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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스테이아 열린책들 세계문학 197
아이스킬로스 지음, 두행숙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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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스테이아는 이 책의 주인공인 오레스테스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지금 존재하는 수많은 나라가 서기라는 숫자매김을 시작하고도 한참뒤에 생겨났다. 그렇지만 만약 오레스테이아가 쓰여진 연도나 글쓴이가 누구인지 모르고 읽어보면 시간의 흐름이 무색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떠오른건 누구나 그렇게 결론으로 갈 만큼 이야기 소재와 풀어나가는 데 있어 공통점이 보인다. 그렇다면, 적어도 서양의 위대한 이야기의 근원은 그리스 로마로 올라간다고 환원지을 수도 있을까? 마치 서양의 철학을 플라톤으로 귀결시키는 의견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전에 움베르토 에코가 책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까지 전해지는 이야기가 과연 그 시대의 가장 대표할만한 것들이었나를 놓고서 공동으로 쓴 다른 글쓴이와 잠시 이야기 나눈 대목이 생각난다. 그점이라면 이 책은, '맞다'고 말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작년부터 읽어왔던 그리스 로마의 고전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를 관통한다. 제우스를 비롯한 그 형제들과 다른 신, 그리고 그 윗대의 크로노스와 탄탈로스 무리들, 그리고 아테네와 전쟁에서 막판에 허무하게 무너져버린 트로이까지


비극, 그것도 가족간 비극. 가족이지만 왕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 내 한몸 가누려고 해도 정말 많은 욕심과 무례, 관습의 어긋남, 때로는 지어야 하는 철면피같은 표정. 이 모든 것은 왕의 가족들에게서 충분히 나올 만한 정황이나 이야깃거리라고 본다. 오늘날로 보면 기업의 역사, 그걸 둘러싼 기업주와 그 가족들의 역사를 투영해보면 비슷하지 않을까?


이 책이 아닌, 트로이 전쟁사나 다른 이야기책을 보면 나오는 아가멤논은, 무뢰한이자 야심과 욕심이 철철 흘러내리는 인간이다. 그런 사람이 이 책에서는 문득 나왔다 사라져버림이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책의 이야기 흐름이 어색하다는 말은 아니다.


문득 그리스의 비극이 유행하던 시대로 돌아가, 배우와 코러스가 장엄하게 연기하는 그 광경을 보았으면 얼마나 가슴이 뛸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 책을 보다가 드는 의문은, 이 책의 결말을 보면서 이게 과연 비극일까 싶은 물음이 떠올랐다. 며칠 되새김질해보니 그럴 듯도 싶긴 하지만, 그동안 익숙하게 생각했던 비극과는 그 뜻이 조금은 다르지 않나 싶다. 그리고 그리스 신은 과연 신일까 아니면 사람과 신의 중간단계쯤에 있는, 사람보다 뛰어난 존재지만 신으로 부르기에는 사람과 닮은 슈퍼 히어로 정도일까? 하는 궁금함이다. 아마도 민주주의의 발전은 신에게 조차 그 영험함을 다 주기에는 인간의 위대함을 양보하기 싶어하지 않는 초기 인문주의자들이 아니었을까?

 

문체가 분명 오늘날과는 다른데 , 그 다름 속에서 참신함이라는 모순의 감정이 느껴진다.

1. 아가멤논

[노인이라도 배움에 있어서는 항상 젊은 법이지요예부터 인간 세상에 잘 알려진 속담이 있으니, <사람의 행복이 커지고 부유해지면 자식을 낳게 되니, 자식 없이 죽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그러나 행복의 뜰 안에는 만족할 줄 모르는 불행이 싹터 자란다!>…해묵은 죄악은 계속해서 죄악을 낳고 새로운 죄악으로 더욱 번성하게 되니, 오늘이든 내일이든 때가 되면 그 열매의 저주는 또다시 죄악을 낳는다네. 결코 피할 수도 견딜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없앨 수도 없는 일. 어두은 저주의 불경하기 그지없는 오만함은 그 집안의 아비를 닮았구나...커다란 행운을 누리는 친구를 시기하지 않고 존중해줄 수 있는 기질을 타고난 사람은 드물다. 악한 마음의 독기는 사람의 마음에 파고들어 시기로 병든 자를 이중의 원한으로 괴롭히는 법이다. 자신의 불쾌함으로 마음이 무겁게 짓눌리는 데다 또 남이 잘되는 것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사람과의 교류란 거울에 스쳐가는 그림자처럼 허황된 것에 불과한 것을 과거에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운명이여! 행복할 때는 그림자처럼 뒤집히기 쉽고, 불행할 때는 젖은 해면으로 한번 훔치면 지워져버리는 그림과 같구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처럼 지워지는 운명이 나에게는 더욱 슬프구나.]

 

2. 제주(祭酒)를 바치는 여인들

[나를 지배하는 자의 행위가 옳든 그르든 강요에 못 이겨 그 행위를 찬양해야 하고, 마음속의 증오를 잊어야만 하네!...위대한 힘을 지닌 운명의 여신들이여, 제우스의 힘으로 정의가 나에게 다가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모ㄱㅈㅓㄱㅇㅡㄹ 이루도록 해주소서. <네가 소리치면 그 메아리가 되돌아온다! 증오는 증오를 낳는다> 이렇게 정의하는 죄지은 자의 죗값을 거두어들일 때 소리 높여 호통을 친다! <피 묻은 칼에는 피 묻은 칼로 보답하라! 행한 자는 그대로 당해야 한다!>...그러나 인간의 파렴치하고 대담한 교만과 비길 것이 무엇이며, 인간들에게 고통을 수반하는 뻔뻔하고 욕정에 빠진 여인의분별없는 욕망과 비길 것이 무엇이랴? 여인의 강력하고 제어할 수 없는 욕정은 심지어 짐승의 욕정마저도 능가하는 것을...]

 

3. 자비로운 여신들

[무서운 것도 적절한 곳에서는 이롭게 작용하느 stn가 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속에는 감시자가 늘 지키고 있어야 한다. 고통의 눈물을 통해 엄한 훈련을 하는 것도 이로울지니. 인간이든, 백성이든, 한 나라든 만약 마음 속에 정의를 맞는 두려움이 자리하지 않는다면 어찌 스스로 정의를 존중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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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나의 선택 1 - 3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3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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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라고 머릿속에서 글씨를 써보면 떠오르는 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믿어보자는 느낌이다. 그런 종교는 무조건의 믿음을 가져간다. 그래서 종교의 성인은 만들어지고 지금까지 그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의 믿음과 은혜로,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평가의 객관화나 반론의 모습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버전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종교와는 거리를 둔 예전 사람 중 시저, 케사르, 체자레 라는 사람처럼 글쓰기의 인물로 사랑받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지난 날, 시오노 나나미씨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내용을 본 기억이 희미하게 나는데, 픽션으로 된 이 글을 보면서 그 희미함에 확실한 색깔이 덧칠해지는 기분이다.


포르투나의 선택은 마리우스 이후 술라가 세상을 움켜쥐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포르투나는 누구일까? 1편만을 보면 술라다. 하지만 이제 술라는 진짜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었다. 정말로그렇게 이빨 빠진 호랑이가 인생과 권력의 정점을 찍을 때쯤, 또다른 포르투나가, 태어나고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되는 공작새이자 세번째 포르투나인 아우구스투스의 아버지인 카이사르다. 1권은 흑마왕 술라에 의한 시이저의 시련기가 주된 내용이며 이 사람에게 조금씩 서광이 비취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 와중에 삼두정치로 유명한 폼페이우스가 등장한다. 만약 이란 말을 걸어보면, 시이저가 없었다먼 폼페이우스가 상아의자에 앉을 운명었을지도 모르겠다. [폼페이우스는 이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을 바꾸고 우리가 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꿀 것이다. 폼페이우스에게는 티끌만치의 두려움도 없고, 이 사람의 자신감에는 머리카락 한 올만치의 균열도 없다존엄은 개인이 사람으로서, 그리고 자기가 속한 사회의 지도자로서 무엇인지를 요약한다. 존엄은 개인의 자존감, 온전함, , 지성, 행동, 능력, 지식, 지위, 사람으로서의 가치의 총합이다…. 존엄은 사람의 죽음을 넘어서기에, 사람이 죽음에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 이것이 가장 올바른 정의다. 존엄은 사람의 물리화된 존재의 멸실을 향한 승리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바로는 폼페이우스가 절대 옳다고 생각했다. 술라에게 중요한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존엄이다. 술라는 미트라다테스를 무찌를 거라고 말했다. 옛날의, 전통 형태로 공화국을 재건하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술라는 말한 대로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존엄이 손상될 테니까. 사회 추방과 공식의 오명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 존엄은 없었다. 따라서 술라는 자기 바깥에서 자신의 약속을 이행할 힘을 찾아야 한다. 자신의 약속을 이행했을 때 술라는 만족할 것이다. 그때까지 술라는 쉴 수 없다. 쉬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이야기를 적으며 몇번은 반복되지만 잊혀지지 않고 끊임없이 떠오른 물음은, ‘왜 누군가는 승자가 되고 누군가는 패자가 되는 것일까? 능력의 차이일까? 운 또는 환경 등 누군가 존재의 바깥에 있는 무언가가 좌지우지하는 것일까?’ 이다. 좀더 밀고 나가면, 왜 우리는 존재하고, 다른 어떤 것은 인간이 되는 기회를 얻지 못했을까? 그리고 우리가 사람으로, 승자로, 살어 남은 것이 행운일까? 아니면 불행일까? 아니면 행과 불행이라는 건  불쌍한 중생인 우리가 만들어낸, 자기 위안의 도구일 뿐일까? 적다 보니 옆으로 비껴나가, 평소의 생각이라는 흐름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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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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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번 써먹은 표현을 다시 비틀어서 들먹이면, 소설을 쓰는 사람은 지금까지의 냄새로 앞날의 향기를 점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해질 무렵은 그 냄새와 향기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주는 소설로 내게 보여진다. 앞으로 몇백년 후, 190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의 우리 삶은 어떻게 쓰여질까? 세세한 기록은 디지털화되어 많이 남아있을지라도, 역사책에서는 한 두페이지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떠들썩한 사건, 몇몇 정치인과 기업인, 우리 사회에 공헌한 누군가 정도가 아닐까? 나무의 나이테가 그 나무의 모든 일들을 적지 못하고 커다란 일들만 굵은 선으로 남기듯 말이다.


지금 땅을 밟고 하늘을 머리에 두고 있는 를 한가운데 놓고 지난 70년대부터 오늘을 뒤돌아보면서 떠올릴만한 사건이나 일이 무엇인지 뒤돌아보면 일단 내가 태어났고 이에 더불어 군사독재, 광주, 경제라고 말해지는 산업화와 소득의 늘어남, 6월 항쟁, 대통령 직선제, 올림픽, 아버지의 퇴직, 성수대교와 삼풍 아파트, IMF, 정권 교체, 코스닥 광풍, 결혼, 김예슬 선언, 아이가 태어났고, 박근혜 게이트 등이 있다. 평범한 일상이라고 말할, 하루만 지나도 잊어버릴 만한 그냥 그런 하루 하루 속에서 도드리지게 튀어오르는 듯한 이런 일을 생각해보며,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나는 어디에 있고, 그 옆에는 누가 있었으며, 지금은 같이 지내지 않지만 오랜 동안 나랑 같이 지낸 부모님과 누나, 그리고 내 친지들은 각각의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내가 태어나서 자라온 그곳, 지금은 뉴타운이라는 이름속에 공원으로 탈바꿈한 그곳을 보며, 그리 길지 않은 이 삼십년의 기간동안 우리는 무슨 짓을 해온건지 궁금하다. 그리고 아직도 기득권에서 그토록 치장한 자유와 풍요가 이제 그 목숨줄이 흔들릴만큼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다. 그동안 누군가의 행복은 누군가의 불행을 디디고 있고, 행복을 얻은 그 누군가는 불행이 오지 않음을, 불행에서 벗어났음에 만족하고 이를 그 누군가에게 감사하면서 스스로의 운명과 시간에 안도하면서 살아온 우리네 삶의 흐름을 무어라고 말하고 평가하고 의미부여를 해야 할까 싶다.


책에는 두명의 민우가 등장하고, 조금 있으면 마지막 해질 무렵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채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다. 또한 책이 얇아서 이 책을 다 읽는 것도 시간을 많이 뺏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운이 꽤 갈 듯 싶다. ‘말빨이라는 단어처럼 분명 글빨이라는게 있긴 있구나 싶었다. 글쓴이의 책을 몇권 읽었고, 그분의 광팬은 아니지만, 책을 쓸 때 어느 책에서나 느껴 지는 빤한 전개나 스타일이 안느껴진다. 이러함이 황석영 선생님의 장점이라고 여겨진다.


요즘 이런저런 글을 쓰려고 조금 더 몸짓과 손짓을 하고 있고, 글이란건 역시 쉽지 않음을 느끼는 찰라 이 책을 보면서 커다란 벽이 서있는 거 같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나도 이렇게 감동을 주는 누군가로 자리매김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끼면서, 아직 살아있는 내 자존감을 다시 한번 느끼고 어루만지며 스스로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좋은 계기로 삼았음으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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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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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에 쓰여진 이 책이 인류의 위대한 고전의 하나로,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비극의 하나로, 중고등학교 시절 위대한 소설의 하나라고 익히 들어온 그런 책을, 이번 기회에 읽게 되었다.


희곡으로, 오래전 영국에서 쓰던 말하기를 가져와서 번역을 하였고, 그 밑에 그 당시 상황을 각주로 넣는 등 옮긴 이는 나름대로 이 고전의 이름값에 맞는 일을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 듯 싶다. 그럼에도, 그 당시 시대 상황, 당시의 주요한 서적이나 속담 등을 잘 모르고 있음이 이 책의 참맛을 느끼는 데 많은 걸림돌이 되었다. 많은 읆조림, 싯구를 보면서 이게 정말 무슨 맛일지, 번역으로 인해 참된 그 뜻을 퇴색시킨건 얼마나 되고, 그 당시 살지 못함으로 인한 무지는 또 얼마나 그 맛을 떨어뜨리는지, 그리고 이런 걸림돌은 각각 얼마나 그 맛의 헤침을 담당하고 있는지, 이 모든 게 매우 아쉽다.

대 문호라는 이름이 어울릴 만한 사람이고, 그 사람의 작품이라고 충분히 부를 만하다고, 나 허영심은 나를 부추기는데 지금으로서는 그 정도의 얘기가 내가 할 수 있는 얘기의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내게 재미를 주는 말은 종종 튀어나온다. 여자들은 좋아하지 않겠지만…[하느님은 여자들에게 한 가지 얼굴을 주셨는데, 여자들은 딴 얼굴을 만들어. 삐딱빼딱 걸음에 혀찌래기 소리내며, 아무 데나 별 이름을 다 붙이고, 변덕을 무식으로 치부하지]


책을 읽으면서 삼촌이자 왕인 클로디어스가 어떻게 죽어갔는지, 클로디어스가 햄릿을 어떻게 방해하고 햄릿을 어디까지 몰아가려 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햄릿이 사랑했던 오필리아라는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은 어떻게 햄릿의 주변에 있다가 죽게 되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비극은 어떻게 쓸 수 있을까에 대한 좋은 예를 가져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오필리아가 정신을 잃고 말하는 대사를 보면서 이게 무슨 말인지, 아무리 정신줄을 놓은 사람의 대사라고 하더라도 읽으면서 정말 나도 정신을 놓지 않을까 싶을 만큼 읽고 무언가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햄릿은 연극으로도 많이 공연되는데, 아직 한번도 못보았다. 그만큼 무지와 무관심의 세상에 살고 있는 내게, 햄릿은 하나의 소설이 되어 내게 나타났다. 이를 통해서 나도 좋은 고전의 맛을 느끼는 소믈리에 같은 사람이 되기를 꿈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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