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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 ㅣ 데이비드 하비의 맑스 <자본> 강의 1
데이비드 하비 지음, 강신준 옮김 / 창비 / 2011년 4월
평점 :
어릴 적 꿈꿔왔던 그 누군가를 실제 만나기보다는, 그냥 꿈속에 계속
놓고서 그 현실과 맞닥뜨리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 가져본 적 있는가?
내게는 있었다. 아직도 있다. 그 중 하나가
자본론이다. 스타보다 가슴이 덜 설레이지만, 대학교 때부터(설익은 생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중학교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이 바로
그것이다. 그 꿈을 서서히 깨어나고자, 그리고 무엇보다 앞서
말한 환상을 깨고 싶은 마음이 스물스물 일어나서 이 책을 들었다.
자본론 1권에만 한정되어 강의록을 정리한 이 책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자본론보다 쉽다고 말하고 있는데, 정말 그런지는 자본론을 읽고 나서 평가해봐야겠다. 거의 600여 페이지에 달아하는 이책을 보는데 원래 계획한 날보다 며칠은 더 걸렸다.
이런 저런 일들이 있기도 했지만, 그리고 아주 꼼꼼히 읽은 것도 아니지만 꽤나 시간이 걸렸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면서, 경기가 가라앉고 성장 동력은 점점 무색화되며, 정치와 법 등 상부 구조가 바람 앞의 촛불이 되어버린 지금의 이 시점에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본론 뿐 아니라 이 책도, 한번 보고 덮어버리기에는 생각해볼 내용이 부지기수다. 그렇다고 이
책만 보자니, 원본은 언제 읽으려나. 이율배반의 상황은 항상
우리 앞에 던져지고(problema), 알아서 스스로 연출한다. 위대한
칸트시여, 당신의 그 마음 100%는 아니지만 점점 이해가
가는 중입니다.
제1편 상품과 교환
자본이란 책에서 상품이 왜 가장 앞에 자리잡고 있을까? 그리고 상품이야말로
자본을 설명하기 위해 추상과 구체화를 넘나드는 좋은 대상으로 파악한다. 여기서 조금 아쉬운 건, 서구의 개념을 맞이하는 우리 말의 한계라고 할까? 표현의 맛이 원뜻에
맞닥드리지 못하는 때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이 책에서 나오는 추상(화)라는 말이다. [상품을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매우 유용한데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매일 상품과 접촉하고 그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방으로부터 상품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것들을 쇼핑하고 살펴보고 갈구하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상품 형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서 어디에나 존재하는 형태다. 맑스는 계급, 인종, 성별, 종교, 국적, 성적 선호 등에 상관없이 우리 모두에게 친숙하고 공통된 어떤 지배의 공통 분모를 선택한 것이다. 우리는 일상 생활을 통해 상품에을 알고 있으며 더구나 상품은 우리의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그것들을 사야만 한다 …모든 상품은 "동등한
인간노동인 추상화된 인간 노동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맑스는 여기에서 다시 한번 추상의 힘을
발휘하여 동일한 노동의 단위라는 생각, 즉 이들 노동 하나하나가 모두 똑같은 것으로서, 모두가 사회의 평균노동력이라는 성격을 띠고, 또한 바로 글너 사회의
평균 노동력으로 작용한다는 생각에 도달한다… 이를 통해 맑스는 가치의 중요 정의, 즉 사회에서 필요한 노동 시간, 다시 말해서 주어진 정상 사회의
생산 조건 아래에서, 그 사회에서의 평균 숙련과 노동 강도로서 어떤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데 요구되는
노동시간이라는 정의를 만들어낸다. 맑스는 이렇게 끝맺고 있다.
"어떤 사용가치의 가치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사회에서 필요한 노동량, 즉 그
사용가치의 생산에 사회에서 필요한 노동시간뿐이다" 이것이 맑스의 정의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은 불완전한 정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라는
개념 속에 포괄된 개념이지만 도대체 이 사회라는 것은 어디서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 것인가? 그것은
폐쇄된 것인가, 개방된 것인가? 혹시 그 사회라는 것이 세계시장이라면
그런 다음에는?]
교환 과정에서는 교환가치를 포함해서 세가지 가치 개념, 그리고 이
셋의 관계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물신성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맑스는 수요와 공급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알고 싶어 했던 것은 수요와 공급이 균형상태 일때 상품 사이의 교환 비율을 어떻게 해석할지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종류의 분석을 통해 사회 필요노동시간이라고 불리는 이 사회 실체의 응결된 요소가치를 찾아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사회 필요 노동인 상품가치를 이야기하기 위해 수요와 공급 조건을 밝히지 않고 무시해왔다
…맑스가 그렇게 하는 까닭은 "노동은…사용가치를
낳는 어머니(즉 유용노동)으로서 그 사회형태가 무엇이든 그것과는
무관하게 인간의 존재조건이며 인간가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를 매개하고 그리하여 인간의 생활을 매개하기 위한 자연필연성이기 때문이다. 이 물질대사의 개념은 인간존재와 자연을
매개하는 노동이라는 개념과 함께 맑스의 유물론 역사관에 있어서 핵심이다… 시장같이 교환이 복합해서 이루어지는
영역에서는, 내 상품은 잠시나마 다수의 등가형태를 지니게 되고, 거꾸로
거기에 나와있는 사람은 누구나 내가 가진 상품을 등가형태로 한 상대 가치형태를 잠시 갖게 된다. 교환관계가
점차 복잡해지면서 전개된 가치 형태가 나타나고, 이것은 일반 가치형태로 발전한다. 이것은 궁극의 "일반 등가물", 즉 "화폐상품"의
독점 역할을 수행하는 하나의 상품으로 집약된다. 화폐상품은 교환체계로부터 발생하는 것을 교환체계 이전에
이미 존재하던 것이 아니다. 따라서 화폐 평태로 집약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필수 조건은 교환 관계가
발달하고 일반화되는 것이다…가치는 물에 기반한 존재가 아니면서도 대상화된 것이라는 사실 …화폐형태의 등장과 가치 형태의 등장은 서로 깊이 연루되어
함께 진화해가는 관계다. 화폐 교환의 등장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부에서 사회 필요노동 시간을 주도하는
요인으로 만들어간다. 그러므로 사회 필요노동시간을 나타내는 가치는 역사를 보았을때 자본주의 생산양식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것이다. 그것은 시장을 통한 교환이 반드시 필요한 조건에서만 등장한다… 사용가치는 사물 세계 속에 존재하고 이 세계는 절대 공간과 시간이라는 뉴턴과 데카르트의 개념들로 묘사될 수
있다. 교환가치는 상품들이 움직이고 교환되는 상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존재하고, 가치는 이와 달리오로지 세계시장이라는 관계 시간과 공간의 맥락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사회 필요노동시간으로서, 사물에 기반한 개념이 아니라 관계 개념인
가치는 세계 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진화하는 시간과 공간 내에서만 비로소 존재를 획득한다) 그러나 맑스는
이미 확실하게 보여준 것처럼 가치는 교환가치없이 존재할 수 없고 교환가치는 사용가치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세
개념은 변증법으로 서로 통합되어 있다… 분석은 두 단계에 걸쳐 이루어진다. 첫번째는 물신성이 어떻게 등장하여 자본주의 하에서의 경제생활에 핵심으로서 불가피한 측면으로 작용하는지를 살펴본다. 두번째는 이 물신성이 일반 부르주아들의 생각 속에서(특히 고전경제학에서) 어떻게 왜곡되어 나타나는지를 검토한다…물신성은 노동생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되는 순간 이들에게 달라붙는 것으로서
상품생산과는 불가분의 것이다… 경제학은 불완전하게나마 가치와 가치크기를 분석하고 이 형태들 속에 숨겨져
있는 내용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 내용이 왜 그런 형태를 취하는지, 즉
왜 노동이 가치로 표시되고 노동생산물의 가치량이 그 노동시간의 길이에 따라 측정되는지는 경제학은 아직 한번도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다. 생산과정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이 아직 생산과정을 지배하지 않는 그러한 사회구성체에 속해있는 것을 이마에 써붙이고
있는 정식들, 바로 그런 정식들은 부르주아 경제학의 시각에서 본다면,
생산하는 노동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너무도 자명한 자연 필연성으로 간주된다… 자본에서 맑스는
물신성의 실재를 부정하지 않은 채로 물신성을 넘어서는 과학을 정립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맑스는 이미
부르주아 경제학의 비판을 통해 기초작업을 부단히 수행했다. 또한 맑스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시장의
추상화된 힘에 의해 얼마나 지배되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물신 구조물에 얼마나 계속해서 지배당할 위험에
처해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과연 이것이 개인의 참된 자유가 보장된 자유로운 사회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이상화된 자유주의 질서라고 하는 환상은 맑스의 관점에서 그것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지 폭로되어야
한다. 그 질서란 것은 실상 인간의 사회관계를 인간의 물화된 관계를 대체해버린 물신성을 복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상품들인 모두 각자의 가치를 어떤 한 상품으로 표시하기 때문에 그 상품이 비로소
화폐가 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그 한 상품이 화폐이기 때문에 다른 상품들이
그 상품으로 각자의 가치를 모두 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2편 화폐
흔히 화폐가 갖는 가치척도로, 그리고 교환기능으로 구분하는데, 맑스는 이러한 구분을 좀더 깊이 들여다본다. 그리고 이 둘 사이를
긴장관계로, 모순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금은 상품에
내재하는 가치척도(즉 노동시간)의 필연스러운 현상형태다. 가치는 자신의 현상형태인 화폐상품과, 그것과 교환되는 다른 모든
상품과의 관계를 통해 표현된다. 상품 가치는 그것의 현상형태 없이는 인식될 수도 없고 알려질 수도 없다…가격은
상품 속에 대상화되어 있는 노동의 화폐명칭이다.라고 맑스는 결론을 내린다…이 점은 꼭 기억해두어야 할 중요한 내용이다…가격 변동이 이루어내는 것은 가격을 그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사회
평균노동으로 수렴시키는 것이다. 만일 이런 가격 변동이 없다면 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 차이를 조정하고
가치를 나타내는 사회의 평균 가격이 형성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맑스는 다음의 모순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앞단계의
모순으로 되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여기에서처럼 도입부의 문장을 찬찬히 살펴보는 것은 맑스의 진의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것은 맑스가 각 절에서 자신의 논의를 펼칠 때 논의하고자 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모순은 상품유통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상품의 형태변화 속에 존재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여기에서 상품 그 자체가 서로 상반된 두가지 성격으로 규정되기"-
상품 소유자의 관점에서는 사용가치가 아닌 것이 구매자에게는 사용가치가 되는- 때문이다…서로를
보완하면서 내부에서 의존해 있는 이들 두 과정(판매와 구매)의
외부 대립이 일정 수준을 넘어가게 되면 내부 통일은 공황을 통해 폭력의 형태로 관철된다. 상품에 내재하는
사용가치와 가치 사이의 대립, 개인 노동이 동시에 사회 노동을 나타나지 않으면 안되는 대립, 물화된 존재의 인격화와 인력의 물화라는 대립 - 이런 내재 모순은
상품의 형태 변화가 빚어내는 갖가지 대립을 통해 더욱 발전된 운동 형태를 취한다. 따라서 이들 형태는
이미 공황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다…화폐를 이처럼 철저한 평등주의자로 간주하는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화폐가 가진 일종의 민주주의를 보여준다. 내 주머니 속에 있는 1달러는
다른 사람의 주머니 속에 있는 1달러와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 화폐를
넉넉히 가지고 있기만 하면 아무리 죄를 많이 저지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천국행 기차표를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화폐는 또한 본래 상품으로서 누군가의 사유 재산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이제 사회의 힘이 개인의 힘이
된다...화폐는 장부에 기록되는 재산상의 화폐로 된다. 결제일이
될 때까지 실제로 움직이는 화폐는 전혀 없기 때문에 상품을 유통시키는 데 필요한 화폐총액은 감소하고 이것은 가치 척도로서의 화폐와 유통수단으로서의
화폐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 결과 새로운 사회 관계(채권자와 채무자 관계)가 만들어지고 이 관계는 새로운 경제 거래와
사회 동학을 만들어 낸다……그러나 G-W-G는 상품이 아니라
화폐가 거래의 목적인 유통형태다. 그런데 이 유통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내가 처음에 유통시킨 화폐액보다
나중에 돌려받는 화폐액이 더 커야 한다. 바로 여기가 화폐 형태의 모순에 의해 매개되는 상품유통으로부터
자본유통이 만들어지는 것을 우리가 자본에서 처음으로 보게 되는 부분이다. 상품 교환의 매개수단으로 사용되는
화폐의 유통과 자본으로 사용되는 화폐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모든 화폐가 자본인 것은 아니다. 화폐가 사용된다고 해서 반드시 자본주의 사회인 것은 아니다 …경제가 호황일 때는 누구나 신교도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공황이 발발하면 누구나 갑자기 화폐의 토대인 지금(地金)을 신봉하는 교리주의자로 변신한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야말로 실제의
가치와 신용할 수 있는 화폐형태의 문제가 제기되는 시점이다. 대출을 콸콸 쏟아내는 뉴욕시의 금융기관들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실제의 생산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들은 순전히 가상의 가치들만을 거래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맑스가 우리에게 제기하는 물음이다. 즉
경기가 좋은 호시절에는 잊혀져 있다가 주기를 갖고 위기가 발생하면 그때마다 우리들에게 다시 밀어다기는 바로 그 물음 말이다. 화폐제도가 금본위제하의 가치체제로부터 점차 분리되면 될수록 사회/자연
관계가 황페화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가능성도 그만큼 더 넓게 열린다.]
제3편 자본으로부터 노동력으로
노동가치론이 오늘날에까지도 갖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화폐 교환(G-W-G')에서 말하는 잉여 가치는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알아보자. 그에
앞서 글쓴 이는 맑스의 자본론 1장의 논의 방법론은 역사가 아닌 논리에 뿌리를 더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점을 미리 확인하고 맑스의 주장으로 넘어가보도록 한다. [사용 가치의 경우에는 같은 가치의 교환이
전혀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왜냐하면 이때는 문제가 되는 것이 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G-W-G의 유통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유일한 이유는 처음 시작할 때의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얻는 데 있다…가치가
전체 과정의 주체이며 가치는 이 과정을 통해 화폐와 상품으로 번갈아 형태를 바꾸면서 자신의 크기를 변화시키고 또한 자신의 본래 가치로부터 잉여가치를
만들어냄으로써 스스로를 증식시킨다. 왜냐하면 가치가 잉여가치를 부가하는 운동은 가치 자신의 운동이며
가치의 증식이고 따라서 자기증식이기 때문이다. 가치는 그것이 가치이기 때문에 가치를 낳는다는 신비한
성질이 있다. 그것은 살아있는 자식을 낳든가 아니면 적어도 황금의 알을 낳는다…맑스는 이렇게 말한다. 이 유통과정 속에는 언제나 되돌아오고 따라서
다른 것들보다 더 중요해보이는 하나의 계기, 즉 화폐로서의 계기인
G-G가 존재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화폐가
가치를 나타내는 일반 형태이면서 궁극의 가치척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가치나 잉여가치와 관련있다고
이야기할 경우 그것은 오로지 이 화폐의 계기를 통해서 뿐이다. 우리는 개별 상품을 통해서는 그것을 이야기하기
어렵다. "그래서 화폐는 모든 가치증식과정에서 항상 출발점과 종점을 이룬다" 맑스의 예에서는, 자본가가 출발할 때가지고 있던 100파운드 스털링으로부터 최종의 110파운드 스털링이 만들어진 것은
바로 그것이다…자본은 과정을 진행하는 가치이자 과정을 진행하는 화폐다. 이것은 자산으로 고정된 양이나
생산요소를 이루는 자본과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닌가? 자본은 유통에서 나왔다가 다시 유통으로 들어가고, 유통 속에서 자기를 유지하고 배가시키고 증대되어서 유통 밖으로 되돌아나오는 방식으로 동일한 순환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거나 새롭게 시작한다. 강력한 동학 개념이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자본은 과정이며 과정이 바로 자본이다…맑스는 어딘가에 소비계급이
존재한다거나, 하나님만 아는 은밀한 곳에서 가치를 얻는 제3자가
존재한다거나, 자본주의 사회체제 내부나 외부로부터 잉여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한다거나
하는 따위의 생각을 철저히 배격했다. 자본주의 내부의 모든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어딘가로부터 얻어야
하며, 만일 그들이 이 가치를 이 체제 내에서 얻는다면, 그것은
가치의 시장을 통해서능 해결될 생산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가치를 수탈함으로써 얻게 된다고 말한다. 잉여가치
생산의 문제는 시장을 통해서는 해결될 수 없으며 우리 대부분은 바로 이런 이유때문에 비생산 소비계급의 영속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길게보면 외국무역도 이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언젠가는
등가의 법칙이 이를 지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노동력은 상품 속에 가치를 응결시킬 수 있는 인간 물리와
정신 능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상품이 되기 위해 노동력은 몇가지 특성을 지녀야 한다. 첫째, 노동력의 소유자가 그것을 상품으로 판매하려면 그사람은 그것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어야 하며, 따라서 자신의 노동능력이나 인격의 자유로운 소유자여야 한다" 따라서 자유로운 노동자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해진다. 노예나
농노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인격체를 모두 양도할 수 없다. 그 노동자가 양도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물리 정신 능력이다. "그는
자신의 노동력을 양도하기만 할 뿐 그 소유권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자본가는 노동자를
소유할 수 없다. 자본가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일정 기간 동안 노동을 해서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뿐이다…맑스의 이데올로기 공격의 핵심 목표는 부르주아의 자유 개념을 관통하는 이중성이었다. (부르주아의 정의 개념에 호소하려던 프루동에게 의문을 제기한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노동자들은 언제나 W-G-W의 유통을 수행하지만 자본가들은 G-W-G'의 유통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이들이 각자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노동자는 등가의 교환에 만족하는데 이는 그들의 관심이 사용가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가는 등가의 교환으로부터 잉여가치를 뽑아내야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맑스는 특정 시점의 특정한 사회에서 합리화된 임금으로 계산될 수 있는 상품의 총액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노동력 상품이 지니는 특성 가운데 특별히 유념해둘 만한 것이 또 하나 있다. 자본가는
시장의 모든 상품은, 그것을 손에 넣어 사용하기 앞서 반드시 먼저 지불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노동력은 그 반대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빌린 다음 노동자들이
노동을 모두 수행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지불을 한다…왜냐하면 양쪽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하나의 관계로 묶어주는 유일한 힘은 그들 자신의 이익이 발휘하는 힘이다. 이렇듯 그들이 각자 자기만 생각하고 타인을 생각하지 않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모든 사람은 사물의 예정조화가
빚어내는 결과에 따라 오로지 그들 상호간에 이익이 되는 사업만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제4편 노동과정과 잉여가치의 생산
노동자가 자본가에 고용되어 자신의 노동을 투입하고 이를 통해 나오는 생산물과 그 가치를 따져본다. [노동과정은 전부가 자연에 의한 것이면서 동시에 인간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연에 의한 것과 인간에 의한 것을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한 물질대사의 변증법으로서의 계기로 파악된다…화폐제도가
일정 지점에 도달하면 어쩔 수 없이 사회 필요노동이라는 물질 세계와의 관계로 복귀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오늘날의 자본주의에서 점점 더 심화되고 있는 사회와 환경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한다면, 바로 그
순간부터 부르주아 세계관도 어쩔 수 없이 점차 더 올바른 정신 개념들로 나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맑스는 인간 존재가 자신의 생각과 목적의식에
따라 세계를 급진화된 방식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며 또한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의식할 수 있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신을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고 덧붙인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목적을 생각하고, 언제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세계에 개입해 자신을
변화시킬 것인지를 의식해야만 한다. 우리는 이런 변증법의 가능성을 창조화된 방법으로 포착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와 관련된 외부화된 자연의 변화 가운데 중립이란 것은 없다. "바깥에서" 우리가 행하는 것은 전부 우리의 "내면"과 관련된 것이다. 맑스는 우리로 하여금 바로 그의 변증법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들고 그리하여 노동과정을 보편화된
방식으로 이해하도록 만든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화한다는 것을 가리킨다…그렇다면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보편 조건으로서의 노동과정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맑스는 세가지 기본요소를 든다. "목적에 부합하는 활동(노동 그 자체)과 노동 대상 그리고 노동 수단"이 그것이다…맑스에게 있어 노동하는 것의 핵심은 그 과정에
있다. 자본이 하나의 유통과정으로 파악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노동은 무엇인가를 만드는 하나의 과정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노동은 사용가치를 만드는 과정이고 자본주의 하에서 이것은 상품 형태로 타인의 사용가치를
만드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 사용가치는 즉각 사용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할까?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과거의 노동이 미래의 용도를
위해 저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므로 과거의 생산물 속에 응결되어 있는 죽은 노동의 가치가 다시 소생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살아있는 노동과 접촉함으로써다. 이것은 생산으로서의 소비와 개인으로서의 소비 사이에
중요 차이를 가리킨다. 생산으로서의 소비는 과거의 노동이 완전히 새로운 사용가치를 만드는 현재의 노동과정에서
소비되는 것을 가리킨다. 반면 개인으로서의 소비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재생산을 위해 소비하는 것을
가리킨다…그리하여 자본가는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을 통해 새로운 종류의 통일성을 이룩한다. 이것이 바로 자본가가
하는 일이며, 자본가의 의식된 목표다. 왜냐하면 이윤의 원천이
잉여가치에 있으면 자본가의 역할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잉여가치를 설명해주는 제대로 된 해답은
다음과 같다. 먼저 여러분의 노동력의 가치를 지불한다. 이때
노동력의 가치는 주어진 생활 수준에서 노동자가 재상산되기 위해 필요한 상품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노동자는
노동력 상품을 판매하여 돈을 얻은 다음 시장으로 가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각종 상품을 손에 넣는다. 그런데
노동력 가치의 등가를 노동자가 재생산하는 데에는 매일 약간의 시간만 소요된다. 따라서 "노동력의 하루 유지비"와 노동력이 매일 매일 창출하는
가치는 서로 전혀 다르다. "전자는 노동력의 교환가치를 규정하고 후자는 노동력의 사용가치를
규정한다." 노동은 W-G-W의 ㅇ 통을 수행하고
자본은 G-W-G'의 유통을 수행한다.]
옛날 학생 시절에 읽었던 책과 수업에서 종종 들었던 기억은 나지만, 사실
그 공식은 이미 사라져버린, 하지만 약간의 유추는 할 수 있는 수준이 지금의 내 모습이다. 자본의 성격 규정을 위해서는 분명히 이 범주를 알 필요가 있다. [맑스는
먼저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을 구별한다. 불변자본은 현재의 노동과정에서 생산수단으로 사용되는 상품 속에
이미 응렬되어 있는 과거 노동이다. 생산수단의 가치는 이미 주어져있으며 따라서 문제는 그것이 새로운
노동과정에 합체되면서 그 가치가 어떻게 되느냐에 있다. 맑스는 그 가치가 단순히 새로운 상품에 그대로
이전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가치는 원료나 기계 등을 생산하는 산업 부문의 생산성에 따라 변동하고, 그러므로 이 자본을 불변자본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 가치를 고정된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맑스가 그것을 불변자본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단지 생산수단의 가치가 노동과정을 통해 새로운 상품으로 흘러들어가
응결되고 이때 그것의 가치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사실상 노동자는 이미 원료, 반제품, 기계 등에 이미 응결되어 있는 가치를, 이들을 사용함으로써 보존한다. 맑스는 노동자가 자본가를 위해 이런 친절을 무상으로 베풀어주는 많은 사례들을 들려준다…기계는 전혀 가치의 원천이 아니다. 단지 기계의 가치가 노동과정을
통해 상품으로 이전될 뿐이다…가변자본이 있는데 이 자본의 가치는 노동자를 고용할 때 결정된다. 이 자본은
어떻게 유통되고 그 결과는 무엇일까? 죽은 노동은 살아있는 노동에 의해 소생하여 새로운 상품의 가치로
이전된다. 맑스에게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며, 여러분은
이것이 정치에서 갖는 중요성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노동자는 단지 불변자본을 이용한 노동을 거부하기만
해도 불변자본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노동이 중단되면 기계로부터 최종생산물로의 자본의 이전은
중단되고 불변자본의 가치는 감소하거나 유실되어버린다. 노동자들은 틀림없이 이런 능력이 있고, 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도에 따라 그만큼의 댓가를 반드시 요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만일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잉여가치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면, 왜 노동자들은 그들의 노력 없이는 자본가가 투하한 불변자본이 모두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을 근거로 잉여가치를
향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단 말인가? …결국 맑스는 잉여가치 생산에 의해 가치를 늘리는 이론을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예를 들어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비율, 즉
c/v를 보도록 하자. 이 비율은 노동생산성 즉 노동력 한단위의 가치가 바꿔내는 생산수단의
가치를 나타낸다. 이 비율이 높다면 노동생산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가변자본과 잉여가치의 비율, 즉 m/v를
보도록 하자. 이것은 노동력의 착취도를 나타낸다. 그것은
노동력 한 단위가 생산하는 잉여가치의 크기를 나타낸다. 이 비율이 높으면 노동력 착취가 그만큼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이윤율, 즉 사용된 총가치(불변자본+가변자본)의 잉여가치
비율 m/(c+v)가 있다. 이윤율은 잉여가치율과 다르다. 잉여가치율은 노동자가 주어진 생활수준에서 스스로를 생산하기 위해 자본가에게서 받은 가치의 댓가로 자본가에게
제공하는 초과노동의 크기를 나타낸다. 물론 여러분은 이윤율이 항상 잉여가치율보다 낮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만일 여러분이 잉여가치율이 높다고 불평을 하면 자본가는 아마 여러분에게 장부를 보이며 그들의
이윤율이 낮다는 것을 입증하려 할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자본가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높은 잉여가치율은
잊어버릴 것이다. 불변자본을 더 많이 사용하면 이윤율은 더 낮아질 것이다. 이윤율은 낮아도 잉여가치율은 높을 수 있다...문제는 이들 모든
비율이 중요한 것이긴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관찰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현실의 노동 과정은 노동자가
하루 동안의 노동 시간 중 v의 가치를 재생산해내는 순간 종이 울리고 따라서 그 순간 이후부터는 그들이
자본가를 위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되는 식이 아니다. 노동과정은 연속 과정으로
진행됭 가치가 c+v+m으로 이루어진 상품이 만들어지고 나서야 끝나게 되어 있다.]
제5편 노동일
근대에서 시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중 하나는 과학의 도움으로
표준이라는 이름을 갖는 시간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시간이 관련 객관화되고 중립의 시간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과학에 중립, 객관이란 영광의 자격을 줄 수 있을까? 섣불리 그럴 수는 없어 보인다. 노동일은 바로 그 시간을 다룬 부분이다. [맑스는 노동가치론의
세계와 노동력 가치의 세계는 다르다는 점을 일깨우면서 시작한다. 노동가치론은 사회 필요노동시간이 노동자에
의해 어떻게 상품 속에 응결되는지를 다룬다. 이 사회 필요노동시간은 화폐 상품과 화폐 일반에 의해 표시되는
가치의 기준이다. 그러나 노동력의 가치는 단지 시장에서 판매되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일 뿐이다. 이 상품은 어떤 점에서는 다른 상품들과 같지만, 다른 상품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몇가지 성질도 지니고 있는데, 왜냐하면 거기에는 역사와 도덕 요소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가치론을 구별하지 못하면 근본의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동등한 권리를 가진(두 사람 모두 교환의 법칙에 따르기로 되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정한 판결을 내릴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자본가들은 시간을 원하고, 이 시간의 1분 1초가 이윤의 요소가 되기를 원한다. 이것은 가치가 사회의 필요노동시간이라는 사실이 빚어내는 필연의 결과다. 이처럼
그것의 추상화된 성질에도 불구하고 가치론은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의 현실과 경험의 중요한 의미를 알려준다…또한 이것(토지의 고갈과 노동자의 생명력 고갈)은 온갖 부를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의 과도한 수탈이 자본주의 그 자체에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이것(과잉인구)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건강이나 복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초과착취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푸꼬가 정부의
등장을 이야기할 때, 참뜻은 바로 사람들이 시간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거의 아무런 생각없이 이
시간개념에 따라 살아가도록 배우기 시작한 시점에 정부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우리 모두는 이 시간 개념을
받아들임으로써 시간 그리고 시간과 관련된 관행이라는 일정한 사고방식의 포로가 된다. 맑스에게 있어 이런
시간개념은 사회의 필요노동시간이라는 가치의 등장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맑스에게 있어서는 푸꼬가 무시하거나
경시하려고 했던 계급 투쟁의 역할이 중심 지위를 차지한다…개혁을 요구하는 운동과정에서 부르주아는 노동계급에게 온갖 정치와 관련해서 약속을 했는데
이 약속 가운데에는 숙련노동자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하고, 노동일의 길이를 제한하며, 노동조합 억압을 개서하는 것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개혁법은
노동자에게 거대한 사기였다는 것이 이내 드러났다. 산업부르조아들은 자신들이 원했던 것을 대부분 얻었지만
노동자계급은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했던 것이다. 노동일의 길이를 제한하는 1833년의 최초의 공장법은 매우 취약하고 효과가 없는 것이었다. 속은
것에 분노한 노동자들은 차티즘이라는 정치운동을 조직했는데 그것은 국민대중의 생활조건과 산업노동자들의 끔찍한 노동조건에 저항하는 운동으로 출발했다. 이 기간 동안 귀족지주계급은 산업부르조아 세력의 성장에 훨씬 더 적대의 입장이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노동자의 요구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에는 국가의 이해를 위한 것은 물론 귀족정치의 한
전형인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과시하기 위한 온갖 의도가 함께 숨어 있었다…여기에서 맑스는 처음으로 노동자들이
"동료들을 규합하고" 하나의 계급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노동조건과 자본주의의 동학에 엄청난 충격을 주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이 투쟁이 바로 핵심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이것(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 조직되어 행동)은 집단 계급 투쟁이 자본주의의 동학 내에서 하나의 균형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일 노동자들이 전혀 세력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면 자본주의 체제는 붕괴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뒷일은 난 몰라!"라는 자본가들 개인의 행태로는 자본주의 경제가 안정스럽게 운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가들을 자기파괴의 길로 이끄는 경쟁의 강제 법칙은 반드시 억제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노동력 공급의 양과 질에 있어서는 물론 초과된 토지 착취와 과도한 자연 자원 수탈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니는 심각한 문제다…계급투쟁은 단지 자본-임노동 관계의 균형추 역할을 할 뿐이다. 계급투쟁은 또한 너무도 쇱게 자본주의의 동학 내부로 통합되어 자본조의 생산양식을 지속해주는 긍정의 힘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것은 계급투쟁이 불가피한 것이면서 동시에 사회에서 필요한 것이라는 의미를 전달해주기는 하지만, 자본주의 혁명 전복을 갖고서는 거의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잉여가치라는 말과 그 논의는 계속 나오는데 이 말의 이해가 선뜻 와닿지 않고 매우 헤깔리게 들릴 때가 많다. ["우리가 생산 과정을 가치증식 과정의 관점에서 고찰하면" 생산수단은 이제 "타인의 노동을 흡수하기 위한
수단"으로 바뀐다. 이제는 더 이상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이 노동자를 사용하게 된다". 이 역사와 논리의 전도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이해하는 데 있어 놀라운 전환이 이루어지는 핵심부분에
해당한다.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자신의 생산활동의 재료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산수단이 노동자를 자신의 생산활동의 효소로 소비하는 것이며, 자본의
생활과정은 자기 자신을 증식하는 가치로서의 자본의 운동일 따름이다." 이 모든 것은 자본가가
가지고 있는 생산수단의 가치가 보전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오로지 살아있는 노동이 공급해주는 것을 흡수하는 것일 뿐이라는 단순한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의 의식" 속에서는 노동자가 오로지 그들의 노동력을 사용하여 자본을 증식시키기 위한 용도로만 존재하게 된다…따라서
자본주의는 모든 제약요인을 극복하거나, 혹은 이들을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매우 중요하고 특수한 성격을 부여하고, 그것의
발전이 가져오는 결과에 독특한 역사,지리 성격을 부여한다.]
제6편 상대잉여가치
잉여가치라는 표현도 편치 않거니와, 상대잉여가치라는 표현으로 내용을
보면 생각하고 다시 생각해보면서 우리 삶을 고찰할 필요를 강하게 느낀다. 자본가에 고용된 노동자의 입장에서
보면, 임금 상승의 필요와 실제의 갭은 매우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가 삶을 유지하는 것의 하나는 생필품 가격의 (낮은 수준의) 안정화 같은 것이 방법으로 써먹을 수 있는 좋은 것 중 하나다.["필요
생활수단을 공급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생산하기 위한 생산 수단을 공급하는 것도 아닌 다른 생산부문들에서는
생산력이 상승하더라도 노동력가치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산성이 상승하여 가치재의
가치가 하락할 경우 그것은 상대 잉여가치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상대 잉여가치는 임금재의 가치가 하락할
경우에만 해당된다…지난 30년간 노동자의 임금이 별로 오르지 않았음에도 불고하고 노동자들이 구입할 수
있는 상품의 양은 오히려 늘어났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월마트에서 쇼핑을 함으로써) 이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세기 영국의 산업부르주아들이
값싼 수입품을 통해 노동력의 가치를 하락시키려 했던 것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오늘날 미국에서 값싼 수입품을 개방하려 하는 것은 노동력의 가치를 안정되게
유지하려는 필요성 때문이다. 보호 관세는 미국 내의 일자리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물가를
상승시켜 결국 임금을 상승시키는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다…때때로 자본가들은 집세의 규제나 저가의 주택(공공
주택) 그리고 집세와 농산물 보조금 등의 정책을 지지하곤 하는데 이것 역시 노동력의 가치를 낮게 유지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국가기구를 통해 노동력의 가치를 낮추려는 계급전략이 과거는 물론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종종 확인할 수 있다. 노동 계급이 국가권력의 일부를 획득할 경우 노동계급은
그 권력을 자신들의 수입을 증가시키는 용도에 사용함으로써 (많은 재화나 서비스를 국가가 직접 공급해주는
방식으로) 노동력의 가치를 올릴 수 있다. (결과를 말하면
잠재화된 상대 잉여가치를 그들 자신의 몫으로 도로 가져가는 것이다.) …맑스는 수요와 공급이 일단 균형점에
도달하고 나면 그것들은 어떤 것도 더 이상 설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수요와 공급은 내의가 왜 평균
비율로 교환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이 문제는 전혀 다른 어떤 것,
즉 응결된 사회 필요노동시간(혹은 가치)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이것은 수요와 공급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 없이는 균형가격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요와 공급 관계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특정 상품생산부문 내에서의 개별 자본가들간의 경쟁도 비슷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경쟁은 이 생산부문 생산력의 일반 수준의 변동에 의해 균형 수준을 다시 조정한다. 여기에서 맑스는 경쟁을 사회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부수 현상으로 서술하지만, 교혼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경쟁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해될 수없는 보다 심오한 문제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왜냐하면 임금재 산업부문의 잠깐의 기술혁신은
생활 수준이 불변인 상태에서도 노동력의 가치를 하락…맑스가 전개하는 논리로부터 우리는 개별 자본가들에게
기술혁신을 향한 경쟁의 엄청난 유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가 선두자리를 차지하여 당신보다
더 우수하고 효율화된 생산 체제를 갖춤으로써 3년간 잉여가치를 얻고 나면, 그제야 당신이 누군가를 따라잡거나 혹은 아예 누군가를 앞질러 이번에는 당신이
3년 동안 잉여가치를 차지하는 등의 앞서거뒤서거니 하는 경쟁이 진행될 것이다. 개별 자본가는
모두 새로운 기술로 일시의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 경주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에 의한 기술발전의
동학이다…기계는 상대 잉여가치의 원천이지 가치의 원천은 아니다. 자본가들은
잉여가치량에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에, 그리고 보통은 절대 잉여가치를 둘러싼 계급투쟁에 휘말리기 보다는
상대 잉여가치를 얻는 것을 더욱 선호하기 때문에, 그들이 기술혁신이야말로 이런 그들의 욕망의 해답이라고
굳게 믿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맑스의 논리 전개에 따르더라도, 잉여가치율이 증가하거나 불변인
상태에서 노동자의 생활수준은 지속 증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다른 하나의 대답은 전세계 노동계급
가운데 일부를 제국주의 방식으로 착취하여 얻은 수익을 전세계 노동계급 가운데 다른 일부가 나누어 갖는다는 점과 관련) …미국에서 벌어진 기이한 일은 최근 약 30년동안 노동자들이 생산성
향상으로부터 발생한 이익을 전혀 배분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본가계급은 그 이익을 거의 남김없이
독차지해버렸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의 반혁명의 본질과 관련되어 있고 신자유주의 시대와 케인즈주의 시대(생산성 향상으로부터 얻은 이익을 자본과 노동이 보다 공평하게 배분하던)를
구별짓는 차이점이기도 하다.]
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노동과 기계의 조합을 협업으로 본다. 특히 자본주의
하에서의 이러한 구성은 가치창출, 자본가와의 관계 맺기 측면에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선대제도 하에서는 상업자본가가 원료를 노동자의 오두막집으로 가져다주고 나중에 완성된 생산물을 수집해온다. 노동자들은 감시받지 않으며 노동과정은 오두막집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오두막집에 사는 사람은 화폐수입을 상업자본가에게 의존했으며 자신들이 만든 생산물을 소유하지 못했다. 이것이
맑스가 형식상의 포섭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가 임금을 받기 위해 공장 안으로 들어오면 그때부터
노동자와 노동과정은 모두 자본가의 감독을 직접 받게 된다. 이것이 실질상의 포섭이다. 즉 형식상의 포섭은 공장 바깥에서의 의존 상태를 가리키며 실질상의 포섭은 공장 안에서 자본가의 직접 감독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실질상의 포섭은 초기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간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자본이 귀했고 따라서 노동의 작용범위를 확대시키는 동시에 노동의 공간범위를 제한하는 것은 대량의 낭비를 막을 수
있게 하는데, 이 공간 범위의 제한은 노동자를 한군데로 모으고 여러 노동과정을 통합하거나 생산수단을
집중시킴으로써 이루어내는 것이다…노동자들이 공장의 집단 협업구조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들은 자본가의
직접 지휘를 받게 된다. 모든 협력 행동은 일정한 지휘체계를 필요로 하는데, 이는 마치 지휘자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경우와 꼭 마찬가지다. 문제는 "자본에 종속된 노동이 협업화되면 이 협업의 지휘-감독-매개 기능은 자본의 기능이 된다. 일단 지휘의 기능이 자본의 기능이
되면, 그것은 특수한 성격이 된다". 이 기능은 1분 1초가 모두 이윤의 요소라는 것을 인식하고 노동자로부터 최대한의
노동시간을 쥐어짜내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한꺼번에
고용된 노동자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그들의 저항도 커지며, 또한 이 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자본의 압력도
필연으로 커진다."…임노동자를 모두 똑같은 하나의 임노동자로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노동계급은 오로지 잉여가치 생산이라는 목표만을 지향하는 협업조직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다양한 기능들에
따라 일정한 지위와 각기 다른 금전 보상을 받는 다양한 계층으로 분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분업과 매뉴팩처는 기계를 쓰는 대공업으로 넘어가기에 앞선, 자본주의
초기 당시 자본가의 부를 축적하는 인력과 기술 운영 방식이다.[맑스는 여기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주된 조직 측면이 시공간의 설정과 이해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자본가는 효율화된
시공간 생산체계의 계획을 고안해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곧 시장에서 일어나는 일과 공장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상품에 소비되는 노동시간이 오로지 그 상품의 생사네
사회 필요 노동시간 뿐이라는 것은 상품생산 전반에서 경쟁에 의한 외부 강제로 나타나는 데, 그것은 피상으로
말하면 개별 생산자는 누구든지 상품을 그 시장가격으로 팔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뉴팩처에서 일정한 노동시간 내에 일정량의 생산물을 공급해야 한다는 것이 생산과정 자체의 기술 법칙을
이루게 된다"…노동과정을 자본주의형태로 재편성하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하나의 일면 기능만 수행하는 관행이 지속되면서 노동자는 자연스럽게 그리고 확실하게 이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전화하며, 또한 그와 전체 생산 매커니즘과의 관련은 그에게 기계의 일부분과 같은 규칙성을 강제로
부여한다" 노동자들은 분화되고 각자의 능력과 자질에 따라 분류된다. 그 결과 "임금이 각기 다른 노동력간의 위계구조"가 만들어진다. 숙련노동자와 비숙련 노동자 사이의 구별이
특히 두드러지게 된다…그러나 자본가들이 사회 영역에서의 계획 관련해서 지니는 위선의 태도를 맑스가 지적하는 것과,
상대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 사용되는 자본가의 복잡한 기술들이 모든 사람의 물질로서의 후생을 추구하는 사회주의 사회의 계획에 적합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개인 소유제도와 경쟁의 강제법칙이 주어진 조건에서만 혁신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논리나 역사에서나 모두 근거를
찾기 어려운 억지에 불과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맑스가 여기에서 가장 강조하려고 했던 부분은 자본에 의한
노동생산력의 수탈에 있다. 맑스는 협업과 분업의 이 모든 힘이 노동계급의 생산력이며 그것을 바로 자본이
수탈하고 있다는 점을 노동계급에게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매뉴팩처 노동자는 자신이 자연의
속성을 박탈당하여 어떤 것도 자립해서 만들 수 없게 되었으며, 이제 자본가의 작업장 부속물로서만 생산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슬프게도…"정신이나
육체 불구 가운데 상당수는 사회 전체의 분업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말하면서 맑스는 그
산업병리학이라고 이름 붙인 것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위험한 길로 접어든다. 노동계급 전체가 병들었다는 것이 확실히 맞는 이야기일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반응하고 생각하는 인간의 능력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안이하다. 여러분 가운데 두개의 작업을 동시에 가져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 문제의 내용을 잘
알 것이다. 그런 조건에 있는 노동자들은, 노동자계급이라면
당연히 생각해야 한다고 여겨지는 문제들을 생각해볼 시간이 거의 없다. 그 사람들은 가계의 적자를 메우고, 자녀들의 음식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 다른 자잘한 집안의 허드렛일을 해나가기에도 너무 바빠서 노동 이외의 다른
일에는 틈을 낼 시간이 없다.]
제7편 기술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매뉴팩처 이후 오늘날까지 전형의 자본주의는 기계라는 생산수단을 중시하는 대공업 형태이다. ["종래의 역사 저술은 모든 사회생활의 기초인 물질 생산의 발전(즉 사실상의 모든 역사)을 인식하지 못했다"…맑스가 말하고 있는 것은 기술과 그 조직 형태가 정신과 관련된 개념이나 사회 관계, 혹은 일상생활과 노동 과정 등은 물론 자연과의 일정한 관계까지도 모두 내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내부화 덕분에 기술과 그 조직 형태 연구는 필연으로 다른 모든 요소들과 관련하여 많은 것들을 나타내거나
드러내는 것이다. 거꾸로 이 모든 요소들은 기술의 본질과 관련된 어떤 것을 내부화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 하에서의 일상생활을 상세히 탐구하게 되면 자연, 기술, 사회 관계, 정신 개념, 생산의
노동과정 등과 우리와의 관계의 많은 것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와 자연과의 관계 연구는 우리의
사회 관계, 우리의 생산 체제, 우리의 정신 세계관, 우리가 사용하는 기술, 우리의 일상생활 내용 등을 살펴보지 않고는
진전되기 어렵다. 이 모든 요소는 하나의 총체를 이루고 있고, 우리는
이들간의 상호관계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만 한다…어떤 신도시가 건설되고 있을 때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어떤 신도시가 건설되고 있을 때 여러분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새롭게 만들어질
자연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도시에서 실현될 기술은 어떤 것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새로 형성될 사회 관계는 어떤 것인가? 여기에서 이루어질 생산과
재생산체계는 어떤 것인가? 이 도시에서의 일상생활은 어떤 모습이 될 것이며 우리가 바라는 일상생활은
어떤 것인가? 그리고 이 도시에 적용될 정신 개념과 상징은 어떤 것인가? 여기에 건설될 도시는 민족의 기념비로서의 성격을 갖는가, 아니면
코스모폴리탄 장소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인가? …이때의 총체성은 각 계기가 다른 모든 계기들을 긴밀하게
내부에 포괄하는 헤겔이 말하는 총체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르페브르가 조화(ensemble)라고 불렀던 것, 혹은 들뢰즈가 집합(asemblage)이라고 불렀던 것, 즉 열려있는 변증법의 방식으로
공동으로 진회해나가는 요소들의 생태학으로서의 총체성에 더 가까운 개념이다. 이 요소들간의 불균등한 발전은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우연성을 만들어낸다…아마도 자본주의의 토대 위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건설하려는 의식의 노력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지리상의
특수성에 맞춰 이 모든 계기들에 정치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점에 있다. 혁명으로서의
공산주의 관련 유혹은 변증법을 단순한 인과론 모델로, 즉 하나 혹은 둘의 계기가 모든 변화를 선도하도록
환원해버렸다. 물론 이런 접근방식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역사
과정을 배제하는 추상-자연과학 유물론의 결합은 그 대변인들이 자신들의 전문영역을 벗어나자마자 보여주는
추상화되고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견해에 의해 분명히 드러난다"…우리는 사물의 표면으로부터 출발한
다음 물신성 밑으로 파고들어가서 사회 과정의 핵심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는 이론으로서의 개념을 찾아낸다. 그런
다음 이 이론상의 개념을 다시 표면으로 끌어내어 일상생활의 움직임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석한다. 이것이
바로 맑스가 각주에서 말한 "유물론" 방법이다. 우리는 이 방법이 적용된 사례를 노동일에 관한 장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즉 사회 필요노동시간인 가치는 자본주의의 노동시간을 내부화하고, 사회 표면의 광범위한 영역에서
타인의 노동시간을 수탈하는 것과 관련된 사회 투쟁을 불러 일으킨다…우리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뿐이다. 즉 성장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앞으로 어떤 종류의 기술혁신이
이루어질 것인가?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과의 관계 같은 정신 개념과 관련해서 함의를 고찰하도록 만든다. 만일 이들 함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제 우리에게 남는 것은 오로지 이 문제들 가운데 일부와 관련된 투쟁에
직접 참여하는 것뿐인데,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가치 관계 그 자체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궁극의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 것이다…"기계는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수단이다" …기계는 잉여가치의 원천이 될 수 있다. 임금재 부문의
생산성 향상에 의한 노동력 가치의 하락은 자본가계급에 상대 잉여가치를 만들어주는 한편 가장 우수한 기계를 가진 자본가는 보다 높은 생산성을 갖춘
생산자에게 돌아가는 잠깐의 특별잉여가치를 얻게 된다…한 생산과정의 각 부분간 스필오버(어떤 요소의 생산활동이 그 생산부문이나 다른 생산부문의 생산성을 향상시켜 경제 전반의 생산성 향상을 가져오는
현상) 효과는 상호작용을 통해 각 부분들의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또한 "공업이나 농업의 생산방식에서 일어난 혁명은 사회의 생산과정의 일반 조건인 교통과 통신수단의 혁명도
필요로 했다" 이것은 내가 맑스에게서 특별히 흥미를 갖는 또다른 하나의 주제와 연결된다. 그것은…"시간에 의한 공간의 파괴"라고 불렀던 개념의 중요성이다. 자본주의의 역동스러운 진화과정은
지리상 의미에서 중립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맑스의 도시화 논의에서 이와 관련된 몇가지
힌트를 보았는데, 즉 증기기관을 통해 가능하게 된 집중과, 증기력을
통해 얻게 된 지역 제약으로부터의 해방이 바로 그것이다. 세계시장의 연결도 변화를 겪게 된다…요컨데 기계의 도움을 받아 기계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충분히 성숙한 역동스러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기술
토대인 것이다. 다시 말해 공학과 공작기계산업의 성장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일반에 "적합한 기술 토대"를 만들어낸 혁명의 마지막 단계다. "기계로서의 노동 수단은 인력 대신 반드시 자연력을 이용하고 경험에 의한 숙련 대신 자연 과학을 의식하고
사용하는 물질로서의 존재 양식을 취한다" 이것은 정신 개념은 물론 이들 개념의 사용에 있어서도
혁명을 불러일으킨다…기계는 실제 사용되는 것보다 더 급속하게 마모되기 때문에 가능한 한 기계를 빨리
사용하려는 강력한 유인이 존재한다.]
제8편 기계와 대공업
기계는 노동자의 경험과 기술이 집약된 생산수단이자, 노동하는 사람의
대체수단으로 등장해서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점차로 인간을
지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맑스는 여기에서 처음으로 기술에 의해 발생하는 실업의 개념을 도입한다. 노동을 절약하는 기술혁신은 노동자를 일자리로부터 쫓아낸다. 실제로
지난 30년동안 강력한 기술변화와 놀랄 만한 생산성 증가는 실업과 고용불안을 만들어냈고 이를 통해 노동자들을
정치를 통해 통제하는 것을 보다 용이하게 만들었다…아웃소싱과 멕시코,
중국의 저임금 노동과의 경쟁은 그동안 미국 노동자들의 잘못 때문이라는 경향이 우세했지만, 실제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로는 감소된 일자리의 3분의 2가 기술변화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근대 공업은 기계와 화학공정 등을 통해 생산기술의 기초와 함께 노동자의 기능과
노동과정의 사회상의 결합을 끊임없이 변혁시킨다. 그리하여 그것은 사회 내의 분업을 끊임없이 변혁시키며, 또 대량의 자본과 대량의 노동자를 한 생산부문에서 다른 생산부문으로 계속해서 이동시킨다. 따라서 대공업의 본성은 노동의 전환, 기능의 유동화, 노동자의 이동 등을 그 조건으로 삼는다…이 필연성은 중요한 모순을
만들어낸다. 부정의 측면에서 대공업은 "특화된 기능들로
화석화해버린 낡은 분업을 재생산"해내며 "노동자들의
생활상태에서 온갖 평온함과 안정성 또는 확실성을 없애버리고, 노동자들의 수중에서 노동수단은 물론 생활수단까지
끊임없이 탈취해버린다." 이것은 결국 "노동력
무제한 낭비 그리고 사회의 무정부 상태가 빚어내는 파괴작용"을 가져온다…그래서 잘 기억해두어야
할 점은 "역사상 하나의 생산형태의 갖가지 모순의 발전은 그 생산형태의 해체와 새로운 형성으로
가는 유일한 역사 경로"라는 사실이다.]
제9편 절대/상대잉여가치로부터
자본의 축적까지
자본의 축적은 자본주의가 갖는 원시축적의 형태를 이해할 수 있어,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의 이해에 조금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맑스는 우리에게 "자본관계는 오랜 발전과정의 산물인 경제 토대 위에서 발생"하며
노동생산성은 "자연의 산물이 아니라 수천 세기를 포함하는 역사의 산물"임을 인식하도록 요구한다. 또한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한 잉여노동에 소비하기 위해서는 외부 강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고 궁극의 모순은 "역사상
발달한 사회의 노동생산력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제약을 받는 노동생산력도 노동과 한몸을 이룬 자본의 생산력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맑스에게 문제의 핵심은 언제나
옳든 그르든 끊임없이 진화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총체성을 구성하는 각 요소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자본이 노동으로부터 잉여가치를 수탈하는 독특한
모습을 포착하는 데 있다. 만일 맑스가 여성해방론자들이 제기한 문제 언급을 알았다면, 아마도 거의 틀림없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말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가사노동의 문제를 제기했을 것이다…노동가치는
노동력의 가치라는 개념을 은폐하고, 따라서 노동력이 어떻게 상품이 되는지를 간과하게 만드는 물신 개념이다…맑스의
결론은 보편 명제가 아니고 우연한 발견(contingent findings)로서 그것들은 모두 그가
설정해둔 가정에 기초한다. 이 점을 잊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
체제를 재생산하기 위해 잉여가치가 어떻게 단순재생산 속으로 돌아와 유통되는걸까?
["이 단순한 반복 또는 연속은 이 과정에서 어떤 새로운 성격을 각인하며 또한 그가 개별화된 과정처럼 보이는
이 과정의 피상화된 성격을 해소시켜 버린다"…우리의 법률 상부구조는 원래의 소유권을 보존하고
이 권리를 사용하여 이윤을 얻을 수 있는 권리도 함께 보존하는 것을 엄격하게 지지한다. 그러나 그런
권리는 잉여가치를 뽑아내고 그 처분권을 유지하려는 자본의 계급화된 힘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는 노동력이
특수한 역사 과정을 통해 노동시장에서 사고파는 상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맑스가 말하고자 하는
말은,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소유권의 전반 인식(즉
사람들이 권리와 재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은 물론 잉여가 자본에 의해 창출되어 수탈되는 물화된 과정을
분서할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그러므로 노동자는 끊임없이 객관화(즉
자신에 바깥에 있으면서 자신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힘)으로서 생산하고,
자본가는 끊임없이 노동력을 주관화된(즉 자신을 대상화하고 실현하는 수단에서 분리되어 추상화하여
노동자의 육체 속에 존재하는) 부의 원천으로서 생산한다. 요컨데
노동자를 임노동자로서 생산하는 것이다. 이런 노동자의 끊임없는 재생산 또는 영구화는 자본주의 생산에
없어서는 안될 조건이다…이리하여 자본주의 생산과정을 연속되는 과정으로(재생산과정으로) 고찰하면 그것은 단지 상품이나 잉여가치만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관계 그 자체(즉 한편은 자본가, 다른 한편은 임노동자)를 생산하고 재생산한다.]
결국 잉여가치는 자본화되어야 자본가에게 궁극의, 쓸모가 되는 것이다.[상품 생산이 그 자체의 내재 법칙에 의해 자본주의 생산으로 발전해감에 따라 상품생산의 소유법칙은 자본주의의
취득법칙으로 전화한다". 경제학비판의 서문 용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개인 소유권이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잉여가치의 수탈을 법으로 정당화하는 상부구조의 조정이 이뤄지는 것이다…자본가들은 필연으로 화폐형태의 사회 권력을 축적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따라서 그것을 자신의 유인으로 삼는다…맑스에 따르면 자본가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는 못한다. 불쌍한
자본가는 하나의 메커니즘 속에 위치한 부속품에 지나지 않으며, 그는 경쟁의 강제법칙이 그들에게 강요하는
바에 따라 재투자를 해야만 한다…"새로운 자본의 개입 없이 축적이 증대되는 직접 원천은 자연을
맞는 인간의 직접 작용이다". 다른 수단(동기 부여, 작업조직)에 의한 사회 노동생산성 변화도 역시 무상으로 얻어지는
것이며, 낡은 기계를 그 수명보다 더 오래 사용하는 것과 과거의 자산(예를
들어 공사가 이뤄진 기반시설 등)을 새로운 용도로 활용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끝으로 "과학과 기술은 현재 사용되고 있는 자본의 주어진
크기와는 무관하게 자본의 팽창력을 형성한다" 축적은 잉여가치를 자본화하지 않고도 이들 갖가지
수단을 이용하여 확대될 수 있다…자본주의는 괴물이지만 그것은 경직된 괴물이 아니다. 자본주의 비판운동이
자본주의의 적응능력과 유연성, 그리고 유동성을 무시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자본은 물화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심지어 "축적을 위한 축적, 생산을 위한 생산"의 규제 원칙을 받아들일 때에도 그렇다.]
자본의 원시축적을 역사에 비춰볼때 그 원칙은 무엇일까? 하비 식으로
말하면 논리의 흐름이 아닌, 역사의 과정으로서 들추어본다. ["기술상의
구성"이라는 용어는 주어진 시간에 일정량의 사용가치를 상품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노동자의 능력을
단순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물리 측면의 생산성의 척도다. 그것은
한 사람의 노동자가 한시간당 몇켤레의 양말, 몇톤의 강철, 몇덩어리의
빵. 몇갤론의 오렌지 주스 혹은 몇병의 맥주를 생산하는 지를 나타낸다…가치구성은
새안에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를 선대된 가변자본의 가치로 나눈 비율이다. 편의상 우리는 이것을 c/v로,
즉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의 비율로 나타낸다. 유기 구성도 역시 c/v의 가치비율로 측정되는 데 이것은 물리화된 생산성의 변동으로 발생하는 가치구성의 변화를 반영한다…(맑스는 이윤율 저하경향과 관련하여 리카도가 "경제학으로부터
도망하여 유기화학에서 피난처를 구하려했다"고 힐난한 바 있다)
맑스는 이 설명을 지워버리고 그 대신 자본주의 내부의 기술변화 동학 때문에 자본의 유기 구성 c/v가
상승하고 이것이 곧 장기로는 잉여가치율이 일정한 조건에서 이윤율 m/(c+v)의 하락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달리 말해 노동절약의 기술혁신은 능동의 가치 생산자(노동자)를 제거해버리고 따라서 잉여가치의 생산을 보다 어렵게 만든다. 이
주장은 매우 명쾌한 것이어서 자본주의의 사회관계와 그 생산력의 발전이라는 틀 내에서 위기가 형성되는 동학을 설명해주는 뛰어난 장점이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논의는 불완전하고 문제가 있는데, 왜냐하면 위에서
제시된 논의의 두번째 항목에서 맑스가 제시하고 있는 대로 c/v가 반드시 상승한다는 중요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소비되는 생산수단의 가치만을 대표하는 가격요소의 상대화 측면의 크기는 축적의 진전에 정비례하고, 노동에
지불되는 또다른 가격요소의 상대화 측면의 크기는 보통 축적의 진전에 반비례한다…c/v의 상승이 그대로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노동생산성의 증대에 따라 노동에 의해 소비되는 생산수단의 규모는 증대하는
반면, 그 규모에 비해 그 가치는 저하하기 때문이다." …c/v의 비율이 계속 안정되게 지켜지려면 두 부문(임금재,생산수단) 사이의 기술 변화가 일정한 패턴을 이뤄야 하지만 이런 결과를
보장하는 메커니즘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불비례로 인한 잦은 공황의 가능성과, 기술변활 인해 발생하는 불안정성으로부터 공황이 주기를 갖고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마땅히 검토되었어야 할
중요한 문제들이다…"자본주의 생산과 축적이 발전함에 따라 그에 비례하여 두개의 가장 강력한
집중의 지렛대, 즉 경쟁과 신용이 발전한다"고 맑스는
정확하게 관찰해냈다…시장경제가 설사 처음에는 서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소규모 기업에서 출발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거의 분명히 급속하게 변모하여 자본이
집중을 거쳐 결국 독점이나 과점 상태로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실업자의 항구 저수지는 축적이 계속 이뤄지기 위해 필요한 사회 조건인 것이다…축적의 주요 지렛대는 기술이 아니라 축적이 만들어내는 과잉인구의 저수지다.
"이 과잉인구는 자본의 변동하는 증식욕구를 위해, 실제 인구증가의 제약과는 무관하게
언제든지 착취가능한 인간 재료를 만들어낸다." 보통 산업예비군은 생산에 투입되었다가 뒤이은
침체기에 쫓겨자는 형태로 노동시장에서 경기순환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이 산업순환의 부침은
스스로 과잉인구를 보충하기도 하고 또 그것을 가장 활력있게 생산하기도 하는 주요한 요인의 하나가 된다"…오늘날의
자본은 정규직 노동자의 간접비용을 부담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실업자의 저수지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기존의 취업자들에게 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초과노동을 강요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 때로는 아예 초과노동이
취업의 전제조건이 되는 경우도 많다. 그리하여 결국 기존 취업자들은 초과노동과 초과 착위에 시달리게
된다…자본은 재투자를 하면서 노동수요를 만들어내지만, 자본은
또한 실업을 만들어내는 노동절약 기술에 재투자함으로써 노동의 공급을 조절하기도 한다. 수요와 공급의
양면을 모두 조작할 수 있는 이런 능력은 시장이 작동하는 방식과 정면으로 모순된다…신자유주의 구상은
자본가계급의 최상부로 부가 보다 많이 축적되고 잉여가치가 보다 많이 수탈되는 것을 지향해왔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본가 계급은 자본축적 모델의 전형화된 길을 밟아왔다. 즉 임금을 인하하고, 노동자를 대체하는 기술변화를 통해 실업을 만들어내고, 자본의 권력을
소수의 수중으로 집중시키고, 시장의 수요 공급을 조절하고, 아웃소싱과
역외이전을 활용하고, 세계 곳곳에 산재하는 잠재의 과잉인구를 동원하고,
가능한 한 복지수준을 축소 시 큰 틀의 방법을 사용한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참된 내용이다.]
제11편 본원 축적의 비밀
맑스의 본원 축적의 중요성의 강조는 끊임 없이 등장한다. [우리
모두는 교환과 계약의 자유라는 이데올로기에 홀려 있다. 이 이데올리기는 부르주아 정치이론의 도덕상 우위와
헤게모니에 기초해서 자신의 정당성을 확고히 하고 휴머니즘을 표방한다. 그러나 이 자유롭고 평등한 교환이
이뤄지는 시장의 세계로 각기 다른 초기 부존 endowment과 재산을 가지고 들어가면, 그 순간 그 불평등이 아무리 작은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점점 부풀려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영향력과 부, 그리고 힘에 있어 엄청난 불평등으로 발전해나간다. 여기에 자본의
집중화 경향이 가세하면 이것은 맑스가 단번에 뒤집어 엎었던 스미스의 이상, 즉 시장교환의 보이지 않는
손이 만들어내는 "만인을 향한 혜택"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만들어낸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시장에 기초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진행된 지난 30년 동안 실제로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를 뚜렷하게 인식하게 된다. 맑스의
결론은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이론이 기초가 되고 있는 개인의 자유 관련 명제를 철저히 비판하는 것이다. 이
신자유주의 개념들은 맑스의 관점에서 보면 틀렸을 뿐만 아니라 비현실의, 사기와 현혹으로 가득찬 것이다…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분리가 본원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까닭은 그것이 자본 그리고 자본에 맞는 생산양식의 前史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부르주아의 합법성은 이처럼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힘을 모을 수 있는 가능성을 금지하는 특수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1970년대 이후 세계자본주의가 충분한 성장을 이룩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본가 계급은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약탈에 뿌리를 둔 축적에 더 많이 의존해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까지 상층계급이
자신의 주머니를 넘쳐나도록 채워온 것은 바로 이 방법에 의해서일 것이다. 약탈에 의한 축적의 메커니즘이
부활한 가장 뚜렷한 징후는 신용제도의 금융 수탈 - 이것은 최근 미국에서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공매 처분을
통해 자신이 살던 집을 잃게 만든다 - 의 역하링 확대된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발생한 자산 손실은 대부분 빈곤층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집중되었고, 이것은
특히 클리블랜드와 볼티모어 같은 오랜 도시의 여성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는
동안, 이미 호황기에도 이 사업을 통해 엄청나게 부를 키웠던 월가의 은행가들은, 금융위기 때문에 일자리를 잃었으면서도 다시 엄청난 액수의 위로금을 보너스로 거머쥐었다.]
정리하다 보니 매우 긴 글이 되었다. 아직 본 게임으로 들어가지 않았지만 약간의 피로감이 몰려온다. 그럼에도 이를 통해서 자본론으로 들어가는 준비를 조금 더 했다는 스스로의 만족감으로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