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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의 중심 - 가리타니 고진 인터뷰 궁리 공동선 총서 3
가라타니 고진 지음, 인디고 연구소 기획 / 궁리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1부 새로운 이념을 향하여


하나의, 소수의 이념과 가치관이 지속된다면 새로운 생각이 그 평탄함을 비집고 나온다. 자본주의가 갖는 역동의 이미지는 이제 구태의연함을 지우려는 알레고리의 노력으로 보인다. 이 와중에, 일본의 멋진 비평가 고진 씨는, 20대에 세상이라는 물에 돌을 던져 큰 파문을 일으킨 것처럼 혁명의 논리를 외쳐왔다. 그런데 그 논리의 씨앗 두개 중 하나가 칸트라는 건 태극 속 음양처럼 이율배반으로 느껴진다. 아래 글의 이율 배반과는 또 다른 의미로서지만 말이다.

[주체는 근본으로서 자유와 관련이 있습니다. 제가 칸트를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즈음입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는 제3이율배반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정명제는 자유가 있다이고 반대명제는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라는 것인 것, 칸트는 이렇게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명제가 양쪽 모두 성립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이 것만 읽으면 칸트가 생각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 어렵습니다실존주의자나 구조주의자는 칸트를 냉소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논의까지도 이 제3이율배반에 포함되어 버립니다. 실존주의자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라고 생각하죠.(정명제) 구조주의자는 자유는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유로운 것처럼 보일 순 있지만 구조에서 벗어나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반대명제). 둘 중 어느 쪽이 옳은지를 분명하게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명제 모두 성립하니까요. 그러니까 둘 다 칸트를 뛰어넘은 것이 아닙니다. 실존주의와 구조조의의 논쟁은 조금도 새롭지 않습니다. 어떤 국면에서 주체를 부정하더라도 다른 국면에서 재차 주체를 도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체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도 있고, 그것을 긍정해야만 하는 상황도 있는 것이지요.]


이 책을 보면서 다시 한번 느낀 생각 중 하나는, 서양의 사유를 어떻게 우리가 받아들일까? 제대로 받아들일수 있을까? 의 문제다. 칸트가 말한 자유를, 고진 씨는 왜 사람들이 이해를 못했는지, 그리고 그걸 이해한 건 나뿐이라는 말로 밀고 나간다(물론 웃음을 포함해서…) 그런데 칸트와 서구의 부르주아지 혁신의 과정에 나온 그 자유가, 과연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얼마나 원전(또는 사전 속) 의미로서 유효할까? 이렇게 생각하면, 과연 사회주의를 말할 만큼 사회가 봉건주의를 뛰어넘어, 사회 구성원의 자발성을 발판으로 그 다음 단계로 진행했는가? 책에서 뽑은 구절과 엇나가는 말을 계속 하는 내가, 왜 이럴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칸트는 자유가 도덕의 영역에만 있다고 말합니다. 의무를 다함으로써 사람은 자유로워진다고 말하죠. 일반에서 사람은 의무를 다하는 일이 어째서 자유인가?’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이애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 칸트를 비난합니다. 이를 납득할 만한 해결책을 내놓은 사람은 저뿐입니다. 제 생각에 자유로워라라는 명령에 따를 때에 인간은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자유는 그와 같은 명령에서 오는 것이며 그 외에 자유는 없습니다.]


고진 씨도 나름 아틀라스의 어깨 급이라고 평가되어 보이는데, 가볍고 얕은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행복이 목적이 되면 우리는 자유로워지지 못할지니하지만 그 가벼움 속에서 책임을 말하고, 그동안의 일을 철저하게 살펴봄은 곱씹어볼만한 주장이다.

[도덕이 공동체 규범이라면, 윤리는 자유로워지려는 의무(명령)이지요. 자유는 어떤 것에 속박되지 않는 것인데, 행복하고자 애쓰는 인간의 본능이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행복이 목적이 되면 우리는 결코 자유로워질 수가 없습니다이미 일어나버린 일이 자신의 자유에 의한 것이었다고 받아들이는 것, 즉 책임을 지는 일입니다…”책임지는 또 하나의 바람직한 방법은 그동안의 과정을 남김없이 고찰하는 일이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가를 철저하게 검증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고진이 말하는 헤겔(의 법철학)은 마치 얼마전까지의 한국을 짓누르고 있던, ‘국가의 국민 우위태도의 뿌리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조선시대를 지배한 성리학과는 어느 정도 겹치는 시각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그것은 일본 식민지에서 흘러내려온 것이 아닐까? 그 당시 일본을 휩쌓아온 그 전체주의와 국가 우위가 갖고 있던 그 폭력성

[헤겔은 법철학에서 정치 국가를 시민사회 위에 두었습니다. 시장경제체제인 시민사회는 욕망의 체계이고, 정치 국가는 그것을 초월한 이성의 차원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는 사람들이 시민사회에서는 私人이지만, 국가 차원에서 공민으로서 본연의 모습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역전시킨 겁니다. 경제 사회에서 각자가 보편으로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고 말이죠. 즉 현실 시민사회에서 사람들이 유적 존재로서 존재한다면, 시민 사회 상위에 상상되는 으로서의 국가는 이미 필요없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경제에 뿌리를 둔 사회관계에서 계급 대립이 해소되면 정치 국가는 지양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마르크스의 유적 존재란 개별의 개인화된 존재 방식이 아니라, 자연/ 사회 존재로서 인간의 총체 존재 방식을 뜻한다. 즉 인간이 노동을 통해 자신을 실현하고 사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방식을 말한다. 그런데 자본에 의해 노동이 탈취되어버리면 인간은 자신의 유적 존재를 탈취당하게 되며 도구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하고 있는 바는 곧 사인이라는 것을 긍정하면서도 그것을 보편의 것으로 삼으라는 명령입니다. 그것은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서술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이 계몽이라고 한다면 이는 사회의 근본 변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그러니까 우리는 계몽된 시대가 아니라 계몽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빅데이터라는, 데이터 분석이 강조되는 오늘날에, 그 기반을 제공하는 분야 중 하나인 사회물리학(social physics)가 떠오른다. 이 사회를 물리학으로, 구조의 급격한 움직임은 마치 상전이 현상을 말하는 듯 싶다.

[인간은 아무리 설득해도 움직이지 않지만, 구조의 원인이 명백해지면 급격하게 움직이는 법입니다자유란 원인이 너무 복잡해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 상정되는 환상이라는 스피노자의 생각을 언급했습니다.]


앞서 트랜스크리틱을 읽다가 멈춘 적이 있는데, 그때 이해하지 못했던 자본=네이션=국가를 이제 조금 이해할 수 있는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고진 매트릭스

B 국가(약탈과 재분배-지배와 보호)

세계 = 제국

A 네이션(호수 증여와 답례)

미니 세계 시스템

C 자본(상품교환 화폐와 상품)

세계 = 경제 (근대세계시스템)

D X (세계 공화국)

평등 →                                                              자유

오늘날의 모습을 이루게 된 근대자본제 사회에서는 교환양식 C가 지배형태입니다. 그렇지만 앞서와 마차가지로 교환양식 A B도 각기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세계=경제, 즉 근대 세계시스템입니다. 저는 특별히 오늘날의 이 시스템을 자본=네이션=국가라는 접합체로 봅니다. 그리고 저의 과제는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각기 다른 교환양식의 기원까지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체제를 넘어선 사회가 있는데 이는 교환양식 D가 지배하는 사회구성체입니다. 칸트도 이런 사회를 생각했는데, 이것이 바로 세계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진 선생이, 그 나름의 순발력이나 머리의 반짝거림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 하지만 노동자이자 소비자라는 논리로 프롤레타리아트를 풀어낸다는 건, 마르크스의 생각을 매우 비틀어서 생각하지 않나 싶다. 소비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생산자와는 다른, 기업이나 자본에 맞설 수 있다고 보는 논리인데, 생산자로서 자본에 맞섬이 쉽지 않듯 소비자로서 자본에 맞섬의 우위가 누구나 인정할 만큼 그렇게 커다란 차이를 줄 수 있을까? 설령 그렇지 않다고 했을 때, 용기를 걸고 추구해야 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뭔가 통통 튀는 듯한데, 막상 손에 잡으면 묵직함보다 가벼움에 살짝살짝 실망을 받는 느낌이다. 또 한가지, 기업을 협동조합으로 만들어서 노동자가 경영자가 된다는 생각은 김상봉 선생이 기업의 주인은 누구인가?’에서 말한 논리와 매우 유사성을 띤다.

[봉건 노예는 소비자가 아니지만, 프롤레타리아는 소비자입니다. 이것은 결정을 지을만한 차이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을 놓치고 있기 때문에 소비자 운동은 프롤레타리아트운동과 다른 것이라든 가, 노동자 파업은 이미 힘을 잃었다고 말해버리는 것입니다노동자와 소비자는 별개가 아닙니다. 노동자가 소비라는 장에 설 때에 소비자가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노동자는 그들이 가장 약한 입장이 되는 생산지점에서만이 아니라 오히려 강한 입장에 서는 유통의 장에서 소비자로써 싸워야만 하는 것이죠. 생산지점에서 노동자는 기업과 일체화되기 쉽습니다. 기업에 이익이 되는 일은 노동자에게도 좋은 일이기 때문이죠자본에 대항하는 또 한가지 요소는 노동력 상품을 지양하는 것입니다. 기업을 국유화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하면 국유기업의 임노동자가 될 뿐이므로, 노둥자 상품을 지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자본제 기업을 그대로 협동조합으로 만들어버리면 됩니다. 거기서는 노동자 자신이 경영자죠.]


국가는 의무라기 보다 권리,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보자는 것일까? 사실 국가가 자본을 지배하지 못하게 되면서 고진 씨와 같은 생각을 하는 상황은 이제 충분히 무르익었다. 분명 커다란 변화의 시기가 조만간 올 것이라는 신호가 여러 사람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사회주의 혁명이 띄었던 폭력성보다는, 유엔이라는 기존 조직을 통해 바꿔가자는 온건한 방법론을 제시한다.

또 하나 말하고 싶은 건, 일본의 책쓰는 분들이 잘하는 도식화 성향이 이분에게도 보인다는 것이다. 네가지 매트릭스가 나오고, 현재와 조만간의 미래 시국을 그 매트릭스에 투사해서 설명함이, 이해는 쉽지만 언제 우리가 매트릭스로 나타나는 역사를 살아 본적이 있을까?의 물음의 답으로는 그리 적절해보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임박? 이 의견은 어느 정도 공감, 아니 이미 그 생각을 이미 해온 나로서는 겹쳐지는 이런 부분이 반갑다는 느낌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세계 전쟁은 과연 선진국보다 중,후진국이라는 범주에 더 큰 위험이 될 것인가?

[앞으로 선진국은 경제 성장이 없는 시대가 계속되어 그것에 익숙해져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어소시에이셔니스트가 해야 할 과제는 사람들을 국가에 의해 구제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의 힘을 기르도록 돕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러한 사회의 힘을 위한 시도를 막는 억압을 저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칸트가 말하는 국가연합은 본래 평화론이 아니라 시민혁명을 세계에 동시 실현하기 위해서 구상한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마르크스가 말하는 세계동시혁명과 칸트가 말하는 국가연합이 저의 이론 속에서 서로 이어진 것입니다물론 자본=국가는 완강히 저항할 것입니다. 이미 자본주의는 한계를 보이고 있음에도, 자본=국가는 간신히 연명하며 살아남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대항하는 것, 즉 그것을 새로운 세계 체제의 형성으로 전환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앞으로 남겨진 과제입니다현재 시점에서 증여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 포기/군비 포기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대로 일본인에게는 비교적 실현하기 쉬운 것이라 생각합니다제가 세계 동시혁명이라고 말할 때 마음 속에 그리고 있는 것은 전세계의 거리에서 시민의 봉기가 일어나는 것과 같은 그림이 아니라, 유엔의 획기스러운 변화일 뿐입니다. 이런 변화가 없다면, 세계 각지의 혁명은 결국 분열하고 고립되며 점차 사라져버리게 될 것입니다...칸트의 용어를 빌려서 말하자면, 이는 구성 이념이 아니라 규제 이념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이상은 점진화되어 달성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규제 이념이란 현실에서 실현될 수는 없지만 하나의 이상향으로 현실을 비판할 근거가 되는 이념)…제가 역사의 반복과 관련하여 염려하는 부분을 좀 더 정확히 하자면, 가까운 미래에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가 증대하는 것과 더불어, 교환양식 B가 강화되는 순간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국주의 전쟁이 발발하게  될지도 모릅니다자본의 축적은 자급자족 경제에 속한 농민을 시장경제의 임금노동자와 소비자로 편입시키면서 유지됩니다. 1970년대까지 선진 사회에서는 이 과정이 한창 진행되었지요. 그러다가 일반 이윤율이 하락하게 되고, 그때부터 세계 자본주의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자본은 당시 자본주의 경제 바깥을 편입시키며 세계 시장으로의 진출을 통해 그 출구를 찾았습니다. 이 과정이 세계화 입니다저는 세계 전쟁이 임박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경우만 해도 국내의 빈부 격차가 극도로 커졌고, 그를 맞는 사회 불만의 목소리도 많습니다. 그래도 일본은 그나마 괜찮습니다만, 대한민국 남북 격차는 세계 차원으로 보아도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입니다. 이대로 괜찮을 수는 없습니다. 선진국에서는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겠지만, 중진국에서는 그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갈등이 커지고 있는 것이지요…]


여러 이야기가 나온다. 중핵-주변-아주변이라는 중심-주변 이론, 제국과 제국주의의 차이, 영구평화와 세계동시혁명 등을 말한다.

[선생님은 세계사의 구조에서 세계=제국 단계에서의 중핵-주변-아주변의 구조(중핵과 주변이라는것은 바로 부르주아에 의한 잉여가치 취득 시스템의 한 혁신 부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극단으로 말하자면 자본주의란 프롤레타리아가 창출해낸 잉여가치를 부르주아가 취득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이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가 별도의 나라에 있는 경우, 잉여가치의 취득 과정에 영향을 미쳐온 메커니즘 하나가 국경을 초월하는 가치의 흐름을 통제하는 교묘한 조작이다. 거기서부터 중핵/반주변/주변이라는 개념으로 총괄되는 불균등 발전의 패턴이 생겨난다. 이 개념은 자본주의 세계 경제의 다양한 형태의 계급 대립을 분석하는 데 유용한 지식 개념 장치이다)를 설명하시면서 제국의 문명을 자율성에 기반하여 선택해서 받아들였던 아주변 국가인 영국과 일본은 근대 세계 시스템에서의 중심국가가 될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제국과 제국주의는 다른 것입니다. 제국은 근대 이전 광역국가의 한 형태입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이라는 하나의 제국이 있었고, 그 주변의 여러 나라들은 조공을 바치는 관계로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이 조공은 실제로는 중국 왕조 측의 답례가 더 많은 호수 교환 관계로 이뤄졌습니다. 제국은 이러한 교환으로 평화체계를 구축하려고 했지요. 이에 비해 제국주의는 근대의 네이션=스테이트가 확장되어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대영제국이나 일본제국이라고 말합니다만 이들은 제국이 아닌 제국주의인 것입니다월러스타인은 자유주의나 제국주의를 직선의 일회성 역사 단계로 보지 않았습니다. 즉 그것들을 역사의 단계라기보다 반복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에 따르면 자유주의란 헤게모니 국가의 단계에서 세계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이고, 제국주의란 헤게모니 국가가 몰락하고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가 아직 확립되지 않아서 그것을 목표로 각국이 싸우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 둘은 번갈아 반복으로 일어나는 것이죠저는 다음에 일어날 세계 전쟁을 막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일어날 전쟁은 자본과 국가가 생존을 위해 일으키는 것이니까 그것을 막는 것은 곧 자본과 국가의 연명을 저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평화 운동과 혁명 운동은 별개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칸트가 말하는 영구평화와 마찬가지로 국가 간의 적대성이 없어진 상태, 즉 국가가 지양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 바로 세계동시혁명입니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그 방향성은 분명 우리가 생각해보고 우리 나름의 명확한 눈을 가져야할 분야이다. 현재 IT로 불리는 이 기술이 갖는 지향성이 무엇인지는 (만약 있다해도 아주 소수를 빼놓고는) 알지 못하며,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IT의 깜짝쇼 시청자로 주저앉았다. 과거 철기도 그랬을까? 결국 기술도 헤게모니의 문제일까?

[테크놀로지 문제 자체를 경시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만, 저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사상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테크놀로지론과 문명론에는 언제나 반대합니다. 이런 논의들은 국가와 자본을 무시합니다.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산업자본주의를 낳았고,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산업자본주의가 테크톨로지를 낳았고, 국가가 전쟁을 일으켰으며, 전쟁 속에서 테크놀로지가 발전한 것입니다. 철기시대를 생각해봅시다. 당시는 강력한 무기로서 철기가 생산되던 시기였습니다. 그것은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가 아니었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과거를 비추어봤을 때 새로운, 변화의, 혁명은 보편 종교의 형태라고 했는데 이때 보편 종교는 종교라는 말에 한정지어지기는 힘든, 문화나 그 이상의 메타 담론이나 개념어로서 그 모든 것을 포섭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보편종교는 유동민으로서의 자유=평등을 지향하지만, 역설스럽게 그것을 부정하고 억압하는 각 국가의 사제계급과 국가 자체에 의해 유지됩니다. 세계=제국에 종속된 것이지요. 그렇게 세계종교가 된 것입니다. 처음에 D는 보편종교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실제로 공산주의 운동은 근대 이전에는 항상 종교 운동 형식을 취했습니다. 일본에도 16세기 일향종이 좋은 예이고, 한국의 동학혁명도 그렇지 않습니까? 중국에서는 한왕조 말기 황건의 난 이후, 늘 도교와 관련된 종교 사회 운동이 있었고 그것이 왕조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마오는 종교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혁명에 성공했지요.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로 19세기 중반까지 사회운동은 모두 기독교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그 이후 기독교 배경은 사라지고 과학 사회주의(역사 유물론의 관점에서 현실을 과학으로 분석하여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이론이다. 이에 따르면 자본주의 생산방식이나 노동력의 착취에 기반하고 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공산주의가 필욘으로 도래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가 주장되었습니다.]


자유와 평등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매우 중요한 영역이다. 둘중 어느 하나를 제대로 갖추기 매우 힘들고, 하나를 갖출 때 다른 하나는 같이 갖추기는 매우 힘든, 서로 상충되는 요인으로 판단된다. 그 자유와 평등, 아직 우리가 제대로 맛보지 못한 이념의 결과가 언제까지 우리가 목숨까지 바치며 추구해야 할 덕목일까? 게다가 둘은 같은 선상에 놓이기를 서로 썩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아 보이는데 말이다. 이제 우리는 지겨운 두 개념어를 넘어설 준비를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아니 그렇게 해야 우리는 우리 그리고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개인/ 사회 공동체로서 삶의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입니다. 서로 대립하는 개념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것입니다. 상반되는 개념인 자유와 평등이 양립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유를 중시하면 불평등이 생기고, 평등에 무게를 두면 자유가 억압되는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이렇게 위태롭게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다른 쪽에서 반발이 생깁니다. 그 결과 정권교체가 일어납니다. 선진국의 정치 형태는 이 같은 자유민주주의로 이루어지고, 이것이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말한 역사의 종언입니다자유민주주의 정치제체라고 하는 건 자본=네이션=국가일 뿐, 그것으로 역사가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유와 평등 양 끝 중 어느 한쪽으로 과도하게 치우치면 균형을 잡기 위한 운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스템 자체를 넘어설 순 없을까요? 제가 고민했던 바는 이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참고하는 아테네의 데모크라시는 바로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으의 모습입니다.]


고진이 본, 마르크스가 보고 비판했던 헤겔은 법철학이었다고 한다.

[다른 헤겔 좌파들처럼 청년 마르크스도 헤겔을 비판하는 것으로 자신의 직업을 시작했습니다. 마르크스가 특히 초점을 맞춘 것은 법철학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관념론을 유물론으로 전복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째, 마르크스는 헤겔 변증법으로 개념화된 자본=네이션=국가라는 삼위일체의 구조를 보지 못했습니다. 헤겔은 네이션과 국가를 초월의 위치에 둔 반면에, 마르크스는 그것을 경제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이데올로기 상부구조로 간주했던 것입니다마르크스가 헤겔의 생각을 뒤집었을 때, 마르크스는 역사를 이미 끝난 것으로서가 아니라 미래에 실현되어야 할 것으로 봐야 했습니다. 이것이 사물을 사후에 보는 입장에서 사전에 보는 입장으로의 이동입니다교환양식 A,B,C는 끈덕지게 남아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공동체, 국가, 자본은 끈질기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관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교환양식이 집요하게 지속하는 동안, 교환양식 D 역시 마찬가지로 끈질기게 지속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것이 억압받고, 은폐되었다 하여도 D는 계속해서 돌아올 것입니다. 칸트가 말한 규제 이념이란 바로 이런 것이지요칸트에 따르면, 국가연방과 궁극의 세계공화국이란 인간의 선의지 혹은 지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비사회의 사회성과 이를 통한 전쟁으로 도래하게 됩니다. 이 같은 관점을 헤겔은 이성의 간지와는 반대로 자연의 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와 같은 칸트의 낙관주의는 가혹한 회의주의를 그 바탕에 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19세기 내내 헤겔의 관점이 지배해왔습니다. 제국 사이에서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 계속되었고,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귀결되었지요. 결국 전쟁으로 황폐화된 세계에서 사람들은 영구평화라는 칸트의 관념을 다시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국제 연맹은 자연의 간지에 의하여 현실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부 윤리의 정치화, 정치의 윤리화

고진씨가 말하는 새로운 지평이 어떤 건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근대 철학이 제기하는 문제들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면서도 새로운 지평을 마련하지는 못하는 교착상태 말이다. 물론 이러한 패러독스를 피할 방법은 있다. 푸꼬의 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주체의 문제를 구조 토대의 차원으로 끌어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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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 1
데이비드 하비 지음, 강신준 옮김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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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꿈꿔왔던 그 누군가를 실제 만나기보다는, 그냥 꿈속에 계속 놓고서 그 현실과 맞닥뜨리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 가져본 적 있는가? 내게는 있었다. 아직도 있다. 그 중 하나가 자본론이다. 스타보다 가슴이 덜 설레이지만, 대학교 때부터(설익은 생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중학교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이 바로 그것이다. 그 꿈을 서서히 깨어나고자, 그리고 무엇보다 앞서 말한 환상을 깨고 싶은 마음이 스물스물 일어나서 이 책을 들었다.

자본론 1권에만 한정되어 강의록을 정리한 이 책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자본론보다 쉽다고 말하고 있는데, 정말 그런지는 자본론을 읽고 나서 평가해봐야겠다. 거의 600여 페이지에 달아하는 이책을 보는데 원래 계획한 날보다 며칠은 더 걸렸다. 이런 저런 일들이 있기도 했지만, 그리고 아주 꼼꼼히 읽은 것도 아니지만 꽤나 시간이 걸렸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경기가 가라앉고 성장 동력은 점점 무색화되며, 정치와 법 등 상부 구조가 바람 앞의 촛불이 되어버린 지금의 이 시점에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본론 뿐 아니라 이 책도, 한번 보고 덮어버리기에는 생각해볼 내용이 부지기수다. 그렇다고 이 책만 보자니, 원본은 언제 읽으려나. 이율배반의 상황은 항상 우리 앞에 던져지고(problema), 알아서 스스로 연출한다. 위대한 칸트시여, 당신의 그 마음 100%는 아니지만 점점 이해가 가는 중입니다.

 

1편 상품과 교환

자본이란 책에서 상품이 왜 가장 앞에 자리잡고 있을까? 그리고 상품이야말로 자본을 설명하기 위해 추상과 구체화를 넘나드는 좋은 대상으로 파악한다. 여기서 조금 아쉬운 건, 서구의 개념을 맞이하는 우리 말의 한계라고 할까? 표현의 맛이 원뜻에 맞닥드리지 못하는 때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이 책에서 나오는 추상()라는 말이다. [상품을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매우 유용한데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매일 상품과 접촉하고 그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방으로부터 상품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것들을 쇼핑하고 살펴보고 갈구하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상품 형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서 어디에나 존재하는 형태다. 맑스는 계급, 인종, 성별, 종교, 국적, 성적 선호 등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에게 친숙하고 공통된 어떤 지배의 공통 분모를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일상 생활을 통해 상품에을 알고 있으며 더구나 상품은 우리의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그것들을 사야만 한다 …모든 상품은 "동등한 인간노동인 추상화된 인간 노동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맑스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추상의 힘을 발휘하여 동일한 노동의 단위라는 생각, 즉 이들 노동 하나하나가 모두 똑같은 것으로서, 모두가 사회의 평균노동력이라는 성격을 띠고, 또한 바로 글너 사회의 평균 노동력으로 작용한다는 생각에 도달한다이를 통해 맑스는 가치의 중요 정의, 즉 사회에서 필요한 노동 시간, 다시 말해서 주어진 정상 사회의 생산 조건 아래에서, 그 사회에서의 평균 숙련과 노동 강도로서 어떤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데 요구되는 노동시간이라는 정의를 만들어낸다. 맑스는 이렇게 끝맺고 있다. "어떤 사용가치의 가치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사회에서 필요한 노동량, 즉 그 사용가치의 생산에 사회에서 필요한 노동시간뿐이다" 이것이 맑스의 정의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은 불완전한 정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라는 개념 속에 포괄된 개념이지만 도대체 이 사회라는 것은 어디서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 것인가? 그것은 폐쇄된 것인가, 개방된 것인가? 혹시 그 사회라는 것이 세계시장이라면 그런 다음에는?]

교환 과정에서는 교환가치를 포함해서 세가지 가치 개념, 그리고 이 셋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물신성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맑스는 수요와 공급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알고 싶어 했던 것은 수요와 공급이 균형상태 일때 상품 사이의 교환 비율을 어떻게 해석할지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종류의 분석을 통해 사회 필요노동시간이라고 불리는 이 사회 실체의 응결된 요소가치를 찾아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회 필요 노동인 상품가치를 이야기하기 위해 수요와 공급 조건을 밝히지 않고 무시해왔다 …맑스가 그렇게 하는 까닭은 "노동은사용가치를 낳는 어머니(즉 유용노동)으로서 그 사회형태가 무엇이든 그것과는 무관하게 인간의 존재조건이며 인간가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그리하여 인간의 생활을 매개하기 위한 자연필연성이기 때문이다.  이 물질대사의 개념은 인간존재와 자연을 매개하는 노동이라는 개념과 함께 맑스의 유물론 역사관에 있어서 핵심이다시장같이 교환이 복합해서 이루어지는 영역에서는, 내 상품은 잠시나마 다수의 등가형태를 지니게 되고, 거꾸로 거기에 나와있는 사람은 누구나 내가 가진 상품을 등가형태로 한 상대 가치형태를 잠시 갖게 된다. 교환관계가 점차 복잡해지면서 전개된 가치 형태가 나타나고, 이것은 일반 가치형태로 발전한다. 이것은 궁극의 "일반 등가물", "화폐상품"의 독점 역할을 수행하는 하나의 상품으로 집약된다. 화폐상품은 교환체계로부터 발생하는 것을 교환체계 이전에 이미 존재하던 것이 아니다. 따라서 화폐 평태로 집약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필수 조건은 교환 관계가 발달하고 일반화되는 것이다…가치는 물에 기반한 존재가 아니면서도 대상화된 것이라는 사실 …화폐형태의 등장과 가치 형태의 등장은 서로 깊이 연루되어 함께 진화해가는 관계다. 화폐 교환의 등장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부에서 사회 필요노동 시간을 주도하는 요인으로 만들어간다. 그러므로 사회 필요노동시간을 나타내는 가치는 역사를 보았을때 자본주의 생산양식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것이다. 그것은 시장을 통한 교환이 반드시 필요한 조건에서만 등장한다사용가치는 사물 세계 속에 존재하고 이 세계는 절대 공간과 시간이라는 뉴턴과 데카르트의 개념들로 묘사될 수 있다. 교환가치는 상품들이 움직이고 교환되는 상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존재하고, 가치는 이와 달리오로지 세계시장이라는 관계 시간과 공간의 맥락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사회 필요노동시간으로서, 사물에 기반한 개념이 아니라 관계 개념인 가치는 세계 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진화하는 시간과 공간 내에서만 비로소 존재를 획득한다) 그러나 맑스는 이미 확실하게 보여준 것처럼 가치는 교환가치없이 존재할 수 없고 교환가치는 사용가치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세 개념은 변증법으로 서로 통합되어 있다분석은 두 단계에 걸쳐 이루어진다. 첫번째는 물신성이 어떻게 등장하여 자본주의 하에서의 경제생활에 핵심으로서 불가피한 측면으로 작용하는지를 살펴본다. 두번째는 이 물신성이 일반 부르주아들의 생각 속에서(특히 고전경제학에서) 어떻게 왜곡되어 나타나는지를 검토한다…물신성은 노동생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되는 순간 이들에게 달라붙는 것으로서 상품생산과는 불가분의 것이다경제학은 불완전하게나마 가치와 가치크기를 분석하고 이 형태들 속에 숨겨져 있는 내용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 내용이 왜 그런 형태를 취하는지, 즉 왜 노동이 가치로 표시되고 노동생산물의 가치량이 그 노동시간의 길이에 따라 측정되는지는 경제학은 아직 한번도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다. 생산과정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이 아직 생산과정을 지배하지 않는 그러한 사회구성체에 속해있는 것을 이마에 써붙이고 있는 정식들, 바로 그런 정식들은 부르주아 경제학의 시각에서 본다면, 생산하는 노동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너무도 자명한 자연 필연성으로 간주된다자본에서 맑스는 물신성의 실재를 부정하지 않은 채로 물신성을 넘어서는 과학을 정립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맑스는 이미 부르주아 경제학의 비판을 통해 기초작업을 부단히 수행했다. 또한 맑스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시장의 추상화된 힘에 의해 얼마나 지배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물신 구조물에 얼마나 계속해서 지배당할 위험에 처해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과연 이것이 개인의 참된 자유가 보장된 자유로운 사회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이상화된 자유주의 질서라고 하는 환상은 맑스의 관점에서 그것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지 폭로되어야 한다. 그 질서란 것은 실상 인간의 사회관계를 인간의 물화된 관계를 대체해버린 물신성을 복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상품들인 모두 각자의 가치를 어떤 한 상품으로 표시하기 때문에 그 상품이 비로소 화폐가 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그 한 상품이 화폐이기 때문에 다른 상품들이 그 상품으로 각자의 가치를 모두 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2편 화폐

흔히 화폐가 갖는 가치척도로, 그리고 교환기능으로 구분하는데, 맑스는 이러한 구분을 좀더 깊이 들여다본다. 그리고 이 둘 사이를 긴장관계로, 모순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금은 상품에 내재하는 가치척도(즉 노동시간)의 필연스러운 현상형태다. 가치는 자신의 현상형태인 화폐상품과, 그것과 교환되는 다른 모든 상품과의 관계를 통해 표현된다. 상품 가치는 그것의 현상형태 없이는 인식될 수도 없고 알려질 수도 없다…가격은 상품 속에 대상화되어 있는 노동의 화폐명칭이다.라고 맑스는 결론을 내린다이 점은 꼭 기억해두어야 할 중요한 내용이다…가격 변동이 이루어내는 것은 가격을 그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사회 평균노동으로 수렴시키는 것이다. 만일 이런 가격 변동이 없다면 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 차이를 조정하고 가치를 나타내는 사회의 평균 가격이 형성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맑스는 다음의 모순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앞단계의 모순으로 되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처럼 도입부의 문장을 찬찬히 살펴보는 것은 맑스의 진의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것은 맑스가 각 절에서 자신의 논의를 펼칠 때 논의하고자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모순은 상품유통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상품의 형태변화 속에 존재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여기에서 상품 그 자체가 서로 상반된 두가지 성격으로 규정되기"- 상품 소유자의 관점에서는 사용가치가 아닌 것이 구매자에게는 사용가치가 되는- 때문이다…서로를 보완하면서 내부에서 의존해 있는 이들 두 과정(판매와 구매)의 외부 대립이 일정 수준을 넘어가게 되면 내부 통일은 공황을 통해 폭력의 형태로 관철된다. 상품에 내재하는 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의 대립, 개인 노동이 동시에 사회 노동을 나타나지 않으면 안되는 대립, 물화된 존재의 인격화와 인력의 물화라는 대립 - 이런 내재 모순은 상품의 형태 변화가 빚어내는 갖가지 대립을 통해 더욱 발전된 운동 형태를 취한다. 따라서 이들 형태는 이미 공황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화폐를 이처럼 철저한 평등주의자로 간주하는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화폐가 가진 일종의 민주주의를 보여준다. 내 주머니 속에 있는 1달러는 다른 사람의 주머니 속에 있는 1달러와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 화폐를 넉넉히 가지고 있기만 하면 아무리 죄를 많이 저지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천국행 기차표를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화폐는 또한 본래 상품으로서 누군가의 사유 재산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이제 사회의 힘이 개인의 힘이 된다...화폐는 장부에 기록되는 재산상의 화폐로 된다. 결제일이 될 때까지 실제로 움직이는 화폐는 전혀 없기 때문에 상품을 유통시키는 데 필요한 화폐총액은 감소하고 이것은 가치 척도로서의 화폐와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 결과 새로운 사회 관계(채권자와 채무자 관계)가 만들어지고 이 관계는 새로운 경제 거래와 사회 동학을 만들어 낸다…그러나 G-W-G는 상품이 아니라 화폐가 거래의 목적인 유통형태다. 그런데 이 유통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내가 처음에 유통시킨 화폐액보다 나중에 돌려받는 화폐액이 더 커야 한다. 바로 여기가 화폐 형태의 모순에 의해 매개되는 상품유통으로부터 자본유통이 만들어지는 것을 우리가 자본에서 처음으로 보게 되는 부분이다. 상품 교환의 매개수단으로 사용되는 화폐의 유통과 자본으로 사용되는 화폐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모든 화폐가 자본인 것은 아니다. 화폐가 사용된다고 해서 반드시 자본주의 사회인 것은 아니다 …경제가 호황일 때는 누구나 신교도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공황이 발발하면 누구나 갑자기 화폐의 토대인 지금(地金)을 신봉하는 교리주의자로 변신한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야말로 실제의 가치와 신용할 수 있는 화폐형태의 문제가 제기되는 시점이다. 대출을 콸콸 쏟아내는 뉴욕시의 금융기관들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실제의 생산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들은 순전히 가상의 가치들만을 거래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맑스가 우리에게 제기하는 물음이다. 즉 경기가 좋은 호시절에는 잊혀져 있다가 주기를 갖고 위기가 발생하면 그때마다 우리들에게 다시 밀어다기는 바로 그 물음 말이다. 화폐제도가 금본위제하의 가치체제로부터 점차 분리되면 될수록 사회/자연 관계가 황페화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가능성도 그만큼 더 넓게 열린다.]

 

3편 자본으로부터 노동력으로

노동가치론이 오늘날에까지도 갖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화폐 교환(G-W-G')에서 말하는 잉여 가치는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알아보자. 그에 앞서 글쓴 이는 맑스의 자본론 1장의 논의 방법론은 역사가 아닌 논리에 뿌리를 더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점을 미리 확인하고 맑스의 주장으로 넘어가보도록 한다. [사용 가치의 경우에는 같은 가치의 교환이 전혀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왜냐하면 이때는 문제가 되는 것이 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G-W-G의 유통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유일한 이유는 처음 시작할 때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얻는 데 있다…가치가 전체 과정의 주체이며 가치는 이 과정을 통해 화폐와 상품으로 번갈아 형태를 바꾸면서 자신의 크기를 변화시키고 또한 자신의 본래 가치로부터 잉여가치를 만들어냄으로써 스스로를 증식시킨다. 왜냐하면 가치가 잉여가치를 부가하는 운동은 가치 자신의 운동이며 가치의 증식이고 따라서 자기증식이기 때문이다. 가치는 그것이 가치이기 때문에 가치를 낳는다는 신비한 성질이 있다. 그것은 살아있는 자식을 낳든가 아니면 적어도 황금의 알을 낳는다맑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유통과정 속에는 언제나 되돌아오고 따라서 다른 것들보다 더 중요해보이는 하나의 계기, 즉 화폐로서의 계기인 G-G가 존재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화폐가 가치를 나타내는 일반 형태이면서 궁극의 가치척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가치나 잉여가치와 관련있다고 이야기할 경우 그것은 오로지 이 화폐의 계기를 통해서 뿐이다. 우리는 개별 상품을 통해서는 그것을 이야기하기 어렵다. "그래서 화폐는 모든 가치증식과정에서 항상 출발점과 종점을 이룬다" 맑스의 예에서는, 자본가가 출발할 때가지고 있던 100파운드 스털링으로부터 최종의 110파운드 스털링이 만들어진 것은 바로 그것이다…자본은 과정을 진행하는 가치이자 과정을 진행하는 화폐다. 이것은 자산으로 고정된 양이나 생산요소를 이루는 자본과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닌가? 자본은 유통에서 나왔다가 다시 유통으로 들어가고, 유통 속에서 자기를 유지하고 배가시키고 증대되어서 유통 밖으로 되돌아나오는 방식으로 동일한 순환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거나 새롭게 시작한다. 강력한 동학 개념이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자본은 과정이며 과정이 바로 자본이다맑스는 어딘가에 소비계급이 존재한다거나, 하나님만 아는 은밀한 곳에서 가치를 얻는 제3자가 존재한다거나, 자본주의 사회체제 내부나 외부로부터 잉여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한다거나 하는 따위의 생각을 철저히 배격했다. 자본주의 내부의 모든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어딘가로부터 얻어야 하며, 만일 그들이 이 가치를 이 체제 내에서 얻는다면, 그것은 가치의 시장을 통해서능 해결될 생산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가치를 수탈함으로써 얻게 된다고 말한다. 잉여가치 생산의 문제는 시장을 통해서는 해결될 수 없으며 우리 대부분은 바로 이런 이유때문에 비생산 소비계급의 영속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길게보면 외국무역도 이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언젠가는 등가의 법칙이 이를 지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노동력은 상품 속에 가치를 응결시킬 수 있는 인간 물리와 정신 능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상품이 되기 위해 노동력은 몇가지 특성을 지녀야 한다. 첫째, 노동력의 소유자가 그것을 상품으로 판매하려면 그사람은 그것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어야 하며, 따라서 자신의 노동능력이나 인격의 자유로운 소유자여야 한다" 따라서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해진다. 노예나 농노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인격체를 모두 양도할 수 없다. 그 노동자가 양도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물리 정신 능력이다. "그는 자신의 노동력을 양도하기만 할 뿐 그 소유권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자본가는 노동자를 소유할 수 없다. 자본가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일정 기간 동안 노동을 해서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뿐이다맑스의 이데올로기 공격의 핵심 목표는 부르주아의 자유 개념을 관통하는 이중성이었다. (부르주아의 정의 개념에 호소하려던 프루동에게 의문을 제기한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노동자들은 언제나 W-G-W의 유통을 수행하지만 자본가들은 G-W-G'의 유통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이들이 각자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노동자는 등가의 교환에 만족하는데 이는 그들의 관심이 사용가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가는 등가의 교환으로부터 잉여가치를 뽑아내야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맑스는 특정 시점의 특정한 사회에서 합리화된 임금으로 계산될 수 있는 상품의 총액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노동력 상품이 지니는 특성 가운데 특별히 유념해둘 만한 것이 또 하나 있다. 자본가는 시장의 모든 상품은, 그것을 손에 넣어 사용하기 앞서 반드시 먼저 지불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노동력은 그 반대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빌린 다음 노동자들이 노동을 모두 수행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지불을 한다…왜냐하면 양쪽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하나의 관계로 묶어주는 유일한 힘은 그들 자신의 이익이 발휘하는 힘이다. 이렇듯 그들이 각자 자기만 생각하고 타인을 생각하지 않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모든 사람은 사물의 예정조화가 빚어내는 결과에 따라 오로지 그들 상호간에 이익이 되는 사업만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4편 노동과정과 잉여가치의 생산

노동자가 자본가에 고용되어 자신의 노동을 투입하고 이를 통해 나오는 생산물과 그 가치를 따져본다. [노동과정은 전부가 자연에 의한 것이면서 동시에 인간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연에 의한 것과 인간에 의한 것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한 물질대사의 변증법으로서의 계기로 파악된다…화폐제도가 일정 지점에 도달하면 어쩔 수 없이 사회 필요노동이라는 물질 세계와의 관계로 복귀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오늘날의 자본주의에서 점점 더 심화되고 있는 사회와 환경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바로 그 순간부터 부르주아 세계관도 어쩔 수 없이 점차 더 올바른 정신 개념들로 나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맑스는 인간 존재가 자신의 생각과 목적의식에 따라 세계를 급진화된 방식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며 또한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의식할 수 있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을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고 덧붙인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생각하고, 언제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세계에 개입해 자신을 변화시킬 것인지를 의식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런 변증법의 가능성을 창조화된 방법으로 포착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와 관련된 외부화된 자연의 변화 가운데 중립이란 것은 없다. "바깥에서" 우리가 행하는 것은 전부 우리의 "내면"과 관련된 것이다. 맑스는 우리로 하여금 바로 그의 변증법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노동과정을 보편화된 방식으로 이해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한다는 것을 가리킨다그렇다면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보편 조건으로서의 노동과정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맑스는 세가지 기본요소를 든다. "목적에 부합하는 활동(노동 그 자체)과 노동 대상 그리고 노동 수단"이 그것이다맑스에게 있어 노동하는 것의 핵심은 그 과정에 있다. 자본이 하나의 유통과정으로 파악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노동은 무엇인가를 만드는 하나의 과정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노동은 사용가치를 만드는 과정이고 자본주의 하에서 이것은 상품 형태로 타인의 사용가치를 만드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 사용가치는 즉각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할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과거의 노동이 미래의 용도를 위해 저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과거의 생산물 속에 응결되어 있는 죽은 노동의 가치가 다시 소생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살아있는 노동과 접촉함으로써다. 이것은 생산으로서의 소비와 개인으로서의 소비 사이에 중요 차이를 가리킨다. 생산으로서의 소비는 과거의 노동이 완전히 새로운 사용가치를 만드는 현재의 노동과정에서 소비되는 것을 가리킨다. 반면 개인으로서의 소비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재생산을 위해 소비하는 것을 가리킨다그리하여 자본가는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을 통해 새로운 종류의 통일성을 이룩한다. 이것이 바로 자본가가 하는 일이며, 자본가의 의식된 목표다. 왜냐하면 이윤의 원천이 잉여가치에 있으면 자본가의 역할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잉여가치를 설명해주는 제대로 된 해답은 다음과 같다. 먼저 여러분의 노동력의 가치를 지불한다. 이때 노동력의 가치는 주어진 생활 수준에서 노동자가 재상산되기 위해 필요한 상품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노동자는 노동력 상품을 판매하여 돈을 얻은 다음 시장으로 가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각종 상품을 손에 넣는다. 그런데 노동력 가치의 등가를 노동자가 재생산하는 데에는 매일 약간의 시간만 소요된다. 따라서 "노동력의 하루 유지비"와 노동력이 매일 매일 창출하는 가치는 서로 전혀 다르다. "전자는 노동력의 교환가치를 규정하고 후자는 노동력의 사용가치를 규정한다." 노동은 W-G-W의 ㅇ 통을 수행하고 자본은 G-W-G'의 유통을 수행한다.]

옛날 학생 시절에 읽었던 책과 수업에서 종종 들었던 기억은 나지만, 사실 그 공식은 이미 사라져버린, 하지만 약간의 유추는 할 수 있는 수준이 지금의 내 모습이다. 자본의 성격 규정을 위해서는 분명히 이 범주를 알 필요가 있다. [맑스는 먼저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을 구별한다. 불변자본은 현재의 노동과정에서 생산수단으로 사용되는 상품 속에 이미 응렬되어 있는 과거 노동이다. 생산수단의 가치는 이미 주어져있으며 따라서 문제는 그것이 새로운 노동과정에 합체되면서 그 가치가 어떻게 되느냐에 있다. 맑스는 그 가치가 단순히 새로운 상품에 그대로 이전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가치는 원료나 기계 등을 생산하는 산업 부문의 생산성에 따라 변동하고, 그러므로 이 자본을 불변자본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 가치를 고정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맑스가 그것을 불변자본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단지 생산수단의 가치가 노동과정을 통해 새로운 상품으로 흘러들어가 응결되고 이때 그것의 가치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사실상 노동자는 이미 원료, 반제품, 기계 등에 이미 응결되어 있는 가치를, 이들을 사용함으로써 보존한다. 맑스는 노동자가 자본가를 위해 이런 친절을 무상으로 베풀어주는 많은 사례들을 들려준다기계는 전혀 가치의 원천이 아니다. 단지 기계의 가치가 노동과정을 통해 상품으로 이전될 뿐이다…가변자본이 있는데 이 자본의 가치는 노동자를 고용할 때 결정된다. 이 자본은 어떻게 유통되고 그 결과는 무엇일까? 죽은 노동은 살아있는 노동에 의해 소생하여 새로운 상품의 가치로 이전된다. 맑스에게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며, 여러분은 이것이 정치에서 갖는 중요성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노동자는 단지 불변자본을 이용한 노동을 거부하기만 해도 불변자본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노동이 중단되면 기계로부터 최종생산물로의 자본의 이전은 중단되고 불변자본의 가치는 감소하거나 유실되어버린다. 노동자들은 틀림없이 이런 능력이 있고, 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그만큼의 댓가를 반드시 요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만일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잉여가치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면, 왜 노동자들은 그들의 노력 없이는 자본가가 투하한 불변자본이 모두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을 근거로 잉여가치를 향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단 말인가? …결국 맑스는 잉여가치 생산에 의해 가치를 늘리는 이론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예를 들어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비율, c/v를 보도록 하자. 이 비율은 노동생산성 즉 노동력 한단위의 가치가 바꿔내는 생산수단의 가치를 나타낸다. 이 비율이 높다면 노동생산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가변자본과 잉여가치의 비율, m/v를 보도록 하자. 이것은 노동력의 착취도를 나타낸다. 그것은 노동력 한 단위가 생산하는 잉여가치의 크기를 나타낸다. 이 비율이 높으면 노동력 착취가 그만큼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이윤율, 즉 사용된 총가치(불변자본+가변자본)의 잉여가치 비율 m/(c+v)가 있다. 이윤율은 잉여가치율과 다르다. 잉여가치율은 노동자가 주어진 생활수준에서 스스로를 생산하기 위해 자본가에게서 받은 가치의 댓가로 자본가에게 제공하는 초과노동의 크기를 나타낸다. 물론 여러분은 이윤율이 항상 잉여가치율보다 낮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만일 여러분이 잉여가치율이 높다고 불평을 하면 자본가는 아마 여러분에게 장부를 보이며 그들의 이윤율이 낮다는 것을 입증하려 할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자본가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높은 잉여가치율은 잊어버릴 것이다. 불변자본을 더 많이 사용하면 이윤율은 더 낮아질 것이다. 이윤율은 낮아도 잉여가치율은 높을 수 있다...문제는 이들 모든 비율이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관찰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현실의 노동 과정은 노동자가 하루 동안의 노동 시간 중 v의 가치를 재생산해내는 순간 종이 울리고 따라서 그 순간 이후부터는 그들이 자본가를 위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되는 식이 아니다. 노동과정은 연속 과정으로 진행됭 가치가 c+v+m으로 이루어진 상품이 만들어지고 나서야 끝나게 되어 있다.]

 

5편 노동일

근대에서 시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중 하나는 과학의 도움으로 표준이라는 이름을 갖는 시간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시간이 관련 객관화되고 중립의 시간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과학에 중립, 객관이란 영광의 자격을 줄 수 있을까? 섣불리 그럴 수는 없어 보인다. 노동일은 바로 그 시간을 다룬 부분이다. [맑스는 노동가치론의 세계와 노동력 가치의 세계는 다르다는 점을 일깨우면서 시작한다. 노동가치론은 사회 필요노동시간이 노동자에 의해 어떻게 상품 속에 응결되는지를 다룬다. 이 사회 필요노동시간은 화폐 상품과 화폐 일반에 의해 표시되는 가치의 기준이다. 그러나 노동력의 가치는 단지 시장에서 판매되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일 뿐이다. 이 상품은 어떤 점에서는 다른 상품들과 같지만, 다른 상품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몇가지 성질도 지니고 있는데, 왜냐하면 거기에는 역사와 도덕 요소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가치론을 구별하지 못하면 근본의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동등한 권리를 가진(두 사람 모두 교환의 법칙에 따르기로 되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정한 판결을 내릴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자본가들은 시간을 원하고, 이 시간의 1 1초가 이윤의 요소가 되기를 원한다. 이것은 가치가 사회의 필요노동시간이라는 사실이 빚어내는 필연의 결과다. 이처럼 그것의 추상화된 성질에도 불구하고 가치론은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의 현실과 경험의 중요한 의미를 알려준다…또한 이것(토지의 고갈과 노동자의 생명력 고갈)은 온갖 부를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의 과도한 수탈이 자본주의 그 자체에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이것(과잉인구)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건강이나 복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초과착취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푸꼬가 정부의 등장을 이야기할 때, 참뜻은 바로 사람들이 시간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거의 아무런 생각없이 이 시간개념에 따라 살아가도록 배우기 시작한 시점에 정부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우리 모두는 이 시간 개념을 받아들임으로써 시간 그리고 시간과 관련된 관행이라는 일정한 사고방식의 포로가 된다. 맑스에게 있어 이런 시간개념은 사회의 필요노동시간이라는 가치의 등장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맑스에게 있어서는 푸꼬가 무시하거나 경시하려고 했던 계급 투쟁의 역할이 중심 지위를 차지한다…개혁을 요구하는 운동과정에서 부르주아는 노동계급에게 온갖 정치와 관련해서 약속을 했는데 이 약속 가운데에는 숙련노동자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하고, 노동일의 길이를 제한하며, 노동조합 억압을 개서하는 것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개혁법은 노동자에게 거대한 사기였다는 것이 이내 드러났다. 산업부르조아들은 자신들이 원했던 것을 대부분 얻었지만 노동자계급은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했던 것이다. 노동일의 길이를 제한하는 1833년의 최초의 공장법은 매우 취약하고 효과가 없는 것이었다. 속은 것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차티즘이라는 정치운동을 조직했는데 그것은 국민대중의 생활조건과 산업노동자들의 끔찍한 노동조건에 저항하는 운동으로 출발했다. 이 기간 동안 귀족지주계급은 산업부르조아 세력의 성장에 훨씬 더 적대의 입장이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노동자의 요구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에는 국가의 이해를 위한 것은 물론 귀족정치의 한 전형인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과시하기 위한 온갖 의도가 함께 숨어 있었다…여기에서 맑스는 처음으로 노동자들이 "동료들을 규합하고" 하나의 계급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노동조건과 자본주의의 동학에 엄청난 충격을 주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이 투쟁이 바로 핵심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이것(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 조직되어 행동)은 집단 계급 투쟁이 자본주의의 동학 내에서 하나의 균형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일 노동자들이 전혀 세력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면 자본주의 체제는 붕괴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뒷일은 난 몰라!"라는 자본가들 개인의 행태로는 자본주의 경제가 안정스럽게 운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을 자기파괴의 길로 이끄는 경쟁의 강제 법칙은 반드시 억제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노동력 공급의 양과 질에 있어서는 물론 초과된 토지 착취와 과도한 자연 자원 수탈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니는 심각한 문제다…계급투쟁은 단지 자본-임노동 관계의 균형추 역할을 할 뿐이다. 계급투쟁은 또한 너무도 쇱게 자본주의의 동학 내부로 통합되어 자본조의 생산양식을 지속해주는 긍정의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것은 계급투쟁이 불가피한 것이면서 동시에 사회에서 필요한 것이라는 의미를 전달해주기는 하지만, 자본주의 혁명 전복을 갖고서는 거의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잉여가치라는 말과 그 논의는 계속 나오는데 이 말의 이해가 선뜻 와닿지 않고 매우 헤깔리게 들릴 때가 많다. ["우리가 생산 과정을 가치증식 과정의 관점에서 고찰하면" 생산수단은 이제 "타인의 노동을 흡수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뀐다. 이제는 더 이상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이 노동자를 사용하게 된다". 이 역사와 논리의 전도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이해하는 데 있어 놀라운 전환이 이루어지는 핵심부분에 해당한다.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자신의 생산활동의 재료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산수단이 노동자를 자신의 생산활동의 효소로 소비하는 것이며, 자본의 생활과정은 자기 자신을 증식하는 가치로서의 자본의 운동일 따름이다." 이 모든 것은 자본가가 가지고 있는 생산수단의 가치가 보전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오로지 살아있는 노동이 공급해주는 것을 흡수하는 것일 뿐이라는 단순한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의 의식" 속에서는 노동자가 오로지 그들의 노동력을 사용하여 자본을 증식시키기 위한 용도로만 존재하게 된다…따라서 자본주의는 모든 제약요인을 극복하거나, 혹은 이들을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매우 중요하고 특수한 성격을 부여하고, 그것의 발전이 가져오는 결과에 독특한 역사,지리 성격을 부여한다.]

 

6편 상대잉여가치

잉여가치라는 표현도 편치 않거니와, 상대잉여가치라는 표현으로 내용을 보면 생각하고 다시 생각해보면서 우리 삶을 고찰할 필요를 강하게 느낀다. 자본가에 고용된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임금 상승의 필요와 실제의 갭은 매우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가 삶을 유지하는 것의 하나는 생필품 가격의 (낮은 수준의) 안정화 같은 것이 방법으로 써먹을 수 있는 좋은 것 중 하나다.["필요 생활수단을 공급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생산하기 위한 생산 수단을 공급하는 것도 아닌 다른 생산부문들에서는 생산력이 상승하더라도 노동력가치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산성이 상승하여 가치재의 가치가 하락할 경우 그것은 상대 잉여가치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상대 잉여가치는 임금재의 가치가 하락할 경우에만 해당된다…지난 30년간 노동자의 임금이 별로 오르지 않았음에도 불고하고 노동자들이 구입할 수 있는 상품의 양은 오히려 늘어났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월마트에서 쇼핑을 함으로써) 이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세기 영국의 산업부르주아들이 값싼 수입품을 통해 노동력의 가치를 하락시키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오늘날 미국에서 값싼 수입품을 개방하려 하는 것은 노동력의 가치를 안정되게 유지하려는 필요성 때문이다. 보호 관세는 미국 내의 일자리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물가를 상승시켜 결국 임금을 상승시키는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다…때때로 자본가들은 집세의 규제나 저가의 주택(공공 주택) 그리고 집세와 농산물 보조금 등의 정책을 지지하곤 하는데 이것 역시 노동력의 가치를 낮게 유지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국가기구를 통해 노동력의 가치를 낮추려는 계급전략이 과거는 물론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노동 계급이 국가권력의 일부를 획득할 경우 노동계급은 그 권력을 자신들의 수입을 증가시키는 용도에 사용함으로써 (많은 재화나 서비스를 국가가 직접 공급해주는 방식으로) 노동력의 가치를 올릴 수 있다. (결과를 말하면 잠재화된 상대 잉여가치를 그들 자신의 몫으로 도로 가져가는 것이다.) …맑스는 수요와 공급이 일단 균형점에 도달하고 나면 그것들은 어떤 것도 더 이상 설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수요와 공급은 내의가 왜 평균 비율로 교환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이 문제는 전혀 다른 어떤 것, 즉 응결된 사회 필요노동시간(혹은 가치)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이것은 수요와 공급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 없이는 균형가격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요와 공급 관계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특정 상품생산부문 내에서의 개별 자본가들간의 경쟁도 비슷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경쟁은 이 생산부문 생산력의 일반 수준의 변동에 의해 균형 수준을 다시 조정한다. 여기에서 맑스는 경쟁을 사회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부수 현상으로 서술하지만, 교혼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경쟁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해될 수없는 보다 심오한 문제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왜냐하면 임금재 산업부문의 잠깐의 기술혁신은 생활 수준이 불변인 상태에서도 노동력의 가치를 하락맑스가 전개하는 논리로부터 우리는 개별 자본가들에게 기술혁신을 향한 경쟁의 엄청난 유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가 선두자리를 차지하여 당신보다 더 우수하고 효율화된 생산 체제를 갖춤으로써 3년간 잉여가치를 얻고 나면, 그제야 당신이 누군가를 따라잡거나 혹은 아예 누군가를 앞질러 이번에는 당신이 3년 동안 잉여가치를 차지하는 등의 앞서거뒤서거니 하는 경쟁이 진행될 것이다. 개별 자본가는 모두 새로운 기술로 일시의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 경주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에 의한 기술발전의 동학이다기계는 상대 잉여가치의 원천이지 가치의 원천은 아니다. 자본가들은 잉여가치량에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그리고 보통은 절대 잉여가치를 둘러싼 계급투쟁에 휘말리기 보다는 상대 잉여가치를 얻는 것을 더욱 선호하기 때문에, 그들이 기술혁신이야말로 이런 그들의 욕망의 해답이라고 굳게 믿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맑스의 논리 전개에 따르더라도, 잉여가치율이 증가하거나 불변인 상태에서 노동자의 생활수준은 지속 증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다른 하나의 대답은 전세계 노동계급 가운데 일부를 제국주의 방식으로 착취하여 얻은 수익을 전세계 노동계급 가운데 다른 일부가 나누어 갖는다는 점과 관련) …미국에서 벌어진 기이한 일은 최근 약 30년동안 노동자들이 생산성 향상으로부터 발생한 이익을 전혀 배분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본가계급은 그 이익을 거의 남김없이 독차지해버렸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의 반혁명의 본질과 관련되어 있고 신자유주의 시대와 케인즈주의 시대(생산성 향상으로부터 얻은 이익을 자본과 노동이 보다 공평하게 배분하던)를 구별짓는 차이점이기도 하다.]

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노동과 기계의 조합을 협업으로 본다. 특히 자본주의 하에서의 이러한 구성은 가치창출, 자본가와의 관계 맺기 측면에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선대제도 하에서는 상업자본가가 원료를 노동자의 오두막집으로 가져다주고 나중에 완성된 생산물을 수집해온다. 노동자들은 감시받지 않으며 노동과정은 오두막집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오두막집에 사는 사람은 화폐수입을 상업자본가에게 의존했으며 자신들이 만든 생산물을 소유하지 못했다. 이것이 맑스가 형식상의 포섭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가 임금을 받기 위해 공장 안으로 들어오면 그때부터 노동자와 노동과정은 모두 자본가의 감독을 직접 받게 된다. 이것이 실질상의 포섭이다. 즉 형식상의 포섭은 공장 바깥에서의 의존 상태를 가리키며 실질상의 포섭은 공장 안에서 자본가의 직접 감독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실질상의 포섭은 초기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간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자본이 귀했고 따라서 노동의 작용범위를 확대시키는 동시에 노동의 공간범위를 제한하는 것은 대량의 낭비를 막을 수 있게 하는데, 이 공간 범위의 제한은 노동자를 한군데로 모으고 여러 노동과정을 통합하거나 생산수단을 집중시킴으로써 이루어내는 것이다노동자들이 공장의 집단 협업구조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들은 자본가의 직접 지휘를 받게 된다. 모든 협력 행동은 일정한 지휘체계를 필요로 하는데, 이는 마치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경우와 꼭 마찬가지다. 문제는 "자본에 종속된 노동이 협업화되면 이 협업의 지휘-감독-매개 기능은 자본의 기능이 된다. 일단 지휘의 기능이 자본의 기능이 되면, 그것은 특수한 성격이 된다". 이 기능은 1 1초가 모두 이윤의 요소라는 것을 인식하고 노동자로부터 최대한의 노동시간을 쥐어짜내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한꺼번에 고용된 노동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그들의 저항도 커지며, 또한 이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자본의 압력도 필연으로 커진다."…임노동자를 모두 똑같은 하나의 임노동자로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노동계급은 오로지 잉여가치 생산이라는 목표만을 지향하는 협업조직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기능들에 따라 일정한 지위와 각기 다른 금전 보상을 받는 다양한 계층으로 분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분업과 매뉴팩처는 기계를 쓰는 대공업으로 넘어가기에 앞선, 자본주의 초기 당시 자본가의 부를 축적하는 인력과 기술 운영 방식이다.[맑스는 여기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주된 조직 측면이 시공간의 설정과 이해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자본가는 효율화된 시공간 생산체계의 계획을 고안해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곧 시장에서 일어나는 일과 공장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상품에 소비되는 노동시간이 오로지 그 상품의 생사네 사회 필요 노동시간 뿐이라는 것은 상품생산 전반에서 경쟁에 의한 외부 강제로 나타나는 데, 그것은 피상으로 말하면 개별 생산자는 누구든지 상품을 그 시장가격으로 팔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뉴팩처에서 일정한 노동시간 내에 일정량의 생산물을 공급해야 한다는 것이 생산과정 자체의 기술 법칙을 이루게 된다"…노동과정을 자본주의형태로 재편성하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하나의 일면 기능만 수행하는 관행이 지속되면서 노동자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확실하게 이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전화하며, 또한 그와 전체 생산 매커니즘과의 관련은 그에게 기계의 일부분과 같은 규칙성을 강제로 부여한다" 노동자들은 분화되고 각자의 능력과 자질에 따라 분류된다. 그 결과 "임금이 각기 다른 노동력간의 위계구조"가 만들어진다. 숙련노동자와 비숙련 노동자 사이의 구별이 특히 두드러지게 된다…그러나 자본가들이 사회 영역에서의 계획 관련해서 지니는 위선의 태도를 맑스가 지적하는 것과, 상대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 사용되는 자본가의 복잡한 기술들이 모든 사람의 물질로서의 후생을 추구하는 사회주의 사회의 계획에 적합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개인 소유제도와 경쟁의 강제법칙이 주어진 조건에서만 혁신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논리나 역사에서나 모두 근거를 찾기 어려운 억지에 불과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맑스가 여기에서 가장 강조하려고 했던 부분은 자본에 의한 노동생산력의 수탈에 있다. 맑스는 협업과 분업의 이 모든 힘이 노동계급의 생산력이며 그것을 바로 자본이 수탈하고 있다는 점을 노동계급에게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매뉴팩처 노동자는 자신이 자연의 속성을 박탈당하여 어떤 것도 자립해서 만들 수 없게 되었으며, 이제 자본가의 작업장 부속물로서만 생산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슬프게도…"정신이나 육체 불구 가운데 상당수는 사회 전체의 분업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말하면서 맑스는 그 산업병리학이라고 이름 붙인 것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위험한 길로 접어든다. 노동계급 전체가 병들었다는 것이 확실히 맞는 이야기일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반응하고 생각하는 인간의 능력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안이하다. 여러분 가운데 두개의 작업을 동시에 가져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 문제의 내용을 잘 알 것이다. 그런 조건에 있는 노동자들은, 노동자계급이라면 당연히 생각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문제들을 생각해볼 시간이 거의 없다. 그 사람들은 가계의 적자를 메우고, 자녀들의 음식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 다른 자잘한 집안의 허드렛일을 해나가기에도 너무 바빠서 노동 이외의 다른 일에는 틈을 낼 시간이 없다.]

 

7편 기술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매뉴팩처 이후 오늘날까지 전형의 자본주의는 기계라는 생산수단을 중시하는 대공업 형태이다. ["종래의 역사 저술은 모든 사회생활의 기초인 물질 생산의 발전(즉 사실상의 모든 역사)을 인식하지 못했다"…맑스가 말하고 있는 것은 기술과 그 조직 형태가 정신과 관련된 개념이나 사회 관계, 혹은 일상생활과 노동 과정 등은 물론 자연과의 일정한 관계까지도 모두 내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내부화 덕분에 기술과 그 조직 형태 연구는 필연으로 다른 모든 요소들과 관련하여 많은 것들을 나타내거나 드러내는 것이다. 거꾸로 이 모든 요소들은 기술의 본질과 관련된 어떤 것을 내부화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하에서의 일상생활을 상세히 탐구하게 되면 자연, 기술, 사회 관계, 정신 개념, 생산의 노동과정 등과 우리와의 관계의 많은 것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와 자연과의 관계 연구는 우리의 사회 관계, 우리의 생산 체제, 우리의 정신 세계관, 우리가 사용하는 기술, 우리의 일상생활 내용 등을 살펴보지 않고는 진전되기 어렵다. 이 모든 요소는 하나의 총체를 이루고 있고, 우리는 이들간의 상호관계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만 한다어떤 신도시가 건설되고 있을 때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어떤 신도시가 건설되고 있을 때 여러분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새롭게 만들어질 자연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도시에서 실현될 기술은 어떤 것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새로 형성될 사회 관계는 어떤 것인가? 여기에서 이루어질 생산과 재생산체계는 어떤 것인가? 이 도시에서의 일상생활은 어떤 모습이 될 것이며 우리가 바라는 일상생활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이 도시에 적용될 정신 개념과 상징은 어떤 것인가? 여기에 건설될 도시는 민족의 기념비로서의 성격을 갖는가, 아니면 코스모폴리탄 장소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인가? …이때의 총체성은 각 계기가 다른 모든 계기들을 긴밀하게 내부에 포괄하는 헤겔이 말하는 총체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르페브르가 조화(ensemble)라고 불렀던 것, 혹은 들뢰즈가 집합(asemblage)이라고 불렀던 것, 즉 열려있는 변증법의 방식으로 공동으로 진회해나가는 요소들의 생태학으로서의 총체성에 더 가까운 개념이다. 이 요소들간의 불균등한 발전은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우연성을 만들어낸다…아마도 자본주의의 토대 위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건설하려는 의식의 노력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지리상의 특수성에 맞춰 이 모든 계기들에 정치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점에 있다. 혁명으로서의 공산주의 관련 유혹은 변증법을 단순한 인과론 모델로, 즉 하나 혹은 둘의 계기가 모든 변화를 선도하도록 환원해버렸다. 물론 이런 접근방식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역사 과정을 배제하는 추상-자연과학 유물론의 결합은 그 대변인들이 자신들의 전문영역을 벗어나자마자 보여주는 추상화되고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견해에 의해 분명히 드러난다"…우리는 사물의 표면으로부터 출발한 다음 물신성 밑으로 파고들어가서 사회 과정의 핵심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는 이론으로서의 개념을 찾아낸다. 그런 다음 이 이론상의 개념을 다시 표면으로 끌어내어 일상생활의 움직임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한다. 이것이 바로 맑스가 각주에서 말한 "유물론" 방법이다. 우리는 이 방법이 적용된 사례를 노동일에 관한 장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즉 사회 필요노동시간인 가치는 자본주의의 노동시간을 내부화하고, 사회 표면의 광범위한 영역에서 타인의 노동시간을 수탈하는 것과 관련된 사회 투쟁을 불러 일으킨다…우리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뿐이다. 즉 성장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앞으로 어떤 종류의 기술혁신이 이루어질 것인가?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과의 관계 같은 정신 개념과 관련해서 함의를 고찰하도록 만든다. 만일 이들 함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오로지 이 문제들 가운데 일부와 관련된 투쟁에 직접 참여하는 것뿐인데,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가치 관계 그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궁극의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 것이다…"기계는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수단이다" …기계는 잉여가치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임금재 부문의 생산성 향상에 의한 노동력 가치의 하락은 자본가계급에 상대 잉여가치를 만들어주는 한편 가장 우수한 기계를 가진 자본가는 보다 높은 생산성을 갖춘 생산자에게 돌아가는 잠깐의 특별잉여가치를 얻게 된다한 생산과정의 각 부분간 스필오버(어떤 요소의 생산활동이 그 생산부문이나 다른 생산부문의 생산성을 향상시켜 경제 전반의 생산성 향상을 가져오는 현상) 효과는 상호작용을 통해 각 부분들의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공업이나 농업의 생산방식에서 일어난 혁명은 사회의 생산과정의 일반 조건인 교통과 통신수단의 혁명도 필요로 했다" 이것은 내가 맑스에게서 특별히 흥미를 갖는 또다른 하나의 주제와 연결된다. 그것은…"시간에 의한 공간의 파괴"라고 불렀던 개념의 중요성이다. 자본주의의 역동스러운 진화과정은 지리상 의미에서 중립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맑스의 도시화 논의에서 이와 관련된 몇가지 힌트를 보았는데, 즉 증기기관을 통해 가능하게 된 집중과, 증기력을 통해 얻게 된 지역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그것이다. 세계시장의 연결도 변화를 겪게 된다요컨데 기계의 도움을 받아 기계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충분히 성숙한 역동스러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기술 토대인 것이다. 다시 말해 공학과 공작기계산업의 성장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일반에 "적합한 기술 토대"를 만들어낸 혁명의 마지막 단계다. "기계로서의 노동 수단은 인력 대신 반드시 자연력을 이용하고 경험에 의한 숙련 대신 자연 과학을 의식하고 사용하는 물질로서의 존재 양식을 취한다" 이것은 정신 개념은 물론 이들 개념의 사용에 있어서도 혁명을 불러일으킨다기계는 실제 사용되는 것보다 더 급속하게 마모되기 때문에 가능한 한 기계를 빨리 사용하려는 강력한 유인이 존재한다.]

 

8편 기계와 대공업

기계는 노동자의 경험과 기술이 집약된 생산수단이자, 노동하는 사람의 대체수단으로 등장해서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점차로 인간을 지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맑스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기술에 의해 발생하는 실업의 개념을 도입한다. 노동을 절약하는 기술혁신은 노동자를 일자리로부터 쫓아낸다. 실제로 지난 30년동안 강력한 기술변화와 놀랄 만한 생산성 증가는 실업과 고용불안을 만들어냈고 이를 통해 노동자들을 정치를 통해 통제하는 것을 보다 용이하게 만들었다아웃소싱과 멕시코, 중국의 저임금 노동과의 경쟁은 그동안 미국 노동자들의 잘못 때문이라는 경향이 우세했지만, 실제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로는 감소된 일자리의 3분의 2가 기술변화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근대 공업은 기계와 화학공정 등을 통해 생산기술의 기초와 함께 노동자의 기능과 노동과정의 사회상의 결합을 끊임없이 변혁시킨다. 그리하여 그것은 사회 내의 분업을 끊임없이 변혁시키며, 또 대량의 자본과 대량의 노동자를 한 생산부문에서 다른 생산부문으로 계속해서 이동시킨다. 따라서 대공업의 본성은 노동의 전환, 기능의 유동화, 노동자의 이동 등을 그 조건으로 삼는다이 필연성은 중요한 모순을 만들어낸다. 부정의 측면에서 대공업은 "특화된 기능들로 화석화해버린 낡은 분업을 재생산"해내며 "노동자들의 생활상태에서 온갖 평온함과 안정성 또는 확실성을 없애버리고, 노동자들의 수중에서 노동수단은 물론 생활수단까지 끊임없이 탈취해버린다." 이것은 결국 "노동력 무제한 낭비 그리고 사회의 무정부 상태가 빚어내는 파괴작용"을 가져온다…그래서 잘 기억해두어야 할 점은 "역사상 하나의 생산형태의 갖가지 모순의 발전은 그 생산형태의 해체와 새로운 형성으로 가는 유일한 역사 경로"라는 사실이다.]

 

9편 절대/상대잉여가치로부터 자본의 축적까지

자본의 축적은 자본주의가 갖는 원시축적의 형태를 이해할 수 있어,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의 이해에 조금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맑스는 우리에게 "자본관계는 오랜 발전과정의 산물인 경제 토대 위에서 발생"하며 노동생산성은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수천 세기를 포함하는 역사의 산물"임을 인식하도록 요구한다. 또한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한 잉여노동에 소비하기 위해서는 외부 강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궁극의 모순은 "역사상 발달한 사회의 노동생산력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제약을 받는 노동생산력도 노동과 한몸을 이룬 자본의 생산력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맑스에게 문제의 핵심은 언제나 옳든 그르든 끊임없이 진화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총체성을 구성하는 각 요소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본이 노동으로부터 잉여가치를 수탈하는 독특한 모습을 포착하는 데 있다. 만일 맑스가 여성해방론자들이 제기한 문제 언급을 알았다면, 아마도 거의 틀림없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말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가사노동의 문제를 제기했을 것이다…노동가치는 노동력의 가치라는 개념을 은폐하고, 따라서 노동력이 어떻게 상품이 되는지를 간과하게 만드는 물신 개념이다…맑스의 결론은 보편 명제가 아니고 우연한 발견(contingent findings)로서 그것들은 모두 그가 설정해둔 가정에 기초한다. 이 점을 잊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

체제를 재생산하기 위해 잉여가치가 어떻게 단순재생산 속으로 돌아와 유통되는걸까? ["이 단순한 반복 또는 연속은 이 과정에서 어떤 새로운 성격을 각인하며 또한 그가 개별화된 과정처럼 보이는 이 과정의 피상화된 성격을 해소시켜 버린다"…우리의 법률 상부구조는 원래의 소유권을 보존하고 이 권리를 사용하여 이윤을 얻을 수 있는 권리도 함께 보존하는 것을 엄격하게 지지한다. 그러나 그런 권리는 잉여가치를 뽑아내고 그 처분권을 유지하려는 자본의 계급화된 힘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는 노동력이 특수한 역사 과정을 통해 노동시장에서 사고파는 상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맑스가 말하고자 하는 말은,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소유권의 전반 인식(즉 사람들이 권리와 재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은 물론 잉여가 자본에 의해 창출되어 수탈되는 물화된 과정을 분서할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그러므로 노동자는 끊임없이 객관화(즉 자신에 바깥에 있으면서 자신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힘)으로서 생산하고, 자본가는 끊임없이 노동력을 주관화된(즉 자신을 대상화하고 실현하는 수단에서 분리되어 추상화하여 노동자의 육체 속에 존재하는) 부의 원천으로서 생산한다. 요컨데 노동자를 임노동자로서 생산하는 것이다. 이런 노동자의 끊임없는 재생산 또는 영구화는 자본주의 생산에 없어서는 안될 조건이다이리하여 자본주의 생산과정을 연속되는 과정으로(재생산과정으로) 고찰하면 그것은 단지 상품이나 잉여가치만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관계 그 자체(즉 한편은 자본가, 다른 한편은 임노동자)를 생산하고 재생산한다.]

결국 잉여가치는 자본화되어야 자본가에게 궁극의, 쓸모가 되는 것이다.[상품 생산이 그 자체의 내재 법칙에 의해 자본주의 생산으로 발전해감에 따라 상품생산의 소유법칙은 자본주의의 취득법칙으로 전화한다". 경제학비판의 서문 용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개인 소유권이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잉여가치의 수탈을 법으로 정당화하는 상부구조의 조정이 이뤄지는 것이다…자본가들은 필연으로 화폐형태의 사회 권력을 축적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따라서 그것을 자신의 유인으로 삼는다…맑스에 따르면 자본가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는 못한다. 불쌍한 자본가는 하나의 메커니즘 속에 위치한 부속품에 지나지 않으며, 그는 경쟁의 강제법칙이 그들에게 강요하는 바에 따라 재투자를 해야만 한다…"새로운 자본의 개입 없이 축적이 증대되는 직접 원천은 자연을 맞는 인간의 직접 작용이다". 다른 수단(동기 부여, 작업조직)에 의한 사회 노동생산성 변화도 역시 무상으로 얻어지는 것이며, 낡은 기계를 그 수명보다 더 오래 사용하는 것과 과거의 자산(예를 들어 공사가 이뤄진 기반시설 등)을 새로운 용도로 활용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끝으로 "과학과 기술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자본의 주어진 크기와는 무관하게 자본의 팽창력을 형성한다" 축적은 잉여가치를 자본화하지 않고도 이들 갖가지 수단을 이용하여 확대될 수 있다…자본주의는 괴물이지만 그것은 경직된 괴물이 아니다. 자본주의 비판운동이 자본주의의 적응능력과 유연성, 그리고 유동성을 무시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자본은 물화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심지어 "축적을 위한 축적, 생산을 위한 생산"의 규제 원칙을 받아들일 때에도 그렇다.]

자본의 원시축적을 역사에 비춰볼때 그 원칙은 무엇일까? 하비 식으로 말하면 논리의 흐름이 아닌, 역사의 과정으로서 들추어본다. ["기술상의 구성"이라는 용어는 주어진 시간에 일정량의 사용가치를 상품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노동자의 능력을 단순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물리 측면의 생산성의 척도다. 그것은 한 사람의 노동자가 한시간당 몇켤레의 양말, 몇톤의 강철, 몇덩어리의 빵. 몇갤론의 오렌지 주스 혹은 몇병의 맥주를 생산하는 지를 나타낸다가치구성은 새안에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를 선대된 가변자본의 가치로 나눈 비율이다. 편의상 우리는 이것을 c/v,  즉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의 비율로 나타낸다. 유기 구성도 역시 c/v의 가치비율로 측정되는 데 이것은 물리화된 생산성의 변동으로 발생하는 가치구성의 변화를 반영한다…(맑스는 이윤율 저하경향과 관련하여 리카도가 "경제학으로부터 도망하여 유기화학에서 피난처를 구하려했다"고 힐난한 바 있다) 맑스는 이 설명을 지워버리고 그 대신 자본주의 내부의 기술변화 동학 때문에 자본의 유기 구성 c/v가 상승하고 이것이 곧 장기로는 잉여가치율이 일정한 조건에서 이윤율 m/(c+v)의 하락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 노동절약의 기술혁신은 능동의 가치 생산자(노동자)를 제거해버리고 따라서 잉여가치의 생산을 보다 어렵게 만든다. 이 주장은 매우 명쾌한 것이어서 자본주의의 사회관계와 그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틀 내에서 위기가 형성되는 동학을 설명해주는 뛰어난 장점이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논의는 불완전하고 문제가 있는데, 왜냐하면 위에서 제시된 논의의 두번째 항목에서 맑스가 제시하고 있는 대로 c/v가 반드시 상승한다는 중요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소비되는 생산수단의 가치만을 대표하는 가격요소의 상대화 측면의 크기는 축적의 진전에 정비례하고, 노동에 지불되는 또다른 가격요소의 상대화 측면의 크기는 보통 축적의 진전에 반비례한다…c/v의 상승이 그대로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노동생산성의 증대에 따라 노동에 의해 소비되는 생산수단의 규모는 증대하는 반면, 그 규모에 비해 그 가치는 저하하기 때문이다." c/v의 비율이 계속 안정되게 지켜지려면 두 부문(임금재,생산수단) 사이의 기술 변화가 일정한 패턴을 이뤄야 하지만 이런 결과를 보장하는 메커니즘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불비례로 인한 잦은 공황의 가능성과, 기술변활 인해 발생하는 불안정성으로부터 공황이 주기를 갖고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마땅히 검토되었어야 할 중요한 문제들이다…"자본주의 생산과 축적이 발전함에 따라 그에 비례하여 두개의 가장 강력한 집중의 지렛대, 즉 경쟁과 신용이 발전한다"고 맑스는 정확하게 관찰해냈다…시장경제가 설사 처음에는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소규모 기업에서 출발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거의 분명히 급속하게 변모하여 자본이 집중을 거쳐 결국 독점이나 과점 상태로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실업자의 항구 저수지는 축적이 계속 이뤄지기 위해 필요한 사회 조건인 것이다축적의 주요 지렛대는 기술이 아니라 축적이 만들어내는 과잉인구의 저수지다. "이 과잉인구는 자본의 변동하는 증식욕구를 위해, 실제 인구증가의 제약과는 무관하게 언제든지 착취가능한 인간 재료를 만들어낸다." 보통 산업예비군은 생산에 투입되었다가 뒤이은 침체기에 쫓겨자는 형태로 노동시장에서 경기순환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 산업순환의 부침은 스스로 과잉인구를 보충하기도 하고 또 그것을 가장 활력있게 생산하기도 하는 주요한 요인의 하나가 된다"…오늘날의 자본은 정규직 노동자의 간접비용을 부담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실업자의 저수지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기존의 취업자들에게 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초과노동을 강요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 때로는 아예 초과노동이 취업의 전제조건이 되는 경우도 많다. 그리하여 결국 기존 취업자들은 초과노동과 초과 착위에 시달리게 된다자본은 재투자를 하면서 노동수요를 만들어내지만, 자본은 또한 실업을 만들어내는 노동절약 기술에 재투자함으로써 노동의 공급을 조절하기도 한다. 수요와 공급의 양면을 모두 조작할 수 있는 이런 능력은 시장이 작동하는 방식과 정면으로 모순된다신자유주의 구상은 자본가계급의 최상부로 부가 보다 많이 축적되고 잉여가치가 보다 많이 수탈되는 것을 지향해왔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본가 계급은 자본축적 모델의 전형화된 길을 밟아왔다. 즉 임금을 인하하고, 노동자를 대체하는 기술변화를 통해 실업을 만들어내고, 자본의 권력을 소수의 수중으로 집중시키고, 시장의 수요 공급을 조절하고, 아웃소싱과 역외이전을 활용하고, 세계 곳곳에 산재하는 잠재의 과잉인구를 동원하고, 가능한 한 복지수준을 축소 시 큰 틀의 방법을 사용한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참된 내용이다.]

 

11편 본원 축적의 비밀

맑스의 본원 축적의 중요성의 강조는 끊임 없이 등장한다. [우리 모두는 교환과 계약의 자유라는 이데올로기에 홀려 있다. 이 이데올리기는 부르주아 정치이론의 도덕상 우위와 헤게모니에 기초해서 자신의 정당성을 확고히 하고 휴머니즘을 표방한다. 그러나 이 자유롭고 평등한 교환이 이뤄지는 시장의 세계로 각기 다른 초기 부존 endowment과 재산을 가지고 들어가면, 그 순간 그 불평등이 아무리 작은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점점 부풀려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영향력과 부, 그리고 힘에 있어 엄청난 불평등으로 발전해나간다. 여기에 자본의 집중화 경향이 가세하면 이것은 맑스가 단번에 뒤집어 엎었던 스미스의 이상, 즉 시장교환의 보이지 않는 손이 만들어내는 "만인을 향한 혜택"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만들어낸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시장에 기초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행된 지난 30년 동안 실제로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를 뚜렷하게 인식하게 된다. 맑스의 결론은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이론이 기초가 되고 있는 개인의 자유 관련 명제를 철저히 비판하는 것이다. 이 신자유주의 개념들은 맑스의 관점에서 보면 틀렸을 뿐만 아니라 비현실의, 사기와 현혹으로 가득찬 것이다…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분리가 본원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까닭은 그것이 자본 그리고 자본에 맞는 생산양식의 前史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부르주아의 합법성은 이처럼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힘을 모을 수 있는 가능성을 금지하는 특수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1970년대 이후 세계자본주의가 충분한 성장을 이룩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본가 계급은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약탈에 뿌리를 둔 축적에 더 많이 의존해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상층계급이 자신의 주머니를 넘쳐나도록 채워온 것은 바로 이 방법에 의해서일 것이다. 약탈에 의한 축적의 메커니즘이 부활한 가장 뚜렷한 징후는 신용제도의 금융 수탈 - 이것은 최근 미국에서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공매 처분을 통해 자신이 살던 집을 잃게 만든다 - 의 역하링 확대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발생한 자산 손실은 대부분 빈곤층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집중되었고, 이것은 특히 클리블랜드와 볼티모어 같은 오랜 도시의 여성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는 동안, 이미 호황기에도 이 사업을 통해 엄청나게 부를 키웠던 월가의 은행가들은, 금융위기 때문에 일자리를 잃었으면서도 다시 엄청난 액수의 위로금을 보너스로 거머쥐었다.]


정리하다 보니 매우 긴 글이 되었다. 아직 본 게임으로 들어가지 않았지만 약간의 피로감이 몰려온다. 그럼에도 이를 통해서 자본론으로 들어가는 준비를 조금 더 했다는 스스로의 만족감으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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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 - 베버 편 최장집 교수의 정치철학 강의 1
막스 베버 지음, 최장집 엮음, 박상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진태원 선생님이 하시는 첫번째 강의에서 쓴 책이다. 베버는 많이 들어보았지만, 그분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서 접하고자 하는 마음을 크게 갖지 않고 있다가, 이번 강의를 통해 접했고, 선입견은 역시 선입견일 뿐이구나라는걸 크게 느꼈다.


여기 정리하는 이 책은, 두개로 나눠져있다. 앞에는 베버의 책에 대한 강의이고, 뒤에는 베버의 책이 나온다. 원문을 읽기에 앞서 해설서가 같이 있다는건 좋은 장점으로 보인다. 그리고 여기 적는 소감은 주로 뒷부분인 베버의 책에 맞추었다.


소명으로서의 정치는 무엇일까 라는 묵직한 질문을 베버는 다음의 질문으로 정리한다. [정치를 소명이자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또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그렇다면 국가란 무엇일까? [근대 국가란, 국가만이 하는 고유 업무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특수한 수단을 준거로 정의될 수 밖에 없게 되는데, 그 수단이란 곧 물리의 폭력/ 강권력이다.] 여러 전제와 조건을 다 짤라서 말한다면, 수단으로서 폭력이 필요조건임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지배에 복종할까? [정치란 권력의 배분과 유지 그리고 권력 이동의 이해 관계가 문제 해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정책 결정을 제약하고 해당 관료의 업무를 규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권력을 갖기 위한 부분은? 관료의 업무를 규정한다는 투로 관료만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을까? 그렇다면 지배의 정당화는 어디서 찾을까? [지배를 정당화하는 근거에는 세가지가 있다…(1) 첫째는 '인간 역사 속 영속의 존재', 즉 아득한 옛날부터 통용되어 왔으며 사람들은 이를 지키려는 성향을 갖는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되는 신성화된 관습의 권위다. 과거 가부장과 군주가 행사하던 전통 지배가 이 유형에 속한다. (2) 다음으로 비범한 개인의 천부 자질, 즉 카리스마에 의거한 권위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신의 계시와 영웅주의 혹은 그가 가진 다른 자질을 이유로 한 개인 지도자에 대한 완전한 헌신과 신뢰를 보내는 것을 뜻한다. (3) 마지막으로 합법성에 의거한 지배가 있다. 이는 제정된 법규의 타당성에 대한 신뢰, 합리성을 갖춘 절차에 따라 부여된 객관의 권한, 그리고 법규가 규정하고 있는 의무를 기꺼이 수행한다는 복종의 관념에 따른 지배로서, 근대 공무원을 비롯해 그와 유사한 형태로 권력을 갖게 된 사람에 의해 행사되는 지배 형태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을 끄는 것은 무엇보다도 두 번째 유형, 즉 복종자들이 지도자가 갖는 순수한 개인 카리스마에 추종함으로써 성립되는 지배 유형이다. 왜냐하면 정치에 대한 가장 높은 차원의 표현인 소명 beruf이라는 개념은 바로 여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순서는 마치 역사의 발전 흐름과 짝지운 듯하다. 21세기의 우리에게는 셋째가 당연한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베버가 카리스마를 강조했다면 그는 얼마나 그의 시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을지 조금은 공감을 하고 싶다.


지배의 조직화로서 행정의 조건은 무엇일까? [(지배를 조직화하기 위해) 어떤 상황에서든 통치자는 물리의 폭력/강권력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물질 재화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조금 특이한 점은, '통치자=폭력/강권력'가 아닌, '통치자=재화=폭력/강권력'으로 중간에 매개체를 두고 지배의 조직화를 풀어나간다. 행정 관점에서 국가를 구분해보면 [국가 조직은 서로 다른 원리에 토대를 두고 있는 두 범주로 나뉜다. 첫째는 행정관리들이 화폐, 건물, 전쟁 물자, 마차, 말과 같은 행정 수단을 독자 소유한다는 원리다. 둘째는 행정관리를 행정 수단으로부터 분리한다는 원리로서, 그것은 마치 오늘날 자본주의 기업 내에서 사무직 봉급자와 프롤레타리아를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한다는 것과 동일한 방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문제의 핵심은, 권력자가 자신의 지시에 의해 일을 하는 사람을 통해 직접 행정을 관리하는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에 있다…근대 국가의 발전은 어디서나 군주가 그와 공생해 왔던 계층의 권한을 박탈함으로써 시작된다. 그때까지 이 계층은 행정 수단, 전쟁 수단, 재정 수단 그리고 기타 정치에서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재화를 직접 소유한 계층이었다. 그 과정 전체를 보면 독립 생산자의 생산 수단을 점차 박탈하는 것으로 진행된 자본주의 기업의 발전과 아주 유사하다…다시 말해 오늘날의 국가에서는 물질 바탕의 행정 수단을 행정 관리, 즉 행정 관료 내지 행정 직원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과정이 철저하게 관철되었던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국가라는 개념에서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해석은 마치 '자본론의 행정/정치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분명해지는 건, 공공이건 시장경제 영역이건 그 안에서 몸바쳐 일하는 계층은 이제 몸뚱아리를 빼곤 남은게 없는 힘든 상황으로 밀쳐내졌다는 점이다. 토지나 봉건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자유는 근대에서 성공한 누군가에게만 진정한 자유를 뜻하는 것일뿐이었다.


[근대 국가는 제도화된 통치 조직이다. 이 통치 조직은 한 특정하 영토 내에서, 지배의 수단인 정당한 물리 폭력/강권력을 독점하는 데 성공한 지배 조직이다. 근대 국가는 이런 독점을 통해 모든 물질 기반 통제 수단을 지도자의 수중으로 통합시키고, 과거 이 물질 기반 통치 수단에 대해 독자 처분권을 가졌던 모든 신분제 기구의 권한을 박탈하고는, 그 대신 국가 자신을 최정점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이렇게 국가가 강권력을 독점하도록 이론을 만들고 실제 집행해서 성공한 그들의 통찰력이 얼마까지 앞을, 옆을 보았는지 알기 힘들지만, 어떻게 이런 전략이 나왔고, 힘을 얻어서 서구의 근대를 움켜쥐었는지는 곱씹을 값어치가 매우 높다.


근대 정치에 세 가지 경향을 말하고, (1) 그 첫 번째는 새로운 직업 정치가의 출현이다. [정치를 전업으로 하는 새로운 유형의 정치가들은 행정 수단의 박탈을 둘러싼 투쟁 과정에서 군주의 편에 섰고, 그의 정책을 집행해 주었으며 이를 통해 한편으로 자신의 생계기반을 확보하고 다른 한편 자신의 삶에 이상이 넘치는 의미를 부여했다.] 결국 봉건제에서 전제 군주로 넘어 가는 시기에 발생한 새로운 서비스 분야가 나왔고, 이때 왕이 서있는 쪽으로 줄을 서서 이를 밥벌이로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말인듯 한데…[정치를 위해 살고자 하는 자는 경제의 속박이 없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여유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생계를 버는 일에 자신의 생산 에너지와 생각의 모두 혹은 상당 부분을 지속 쏟아 넣지 않고도 자신의 수입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경제 활동에 묶여 있지 않은 가장 완벽한 경우는 금리 내지 지대 생활자, 즉 왅완전한 불로 소득 생활자이다.] 직업 정치가라는 개념을 만들고, 그 조건으로 다시 봉건시대 상층부를 끌고 온다. 의도는 알겠으나,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작은 부분이지만, 이런 내용은 자기 무덤을 파고 있다는 느낌이다. (2) 두 번째는 전문 관료제의 발달이다. [근대 관료층의 발전이들은 장기간의 예비교육을 통해 전문 훈련을 받은 고급 정신노동자로 발전했으며, 청렴성을 확립하기 위해 고도로 발전된 신분상 명예심을 갖췄다. 이런 신분상 명예심이 없었더라면 반드시 엄청난 부패와 저속한 속물근성이 만연했을 것이다.] 정신 교육, 그에 따른 명예심이 근대 관료제도 발전에 중요하다. 즉 계몽의 측면을 관료제의 아주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다. [전쟁 기술의 발전은 전문 장교를 낳았고 사법 절차의 정교화는 훈련된 법률가를 낳았다. 16세기에 들어와 발전된 국가에서는 이 세분야, 즉 재정, 군사, 법률 분야에서 전문 관료제가 완전히 장착된다. 그리고 이 전문 관료층은 트구건 신분 계층에 대한 군주의 승리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신분 계층에 대한 절대 군주의 이런 승리와 동시에 군주는 자신의 절대 지배권을 서서히 전문 관료층에 넘겨주기 시작했다.] 관료는 절대군주의 헤게모니 장악에 도우미 역할에 머물렀으나, 점차 군주의 역할을 대체하는 군주와 동등한 수준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근대 정당 체제는 권력을 얻기 위한 투쟁 내지 권력을 다루기 위한 방법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에 따라 정치라는 일은 이제 훈련을 필요로 하는 업무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결과 공공 기능이 두개의 뚜렷한 범주로 나뉘게 되었다. 비록 두 범주 간의 차이가 그렇게 절대시할 만큼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 하나는 전문 관료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 관료이다.] 절대왕정이 민주정이나 입헌제로 권력을 확보하는 그 목적은 바뀌지 않고 지속되었다. 그리고 절대왕정에서 왕의 손에서 까딱거리는 권력이라는 공은 정당제에서 어떻게 그 공을 가져와서 놀지에 대한 방법으로 고민의 차원이 바뀌었다. [이 점에서 현재(1917년 혁명 이후의 러시아 내지 1918 11월 독일 혁명의 여파로 새롭게 등장한) 혁명 국가에서도 근본이 새로운 것은 없다. 행정은 완전한 아마추어들 손으로 넘겨졌고, 이들 아마추어는 전문 훈련을 받은 관료를 행정 집행을 위한 두뇌와 수족 이상으로는 활용하려 하지 않았다. 이런 체제가 안고 있는 어려움은 다른 곳에 있는데, 하지만 그 문제는 오늘 우리가 관심 가질 만한 것이 못된다.] 참 고민스러운 대목이 여기다. 해방 이후 한국에 친일 관료/군인/경찰이 득세한 논리가 이것 아닌가? 앞서의 세련된 정치 흐름을 아마추어 상태로 떨어뜨리면 통치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그 논리 말이다. 하지만 전문 관료 또한 절대 왕정 기에 아마추어 시기를 거쳐서 그 자리에 올라왔을 터이다. 결국 밥그릇 싸움으로 환원해야 하는가? (3) 세 번째는 직업 정치가의 유형별 특징은 다음과 같다. [전문 관료는 데마고그가 아니며 데마고그의 기능을 위해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데마고그가 되려 한다면 대체로 그는 매우 나쁜 데마고그가 되고 만다진정한 관료는 그의 본래 사명에 비춰 볼  정치를 해서는 안 되고 단지 '행정'만 하게 되어 있으며 무엇보다 비당파의 자세로 행정을 해야 한다관료는 분노도 편견도 없이 그의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정치가, 지도자와 그의 추종자들이라면 항상 그리고 불가피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바로 그것, 즉 투쟁을 해서는 안된다. 당파성, 투쟁, 열정 등은 정치가, 특히 정치 지도자들이 활동하는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관료는 전문성을 갖춘, 큰 주제를 숙제로 받아서 그 뼈대와 살을 채우는 행정 기계가 바른 모습이라는 말인가?


이제 정당체제로 넘어가서, 몇 가지 민주주의 정당체제를 논의한다. (1) 첫째로 명사 정당체계는 [명사들의 지배와 의원들이 주도하는 역할은 막을 내렸다. 이제는 의회 밖에 있는 전업 정치가들이 정당 조직을 손에 넣었다. 이들은 사실상의 사업가일 수도, 아니면 고정 월급을 받는 관료일 수도 있다.] 한국은 어디쯤일까? 명사의 지배는 한국에서도 막을 내렸는가? 아니면 전업 정치가들이 명사가 되려고 아직도 노력하는 그런 수준일까? (2) 두 번째는 지도자와 머신이 주도하는 정당 체제이고 여기서 베버가 강조하는 카리스마 지도자가 나온다. [사람의 기구-머신-혹은 좀더 정확히 말해 이 기구를 주도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이, 의회 의원을 제어할 수 있고 상당 정도 그들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정당 지도자를 선발하는 데 있어서 특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무엇보다 추종자들은 지도자가 가진 개성스러운 힘이 선거전에서 데마고그로서의 효과를 발휘하여 당에게는 지지표와 통치 권한, 즉 권력을 가져다주고, 자신과 같은 지지자들에게는 더 많은 보상의 기회를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한다. 이상으로 잡은 기준에서 보면, 그들을 추동하는 힘의 하나는 진부한 것들로 구성된 한 정당의 추상화된 정책 프로그램이 아니라 어던 한 개인을 위해 일하는 것에서 얻는 만족감이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지도력이 가진 카라스마의 요소다.] 카리스마 지도자는 떡고물, 만족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고, 그래야 한다. 영국의 코커스 시스템은 건너뛰고 (4) 미국은 엽관 체제가 나온다. 승자 독식 프로그램이다. [미국에서 대중투표제의 머신이 그렇게 일찍부터 발전했던 이유는, 미국에서 그리고 미국에서만, 대중 직접 투표의 원리로 선출된 대통령이 행정부의 수반이자 관직 임면권의 최고 책임자였으며, 삼권 분립의 결과로 직무 수행에 있어 의회로부터 거의 독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통령 선거 승리의 보상은 특히나, 관직에 따른 봉록의 형태로 전리품을 분배하는 것으로 나타나기 쉬웠다. 그 결과는 엽관제로서, 그것은 앤드루 잭슨에 의해 체계를 갖추고 하나의 원칙이 되기에 이르렀다.] 전제 봉건주의의 옅은 경험, 왕이 멀리 떨어져있다던가 이런 상황에서 임기제 왕과 같은 대통령 제도가 미국에서 튀어나오고, 그 대통령은 엽관제를 통해 자기의 심복을 잘 챙기게 되었다. [승리한 후보의 추종자에게 모든 연방 관직을 배분하는 시스템인 엽관제가 작용한다는 것은 오늘날 미국의 정당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것은 경합하는 정당들이 일관된 원칙을 전혀 갖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순전히 그리고 오로지 관직 사냥꾼을 위한 조직이고 선거전이 있을 때마다 득표 가능성에 따라 정책 프로그램을 바꿔 버린다.] 오늘날 한국에도 유효한 말일까? [이런 제도에 기반을 둔 엽관제가 미국에서 가능했던 이유는, 미국의 문화가 젊어서 순수한 아마추어 국가 운영을 관용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에 충실히 봉사했다는 자격 이외에는 어떤 자격도 제시할 필요가 없는 30만에서 40만 명의 파당 정치인들이 있는 상황이란, 당연히 엄청난 폐단없이 존재할 수 없었다. 그것은 오직 아직까지도 무한정한 경제 기회를 가진 나라에서만 유지될 수 있었다.] 미국의 엽관제 성공은 환경(자원)과 국민의 성향(때묻지 않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스는 어떤 확고한 정치 원칙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어떤 원칙도 갖지 않은 채 단지 무엇으로 표를 끌어모을까 하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 그의 교육 수준이 상당히 낮은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은 보통 흠잡을 데 없이 바르다. 다만 정치 윤리면에서 그는 기존의 통상 차원의 정치 윤리에 적응하고 있을 뿐인데, 이는 우리 독일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통화 퇴장 시기에 경제 윤리 영역에서 취했던 태도와 다를 바 없는 정도다.] 베버는 역사가 짧은 미국을 낮춰 보는게 아닐까? [미국에서 정당들은 뚜렷한 자본주의 노선에 따라 운영된다. 그들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긴밀하게 조직되어 있다. 그들은 태머니홀과 같이 지극히 안정된 정치 클럽들에 의해 뒷받침된다. 이들 정치 클럽은 특히 지방자치 행정기구들을 정치 통제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5) 다섯 번째는 독일의 관료 체제다. [독일 정치의 작동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 요인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첫 번째 요인은 의회의 무기력함이다두번째 요인은 훈련된 전문 관료층이 독일에서는 엄청나게 중요했다는데 있다세 번째 요인은 미국과는 달리 독일에는 정치 신념을 가진 이념 정당이 있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한국을 보면 첫 번째와 두 번째가 해당되지 않을까? 마지막은 정치제제의 전망-어떻게 할 것인가- 이다. [직업 정치가에게 기대할 수 있는 내면의 즐거움은 어떤 것이 있고, 이 길을 택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개인으로서 자격 조건은 무엇인가? 정치가라는 직업은 우선 권력감을 제공한다직업 정치가가 마주해야 할 질문은 자신이 어떤 자질을 갖춰야 이 권력을 제대로 다루고, 그래서 자신에게 부과된 책임성을 제대로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그 권력이 제아무리 좁고 특수한 업무 분야에 한정된 권력일지라도 말이다. 이 질문은 우리를 이제 윤리 문제의 영역으로 데려간다. 어떤 종류의 인물이라야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일 권리를 갖는가를 질문한다는 것은 곧 윤리 문제를 꺼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정치가와 윤리라는 주제다. 먼저, 정치가에 필요한 자질은 무엇일까? [정치가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다음 세가지 자질이 중요하다. 열정 passion, 책임감 sense of responsibility, 균형된 판단  judgement이 그것이다. 여기서 열정이란 객관화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대의와 이 대의를 주관하는 신 또는 (인간과 신 사이에 있는 수호신으로서) 데몬에 대한 열정의 헌신을 가리킨다대의에 대해 헌신하는 또 다른 형태로서, 대의에 대한 책임성이 행동을 이끈는 결정할 만한 길잡이가 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균형된 판단이다균형된 판단은 내면의 집중력과 평정 속에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자, 달리 말하면 사물과 삶에 대해 거리를 둘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뜨거운 열정과 냉철한 균형된 판단이 한 사람의 영혼 속에서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문득 신화에 나오는 신과 주역에 나오는 다양한 괘, 사상 의학에 등장하는 네가지 구분법이 떠오른다. 모든 걸 다 갖춘 건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열정의 정치가를 그저 불모의 흥분 상태에 있는 정치 아마추어들과 구분하게 해주는 것은, 영혼에 대한 자기 통제력이 있느냐에 있다. 그리고 이는 오로지 거리감에 스스로 익숙해져야만 성취될 수 있다.] 정치는 기술이 아니라 예술인가? 그리고 그 예술은 신의 영감을 가져와야 가능할걸까? [권력 추구가, 온전히 대의에 대한 헌신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성을 결여한 순전히 개인의 자기도취를 목표로 하는 순간, 그의 직업이 갖는 신성한 정신에 대한 죄악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정치 영역에서는 궁극으로 두 종류의 치명스러운 죄악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객관성의 결여와 책임성의 결여가 그것이다.] 자기도취가 죄악이라면, 수많은 정치가가 죄인이 될 성 싶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 항상 신념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표면상 아무리 당당한 정치 성공이라 하더라도 이 성공에는 사실 피조물 특유의 공허함이라는 저주가 드리워질 것이다.] 내용이 뒤로 갈수록 정치라기 보다 종교의 엄숙함이 엄습한다.


정치가의 윤리에는 대의와 신념 그리고 도덕이 있다. [당당하고 냉철한 자세를 가진 사람이라면 전쟁이 끝났을 때 늙은 아낙들처럼 누구 때문이라며 책임자를 색출하러 다니는 대신에 적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전쟁에서 우리가 졌고 당신들이 이겼다. 그 문제는 끝났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실질의 이해관계를 어떻게 할지를 염두에 두고 그리고 승자가 짊어져야 할 미래에 대한 책임을 고려하여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하자정치에 윤리에 관한 요구를 부과하는 문제와 관련해, 정치란 하나의 특수한 수단, 다시 말해 폭력/강권력을 내포하고 있는 권력이라는 수단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이 고려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볼셰비키와 스파르타쿠스의 이데올로그들 역시 바로 이런 정치 수단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군사 독재가와 똑같은 결과를 만들어 냈음을 우리는 보지 않았는가? 노동자-병사 평의회의 지배와 구체제 권력 집단의 지배는 인물이 교체되었다는 사실과 아마추어리즘을 빼고 나면 어떤 차이가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는데,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의 글이 잘 정리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우주론의 사랑의 윤리는 악에 대해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지만 정치가는 정반대의 격언, 즉 너의 악에 대해 폭력으로 저항해야만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악의 만연에 대한 책임은 너에게 있다라는 명제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폭력이 답이란 말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폭력을 정치의 수단으로 쓰면서 악을 잘 다루라는 말일 것이다. 정치판은 분명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말할만큼 그렇게 깨끗한 곳이 아닐테니 말이다. 여기서 두 가지 윤리가 나온다. [윤리 지향성을 갖는 모든 행위는 근본이 서로 다르고 화해하기 어려운, 대립하는 두 원칙을 따른다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는 신념 윤리를 따르는 원칙이고 다른 하나는 책임 윤리를 따르는 원칙이다그러나 문제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그 어떤 윤리도 피해갈 수 없는 사실은,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많은 경우 우리는 도덕상 의심스럽거나 위험한 수단을 택하지 않을 수 없으며, 부작용이 수반될 가능성 또는 개연성을 감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윤리 측면에서 선한 목적을 갖는다고 해서 그것이 윤리 차원에서 위험한 수단과 부정의 결과를, 언제 그리고 어느 정도 정당화해줄 수 있는지를 가리켜줄 수 있는 그 어떤 윤리도 세상에는 없다.] 그렇다면 정치에 있어 윤리는 필수의 사항이 아니며, 그렇다고 필수가 아니라고 말할 어떤 기준을 갖고 있지도 않다.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조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우리가 목적에 의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원칙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목적이 어떤 수단을 정당화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는 윤리 계율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개의 윤리가 같지 않고 상충도 아니고 때로는 같을 때도 있고 때로는 다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두가지를 어떻게 조화시킬지 모른다. 결국 두개의 윤리는 여러 윤리 중 대표성을 갖고 있어서 선택된 것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윤리 자체에 대한 고민을 아주 깊숙이 가기에는 정치의 속성이 이를 허용하지 못할지 둘 중 어떤 것으로 설명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정치 윤리를 조금 더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다. [정치 윤리는 근대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문제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모든 종교가 이 문제와 씨름했고 다만 그것이 가져온 성취의 정도가 종교마다 달랐을 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들은 이 문제를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이 만든 조직체가 쥐고 있는 정당한 폭력/강권력이라는 특수한 수단 바로 그 자체가 정의와 관련된 모든 윤리 문제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그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폭력/강권력이라는 이 특수한 수단과 손을 잡은 자는 누구든 그것이 가져오는 특수한 결과에 좌우되지 않을 수 없다. 종교든 혁명이든 신념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특히나 그러하다.] 정치와 윤리는 모두 우리 삶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나, 정치는 어떤 보편의 가치를 말하기 어렵고 그때 그때의 상황을 잘 반영해야 한다. 반대로 윤리는 (종교처럼 아주 극대화된 모습까지 밀고 나가지 않더라) 어떤 보편의 선의 가치를 추구한다. 이런 두가지를 하나로 융합하려는 시도가 현실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양상을 아직까지도 썩 그렇게 그럴듯한 모습의 가치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있어 보인다.


베버의 결론-비관의 현실 속 정치가-에서 몇 가지 정리할만한 내용이 있다. [정치를 직업으로 삼겠다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런 윤리의 역설을 자각하고 있어야 하고 또한 이 역설들의 중압에 압도되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중요한 것은 삶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단련된 실력, 그런 삶의 현실을 견뎌낼 수 있는 단련된 실력, 그것을 감당해 낼 수 있는 단련된 실력이다정치란 열정과 균형된 판단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구멍 뚫는 작업이다. 만약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것을 이루고자 몇 번이고 되풀이해 노력하는 삶들이 없다면, 아마 가능한 것마저도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은 온전히 옳고 모든 역사 경험에 의해 증명된 사실이다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 어리석고 비열해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말할 확신을 가진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느낀 바를 조금은 비관조로 적어보았다. 정치에는 선악과 좋고 나쁨의 판단이 들어간다. 그러다보면, 시간이 좀 지난 책은 아무리 고전이라도 지금과 시간의 거리를 느낄 수 밖에 없다. 또한 글쓴이가 처한 때와 터(시공간)의 모습이 우리의 그것과는 분명 다르다. 이런 것까지 다 반영해서 오늘날 우리의 문제 해결과 앞으로 어떻게 가야할지의 그림에 슬기롭게 우겨 넣는다는 게, 차라리 이런 생각이 없이 하얀 종이에 그리는 것보다 반드시 도움을 준다고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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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톤 정암학당 플라톤 전집 9
플라톤 지음, 이기백 옮김 / 이제이북스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소크라테스가 이 책에서 갖고 있는 원칙을 보면 다음과 같다.[1) 판단 가운데 어떤 것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하되, 어떤 것에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2) 사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사는 것을 가장 중시해야 한다 3) 훌륭하게 사는 것과 아름답게 사는 것과 정의롭게 사는 것은 같다 4) 결코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안된다 5) 정의롭지 못한 짓을 당하더라도 보복으로 정의롭지 못한 짓을 해서는 안된다 6) 남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된다 7) 해를 입더라도 보복으로 해를 입혀서는 안된다 8)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와 합의한 것들이 정의롭다면, 그는 그것을 이행해야 한다.]


작품 해설을 보면서 죽음에 처한 소크라테스가, 그동안 갖고 있던 자신의 철학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주는 내용이 나온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찰학을 금하는 법률 명령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그보다 상위의 명령으로서 철학할 것을 지시하는 신의 명령에 복종할 것인가 하는 기로에서 주저없이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쪽을 택하고자 했다. 소크라테스에게는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야말로 정의로운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신의 명령이란 단순히 종교의 의미는 아니라는 점을 언급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종교 신념을 위해 법률 명령에 불복하려고 했다기보다, 철학함이라는 보편으로 가치있는 활동을 위해 그렇게 했다. 기르기 그가 지켜 내고자 한 철학 활동의 자유는 곧 사상의 자유나 표현의 자유이기도 하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는 말을 한적은 없다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탈옥을 거부하고 죽음을 택한 것은 악법도 법이기 때문이 아니라 정의롭지 못한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는 말을 한 적도 없고, 그런 사상을 갖고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크리톤 후반부에서는 의인화한 법률이 법의 명령에는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식의 연설을 하지만, 이것은 법의 명령과 신의 명령이 상충할 때에도 오직 법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변론이나 크리톤에서 볼 때 그 두 명령이 상충할 때는 상위 명령인 신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상을 공유하고 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작품 해설 이후 크리톤 본문을 보면, 거의 하나의 사상을 갖고 이렇게 저렇게 변주하는 소크라테스의 그 유명한 변론술이 나온다. 학교다닐때 산파술이니 하는 일본식 이름으로 불리어진 이 방법을 통해서 소크라테스는 상대의 무지를 깨우치게 했음은 그 유명한 사례다. [나는 이제 처음이 아니라 언제나, 추론해 볼 때 내게 가장 좋은 것으로 보이는 원칙 logos 이외에는 내게 속해 있는 다른 어떤 것에도 따르지 않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네. 그러니 내게 이런 운명이 닥쳤다고 해서 내가 이전에 말한 원칙을 지금 내던져 버릴 수는 없네. 그것들은 내게 이전과 거의 같아 보이며, 나는 바로 그 동일한 원칙을 이전처럼 우선시하고 존중하네]


그런데 이런 친구가 옆에 있을때 과연 품어줄 수 있을 만큼 넓은 그릇을 갖고 있기가 쉬울까? 소선생님의 주장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말이 갖고 있는 맛의 깊이가, 그 내용의 묵직함으로 인해 되씹기를 수없이 해야 하는 그런 내공보다는, 뛰어난 말빨로 내말 들어봐. 맞지? 아님 더 생각해봐. 거봐!’과 같은, 조금 과하게 말하면 지식 폭력이 아닐까 싶다. [그러면 더없이 훌륭한 친구여, 우리는 다수의 사람이 우리에 대해 뭐라고 말할 것인지에 그토록 크게 주목할 게 아니라, 정의로운 것들과 정의롭지 못한 것들에 관해 전문 지식을 가진 한 사람과 진리 자체가 뭐라고 말할 것인지에 주목해야 하네. 그러니 우선, 자네가 정의로운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 좋은 것들 그리고 이것들과 상반된 것들에 관해 다수의 판단에 주목해야 한다고 권고를 할 때 자네는 옳게 권고하는 것이 아니네] 그리고 이렇게 끝없는 설파를 통해 결국 [소크라테스, 나는 할 말이 없다네]라는 항복의 말을 받고 자신의 최후를 향해 더 나아가면서 이 책의 끝을 마무리한다 [그러면 이쯤 해 두게, 크리톤. 그리고 신께서 이렇게 하시니, 그대로 하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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