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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일기 3 - 소련군의 해방과 미군의 해방 해방일기 3
김기협 지음 / 너머북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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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단추를 잘못 낀 우리의 역사가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는 생각이 지금까지의 내 생각이다. 그럼 그 첫 단추는 어디일까? 광복 이후 군정기일까? 구한 말 조선의 무능 그리고 이를 잡아챈 일제 식민지일까? 임진왜란과 병자왜란 이후 가져가야 할 변화의 흐름을 움켜쥐고 기득권의 살 길만을 찾은 그 시절부터일까?

외세, 지배세력, 불운함 그 어떤 것도 무시할 내용은 아니다. 그럼 우리만 그래왔을까? 그렇게 단정할만한 건 아니지만, 우리에게 역사를 낙담할 만큼 맥빠지게 만드는 일이 지속해서 있어왔음도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 그 속에서 통일 정권을 수립하려는 쪽과 어떻게든 정권을 먼저 쥐고 단독 정권을 수립하려는 세력으로 갈라지고 이 배후에는 외세로서 미군정이, 소련이 도사리고 있다는 얘기가 3권의 내용이다.

 

이 책을 보면서, 그동안 갖고 있었던 김구 선생이란 사람을 보는 눈이 조금은 바뀌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이승만을 보는 눈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고 싶을 마음이 아직까지 한번도 안생기는 것도 놀랍다. 둘은 한살 차이인데,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은 참으로 달랐다. [(1946) 1 21일 임시정부가 추진해온 비상정치의 주비위가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위원회 합류와 함께 비상국민회의로 방향을 바꾸면서 임정 요인 중 좌파로 불리는 비주류 인사 몇이 탈퇴를 선언했다. 비상국민회의가 좌익 참여에 연연하지 않고 우익 통합에 주력할 방침을 정했기 때문이다. 비상국민회의는 임정까지 분열시키며 우익 중심으로 결성되어 이승만과 김구를 영수로 추대했다.]

 

식민지 이후 한국의 경제는 일제의 발전을 위한 도구이자 수단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수탈의 주체가 사라진, 광복을 맞은 이후 한국의 경제는 무언가 바로 나아지는 부분이 있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그런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자질이 떨어지는 미군이 군정을 담당하게 된 것이 원인의 하나고, 또 하나는 식민 체제에 참여함은 물론, 해방 이후에도 자기 이익만을 챙기려는 저 그악한 무리의 이기심이 또 하나의 원인이다. 이 때문에, 그 당시 정치권에서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인 토지개혁이 제대로 실시되지 못한다. [조선에서는 43 8월 이래 식량배급제가 실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미군정은 들어선 지 한달이 안된 10 5일에 미곡의 자유시장화를 선언했다. 작황이 좋아서 시장 상황을 낙관한 것이라 하는데, 아무리 좋게 얘기해도 경솔한 조치였다. 미곡 시장이 투기화되고 도시민들은 겨우내 식량 부족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미소군 대표회담에서 소련군 측의 미군 측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이 이북 지역으로의 쌀 반출을 보는 태도였다. 당시 일본의 식량난은 끔찍한 상황이었고 쌀값이 금값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 점령군이 해결할 문제이며 한국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소련군의 입장이었을 것이고, 한민족 입장에서도 타당한 관점이었다. 그런데 이 일기에 소개한 정도의 정황을 놓고 볼 때 미군정이 대일 쌀 밀수출에 개입하고 있다는 의심을 소련군 휘하 대표들이 가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식민지배의 모순이 가장 심각하고도 광범하게 나타난 것이 해방 당시의 토지소유관계였다. 시장 원리에 맡겨둘 수 없는, 국가의 개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이념 이전에,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익을 자처하는 정당들, 심지어 한민당까지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토지개혁의 필요였다…”(안재홍)는 지금 조선의 상황을 60년 전 일본 상황과 비슷하게 봅니다. 영세농민을 살려줄 토지개혁이 절실하고, 또 한편으로 급속한 산업 진흥이 필요한 상황이죠. 메이지시대 일본에서는 영주와 대지주가 땅을 내놓는 대신 국채를 받아 산업자본가로 역할을 바꿨습니다. 조선의 지주들이 그런 변신을 꾀하는 것이 조선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이 와중에, 북한은 북한대로 자기 갈 길을 가려고 한다. 참고로 46년 북한의 회의에 이미 김일성의 사진이 스탈린 옆에 걸려있는 모습, 그리고 그 밑에 소련군과 더불어 김원봉, 그 옆에 앉은 젊은 김일성의 사진을 보면서 글쓴 이 뿐만 아니라 나도 꽤 놀라웠다. [북한 단독 정권의 출발점이 되기는 했어도 임시인위의 설립이 분단 건국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해방 후 반년이 지난 그 시점까지 북한에서느 인민의 대다수가 동의할 만한 개혁 추진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로 다음 달 시행되어 놀라운 성과를 거둔 토지개혁을 비롯하여 노동법령과 남녀평등법의 제정, 주요 산업의 국유화 등 제반 민주개혁을 책임질 정권의 존재가 필요한 단계에 와 있었다. 임시인위는 이 필요에 부응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을 갖춘 정권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 이 책(3)까지의 내용을 보면 미군에 의한 남한의 지배는 미국이 중시하는 합리성의 측면에서 보면 많이 떨어져보인다. [미군이 한국인을 해방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일본인 대신 통치하러 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경찰 운영 방침이었고, 한국인들에게도 가장 피부로 느껴지는 일이었다…식민지 말기 전 조선의 경찰력은 2만 명이었는데 1946 10월까지 남한 경찰력은 2 5천명이었다. 남한만 놓고 보자면 갑절로 늘어난 것이다미군정 하의 남한은 식민지 시대보다 더 많은 경찰력이 필요한 곳이 되어 있었다…"영어 마디나 한다고" 미군정 밑에서 득세한 장택상. 그가 남긴 수많은 일화들을 훑어보면 그가 왜 정신과 이사의 도움을 받지 않았는지 의문스럽다군정청은 행정 인력이 넉넉지 못할 뿐 아니라 기강도 잘 잡혀있지 못했다. 그런데 일본인 재산 관리 방침마저 오락가락하니, 의지와 능력을 가진 자들이 재산 확보를 위해 온갖 재간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북의 토지개혁 실시에 임해 일본인 소유 농지라도 농민들에게 방매하겠다고 나섰지만, 주택과 산업체도 함께 방매할 방침을 내놓음으로써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일본의 패망으로 대다수 공장의 경영에 공백이 생겼는데, 직원과 공원들의 운영위원회 같은 조직을 만들어 경영을 넘겨받으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런 조직이 경영을 맡는 경우 효율성에는 문제가 있을지 몰라도 물건을 마구 빼내는 일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군정은 이 자율운동을 공산주의 성향으로 보아 군사력과 경찰력으로 탄압하고 경영진을 임명했다. 갑자기 큰 책임과 권한을 맡은 경영자들 중에 책임을 등지고 권한을 남용하는 풍조가 널리 일어났는데, 가장 뚜렷한 사례가 물자횡령이었다한국과 일본에는 두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하나는 일본에 임시과도정부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한국이 두 나라에 분할 점령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차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인민의 개혁 욕구가 점령군 사령부에도 상당히 원활하게 수용된 반면, 한국에서는 이념의 색안경을 피할 수 없었다. 패전의 피해를 일본보다도 오히려 해방된 조선이 더 많이 짊어지기 시작한 것이다충성은 충과 성이 합쳐지는 것이다. 충은 타인을 맞는 진정성이고, 성은 자신을 맞이하는 진정성이다. 임명권자를 향한 맹목 충성은 진정성이 없는 충성이다. 자기 이익 챙기는 길을 분식하기 위해 이용하는 충성이다. 이 진정성 없는 충성이 대한민국 권력을 둘러싼 또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그 혼란 속에서도 이 나라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거나 새 국가 건설을 위해 학문의 역할을 세우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안재홍은 민족주의가 혼란을 극복하는 열쇠라 생각하고 강력한 민족주의 지도력의 출현을 바랐다. 그래서 임정 추대를 일관되게 주정해왔다. 임정의 지도력이 무너진 이제 한독당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국민당을 갖다 바친 그는 천금을 주고 천리마의 뼈를 사는 심정이었을까? …북쪽에서는 백남운, 홍명희, 김두봉 등 학술의 조직 운동에 주동 인물이 국가 건설에서도 주동 역할을 맡았다. 그래서 이 조직 운동이 1949년 말 설립된 정치경제학 아카데미야를 거쳐 과학원 설립으로 이어지면서 학술 연구와 교육이 국가 기능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반면 남쪽에서는 학술 조직 운동이 국가 건설 과정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그 결과 학술원이 상징으로서 의미만을 가진, 국가 기능과 무관한 존재가 되었다.]

 

한국이 진정한 독립국가로 바로 서기 위해 조성된 미소독립위원회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을까? [사실에 있어서 두 나라 모두 점령을 의무가 아니라 권리로 인식하고 있었다. 단독 점령을 못하는 것이 피차 아쉬웠고, 상대방에게 단독 점령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분할 점령이 된 것이었다. 조선은 두 나라가 서로 챙기고 싶어 하는 전리품의 하나였다해방 조선의 미소공위는 소련의 국제주의와 미국의 국가주의가 부딪히는 현장이었다. 소련 측은 제 2차 세계대전 중의 미소 협력체제가 미소공위에서 지켜지도록 애쓰는 반면 미국 측은 회담이 결렬되어도 괜찮다는 배짱으로 소련 측 양보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4 6일 남한 단독정부 추진설이 처음으로 언론에 나타났다…한국인의 장래를 결정하는 회담(미소공위)에 한국인이 주체로 참여하지 못한 것은 한국인을 대표하는 기구가 제도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소공위는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임시과도정부 수립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고, 아직 임시과도정부가 수립되지 않은 단계에서는 협의 상대라는 명목으로 한국인의 정당과 단체들을 회담에 참여시키기로 했다. 옵저버 자격의 참여일 것이다국가 간 회담으로 공동위원회를 만든다면 중국과 영국도 참여해야 한다. 그런데 미국과 소련은 점령을 통해 한국과 관련된 특수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고, 한국의 장래를 결정하는 데 주도하는 입장을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영국의 양해를 얻어 국가 간 회담이 아닌 두 점령군의 회담을 만들기로 한 것이었다. 전쟁 수행을 위해서라면 몰라도 조선임시정부 수립 같은 정치와 포괄된 목적을 위해서라면 군대 차원의 회담이라는 것이 어색하다. 회담의 목적과 회담의 주체가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미소공위가 갖는 근본과 구조의 약점이었다. 미소공위 구조의 또 하나의 약점은 다자 간 회담이 아니라 양자 간 회담이라는 사실에 있었다. 다자 간 회담이라면 이견이 일어나더라도 조정하는 방법을 다각화해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양자 간 회담에서 양측의 입장이 어긋나면 직접 절충하는 외길밖에 없다. 1차 미소공위가 두달 도 안되어 무기 정회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데는 이 약점이 작용했다.]

 

물론 당시의 혼란스러운 좌우 충돌 속에 비판과 새로운 지향점을 제시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사회혁명의 담당자는 무산계급일 수 밖에 없는가? 백남운은 삼일운동 이전 유산계급은 민족 혁명의 배후 세력과 물적 기초를 이루었지만, 삼일운동 이후 유산계급은 일제의 호부정책으로 인하여 특권을 갖게끔 운영되어, 소부분은 반일제 혁명을 내포하여 왔고 대부분은 일제와 결탁 또는 동맹을 결성하였다고 분석하였다. 그리하여 유산계급은 사회 혁명에 있어서는 프랑스의 부르주아지가 담당하였던 역사 혁명성을 갖지 못하고, 프랑스와는 달리 봉건 세력의 대표자인 지주와 시민의 대표자인 자본가가 대립하지 않고 동맹하는 까닭에 현상 유지의 보수화된 성격을 그 속성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느낀 바를 저자의 글을 빌어 정리해본다. [한국의 지식층은 한편으로 반공 독재정권의 억압을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사회의 비역사 성향을 받아왔다. 그렇게 수십 년을 지낸 결과, 미국 보다도 더 비역사 성형을 띤 사회가 되어버린 것 같다. 해방 공간을 탐색하는 해방일기 작업을 벌이면서 절실하게 느낀다. 반공 독재정권의 공식 관점이 가진 극심한 편향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에 대항하는 관점에서도 또 다른 편향성과 자주 마주치게 된다는 점에서 '좌우익의 극단파'만이 과거사를 맞는 열정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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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일기 2 - 해방을 주는 자와 해방을 얻는 자 해방일기 2
김기협 지음 / 너머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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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책에서는, 드디어 이승만이 본격 등장해서 정국을 서서히 휘어잡기 시작한다. 그리고 임시정부 사람들이 귀국해서 옛터에서 다시 자리잡으려 애를 쓴다. 이어서 신탁통치로 이야기는 흘러간다.


지난 이야기, 우리가 결정하기 어려운, 외부의 힘센 누군가의 결정에 따라 우리의 명줄이 왔다갔다 하는 시절에 일어난 옳지 못한 상황을 볼 때면, 왜 우리에게는 이렇게 고통만이 주어질까? 생각될때가 있다. 생각해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일 것이다. 다른 나라의 역사를 보더라도, 피와 아픔 없는 역사를 갖고 있는 나라가 있을까? 나의 아쉬움은, 그 아픔이 우리의 긴 역사의 가장 최근에 더 도드라지게 나온 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또 그 아쉬움의 다른 하나는, 식민 시대 토지 소유 체제를 그대로 이어간 미군정을 보면서 느낀 바이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인데 말이다. [미군정은 사유재산의 매매를 허용했는데, 완전한 허용이 아니라 군정의 허가를 거치게 했다. 허가의 기준도 명확히 세우지 않아 엄청난 이권이 군정청에 쌓이게 되었다. 일본인은 재산을 헐값에라도 처분하고 싶어했고, 조선인 재력가는 헐값에 사들이고 싶어했다. 그리고 허가권은 군정청에 있었다. 유착관계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승만이란 사람은 우리에게 누구일까? 누구 말처럼 과보다 공이 뛰어난 사람일까? 이 책에서 우리는 현대사 정치공학의 최고 달인인 이승만이 주변 상황을 정말 잘 이용하는 대단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이승만의 첫 묘수였다. 미군정은 임정이건 인공이건 어떤 조직에도 정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공식 방침이었다. 정말 어리석은 방침이었다임정과 인공 양쪽에서 존중받고 군정청의 신뢰를 받는 입장. 정말 큰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입장이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3자 사이의 신뢰감을 키워서 해피엔딩으로 끌고 가는 영웅 역할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다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이승만이 임정, 인공과 경쟁할 전국 조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독립촉성이라는 기능 목표를 내새우는 겸손한 자세였지만, 임정과 인공이 군정청과의 긴장 관계로 발전에 한계를 가진 반면 자신은 군정청의 도움을 받아 독촉의 위상을 키워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그는 갖고 있었다. 임정, 인공 어느 쪽에서도 존중은 받지만 실세를 못가진 그는 자신의 세력을 키울 근거지로 독촉을 만든 것이다…(외교위원회 내에 협찬부라는) 2의 임시정부를 만들려고 한 것이다. 요즘 한국 정치계에도 양파론이 유행하는데, 이승만의 음모와 책략이야 말로 까도 까도 끝이 없는 원조 앙파라 할 것이다이승만이 반공이나 반소의 개념을 애초부터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승만은 소련의 지원을 얻기 위해 1933년 모스크바를 방문한 일도 있고 1945 3 28일까지도 워싱턴 주재 소련대사에게 편지를 보내 과거 조러 우호관계를 들먹이며 조선의 독립을 도와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불과 몇 주일 후 얄타 밀약설을 들고 나온 것은 정략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국내의 극좌파가 극우파만큼 이승만에게 절박하게 매달릴 입장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박헌영 일파는 인공과 공산당을 발판으로 인민위원회, 전평, 전농 등 자생 진보 운동을 수렴할 수 있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승만과 결탁하더라도 그에게 큰 권력을 양보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친일파 처단의 위험에 직면해 있던 극우파는 이승만에게 모든 것을 내어줄 용의가 있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어줬고, 이승만은 그것을 받아먹은 것이다국제관리 형태의 신탁통치를 추구하는 미국무성 정책을 뒤집기 위해 맥아더 사령부, 군정청, 이승만, 한민당 세력이 협력해 온 사실을 정병준의 연구를 중심으로 소개해왔다. 정용욱의 조사를 통해 이 허위기사에도 같은 맥락에서 맥아더 사령부와 군정청, 그리고 한민당 세력이 작용한 것을 알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승만 역시 이 음모에 끼어 있었던 사실이 그 전날 밤의 방송 내용에 나타난다그리고 책속에 나오는 송진우, 나중에 김구 선생의 죽음과도 무언가 끈이 있어 보인다는 정황이 나온다.]


식민시대 부를 축적한, 한국의 근대 부르주아지(지나치게 정중한 표현일까?)는 식민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군정체제를 잘 이용한다. 이용한다기 보다는, 자본의 생리가 왜곡된 형태로 자라나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더 알맞아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옳지 못하게 축적한 자본이 한국의 근대화와 자본주의 역사의 주춧돌이 되면서, 한국에서 자본과 윤리와의 격차는 이미 그 시작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정치 측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경제 측면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한민당을 간판으로 한 재산가 집단은 미군정의 영향력을 두 방향으로 써먹었다. 하나는 친일파 처단의 압력을 면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일본인이 남긴 권력의 공백을 차지하는 것, 특히 재산권을 넘겨받는 것이었다. 적산 취득에 매달린 조선인은 친일파로 몰아붙이는 이야기를 송진우에게 하면서 그들이 송진우와 어떤 관계의 사람들인지 하지가 알고 있었을까?]


앞서 1권에서도 나왔지만, 당시 미군정청의 지배층에 있는 군인들의 역량은 게으르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게으름 보다는 함량 미달이 더 맞지 않나 싶다. 1800년대 말부터 진행한, 남아메리카를 쥐고 흔들었던 미국의 정책을 보면 미국 또한 식민지 경영국이고 그 경험을 민주주의로 승화시키지 않은, 유럽의 다른 식민지 경영국보다 더 낫다기보다는 그 밥에 그 나물인 격이다. 이러다보니 일반 민중의 생활은 일제보다 더 나아졌다고 단칼 휘두르듯 말할 수 있을까? [협력 또는 친일에 대한 관점으로, 일면의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민심이 극도로 민감했던 당시 상황에서 이 일면의 타당성에 지나치게 비중을 둔 감이 있다. 미군정의 자본주의 편향성과 친일문제에 무감각에 가까운 관용은 민족정기 확립과 사회주의 원리의 일부 적용을 원하는 일반 민심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것이었고, 그 반감을 극좌 세력이 이용하는 조건을 만들어주었다일본인이 나가고 빈자리를 조선사람으로 채운다. 이것이 당시 조선인의 민족주의에 부응하는 길이라고 미군정 당국자는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식민통치제제가 어떤 문제를 가진 것었는지 아무 인식이 없고, 그 지배자가 미국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다는 사실만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본인 대신 미국인이 지배하면ㅅ 높은 자리를 과거보다 많이 주기만 하면 조선인은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소작료율이 8할에 육박하게 되었다는 것은 쌀 생산원가 중 노동력의 비중이 2할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뜻이다. 전통시대에 5할을 넘던 노동력의 원가 비중이 이렇게 줄어든 데는 근대기술의 활용으로 인한 비료값, 水利 비용 등 다른 원가 요인의 증가도 약간의 몫을 했겟지만, 압도 원인은 노동력의 착취 강화에 있었다. 종래의 소작농은 미약하나마 농업경영의 주체로서 역할을 지키고 있었는데, 식민지 시대 농장체제에서는 단순한 착취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연합군 사령부(GHQ)가 일본 정부를 그대로 두고 지령으로 통제하는 간접통치 방식을 취한 반면 조선 점령군은 직접 군정을 시행했다점령의 가장 악질스러운 유산은 일본제국주의의 최대 희생자인 아시아인들의 존재가 패전한 일본 땅에서 철저히 무시되었다는 데 있다. 중국인, 조선인, 인도네시아인, 필리핀인은 종전 후 일본에서 제대로 된 역할도, 제대로 된 영향력도 갖지 못한 채 그저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다. 제국 육해군을 패퇴시키는 데 아시아인들이 수행한 역할은 태평양전쟁에서의 승리의 영광을 독차지한 미국의 그늘 아래 감추어져 버렸다. 아시아인들에게 돌아갈 영광이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처럼, 식민지화와 전쟁을 통해 그들에게 저질러진 갖가지 범죄는 더더욱 쉽사리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하지는 나중에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한 친구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임무의 하나는 합참과 국무부의 지시나 지원 없이 이 공산정부를 파괴하는 것이었소"…이남의 미군은 자기네 정치원리의 도입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군정 정책이 민심과 유리되거나 대치되는 상황이 좌익세력 성장의 온상이 되었다는 얘기를 흔히 하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투쟁을 추구하는 좌익세력의 득세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준 것이다. 군정 반발 때문에 좌익 지지기반이 저절로 늘어났기 때문에 좌익 내에서 건전한 정책발전의 노력보다 헤게모니 쟁탈의 양상이 더 두드러지게 된 것이다. 적대 공생관계의 전형이다임정이 민족의 정신을 대표하는 존재라면 인공은 민족의 육체를 대표하는 존재였다. 두 존재의 원만한 협력과 결합이 민족의 장래를 가장 잘 풀어나가는 길이었다. 1945 12 28, 해방 후 처음으로 민족의 의지를 적극 표명할 기회가 왔을 때 임정은 인공과 인민위원회를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반탁운동의 에너지를 이용해 지역 차원에서 인민위원회를 대치할 조직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인공과 전면 대결노선이었다커밍스의 책에는 미국의 정책혼선 상황이 세밀하게 살펴져 있다. 번스 국무장관이 대표하는 국무성의 국제주의 노선이 공식 위치를 지키고 있었지만 국가주의 노선이 이미 강력히 대두하고 있어서 맥아더와 하지의 일탈행위도 현실 근거를 상당히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커밍스는 본다.]


해방이 끝나고 우리 역사에 나오는 다양한 헛발질이 있다. 임정(김구) 또한, 돌아오고 난 후 굳이 그 대열에 끼어든다. 물론 한치앞도 못보는 우리같은 중생이라면, 먼 앞날을 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지 않는다. 그러나, 김구 선생님은 우리 민족이 큰 기대를 갖고 있던 분이고, 역량도 클 것이라 크게 믿어왔다. 그분도 사람인지라, 모든 앞날을 계산하기는 힘들었겠지만, 그리고 당장 선생과 임정도 살아서 이 땅에 다시 뿌리 박아야 했겠지만, 친일을 맞이하는 헛발질은 좀 크게 엇나가 보인다. [친일파 처단은 좌익의 구호가 되는데, 임정과 김구가 친일파 문제를 합리스러운 범위 안에서 엄격한 태도를 보였다면 좌익이 그 구호를 써먹을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김구는 친일파 문제를 너무 쉽게 풀어줌으로써 임정의 정치 자산을 잃어버리고 좌우대립의 극단화를 유발하고 말았다…임정의 정치 가치는 능동의 정책보다는 흔들리지 않는 지킴의 자세에 있었다. 그런데 이제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움직여야 할 상황에 왔다. 움직이면서도 지킴이로서 근본 가치를 최대한 지켜내는 것이 귀국 후 임정의 최대 과제가 되었다…12월 중순 한민당 간부들이 임정 요인을 국일관으로 초대한 자리에서 신익희가 친일파의 엄격한 숙청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매 장덕수가 "그러면 나는 숙처이 되겠군"하는 것을 신익희가 "설산 뿐이겠는가"맞받을 때 곁에 있던 송진우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보 해공, 국내에 발붙일 곳도 없이 된 임정을 누가 오게 하였기에 그런 큰 소리가 나오는 거요? 인공이 했을 거 같애? 해외에서 헛고생들 했군. 더구나 일반 국민에게 모두 떠받들도록 하는 것이 삼일 운동 이후 임정의 법통 관계지. 노형들 위해서인 줄 알고 있나? 이봐요, 중국에서 궁할 때 뭣들 해 먹고 살았는지 여기서는 모르고 있는 줄 알아? 국외에서는 배는 고팠을 테지만 마음의 고통은 적었을 것 아니야. 가만히 있기나 해. 하여간 환국했으면 모든 힘을 합해서 건국에 힘쓸 생각들이나 하도록 해요. 국내 숙청 문제 같은 것은 급할 것 없으니, 임정 내부에서 이러한 말들을 삼가도록 하는 것이 현명할 거요(김학준의 고하 송진우 평전)"…김구 선생이 무리한 반탁운동에 나선 데는 순수한 애국심만이 아니라 전국조직 수립 등 임정 법통 강화의 기회로 본 전략 판단도 작용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판단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본다. 전략가로서는 이승만이 김구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반탁운동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26년간 존재한 임정이미잠, 귀국시의 그 모습은 42 10월의 좌파 포용 이후의 것이었다. 좌우합장의 모델 노릇에 임정의 큰 가치가 있었다. 극한의 반탁운동 속에 좌우합작의 정신이 외면당하면서 임정의 깃발이 찢어졌다. 돈과 폭력의 위협으로부터 한민족을 지켜줄 가장 큰 도덕 권위의 주체가 사라지고 있었다.]


왼편은, 그 나름 홀로서기 위해 명분쌓기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나간다. 물론 박헌영이란 사람을 보는 시각, 그의 대표성, 식민 시절부터 계속되어 온 독립 운동의 하나로서의 사회주의 등이 혼합되어, 어느 하나의 정체성으로 굳히기에는 왼편이라는 표현이 메타 수준의 기표로 표현되는 한계가 있지만 말이다. [극좌파가 공화국(인민 공화국) 간판을 필요로 한 것은 임정과의 대결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교과서를 비롯한 큰 물줄기에 안나와서 몰랐지만 치열하게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과 그 모임은 많았다. [독립동맹은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 연안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1월에서 12월에 걸쳐 입국한, 중경 임정 다음으로 중요한 해외 독립운동 세력이었지만 역사가 짧아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독립동맹의 입국으로 해외 독립운동 주요 세력의 무대 입장이 끝났다.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대한민국 임시 정부, 만주 유격항쟁을 대표한 김일성 집단, 중국 공산당을 배경으로 최근까지 무장항쟁을 벌여온 독립동맹, 미국 교민사화를 이승만이 제대로 대표했는지는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더 효과높은 대표를 따로 보내지는 못했다이런 점에서 남한의 이승만, 한민당의 반탁운동과 조만식의 그것은 차이가 있었다그건 점에서 조만식은 일관되게 민족주의자의 길을 걸었으며, 그의 반탁도 그런 민족주의자로서의 연장선 위에 선 것이었다.]


이 책에는 두가지 큰 비교가 나온다. 하나는 우리 안의 역사의 대칭 거울로서 북한, 그리고 우리 밖의 베트남이다. [12 8~10일의 농민조합총연맹 창립대회에는 38선 통제로 인해 이북 지역 대표가 많이 참석하지 못했지만 농민조합운동은 이북에서 더 활발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쌀의 비중이 적은 지역 특성상 소작비율이 맞고 지주세력이 약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로 생각된다. 이북 지역 농민운동은 농민조합총연맹 이북지부를 발판으로 하여 이듬해 1 31일 북조선 농민동맹을 창설, 토지개혁의 주체로 활동하기 시작한다조선의 식민지근대화를 논하는 이들은 베트남의 식민지 근대화를 한번 살펴보기 바란다. 일본의 조선 지배가 당시 상황에서 얼마나 근대화를 억제한 방향이었는지 바로 실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식민지 상태의 근대화 근본이 얼마나 파괴력이 큰 현상인지도 더 잘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나는 일본 지배가 조선에 일으킨 변화는 근본이 질의 변화가 아닌 양의 변화라고 본다. 농지 소유의 과도한 집중은 일본 지배 이전부터 심각한 문제였다. 일본은 조선에 새로운 산업구조를 건설하지 않고 농업생산의 효율화에 경제정책을 집중했다. 그 결과 농지 소유의 집중이 더 심화되면서 대량의 유휴노동력이 발생했다. 일본은 그 유휴노동력을 만주와 일본 등지로 유출하는 조치만 취하면서 조선사회의 발전방향을 열어주지 않았다사회 혁명의 필요가 조선에도 있기는 했지만 베트남처럼 시급하고 절박하지는 않았다. 항일운동의 기초가 사회경제 문제보다 민족주의에 있었다는 점을 해외보다 국내의 운동이 미약했다는 사실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사회경제 문제가 심각했던 베트남에서는 국내의 저항운동이 훨씬 더 치열했다.]


최근 많이 나오는, 일제에 살던 사람은 많건 적건 친일이라는 논리를, 글쓴 이는 안재홍 선생님의 이야기로 받아친다. [며칠 동안 장맛비가 내렸다고 합시다. 35년 일제 지배를 받고 나서 친을을 했냐 안했냐 하는 문제는 빗방울 맞은 일이 이냥 없냐 따지는 것과 비슷해요. 비맞고 싶어서 발가벗고 뛰쳐나간 사람들은 얼마 안되고, 대개는 우산 쓰고 나갔다가 부득이 튀닌 빗방울묻은 정도에요. 방안에 꼼짝않고 틀어박혀 비를 철저히 피한 사람은 몇 안돼요.]


신탁통치를 둘러싼 소동을 보면, 정말 우리나라의 독립을 바라는 건 누구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누구일까? 이 생각이 몹시 흔들린다. [국제주의에 입각한 신탁통치안은 강자 독실알 막고 약자의 지분을 보장해 주는 것인데, 미국이 이것을 내놓을 때는 소련이 강자의 입장에 있을 때였다. 그런데 원자폭탄의 등장으로 미국이 최강자의 입장이 되었다. 그래서 조선의 군정 당국자들을 포함한 미국 극우파는 타협의 신탁통치안을 반대하고 실력대결을 원했다. 약자의 입자잉 된 소련은 신탁통치안의 관철을 통해 지분을 보장받고 싶었을 것이다반탁반대가 꼭 친닥이어야 하는가? 반탁운동은 극우파의 도발이었고, 반탁의 이념 자체보다 그 극단의 운동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소련의 요구가 3상 회담 지지였다면 반탁을 하면서도 지지할 길이 있었다. 7일의 4당 코뮤니케와 같은 길이었다. 상식 차원에서 찬탁으로 오해받을 극단의 반탁반대는 소련의 요구가 아니라 박헌영의 전술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극우파의 도발에 똑같이 극단 방식으로 맞받아침으로써 좌우대립 국면을 고착시키고 그 안에서 극좌파의 위상을 확보한 것이다. 극우와 극좌의 적대 공생관계를 추구하는 길이었다모스크바 결정은 민족주의자 누구라도 반기지 않을 수 없는 두가지 조치를 담은 것입니다. 하나가 임시정부 수립 촉진이고, 또 하나가 38선의 철폐입니다. 신탁통치는 당장의 일도 아니고 확정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신탁통치의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 모스크바 결정 전체를 반대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감정에 치우치고 불합리한 태도 아닐까요?]


물론 이때도 문제는 경제였다. [미군정의 잘못된 정책, 이승만의 야욕, 한민당의 반동성, 공산당의 독단 등 해방공간 역사의 흐름을 험한 길로 이끌어간 요인은 여러 가지 있다. 그러나 그런 요인의 파괴력은 엄청난 규모의 검은 돈에 비하면 오히려 약소한 것 아니었을까? 몇달 사이에 통화량의 70%가 늘어나고 그 3분의 1이 소수 반사회 집단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는 상황을 상상해보라. 돈이 그렇게 괴상한 형태로 깔려 있다면 아무리 의인이 많고 악이이 적은 사회라도 무너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해방 시절의 드라마나 영화에 자주 나오는, 폭력의 시절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우익 청년조직을 처음 조직한 것은 공장 경영자들이었다. 산업 현장에서 직원위원회와 노동조합에 맞서기 위해 룸펜 청년을 모아 폭력조직을 만들었고, 한민당에서 그 이용가치에 착안해 정치폭력에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우익 조직이 풍부한 자금력을 발판으로 자라나는 반작용으로 원래는 정치색이 약하던 청년 단체들이 연대와 통합의 추세를 일으켰고, 이들의 조직화와 의식화에 왼쪽이 나서면서 왼쪽의 색깔이 차츰 강해지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 있다면 무엇일까? 글쓴 이의 말에 찬성하면서, 왜 우리는 비슷한 실수를 지금까지도 계속 하는지 안타까운 마음이 사그러들지 않는다. 심지어 2016 10월인 지금까지도 말이다. [해방공간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 그 어리석음을 모두 고쳐 완벽한 이상향을 만들 욕심이 내게는 없다. 내가 중시하는 것은 보통사람들을 어리석은 행동으로 몰아간 혼란한 상황을 빚어낸 사람들이다. 그들은 대개 보통 넘게 어리석은 사람들이었고, 더러 사악한 사람들도 있었다. 사악함과 그에 가까운 심한 어리석음, 그것을 집중 반성해서 지금의 세상에서 그와 같은 것을 억누를 수 있게 되기를 나는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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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일기 1 -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인가 해방일기 1
김기협 지음 / 너머북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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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8 15일 그날을 해방이라고 하나? 광복이라고 하나? 아직 이 논쟁도 끝나지 않았다. 이 책의 소제목처럼, 해방은 도둑처럼 왔던 것이다. 일제에 넘어간 것도, 거기서 벗어난 것도 모두 우리의 의지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요즘 건국절이란 말이 나오고 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지었다면 건국절에 대한 논란은 필요 없겠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가 얻은 자유가, 우리의 피와 땀에서 나온게 아니었기에, 근대 차원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역사의 아킬레스 건이 되어 버렸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근현대사 중에서 1940년대, 그러니까 식민 통치의 마지막 시기에 일제의 극악무도함이나 그때 한국 사람들의 생각, 갑자기 온 해방(또는 광복)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군정기는 어떠하였는지 궁금해왔다. 이때 마침, 김기협 선생님의 <해방 일기>를 접하게 되었다. 프레시안으로 기억하는데, 전에 연재 기사형태로 이 내용을 본 기억이 난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이 책을 우연히 보고는 냉큼 집어 들었다. 10권의 책은, 쓴 사람의 노고가 엄청나게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쉽지 않은 긴 여행이다. 하지만 한걸음 들여놓았기에 천천히 가보려고 한다. 이 정도를 이 책을 보고 느낀 점의 앞 부분으로 정리한다.

 

시작은 45 8 1일이다. 해방에 앞서 주축국을 포함한 세계의 움직임과 일본의 모습으로 이 책은 시작한다. 원자폭탄이 터졌고, 마지막 남은 파시스트 전쟁기계 일본은 항복을 준비했고, 항복했다. 이에, 한국의 총독부는 정무총감(총독이 아닌!)을 시켜 여운영 선생을 만나서 치안 유지 협조를 요청한다. 여운현 선생은 안재홍 선생 등과 함께 건준을 만들고, 그간 독립운동을 해왔던 왼쪽의 사람들도 움직인다. 여기서 글쓴이는 그때의 왼쪽이 갖는 정의를 지금과는 달리 하고 있다. [일제에 반대하여 형성된 조선의 좌익은 민족주의를 널리 공유했다. 공산당 조직활동을 해온 볼셰비키 중에도 투철한 민족주의자가 많이 있었다.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관계, 자본주의와 민족주의의 관계와 함께 공산주의와 민족주의의 관계도 해방 후 조선의 진로를 결정하는 하나의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일제 하 독립 운동을 볼 때, 주목할 것 중 하나가 종교, 그 중에서도 기독교다. [개신교가 한국에서 융성하게 된 데는 선교 초기의 식민지 상황이 큰 몫을 했다. 이민족의 폭압스러운 통치 현실에 불만을 가진 식민지인은 기독교에서 위안을 찾기도 하고 희망을 찾기도 했다. 기독교인의 정체성으로 조선인의 정체성을 대신함으로써 피지배민족의 질곡으로부터 도피하기도 하고, 서양인들과의 유대를 강화하여 그들의 도움으로 일본의 폭압이 제거되기를 바라기도 했다. 국가의 역할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종교로부터 그 역할을 대신 기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좌익, 기독교가 나오면 그 다음은 우익으로 넘어갈 차례다. 아주 초기 형태의 근대 부르조아지가 형성되고 있었다. 그 부르조아지의 생각은, 자본주의 초기 다른 지역의 부르조아지와 별 차이가 없었다. [20년대 이후엔 지주층이 산업자본으로 진출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그들은 민족자본의 간판을 이용했다. 일본제 경쟁상품보다 여러모로 불리한 조건을 만회하고 조선 내에서 독점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민족정체성은 사업을 위한 방편일 뿐이었다.]

 

이제 역사의 대칭이라는 게임을 해보자. 같은 때 북쪽 땅은 어떻게 일제벗어나기를 하고 있었을까? 분명 남쪽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두 군대의 성격은 어떻게 달랐을까? 북한에서 김일성이란? [소련의 점령방침이 미국과 다른 점 하나가 바로 나타났다. 소련군 치스차코프 사령관은 함경남도의 행정권을 접수하자 그 즉시 조선민족 함경남도 집행위원회에 넘겨줬다. 함흥에서는 16일 함흥형무소에서 석방된 정치범을 중심으로 함경남도 공산주의자협의회가 결성되고, 또 건준 함경남도 지부도 결성되어 있었다. 소련군이 진주하자 두 단체가 합쳐 조선민족 함경남도 집행위원회를 만들어 도행정권을 넘겨받은 것이다소련과 미국의 군대 성격의 차이도 작용했을 것이다. 소련 군대는 정치장교의 역할이 컸다. 초기에는 정치위원이 중대급 이상 각 부대에서 지휘관과 대등한 위치를 가진 시기도 있었다. 중국의 인민해방군 각급 부대에서도 정치위원은 지휘관에 버금가는 위치에서 큰 역할을 맡는다. 일반장교의 정치교육도 서방의 군대보다 훨씬 비중이 크다. 소련 장군들 중에는 하지처럼 순진한 사람을 찾기 어려웠을 것 같다소련군 점령하의 북한에서 김일성은 여러가지 리더쉽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항일투쟁 경력으로 민족주의자의 존중을 받을 수 있었던 점, 소련극동군에 4년간 편성되어 있던 경력으로 점령군 간부들의 신뢰를 받은 점, 국내 무장투쟁이 없던 시절 보천보사건 등으로 큰 명성을 쌓아놓은 점, 그의 손발과 두뇌가 되어줄 정예집단을 보유한 점12월 테제의 뒤를 이은 8월 테제엇 계급투쟁을 강조했기 때문에 남한 공산주의 운동은 지식층 좌익 속에 확산되기 보다 현장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반면 북한에서는 잠재의 좌익이 공산주의운동에 흡수되었다. 미군정의 박해라는 악조건도 물론 작용했겠지만, 박헌영 일파의 편협한 극좌노선도 큰 요인이었을 것이다해방 후 각 지역에서 주민들이 만든 인민위원회가 각 도인민위원회로 묶이고 10 8일부터 10일까지 110명의 대표가 참석한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에서 체제의 표준화를 결정했다. 그 시점까지 각 도 인민위원회는 서울의 인민공화국 중앙에 귀속하는 것으로 보고 북한 지역을 통합하는 조직을 만들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10 10일의 아놀드 망언 이후 미군정의 인공 부정 방침이 확실해짐에따라 잠정 통합 조직으로 5도 행정국을 만든 것이다.]

 

최근 건국절 논란 속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근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지닌 최초이자 정식의 유일한 정부로 평가하는 의견이 많다. 그 의견을 부정하는 건 아니지만, 해방 이후 헤게모니를 쥐지 못함에 있어서는 그분들도 그 문제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이 부분이 아쉽고, 향후에도 역사의 논쟁에서 계속 씹힐만한, 불투명하고 씁쓸한 뒷맛을 줄 법하다. [45 8 15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연합국들에게 해방된 한국의 관리를 맡길 만큼 믿음직한 존재로 인식되지 못했다. 일본과 전쟁에서 뚜렷한 역할도 없었고, 국내에 조직된 지지세력도 없었다. 임시 정부를 지지한 유일한 연합국인 중국은 다른 연합국의 존중을 받지 못했고, 중국마저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하지 않고 있었다지금의 시점에서 임시정부를 바라보는 데도 임시정부와 김구의 절대화와 신화화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표준 교육과 교양은 매우 경직되어 있었다. 임시정부와 김구의 문제점과 한계를 투철하게 인식할 때 그 가치에 대한 올바른 음미도 가능할 것이다광복군의 작전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임정은 보다 당당하게 귀국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 내의 일본군 무장해제 권한까지 바라보았을지 모른다. 김구 자신이 생각해도 임정은 개선장군 행세를 할 실적이 모자랐다. 그래서 일본 항복 후의 상황에서도 임정의 실력을 키우는 방법을 백방으로 모색했다. 그 하나가 일본군 포로들 중 조선인 장병을 편입시키는 광복군 확장 시도였다김규식, 김원봉, 장건상 같은 이들은 국무회의 석상에서의 발언을 통해 "38선 이남에서 미군정이 실시되는 현실에서 더구나 국내외 각 정파가 서로 자기 목소리를 외치는 현실 아래 중경 임시정부가 전민족의 의사를 집약, 대변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어느 정도 합리성에 기반한 논리를 폈다식민통치의 폐단은 그 통치가 지속되는 기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모든 면에서 독립 구조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 식민통치의 속성이고, 그 효과는 통치자의 철수와 함께 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해방 시점의 대다수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어떤 노력이 참으로 필요한 것인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것도 식민통치가 남긴 구조화된 문제의 일부였다.]

 

8 15일 이후 일본은 분명 패전국이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마치 연말 대규모 인사이동으로 새로운 자리에 옮겨갈 준비를 하는 정도랄까? 적어도 미국 점령군은 한국의 일본군을 패전국의 잔당 정도로 취급하지 않고, 무지 몽매한 원주민을 다스려온, 그래서 그 경험을 잘 인계해줄 대상으로 보았다. 그리고 총독부 세력은 이를 분명 알고 있었다. [총독부가 건준에게 협력만을 요구하고 상응한 권력이양을 거부한 데 있다총독부는 여운형에게 협조를 부탁하면서도 실제로는 건준의 협조를 요긴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다. 맥아더는 항복선언 두 주일 후에야 일본에 상륙했지만, 그 두 주일동안 일본 정부와 맥아더 사령부 사이에 온갖 의논이 오고갔을 것이다. 맥아더 취향의 통치노선도 드러나고 새로운 정보의 일부는 조선 총독부에도 계곡 전해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에 따라 건준의 협력에 대한 총독부의 수요는 계속 줄어들었을 것이다.]

 

정치는 생물이다. 그리고 정치인은 자기 앞의 상황에서 스스로가 갖고 있는 대의 명분을 최적화하려 한다. 그리고 해방 이후와 같은 혼란기때는 각자 정치인의 이런 동상이몽은 그리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지기 쉬울 것이다. [그런데 여운형은 임정의 의미를 제한해서 보는 견해를 발표하고 있었다. 임정도 여러 독립운동 세력의 하나일 뿐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임정의 의미를 제한해서 보는 것은 좌익의 일반화된 관점이었다. 좌익 인사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 밀착되어 있던 임정이 우파에 치우쳤다고 보았다. 8 30일 임정 요인들이 중경 미대사관에 가서 했다는 말을 보면 타당성이 있는 관점이다. 일부 공산주의자들은 자기네 몫을 키우기 임정을 깎아내리고 싶은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여운형이 임정을 부정하거나 무시한 것은 결코 아니다. 문자 그대로 경시한 것이다. 임정의 역량 만으로 상황을 감당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건준을 키우려 애쓴 것이다. 그리고 건국동맹을 내세운 것이다그러나 회의스럽게 볼 점이 많다. 무엇보다 국내 근거가 거의 없던 임정의 약점을 안성맞춤으로 보완할 수 있는 국내의 대중운동이라는 점에서, 건국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만들어낼 동기가 있었던 존재다.]

 

김기협 선생님의 이책의 관점을 보면 하나는 중도이고, 하나는 (현실은 땅에 발을 디뎠으나) 꿈꾸는 이상이 분명히 있다는 점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꿈꾸는 투철한 공산주의자는 민족주의에 가치를 두지 않고 분단을 꺼려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익을 표방하던 해방 당시의 가진 자들 대부분은 민족이 갈라지고 식민지 시대의 악질 경찰이 사회를 다시 주름잡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기득권의 상당 부분을 양보할 용의가 있었다보통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좋은 정치가 아닙니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자기 가족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약간 찜찜한 채로 시키는 짓 한 것을 너무 엄하게 다스릴 필요 없습니다. 지나친 욕심을 가지고 시키지도 않은 것을 차장 저지른 놈들만 잡아내도 혼낼 놈들 얼마든지 많습니다해방 당시 한국 사회에는 사회주의 정책을 필요로 하는 측면이 많이 있었다. 그렇다 해서 자본주의 측면을 일체 배제하는 철저한 공산주의 체제를 꼭 필요로 하고 있던 건 아니었다. 한국의 중도 정치인들은 양 측면을 조화시킬 방책을 내놓고 있었다. 그런데 일각에서 철저한 자본주의 체제를 고집하는 극우파가 나타났다. 타협 아닌 대결의 양상으로 사태를 끌고 가는 데 미군정의 편의주의 태도를 이용한 것이다...국민당이 제일 먼저 한 일은 38선 문제의 제기였던 것이다지양회통은 한 사회의 문화 성장 원리일 뿐 아니라 한 생명체의 생장원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변화를 겪되 원래의 내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고 변증법/유기화된 변화과정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예전에 동양인들이 말하던 동도서기나 중체서용 화환양재가 모두 이 원리를 가리키는 것인데, 이 원리의 구체화된 성격을 더 분명히 보여주는 말로 지양회통을 쓴 것입니다.]

 

왼쪽과 오른쪽은 이제 서서히 갈라지고 자기의 색을 드러낸다.[보다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추구하는 진보의 노력도 현실을 무시하는 오만에 빠진다면 사람사는 세상의 기반 조건을 악화시키는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 약자옹호라는 소박한 수준에서라도 사회주의 원리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힘을 합쳐 극소수의 수구파를 배제하는 것이 당시 현실의 필요였다. 그런데 좌파 일각의 헤게모니 추구가 중도파를 우익으로 내몰거나 무력화시켰다. 비극의 역사전개 발판인 적대 공생의 길이 열린 것이다한민당은 우익정당이었지만 그 5대 강령 중에 3) 근로대중의 복리 증진을 기함과 8대 정책 중에 4) 교육과 보건의 기회 균등 6) 주요 산업의 국영 또는 통제 관리 7) 토지제도의 합리스러운 재편성 등 진보스러운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 정도는 당시의 우익인사들도 사회의 당연한 진로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9 8일 성명서는 결성단계의 한민장에 조직력을 가진 주류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자금력과 정보력도 가진 세력이었다. 여기에 참여한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은 이념의 힘을 가지고 현실의 힘을 설복해 새 국가 건설의 길에 참여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아일보계를 주축으로 하는 한민당 주류는 정치공학에 의존하며 정치철학을 물리쳤다. 그렇게 해서 현실 정치는 조직과 돈에 의해 결정된다는 대한민국 정치의 원리를 세웠다.]

 

그리고 우리 현대사의 비극의 한 축에는 미군정과 그들의 왜곡된 시각이 있다. [하지의 눈에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군인과 외교관, 두 종류인 모양이다. 예와 같은 기만정책을 안쓰겠다고 한 데서 그것이 외교관의 방식이라는 생각을 간접으로 드러낸 것이다. 미군정이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을 많이 일으키게 되는 것은 군인과 외교관 사이에 정치가의 입장을 설정할 줄 몰랐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하지 사령부는 진주 전부터 조선 주둔 일본군 17방면군과 긴미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여기서 얻은 왜곡된 정보가 점령 직후의 어리석은 정책에 많이 작용했다고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보고 있다)…남한에서 미군은 점령군을 표방했다. 일본과 독일 진주에서와 같은 자세였다. 주민을 적대시하고 협조를 기대하지 않은 자세였다한민당 주류 세력이 폭력에 의지해 극우의 길로 흘러가는 것을 군정이 방치 내지 방조한 것이 한국의 정치수준을 타락시키고 중도파의 길을 봉쇄한 기반조건이었다. 좌익의 폭력은 군정을 등에 업은 극우파의 폭력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적어도 미군정이 질서유지의 책임을 지고 있던 남한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을 수 없다거의 한민당 인사만으로 구성된 고문단을 군정청이 위촉하는 것은 10 5일의 일이다. 그러나 한민당 인사들과의 집중 접촉은 진주 시점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아무리 확인된 근거가 없더라도 9 22일 군정청의 토지소유권 무변동 발표는 한민당 인사들의 로비에 의한 것의 기반이었던 만큼, 겉으로는 토지제도의 합리성에 기반한 재편성을 표방하면서도 속으로는 변동이 없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추측일 뿐이다. 그러나 45 9월 말 시점에서 조선 내 통화량의 40%가 최근 달포 동안 찍은 새 돈이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고, 그 대부분이 권력의 성격을 지닌 뭉칫돈으로 존재했으리라는 것은 상당히 타당한 추측이다. 그리고 당시 한민당 주류 세력이 막강한 자금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그런데 닷새 후 평안남도 인민위원회는 소작료를 30%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대한민국은 식민지체제로부터 많은 달갑지 않은 유산을 물려받았는데, 부패 한가지는 식민지 체제가 아니라 미군정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친일에서 친미로 옮겨온 일부 세력만을 자기네 편으로 받아들이고 일반민중을 불신의 새앙으로 삼은 것은 일본의 식민 통치와 똑같은 자세였다. 이런 자세에서는 남한에 미국의 절대 영향을 받는 국가를 우선 세운 다음 군사력으로 북한을 통합하자는 내용으로 짐작되는 이승만의 제안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북한에서처럼 점령군이 뒷받침해 주지 않는데도 남한 거의 전역에 군단위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고, 그 대부분이 얼마 동안이라도 상당 수준의 경찰과 행정 기능을 수행하였다.]

 

이제 우리나라 근대에 있어 논란의 한가운데 있는 이승만은 그 시절 어떻게 행동했을까? [그가 임시정부 대통령의 직함을 걸고 미국의 신탁통치를 청원한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힘들여 독립운동을 벌일 생각이 없었다. 적당히 처신해서 직함을 따내고, 그 직함을 이용해 하나의 예속상태를 자기에게 유리한 다른 예속상태로 바꾸는 것이 그의 사업이었다. 해방 후까지도 그는 진정한 독립이 아니라 자기에게 유리한 예속상태를 계속 찾고 있었다이승만은 미국이 일본과 평화로운 관계를 가지고 있는 동안 일본을 적대하지 않았다. 중일전쟁이 터진 후 1939년 워싱턴으로 건너가면서부터 일본을 적대하기 시작했다. 그때의 그는 친미파 한국인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인이었으며, 직업은 지한파 정치브로커였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다.

1) 우리는 일제라는 거악을 우리 힘으로 끝내지 못하고 다른 국가가 점령을 이어 받아 지속하는걸 막지 못했다. 2) 토지 개혁등 당연히 있어야 할 구체제의 극복을 하지 못하고, 구권력의 기생 세력이나 도덕성이 결여된 층이 그 자산을 삼켜버렸다. 3) 잠시 갈라지더라도 그 나눠짐을 명확히 반대하고 하나로 돌아가기에 우리 안에 이해관계가 심하게 갈렸다. 4) 중도의 길은 그 목적하는 바가, 치고 나가기 보다는 양 극단의 명분 사이에 있어서 역사에서 좋게 자리매김하기가 어렵다. 5) 예나 지금이나 사람사는 세상은 일관됨보다는 변화와 변절이, 원칙과 정절보다는 세상을 따르는 사람이 훨씬 많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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