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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특강
이여영 지음 / 맛있는책방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TV속 영화 비평 프로그램에서 제일 먼저 접하고 매력을 느꼈던 사람이 어느날 막걸리 전문점을 운영하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변신하기 앞서 이여영씨가 신문에 기고한 몇개의 글을 읽어보고, 그리고 이 사람의 살아온 길(서울대, 모델, 유명 신문 기자와 프리랜서 기자)을 보면서 더 많은 매력을 느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그리고 말투와 입모양도 매우 독특하다고 생각한 이여영이란 사람의 책을 우연찮게 마주쳤고, 가벼운 분량이라서 재빠르게 읽었다.

사년 전에 어느 동네의 월향에 갔다. (책을 보니 그때가 매우 힘든 때임을 이해했다.) 술집 안에는 직원을 바라보고 적은 글이 있었다. 손님도 볼 수 있는 공간에 이런 내용의 글을 적는게 조금 특이해보였으나, 이여영이란 사람이면 충분히 그럴만하다고 스스로 당위를 주었다.

책속에는, 사업이 결코 쉽지 않고 그 어려움이란 매달 정확한 날짜에 돈을 받는 나같은 사람이 회사에서 경험하는 일과는 결이 매우 다르다는것, 그리고 치열함의 강도 또한 매우 다름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기 이름으로 무엇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세상을 보는 자기만의 눈, 자기 조직을 꾸리는 강한 원칙이 있고 그 눈과 원칙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해석하는 만능열쇠를 갖고 있는 듯한 착각(?)이 매우 강해 보인다는 점이다. 글쓴이 또한 그 범주 안에 머무르게 되어 버린듯한 느낌,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머리속에서 맴돈다. 물론, 만약 글쓴이가 이 글을 본다면, 안타까움과 아쉬움의 대상이 나로 바뀌겠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공주 또는 여왕을 떠올리게 하는 생각글들은 내게 글쓴이의 매력에 한껏 더 젖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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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본은 일하는 자보다 더 많이 버는가 - 피케티와 경제 전문가 9명이 말하는 불평등 그리고 한국 경제
류이근 외 지음 / 시대의창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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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차별은 오직 공익에 바탕을 둘 때만 가능하다 - 프랑스 혁명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1.


프랑스 혁명은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본 혁명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졌고, 자유 평등 박애의 세가지 정신은 똑같이는 아니지만, 근대 이후 국가 그리고 시민이라는 주체의 생각과 활동에 골고루 영향을 주었다. 그 정신이 과연 경제나 정치에서 지금까지도 그 뜻을 유지하면서 나아가고 있는가? 점점 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가고 있고, 피케티는 지금까지의 경제를 보면서 불평등이 더 심화되고 있음을 분석하여 그 유명한 21세기 자본이라는 책으로 펼쳐 내었다. 피케티의 책은 나오자마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 흐름은 한국까지 건너왔다. 그리고, 반피케티 진영의 비판이 곧바로 생겨났고, 그 비판이란 게 건전-생산이란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그와 멀리 떨어진 비판으로 뻗어나가서 한국의 경제학자를 바라보는 눈은 조금 더 비관으로 다져지게끔 되었다.

피케티의 대단함은, 두개의 공식으로 300년이 넘는 자본주의 역사를 해석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일종의 메타 법칙으로 현상을 설명했다는 점에서, 피케티는 이미 거인의 어깨에는 올라갔다고 평가된다. 이 와중에 피케티의 책을 뜯어보고 뜻깊은 의견을 내는 국내 경제학자 9명을 뽑아서 그 생각들을 이 책에 모아놓았다.

 

21세기 자본과 경제학 이준구
이 분의 미시경제학 책은, 25년전 대학교 다닐때 바이블로 불렸고, 나 또한 이분의 책으로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국내 경제학과 교수님들이 갖는 보수성이 조금은 덜 해보이고, 글을 매우 깔끔하게 쓰시는 분으로 알고 있고, 이런 분이 피케티의 생각을 말씀해주셔서 반가운 마음이 크게 다가왔다. […자본주의 체제는 왜 외부 제약이 없는 한 끊임없이 불평등화의 길을 달릴 수 밖에 없는 것일까? 피케티는 다음과 같은 두 자본주의 법칙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선 자본주의의 제1 기본법칙은 다음과 같다. α = r X β (α는 국민소득 가운데 자본소득 비율, r은 자본수익율, β는 자본/소득 비율) 이 법칙은 언제 어디서나 성립하는 보편 성격을 갖는데, 국민소득 가운데 자본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은 자본수익률과 자본/소득 비율의 곱과 같다는 내용이다. 자본주의의 제2법칙은 다음과 같다. β = s/g (s는 저축율, g는 경제성장율), 이 법칙 역시 보편 성격을 갖는 법칙으로서, 한 경제의 자본/소득 비율은 저축율을 경제성장율로 나눈 값과 같다는 내용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피케티

피케티의 육성으로 자신의 이론과 생각을 설명한다. 한국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신자유주의로 불리는 영미의 경제 운영 방식이 한국으로 스며들어와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식으로 던저졌고, 당시 정권은 이를 덥썩 물고 우리에게는 받아들일 것을 유혹하거나 강요했다. [IMF의 권고로 외환위기 이후 채택된 개혁 조처의 일부는 한국에서 소득불평등의 증가에 곧바로 영향을 줬어요. 특히 금융 규제 완화의 탓이 큽니다. 금융제도 완화는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의 불평등 확대를 부채질했습니다. 금융규제 완화 탓에 더욱더 복잡한 금융상품이 등장했고, 소수의 금융자산가는 더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렇다고 IMF탓만 해서는 안됩니다. 한국의 정책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IMF를 비난하는 건 너무 단순합니다. 외환위기 이전부터 한국 정부도 대규모 감세 정책을 펴왔잖아요가장 중요한 해결책 둘을 꼽으라면 교육과 조세체계의 누진성 강화입니다.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하는 식의 대체관계가 아니라, 이 둘을 동시에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08년 세계금융위기와 아시아 외환위기를 겪은 우리는 자본주의를 공익 아래 두는 민주주의 장치를 다시 생각해야만 합니다. 민주주의가 사유재산과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지 않고, 사유재산과 시장의 힘이 민주주의의 노예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은 이런 논쟁을 다시 해야할 때입니다. 자본주의의 역사/비교 관점을 보여주려 노력한 제 책이 이러한 쟁점을 다시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토마 피케티에게 묻다 - 피케티 이강국

우리나라에서 피케티를 이해하는 가장 쉬운, 그러나 잘못된 방법은 좌파, 맑시스트 경제학자라는 프레임에 가두는 것이다. 일제 이후 형성된 이 주홍글씨는, 이미 우리 몸속에 하나의 기제로 박혀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좌우로 나누기에는 경제학자의 생각이 다양하고 그 부류를 부르는 이름과 기준도 꽤 많이 있다. 그리고 피케티는 분명 맑스와는 거리를 두고 있고 그 후계자로 이름짓기에는 자본주의 체제의 지속성을 가져가고 싶어하는 쪽이 더 맞다고 말하고 싶다.

다른 또하나는,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유럽 등에서 얘기되고 있는 법의 유효성을 더 들여다봐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법 바깥에 있는, 법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법을 만들고 이를 강제하는 지금까지의 구도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 그 한계가 바로 얼마전 한국에 나타난, 말도 안되는 정치 농단의 현상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법이 신뢰를 잃었을때, 과연 그 법의 테두리 속에서 정의를 찾기 위한 시도가 얼마나 약발이 먹힐까? [이강국) 불평등 동학이 필연이라는 말은 아닌건가요? 피케티) 경제 동학에서 불가피한 것은 없습니다. 경제사는 우리가 선택한 제도와 정책의 역사입니다피케티) 저를 혼동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성장해야 한다는 데 찬성합니다. 교육 투자는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방법은 인구가 줄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러려면 성 평등을 증진시켜야 합니다. 또 경력 단절 없이 남녀가 자녀를 키울 수 있도록 더 나은 제도를 만들고 보육 지원을 늘려야 합니다. 생산성 향상 만큼 인구도 증가할 거라고 믿습니다. 제로 성장을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자본수익률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부를 향한 누진세 부과를 바랍니다. 그래야 새로운 사람이 부를 쌓고 부의 이동성도 더 커질 수 있습니다. 부의 집중을 억제하기 위해서 매우 큰 부와 관련된 수익률이 줄어들기를 원하는 겁니다이강국) 하지만 한국 등 동아시아 모델의 패러다임이 1997년 이후 깨진 것 같습니다피케티) 인구 증가율의 감소와 민주주의의 힘이 불평등 동학에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중국과 한국에서 인구 증가율의 감소는 상속 재산이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해진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때문에 재산 과세는 상속할 때는 물론이고, 그 이전에도 무척 중요해집니다. 법에 기초한 부와 재산 관련 현대 조세제도를 발전시키는 게 중국을 포함한 모둔 아시아 국가에 앞으로 중요할 거라고 봅니다.]

 

피케티와 분배 정의 이정우

이정우 교수는, 내가 아는 경제학자 중에서 가장 분배를 강조하는 사람이다. 참여 정부 때 정책 실장으로 일했고, 그때 그 경력이 내 귀에 꽤 큰 울림으로 남아있다.[ 피케티의 핵심 개념이 자본입니다. 두 번째 핵심개념은 불평등일 겁니다. 자본으로 인한 불평등을 말하는거죠. 자본의 집중과 거기서 발생하는 불로소득, 이것이 가져오는 불평등이 피케티 책의 키워드입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21세기 자본을 읽기 전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떠올렸어요. 우리나라 말로 옮길 때 책 제목을 21세기 자본론으로 해야 하는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읽다 보니 그러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불평등과 불공평은 좀 다른 의미입니다. 불평등은 객관 사실을 말하고, 후자는 주관의 가치판단이 들어있습니다. 피케티는 전자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후자를 이야기하려면 가치판단을 해야 하는데, 사람마다 달라 설득하기가 쉽지 않죠. 피케티는 상위 집단의 소득 몫, 또는 자본에 돌아가는 소득 몫이 아주 커지는 것은 명백히 불평등하고 암묵상 불공평하다고 가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엄밀한 과학의 기준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접근은 충분히 상식에 맞는 가치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상위 10%의 소득 비율이 50%로 올라갔을 때는 위험하고, 33% 수준일 때 제일 양호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위 10%가 전체 소득에서 가져가는 몫이 2분의 1에 이르면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 대공황을 일으키고, 3분의 1일 때 황금시대를 연다고 할 수 있겠네요맬서스의 인구를 빼고 거기에 자본을 대입하면 피케티가 됩니다. 미래를 꽤나 우울하게 내다보는 게 똑같아요. 피케티에게 상당히 맬서스와 같은 게 있습니다. 물론 쿠즈네츠 같은 면도 잇죠. 피케티는 여러 선각자의 종합판이자 후예입니다…피케티가 시장 만능주의자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제도학파에 가깝습니다. 사회 국가론은 아주 좋은 접근법입니다. 내용을 보면 복지국가 옹호론입니다. 그런데 막상 정책에 가서는 세금 위주로 다뤘습니다. 소득세 누진성 강화와 자본세 도입 정도 밖에 없어요. 그래서 최저 임금제나 기본 소득 등 노동이나 복지, 사회 정책에 관한 논의가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케티가 나중에 보충해야 할 점입니다.]

 

노동소득과 경제 성장: 피케티가 말한 것, 말하지 않은 것 이상헌

국제노동기구에 근무하는 경제학자라면 제도권 경제학자보다는 노동, 분배에 좀더 관심이 있고 학문과 연구 측면에서도 경제학이 말하는 효율의 굴레에 한정짓지 않을 수 있는 처지가 조금 부럽다. 이 박사님에 따르면 노동소득은 선진국조차 상승이 드물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시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경제 생산성이 증가해도 그 열매는 자본에서 따먹고 마는 모양새가 지금까지 이어왔고, 한때 자주 말해지던 낙수효과란 한마디로 멍멍이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라는 말은 이상헌 박사를 포함한 노동 중시 경제학자의 생각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표현한 것이다. […임금의 일반 법칙이란 게 만일 있다면, 그건 아마도 노동생산성이 느는 만큼 임금도 늘어야 한다는 겁니다. 지극히 상식스러운 말입니다. 임금이란 노동자가 생산에 기여한 몫의 보상입니다. 그런데, 그 법칙이 깨지고 임금이 노동생산성을 따라가지 못하는 일이 빈번해졌습니다. 일시 현상도 아니고, 몇 국가에 한정된 문제도 아닙니다. 구조와 세계의 문제죠. 물론 우려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제학자들은 이른바 낙수효과란 용어를 만들어서, 언젠가 경제성장의 혜택이 모두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그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생긴 일이라곤, 1930년대 세계 대공황 이래 가장 심각한 세계 경제 위기였습니다. 경제학은 예측의 과학이라고도 하지만, 이를 예측한 경제학자는 드물었죠지금 와서 보니까 노동소득 몫은 꽤 오랫동안 하락세였습니다. 이런 추세는 선진국의 경우 적어도 30년 가까이 진행돼어 왔습니다. 또 흥미로운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80년대 이전까지는 대체로 증가세였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추적하다 보니, 피케티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노동 소득 몫은 역사에 발맞춰 변화해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결국 자본주의 시기를 통틀어 잠시 동안 보였던 노동소득 몫의 안정성은 일시의 역사 현상이었습니다. 경제학계에서는 이를 법칙으로 본, 돌이켜보면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습니다. 약간의 기적이라고 했던 케인즈의 직관이 옳았던 셈입니다궁극으로 볼때 세계화에 따른 노동자의 협상력 약화를 중시해야 한다고 봅니다. 세계화는 한때 큰 흐름이자 바람이었지만, 동시에 세계화 자체를 절대선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계화는 경제의 개선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방식이었는데, 어느 순간 주객이 전도돼 그 자체가 목표가 되었습니다. 세계화를 하겠다고 각종 정책과 제도를 서로 경쟁하듯 바꿨어요. 국제 자본이 더 좋아할만한 방식, 수출 기업에 더 도움이 될세계화는 공식으로 무역의 자유와 자본의 원활한 이동을 통한 상호 이익추구라는 원대한 구호를 내세웠지만, 그리고 적어도 이론으로는 그럴 수 있지만, 세계화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본과 노동 간 힘의 관계를 바꾸었다는 점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국제노동기구헌장에 명시돼 있는 유명한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불평등의 확대는 경제성장의 구조상 제약 요인입니다. 이 문제를 해소하지 않으면 저성장의 늪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이제껏 한국 경제는 그나마 순수출 확대를 통한 수출주도 전략에 의존해왔는데, 전 세계 경제가 악화되는 상황에서 이 전략에 계속 의존하기느니 힘듭니다. 소득불평등을 줄이면서 내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는게 옳다고 생각합니다….최근 연구 통계를 보면, 한국의 상위 10%가 가져가는 소득 몫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미국과 거의 맞먹습니다. 과감한 정책 전환의 필요성을 시사하는 통계가 아닌가란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게 제 개인의 짐작입니다.]

 

경제사상사로 본 피케티 홍훈

어느 새 부터인가 시장을 거의 만능에 가까운 체계로 보는 주장이 아주 강한 힘을 갖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한 아담 스미스조차 시장을 만능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누군가에 의해 생략되고 시장에서의 교환을 지금껏 만든 그 어떤 장치보다 전지전능한 것이므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한다. 홍훈 교수 표현을 따르면 자본주의 경제면 다 똑같다는 그런 순박함이 대부분의 경제학자한테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제라는 분야 또는 학문이 갖는 절대의 이상향/목적은 무엇일까? 성장을 꾸준히 이룬다고 가정했을 때, 그리 되면 무엇이 달성되고 나타나는가? 혹시 우리는 성장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우리 스스로에게 굴레를 만들고 있지는 않을까? [시장에서 불평등이 자동으로 조정되는 게 아니라 내버려두면 막갈 수 잇다는 겁니다. 시장에서 조절 또는 안정이 이뤄진다고 전혀 보장할 수 없다는거죠. 1970,80년대 이후 계속 불평등이 커지고 있는데, 이처럼 시장에 내맡기면 어느 정도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계속 커질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따라서 정책이나 제도를 강구해서 불평등을 억제해야 한다는 겁니다. 피케티가 누진세 강화나 자본세를 얘기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주류 경제학은 보편 이론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미국, 한국, 유럽, 일본 그 어디에서도 적용되는 이론을 추구하는거죠. 자연과학 비슷하다고 할까요. 이런 성향이 처음부터 있다가 나중에 더 확산됐죠. 따라서 주류 경제학은 미국과한국, 일본, 독일 시장이 다 다라다는 얘기에 익숙하지 않아요. 사회과학자 가운데 경제학자가 이 부분에 가장 친숙하지 않을 겁니다. 인류학이나 사회학이나 정치학에서는 미국과 일본은 다 다르다고 접근할 텐데, 경제학은 시장경제면 다 똑같다고 보려 합니다. 자본주의 경제면 다 똑같다는 그런 순박함이 대부분의 경제학자한테 있어요. 모든 경제학자는 아니지만, 학문의 성격이 좀 그래요과연 미국과 같이 이미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에서 성장을 추구하는 게 과연 맞을까? 성장하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데도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성장해야 할까? 경제란 것은 여타 정치나 문화, 가치 등에 봉사하기 위한 것이잖아요. 그런데 끝없이 성장해야 한다면 결국 경제가 성장의 노예가 되는게 아닌가요? 기본소득론자, 환경론자 같은 사람들은 경제성장 자체가 목적이 돼서는 안된다고 합니다자본이 어떤 수준 이상이 되면 자기 스스로 확대 재생산하기 때문에 덩어리가 커져서 소득 불평등이 악화된다는 게 피케티의 생각입니다. 이 부분은 마르크스와 유사합니다. 이런 논리 속에서 자본의 크기를 관리해야 한다는 피케티의 생각은 특별합니다.. 자본이란 저량 자체를 관리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은 과거에 없었습니다이 지점이 생소합니다. 토지는 움직이지 안잖아요? 그런데 자본은 워낙 활발하게 움직이니까 토지와 달리 위치를 추적해야 한다고 얘기하잖아요. 그래서 국제 간 협조도 필요하다느 겁니다. 자본이 프랑스에 있는지, 케이만 군도에 있는지 등을 다 파악해야 한다는 제 좀 특이합니다소득 분배를 이야기하려면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말해야 하고, 어떤 수준의 불공평은 허용되고 어떤 수준은 허용되지 않는가를 따져야죠. 소득 분배에 뭔가 객관의 기준을 제시하려는 사람들의 논의와 결합시키는 게 필요합니다. 피케티는 이를 많이 얘기하지 않지만, 논의가 이미 다른 곳에서 꽤 있어요. 이문제는 간단치 않아요. 롤즈나 아마르티아 센,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 등의 관련 논의를 거쳐서, 이런 정도의 평등이 돼야 하고, 이런 정도의 불평등은 안된다는 얘기가 나타나야 합니다. 거기에 근거해서 피케티의 자료를 보아야 불평등을ㅇ ㅓ디까지 허용할 수 있고 또 허용할 수 없는지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정책도 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요. 누진세율은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 자본세 도입 말고 또 다른 뭘 해야 할지 말입니다주류 경제학계는 소득 분배 문제를 별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외국 뿐 아니라 한국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소득분배 문제 자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 경제학계는 미시 이론, 소득분배 이론, 한계생산성 이론을 한번 더 성찰해야 합니다. 이에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실제 소득이 어떻게 배분되고 있는지, 능력에 따라서 배분되는 게 과연 어디까지인지, 과연 남을 굶겨 죽여야 할 정도로 많은 100, 200배 보수를 받는 게 맞는 건지 고민해봐야 합니다. 소득분배 이론은 절대 경제이론만 갖고서 답을 찾을 수 없어요. 피케티를 비판한 맨큐 하버드대 교수도 인정한 겁니다. 우리 경제학계에서도 순전히 수리 모형이나 통계 모형 뿐 아니라 철학의 성찰도 함께 해야 합니다.]

 

주류 경제학자가 본 피케티 신관호

자본은 가치판단이 없이 스스로의 증식만을 목적으로 한다. 그 무한한 욕심이 때로는 사람들에게 잘살고자 하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동력으로서 지지되어 왔으나, 피케티가 책으로 말하는 정도로 사람들 사이에 격차가 매우 커져버렸다. 이제는 그 문제를 정말 중요하게 인식해야 함에도 아직 주류 경제학에 계신 분들은 그 심각성을 놓치고 있어 보인다. 사람을 목적으로 하지 못하는 학문으로 변질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불평등이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과거에도 상당히 많은 연구가 있었습니다불평등이 늘어나면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되냐 안되느냐는 거시경제학의 오래된 관심이었습니다피케티의 생각성장과 분배가 상충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분배를 촉진시키면 성장을 더 이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부의 불평등도가 비교해 봤을때 낮은 미국에서 소득불평등도가 가장 높습니다…정치의 힘이 작용그보다 경제의 힘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자본과 노동의 몫 분배가 악화됐을 때는 필요한 노동 이상의 잉여노동이 많았을 때입니다. 19세기 같은 상황이죠. 이때는 한동안 임금이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기술이 자본에 유리하게 작용한 요인이 큽니다. 기술이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발전하는 게 상당히 큰 영향을 주고 있어요. 이런 경제의 힘이 노동소득 분배율 악화에 더 중요한 영향을 준다고 봅니다…피케티는 인구 증가율이 감소하면 성장률도 감소한다고 봅니다. 자본수익률이 성장률보다 크면 불평등이 커진다고 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주장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겠어요. r g보다 크다고 해서 과연 그렇게 될까 의문입니다자본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부의 대물림도 얘기하고, 자본에 의해 생기는 소득불평등도 얘기하지만, 미국이나 한국이나 아직까지는 자본에 의한 소득불평등보다 노동소득에서 생기는 불평등이 최근의 소득불평등 악화 현상에 더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피케티는 최상위 소득층인 1% 0.1%의 소득 집중에 관심이 매우 쏠려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선 중산층 몰락이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부분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로 본 피케티와 불평등 이강욱

순서로 보면 신자유주의의 이념이 나오고, 이 이념을 보편화하려는 시도가 세계화로 이어진다. 서구 뿐 아니라 한국도 이 흐름속에 휘말렸고, 그 속에서 자본과 노동이 갖고 있던 그때까지의 질서가 깨져버렸다. 하지만 가치판단이 개입하지 않고 오로지 커지기만을 희망하는 돈(자본)의 논리 속에서 인간의 어떤 저항 논리도 아직까지 완벽한 승리를 얻지 못했다. […피케티가 굳이 주류 경제학의 대체 탄력성 개념에 기초하여 역사 변화를 설명하려다 문제가 빚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피케티도 정치 경제학, 세력 간 역학관계, 제도와 정치를 중시하긴 했어요. 하지만 저는 자본수익률이나 대체탄력성은 기술 개념보다는 정치 요인을 더욱 고려해서 설명해야 된다고 봅니다.  80년대 이후 자본/소득 비율이 커졌는데 왜 자본수익률은 빨리 떨어지지 않았냐고 할때, 신자유주의 등이 역학관계를 바꿨다고 볼 수 있거든요. 이전보다 노동자들의 힘은 약해졌고, 금융화가 되면서 자산 시장의거품이 커졌잖아요. 이러한 정치 변화가 자본수익률을 덜 떨어뜨렸을 수 있습니다. 세계대전 이후에 이전과 정반대로 나타났던 현상도 똑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그래서 조건부 수렴 이론이 등장했죠. 배로 교수 등이 주장한 개념입니다. 가난한 나라는 선진국과 상황이 같지 않으니, 매개변수 자체가 다르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선진국은 저축률이 높고 인간자본이 크지만 가난한 나라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는 식입니다. 이런 변수를 다 통제하고 나면 비로소 가난한 나라의 성장률이 더 높게 나온다는 것이고 이는 보통의 현실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피케티는 자본 소득을 자본 전체로 나눈 실질수익률이 연간 4~5퍼센트 정도 된다고 봅니다. 피케티는 소득에 비춰 재산의 크기가 커지고 있으며, 동시에 수익률은 별로 하락하지 않기 때문에 자본소득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몫도 커졌음을 보여줍니다. 피케티는 이 메커니즘을 막을 자연 발생 또는 자기 교정 기제는 없다고 봐요. 오히려 가만히 놔두면 자본의 크기나 자본소득은 더 커진다는 겁니다. 돈이 돈을 낳는다는 거죠. 문제는 자본소득은 노동소득보다 훨씬 더 불평등하게 분배되니까, 이렇게 되면 전체의 불평등이 더욱 악화될 수 있다는거죠…최근 분석한 바를 보면, 우리나라의 자본/소득비율인 β 7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선진국에 견줘 무척 높은 수준입니다. 주로 부동산의 영향때문인 듯 한데, 이는 곧 우리나라의 자본이 많이 축적되어 있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또한 자본소득이 전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 α도 최근 증가하여 약 40%가 넘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세금 데이터를 이용하여 자본소득이 얼마나 불평등하게 분배되는지, 즉 상위 1% 그룹이 자본소득, 즉 배당소득이나 이자소득 등에서 얼마나 차지하는지 등의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하지만 우리나라는 아래쪽 고민을 더 많이 하는 게 필요합니다. 세금 뿐 아니라 최저임금을 높이고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고, 특히 노동자의 힘이 강화되어야 하겠죠. 대기업이나 공기업 등 소수의 좋은 일자리와,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 등 다수의 일자리 사이의 임금격차를 줄이는 방법도 고민해야 합니다. 또한 누진소득세든, 글로벌 자본세든, 그 어떤 세금이든, 성장이든 그 혜택이 아래쪽으로 제대로 내려가게 해야 합니다. 시장에 맡겨두면 안 되니까 세금과 복지를 통한 불평등 완화 노력도 매우 중요하죠.]

 

피케티 방법으로 본 한국의 불평등 김낙년

무조건 성장해야 한다는 종교와 같은 믿음 속에서, 성장이 원하는 만큼 따라와주지 않을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꺾임 속에서 그나마 우리는 왜 성장해야 하는지 물어볼 용기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함께 산다는게 무언지 깨닫게 해주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도 할 것이다. [고도성장기엔 고용 창출이 빠르게 이뤄졌어요. 분배 정책이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지만 사실상 분배가 잘 이루어진 셈이죠. 굳이 정책을 쓰지 않아도 성장 효과가 널리 확산되었기 때문이죠. 이에 비해 지금은 경제 성장이 정체 되어 분배 문제가 더 첨예한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90년대 전후로 우리의 경제 구조나 국제 위상이 변하면서 만들어낸 현상입니다. 우리나라의 불평등이 커진 이유 가운데 하나죠우리나라에서 노동소득의 불평등도가 커졌지만, 그 밖의 소득을 포함하여 전체 소득의 불평등도 상승은 좀 더 빨랐던 것으로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자본소득이 우리나라의 불평등 증가에 좀 더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피케티 레볼루션이라고 한 것은 가계조사의 한계를 넘어 상위층이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같은 새로운 지표를 가지고 불평등 추이를 매우 장기간에 걸쳐 보여준다는 사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피케티의 방법을 많은 나라에 적용하여 국제 비교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소득은 물론이고 부의 불평등에도 마찬가지 접근이 가능합니다. 피케티는 소득과 부의 불평등 추이를 프랑스 대혁명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여줘요. 이를 이용해 새롭게 자본주의의 불평등 동학을 만들어낸 거라고 할 수 있어요. 불평등을 보는 사람의 관점을 상당히 바꾸었다고 해야겠죠우리나라는 경제에서 서비스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나라에 비해 낮은 편입니다. 제조업 비중이 크기 때문이죠. 이를 뒤집어 보면 서비스업에서 부가가치를 키울 수 있는 여력이 그만큼 크다고 볼 수 있죠. 제조업 제품의 경우 국제 경쟁에 노출되어 왔기 때문에 이미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요. 이에 비해 우리나라 서비스업의 질은 그렇지 못합니다. 서비스는 여러 형태로 제도 보호를 받고 있어요. 그렇다보니 국제 경쟁에 노출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면 의료 분야 개방을 놓고서도 정치 입장의 차이 때문에 제도를 바꾸기가 여간 힘들지 않습니까? 교육의 경우는 어때요? 우리나라만큼 교육에 엄청난 자원을 퍼붓고 있는 나라가 드믈다고 생각하지만 그 효율은 높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교육제도를 개선하여 성장 잠재력을 높일 수 있는 여지는 그만큼 크다고 봅니다. 결국 이러한 제도 개선을 주도할 수 있는 정치가 문제이긴 하지만, 서비스업 발전이 앞으로의 경제 성장에 중요한 과제가 된다고 봅니다.]

 

피케티의 해법과 조세정책 강병구

조세라는 말이 갖는 습관성 거부감은 잠시 제쳐두고, 자본주의의 지속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소수에게 자원(자본)이 집중되는 현상은 최대한 막고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피케티는 자본주의를 흔들어서 새로운 미래를 보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체제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꿈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면 그 세계 또한 신의 왕국이 아닌 이상 뛰어넘어야 할 장벽일 것이다. [피케티는 자본이 소수의 손에 집중될 경우 기업가 정신이 훼손될 수 있다고 봅니다. 예컨데 자산이 소수에게 집중될수록 자산 보유자들은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 창조스러운 생산 활동을 하는 게 아니라, 금리생활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거죠. 이런 측면에서 세습자본주의에 경고하고 있습니다.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이 "과거가 미래를 집어 삼킨다"는 것입니다. 상속과 증여 등으로 부가 계속 집중되고, 거기서 나오는 이자, 배당금, 임대료 등 자본소득이 지배 계층의 생산과 재생산의 기반을 형성하게 되면, 경제의 생산 동력이 떨어진다고 보는 거예요. 피케티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역동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오히려 자본 과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우리나라와 같이 지하경제 규모가 크고 차명계좌를 활용하여 비자금을 관리하거나 탈세를 하는 경우에는 자산으로부터 발생하는 소득을 정상 과세하기가 어렵습니다. 숨겨진 금융 자산의 소유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도 순자산 과세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자본시장이 자유화되고 조세회피처를 매개로 역외탈세가 만연하는 경우에는 금융시장의 투명화를 위해서도 자산 과세가 필요합니다…저소득 계층은 세율에 좀 반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고소득 계층은 별로 반응하지 않아요. 반응을 하더라도 오히려 세율이 올라가면 노동공급이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실제 고소득 계층은 계급이 조금 올랐다고 해서 일을 그만두지 않잖아요…우리나라의 경제 성장률도 계속 떨어지고 있구요그렇기 때문에 노동소득 분배율을 높이고 조세와 재정의 재분배 기능을 강화해서 내수 기반을 확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수출 주도형 경제체제를 내수 기반을 확충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장도 가능하고 잠재성장률도 높일 수 잇다고 봐요. 일종의 소득주도성장 전략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시장에서 저임금 노동과 비정규직 문제,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불공정 거래관행을 개선해나가야 합니다. 세금은 이런 정책을 지원할 수 있는 좋은 정책 수단입니다…하지만 우리나라의 고소득자의 실제 세부담이 낮고, 세금을 내지 못하는 근로소득자도 30% 정도에 이릅니다. 그런데 면세점 이하의 근로소득이 전체 근로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 정도에 불과합니다…하지만 우리나라의 고소득자의 실제 세부담이 낮고, 세금을 내지 못하는 근로소득자도 30% 정도에 이릅니다. 그런데 면세점 이하의 근로소득이 전체 근로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 정도에 불과합니다…중장기로는 국가의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는 것은 국민경제의 안정된 성장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처한 현실을 고려할 때 재정지출의 확대는 불가피합니다. 정부도 내년에 초유의 확대재정을 편성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재원을 조달할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보다 적극 고민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부는 여전히 증세없는 복지를 주장하면서 소비세와 소득세 위주의 증세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법인세는 불가침 영역으로 설정하고 있나 봅니다. 사내유보금을 대상으로 하는 가계소득 증대세제도 그 효과성이 의심되고 있습니다. 법인세 최고세율 인상을 포함해서 대기업에 집중된 7조원 이상의 공제 감면을 축소하지 않고서는 재원 마련이 어렵습니다…경제협력개발기구에서 발표하는 개별 국가의 공식 지니계수를 보면, 우리나라의 시장 소득 지니계수는 낮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불평등도를 측절할 때 사용하는 통계청의 <가계동향조사?자료에는 고소득 계층과 저소득 계층이 잘 포착되지 않기 때문에 지니계수를 낮게 추정하는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2012년 배당소득자와 이자소득자 가운데 상위 1%가 차지하는 점유율은 각각 72.1% 44.8%였는데, 이런 부분이 조사 자료에서는 잘 잡히지 않습니다. 소득불평등도가 9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증가하고, 최근에는 근로자의 실질임금 증가율이 마이너스를 기록했습니다. 최저임금도 낮은 수준이고, 저임금 근로자의 비중도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더욱이 2000년대 이후 자영업자 소득의 증가폭이 임금노당자보다 떨어지면서 소득 격차도 크게 벌어졌어요. 이 때문에 자영업자를 포함한 근로소득자의 불평등은 더욱 커지고, 우리 경제의 내수 기반을 취약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지요…보다 근본으로 "사회가 무엇인가, 경제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성장의 궁극 목표는 사회 구성원의 행복을 추구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있지요. 그렇다면 소득과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는 사회보다 많은 사람이 성장의 과실을 골고루 누리는 사회가 낫겠죠.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바람직한 분배 구조를 만들어가는데 한계가 있다면, 국가가 개입해서 시장경제의 취약한 부분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습니다학문 뿐 아니라 사람도 가치중립일 수 없다고 봅니다. 중요한 건 어떤 가치를 갖느냐 입니다.]

 

금융 세계화와 최고경영자의 보수 이유영

소유주가 아닌 전문경영인 연봉의 급격한 증가를 맞는 이론의 뿌리는 별로 없다. 사실 자본주의 밑에서 인간의 탐욕을 적나라하게 나타내는 욕망의 경연이 아닐까? 이처럼 노골화되고 미친게 아닐까 싶은 부를 쫓음을 비난할 논리는 무수하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걸까? 이 장에서는 주로 이런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지만, 사실 이 내용은 자본주의의 무규칙 무제한 성장의 매우 작은 내용만을 설명할뿐, 자본 그 자체가 갖는 자기 증대의 주 영역은 월급쟁이 전문 경영인보다는 기업 등 다양한 수익 원천 소유주와 그 우호 세력(관료, , 언론)이 만들고 있는 막장 드라마가 아닐까?? [조세 회피처의 연원과 폐해를 따지고 보면, 우선 영국의 책임이 크다. 그리고 미국계 다국적 기업의 적극 편승 행위가 두드러져 보이는 게 사실이다. 유럽의 전통 조세 회피처를 제외한 대부분의 조세회피처는 1930년대 이래 영국 식민지에서 기원한다. 시티를 중심으로 한 금융자본이 앞다투어 조세회피처를 건설할 때 영국 식민청은 적극 맞서지 못했다. 오히려 영국은 2차 세계대전 종전 뒤 식민지를 독립시키는 과정에서 작은 섬나라에 통제력을 유지했다. 이러한 정책 탓에 영국이 이들을 오늘날의 대표 조세회피처로 키워왔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특히 그레이트 브리튼 섬 근교의 왕실보호령 3개국인 저지섬, 건지섬, 맨 섬을 비롯하여 카리브 해 권역에 퍼져있는 영국령 섬들을 중심으로 조세회피처가 성장했다한편 OECD 18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1970년대부터 2008년까지 소득세 최고세율의 변화와 최상위 1%의 소득 비중 변화를 살펴본 논문의 결과도 흥미롭다. 소득세 최고세율이 30% 이상 하락한 미국, 영국, 포르투갈의 경우 최상위 1% 계층의 소득 비중이 각각 9%,7%,3% 이상씩 증가했다. 반면 독일, 스위스,프랑스, 덴마크, 스페인 등 소득세 최고세율의 변동이 거의 없었던 유럽 국가의 경우에는, 최상위 1% 계층의 소득 비중 증가율이 1% 정도에 그치거나 이에 미치지 못했다하지만 수십 년에 걸쳐 하위 계층의 실질 소득은 제자리걸음을 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최고경영자들이 지대추구 행위로 지나치게 많은 보수를 받고, 그 결과 부의 불평등 현상이 더욱 심화되어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양상은 굳이 피케티식 파국이 아니더라도, 사회 전체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 커다란 장애가 될 것이란 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부의 불평등 심화 요인으로 지탄받는 관련 제도와 관행 아래에서, 지금은 누가 이득을 보는가 cui bono?라는 회의스러운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인 것이다.]

 

맺으며

경제를 포함해서 많은 학문과 연구가 장기 추세를 보고 거기서 발견한 규칙으로 단기 발생 양상을 해석한다면, 단기는 결국 장기의 구성 요소밖에 되지 못하고, 단기의 분석은 장기 분석의 맥락에서 이해될 지경에 놓이면서 그 자생력과 독자성이 무색화되면서 단기와 미시 영역의 존재 의미가 퇴색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피케티 또한 서양의, 근세 이후 전세계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서유럽과 미국을 주로 중심으로 놓은 이론이라서 이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를 해석할 때 개별 역사와 사회 상황을 별도의 변수로 고려하면서 기존의 법칙과 균형잡기가 꽤나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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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반격 - 더 이상 중국 보너스는 없다
중앙일보 중국팀 지음 / 틔움출판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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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우리에게 중국은 하나의 중요한 화두이자 블랙홀이고, 관계맺기의 대명사이자 우리를 볼 수 있는 거울이었다. 이 책은 그런 중국의 경제와 정치, 사회의 관점으로 오늘날의 중국을 말한다. 무려 9명의 기자가 이 책의 이야기꾼이고, 그 안에 인터뷰한 중국과 한국의 사업가나 정치가는 꽤 많이 등장한다. 잘나가는 신문사가 자기가 보유한 자원을 잘 이용해서 나름 중국통의 자리에서 오늘날의 중국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과거와는 다른 중국 이야기를 읊어나간다.


언제부턴가 중국은, 우리의 상품을 굽신거리며 가져가서, 한국 제품의 기술력에 감동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그런 나라가 더 이상 아니라고 한다. 인구는 옛날 그 언제적부터인지 이미 우리를 압도했고, IT라고 불리는 정보통신 산업에서도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사용자/구매자 수와, 그들에게 상품과 서비스 판매로 벌어들이는 돈 또한 우리의 상상을 훌쩍 벗어나버리는 크기로 등장한다알리바바의 비즈니스 규모는 이미 미국에서조차 이 정도는 나오지 않을 수준이다. 여기에 샤오미, 화웨이 등의 정보통신 회사는 글로벌 시장에서 IT강자로서 자리매김한 한국을 불안하게 만들거나, 그 위치를 끌어내리고 있다. 그 저변에는 한국의 창업과는 몇백배나 차이나는 중국의 창업(창커) 정신이 도사리고 있다. 그 뒤에는 혁신정신이 있다(대중창업 만중창신 - 리커창). 그리고 그 뒤에는 만드는 경제에서 소비하는 경제로, 이제 후기자본주의의 프레임워크로 중국 지도층의 방향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나온다.


중국은 그간의 경제 성장 그리고 지난 한나라와 당나라의 영광 재현을 위해 일대일로라는 정책이자 물류망을 엄청난 속도로 확장 중이다. 그 성장을 위한 담론으로 시진핑은 신창타이(新常態: New Normal)을 던지고, 그 핵심 사상을 개혁을 통한 성장으로 잡았다.[중국은 국유기업 독점 분야를 민간에 개방하고, 시장을 옥죄는 행정 규제를 과감히 풀었다. 제조업 보다는 서비스업, 투자보다는 소비에서 성장의 동력을 찾겠다는 구조개혁과 일맥 상통한다길은 오직 하나, 개혁뿐이다. 시진핑은 ‘3개 전변을 말한다. 투자가 아닌 소비에서 성장의 동력을 찾아내고, 제조업보다는 서비스업을 육성하고, 산업고도화를 통해 투입의존형 성장 패턴을 탈피하겠다는 뜻이다. 3개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재균형 작업으로 시진핑 경제의 뼈대이기도 하다. 소비 시장을 키우지 않고는 중진국의 함정을 피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이 분석에 얼마의 객관성을 주어야 할까? 중진국, 선진국이라는 잣대를 아직 엄연히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외치는 나라에 들이대고, 측정하고, 해석하는 이 명확한 오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위에서 소비의 강조를 말했으나, 세계의 공장이자 생산의 중심에 있는 중국은 제조에서의 리더쉽을 갖기 위해 독일, 일본 등 제조 강국과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자본주의 체제는, 빨리 점프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수단으로의 체제이고, 중국은 그걸 해냈다!는 자신감을 보이는게 그들이 가려는 방향성이 아닐까? 1949년에 이룬 사회주의는 경제 체제의 발전에 따른 운동의 결과는 비록 아니나, 적어도 과거 봉건 주의를 뛰어 넘었다. 그리고 한동안의 시행착오를 통해 자본주의를 받아들여 그들과 경쟁하고, 그 결과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빠르게 G2의 역사를 이룩하고 이제 G1으로 발돋움중이다, 이런 식이 그들이 꿈꾸는 바가 아닐까 싶다.


경제로 다시 돌아와서, 우리가 가져가야 할 중국과의 다음 단계 비즈니스는 중국과의 협업, 그리고 화장품이나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공략 등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기업과 가계 부채, 부동산 버블, 중국 리스크, 정부의 개입(보이는 손)등을 꼭 고려할 것들로 정리하였다.


책의 결론을 보면, 신문사에서 나온 책이라는 느낌을 물씬 풍기는 '얇고 넓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이 책에도 거의 판박이로 느껴지고, 그러다보니 생산에서 소비 중시로의 변화 등 경제나 정치 현상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철학 고민과 원천을 파헤치지 못하고 지극히 우리 입장(자본주의?)으로 소화해서 말을 풀어나간다. 그리고 이전처럼 땅집고 헤엄치는 수준은 아니지만, 충분히 들어갈 만한 매력이 있다고 한국의 기업가나 기업을 꿈꾸는 사람에게 말하고 있으나, 그 얘기는 어느 때에 적용해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만큼 항상 맞는 얘기로 보인다. (‘왜 지금인가?’라는 물음의 답은 잘 안보인다!. 그냥 이런 저런 사례와 인터뷰를 해보니 그런게 아닐까 싶다고 추정된다.) 내가 요즘 누구의 말처럼, 장난(사업을 위한 지식 전달)에 죽자사자 덤벼드는걸까(경제와 철학을 들먹이며?) 또한 중국의 경제는 항상 자본주의로 치환시켜서 말해가는 한국의 언론을 보면서 게으름(사회주의 측면을 거부하던 모르고 넘어갔던)과 직무 유기(독자의 앎의 권리를 단절시킴)의 오명을 안겨드리는 걸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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