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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는가
강상중.현무암 지음, 이목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둘간에 우리가 모르는 어떤 커넥션, 음모가 있었을까? 박정희는 마음의 고향인 일본, 거기의 (일본식 표현으로 하면 막후 실력자)인 기시 노부스케에게 무언가 빚진 것이 있었을까?와 같은, 타블로이드 찌라시 수준의 내용이 있나 싶은 마음을 조금은 안고 이 책을 들었다. 강상중 교수의 책을 읽은 바 있어서, 강교수님의 스타일이 타블로이드 수준으로 글을 쓰지 않음을 충분히 알았으면서도... 적다 보니 스스로 조금 창피한 마음마저 들려고 한다.


(그 누구의 말처럼) 어느 나라건 근대화는 폭력이 수반된,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우리에게는 식민지의 통치를, 그리고 이후 (현대 개념의) 전쟁, 장기 독재와 군부 독재로 그 폭력은 지독히도 이어져왔다. 박정희라는 사람은, 그 흐름의 한가운데 있다. 그 사람의 논의, 잘함과 자잘못은 아직도 논의가 끝나지 않고 있다. 그 와중에 박정희라는 사람의 삶의 궤적을, 기시 노부스케라는 요괴와 짝지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 속에는, 식민-피식민 속에서의 폭력, 지식인의 출세욕, 미국과 세계 최종의 결승 전쟁을 준비하는 꼼꼼하지만 미쳐버린 정신병자, 동족을 팔고 매질해서 한자리 하려는 앞잡이가 각각 똬리 틀면서 자기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이 책의 두 명도 그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한 세상을 정말 풍미했다. 그 속에서, 아무리 초짜 정치인이라지만, 식민 통치국가에 가서 식민지 어로 그 나라의 정치인들에게 정치 한수를 구하고자 하는 그 정신은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간다. 그래서 그자가 쓴 혈서는 정말 그의 진심에서 나온 거였는지 매우 혼란스럽다. 그리고 여기에는 제국의 귀태라고 불리는 일본의 2차 대전 주역들이 나타난다.

이 책에서 두 사람의 교차점으로 괴뢰국이라 불리는 만주국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문관으로 자기의 수완을 부리고 인정받기 시작한 곳이고, 다른 한 사람은 식민지인으로 철저히 스스로를 바꾸고 일본 군인으로서 날개를 펼치기 시작한 곳이다. 또한 박정희의 만주 인맥은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하고, 나중에 사형 구형도 살려 준다.


책을 보면, 오늘날 정치권에서 말해지는 것 중에 그 기원이 일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정도 밖에 안되나 하는 슬픈 마음이 막 끓어오르려 한다. 1925년 치안 유지법 등 사상 통제의 내용을 보면 초등학교 시절에 많이 나왔던 말이 생각난다. [구미의 사조와 가치관이 가져온 시민의 자유를 요구하는 다이쇼 데모크라시라는 위기를, 천황의 조서는 공덕을 지키고, 질서를 유지하며, 충효의용의 미와 질실강건의 기풍을 높이고 황조황종의 유훈에 따라 국가의 훙륭과 민족의 안영을 도모하여 국민정신을 떨쳐 일으키으로써 극복하자. 기강을 바로 잡고 국가주의를 철저하게 하자고 다그쳤다]


이 번에는 두 사람의 슬픈 공통점이다. 이들은 패자부활전으로 살아남아 그들이 갖기에는 지나칠 정도의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상식이라는 차원에서의 윤리-도덕과는 거리를 두고 있어 보인다.[두 사람은 기사회생으로 부활하여 전후 일본과 해방 후 한국에서 저마다 최고 권력자로 떠올라, 각각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역사의 우연 치고는 너무나도 유사한 공통점이 거기에 보인다. 우선 첫째로 냉전이라는 새로운 전쟁의 그림자가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게 되었다. 전쟁 종결은 전쟁 자체의 종결을 의미하기 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전쟁의 시작을 의미했다. 미소 대립이라는 거대한 파워 쉬프트는 제국의 귀태들이 새로운 승리자(미국) 아래에서 소생할 무대를 준비했던 것이다. 그것은 오욕으로 뒤범벅이 된 과거의 경력을 지워 없애고 그들에게 재기의 기회를 부여하는 하늘이 내린 선물처럼 여겨지지 않았을까? 이런 의미에서 정치가가 성공하는 데는 자신의 힘이랄까, 그런 것보다는 운이 7할입니다.라고 했던 기시의 입버릇이 꼭 과장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다만 기시는 그 기회와 운을 놓치지 않고 과감하게 틀어쥐는 기술을 익히고 있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시대의 분위기를 읽어내는 민감한 관찰인이었던 것이다.] 기시는 정말 요괴 맞나보다두 번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냉전이라는 호기를 자신들의 권세확대로 이어나가는 데 만주 인맥이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이다넷째로 지적되는 것은, 기시도 박정희도 만주국 건국을 포함해서 전쟁 전의 역사에 대해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이제 박정희라는 사람의 경제 모델이 어디서 왔는지 알기 위해 기시가 무엇을 했는지 살펴 보자. [기시는 이미 자유당 의원이 된 첫해, 침체에 허덕이는 일본 경제의 실태를 놓고 중점 산업부문으로의 자원 배분에 의한 자본 축적과, 중공업 진흥에 의한 수출 산업의 육성을 중요한 과제로 제시하는 한편, 중소영세기업의 보호육성, 사회 보장과 사회 정책의 충실화를 통한 민생의 향상을 주장하고 있었다기본 발상은 만주국의 경사생산 방식에 의한 중공업 진흥과 사회정책의 실험에 있었다박정희 정권은 만주국과 마찬가지로 몇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서 한국의 산업 구조를 수입대체형에서 수출주도형으로 바꾸고, 나아가 중화학공업화로 발전시켜 나갔다. 다만 박정희의 한국이 국책으로 수출주도형 산업화를 적극 추진함으로써 노동집약 산업을 발전시킨 것은 만주국과는 다른 점이다. 그러나 그것도 군수산업을 타깃으로 한 중화학공업화를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고, 자주국방을 지향한 중화학 공업화라는 점에서 만주국과 공통점이 있다 ]


무조건 박정희 정권이 기시를 따라했다고 말할 것은 아니다. 그들도 고민했고 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했다. 하지만, 그들이 잘했다고 말을 듣는 많은 부분은 그 사람들이 남들과 다른 통찰력이나 분석의 눈을 가졌다고 평가해줄 만큼은 아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있으면서 느끼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그들에게는 큰 성장판이 아니었을까? [정권 초기의 경제 정책은 수출주도형 공업화 정책으로 특징지을 수 있겠는데, 경제를 담당할 사람이 부족한 군부 세력이 처음부터 그런 명확한 전망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한 정책은 경제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미국의 간섭이라는 대외 압력과 국내 재계의 요구라는 대내 조건 속에서 수정되며 시행착오를 거쳐 방향을 잡아 나갔다.]


이제 박정희 정권의 철학의 하나인 근대화를 힘껏 파보자. [박정희 정권은 근대화 논리로서 효율화된 동원과 노동, 근검 절약, 집단주의, 욕망의 절제 등을 국민에게 요구했다. 천리마 운동을 통해 자력 갱생과 혁명의식을 붇돋움으로써 사회의 조직화가 침투되는 북한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정신 혁명은 빠뜨릴 수 없었다. 이러한 의식혁명운동의 중심 존재로 유신체제를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떠받친 인물이 전전에 만주에서 활동한 이선근이다. 이선근은 만주에 모든 것을 걸었고, 전후에는 서울대 교수가 되었으며, 이승만 정권에서는 문교부 장관과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고, 박정희 정권에서도 권력층을 향한 역사 교육을 담당하는 등 여러모로 중용된 인물이다. 와세다 대학에서 게무야마 센타로나 쓰다 소키치의 영향 아래 역사학을 공부한 이선근은 전후에 자신이 경영하던 신문에 <화랑도 연구>라는 글을 연재했는데, 그것이 건국 이념을 요구하는 당시의 정세 속에서 평판을 얻어 국방부의 정훈국장으로 초빙된다. 화랑은 신라시대에 청년들의 수양과 훈련을 맡은 조직으로, 전시에는 전투부대로서 국가통일을 위해 목숨을 희생했다는 사실에서 이선근은 화랑도를 국가 이념과 연결시켰던 것이다. 화랑도에서 민족정신의 기원을 찾는 신라중심사관은 북한과 대치하며 민족사관을 정립해서 이데올로기 면에서 국내체제를 다잡으려는 박정희 정권에게 유용했다. 이선근은 박대통령에게 국사를 진강하고 또 국무위원 일동에게도 국사를 강론하여 민족 주체사관에 입각한 국사교육을 강화하는 국책수립에 적극 찬동하고,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새로운 국가관과 유신정권의 구현을 위해서 칠순의 노구를 돌보지 않고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강연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철학뿐 아니라 사회와 문화에서 만주국의 잔재가 얼마나 스며들어왔는지를 보면서 한심함과 놀라움을 같이 느꼈다. […만주국에서의 비합리 정신주의가 한국사회에도 만연하게 된다…1분간 묵념, 행진, 시국강연 청강, 선전영화 시청, 포스터 작성, 학생웅변대회, 집회와 대운동회 참가 등의 국가의례이러한 것들은 원래 1930년대 만주국의 국가행사재건체조라고 해서 시작한 라디오 체조의 모델은 만주국의 건국체조반공대회나 멸공대회도 거슬러 올라가면 만주국에서 수없이 열린 반공대회건국정신 함양을 위해 만주국 교육청이 주최한 학생웅변대회는 수십년 후 한국에서 실시되는 학생웅변대회의 원형가정의례준칙은 낭비나 허례의식을 삼가는 협화식 결혼식을 상정하고전국 각지에 세워지는 동상 역시 만주국에서 제사지낸 공자나 관우의 재래일 따름만주국에서 행해진 규율화의 방법을 엄밀하게 반복할 수 있는 국가는 박정희 정권기의 한국 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새마을 운동에는 온갖 규율화의 방법이 동원오후 6시에 사이렌이 울리는 국기하강식에서는 길을 가는 사람 모두가 그 자리에 멈춰서서 황국 신민의 서사에 해당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암송]


마지막으로 박정희의 평가를 들여다보자. [박정희의 돌격 근대화는 바로 국가에 의해 지도된 변혁과 위로부터의 고도성장을 의미했다. 그것은 최빈국으로 허덕이던 해방 후의 구식민지를 신흥 산업국가로 변모시키게 되었다. 하지만 위로부터의 변혁은 민주주의 이념을 산 제물로 바침으로써 가능했다. 한국의 현대사는 그러한 이념을 국민 스스로가 정의하고 쟁취해가는 피로 얼룩진 역사였다. 그리고 독재자는 참혹한 최후를 맞이하고 한국은 민주화라는 목표에 도달하면서 독재의 시대는 과거가 되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박정희 정권은 이미 지나간 시간이다. 이제 과거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습관처럼 과거, 아니 어제보다 나은 오늘, 그리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꾼다. 그렇다면 이미 끝나버린지 30년이 지난, 그 정권의 시절을 보면서 무처 나아졌어야 할 지금을 느껴야 하는게 마땅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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