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의 중심 - 가리타니 고진 인터뷰 궁리 공동선 총서 3
가라타니 고진 지음, 인디고 연구소 기획 / 궁리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1부 새로운 이념을 향하여


하나의, 소수의 이념과 가치관이 지속된다면 새로운 생각이 그 평탄함을 비집고 나온다. 자본주의가 갖는 역동의 이미지는 이제 구태의연함을 지우려는 알레고리의 노력으로 보인다. 이 와중에, 일본의 멋진 비평가 고진 씨는, 20대에 세상이라는 물에 돌을 던져 큰 파문을 일으킨 것처럼 혁명의 논리를 외쳐왔다. 그런데 그 논리의 씨앗 두개 중 하나가 칸트라는 건 태극 속 음양처럼 이율배반으로 느껴진다. 아래 글의 이율 배반과는 또 다른 의미로서지만 말이다.

[주체는 근본으로서 자유와 관련이 있습니다. 제가 칸트를 다시 읽기 시작한 것은 1990년 즈음입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는 제3이율배반이라고 불리는 것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정명제는 자유가 있다이고 반대명제는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라는 것인 것, 칸트는 이렇게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명제가 양쪽 모두 성립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이 것만 읽으면 칸트가 생각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 어렵습니다실존주의자나 구조주의자는 칸트를 냉소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논의까지도 이 제3이율배반에 포함되어 버립니다. 실존주의자는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라고 생각하죠.(정명제) 구조주의자는 자유는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유로운 것처럼 보일 순 있지만 구조에서 벗어나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반대명제). 둘 중 어느 쪽이 옳은지를 분명하게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두 명제 모두 성립하니까요. 그러니까 둘 다 칸트를 뛰어넘은 것이 아닙니다. 실존주의와 구조조의의 논쟁은 조금도 새롭지 않습니다. 어떤 국면에서 주체를 부정하더라도 다른 국면에서 재차 주체를 도입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체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도 있고, 그것을 긍정해야만 하는 상황도 있는 것이지요.]


이 책을 보면서 다시 한번 느낀 생각 중 하나는, 서양의 사유를 어떻게 우리가 받아들일까? 제대로 받아들일수 있을까? 의 문제다. 칸트가 말한 자유를, 고진 씨는 왜 사람들이 이해를 못했는지, 그리고 그걸 이해한 건 나뿐이라는 말로 밀고 나간다(물론 웃음을 포함해서…) 그런데 칸트와 서구의 부르주아지 혁신의 과정에 나온 그 자유가, 과연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얼마나 원전(또는 사전 속) 의미로서 유효할까? 이렇게 생각하면, 과연 사회주의를 말할 만큼 사회가 봉건주의를 뛰어넘어, 사회 구성원의 자발성을 발판으로 그 다음 단계로 진행했는가? 책에서 뽑은 구절과 엇나가는 말을 계속 하는 내가, 왜 이럴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칸트는 자유가 도덕의 영역에만 있다고 말합니다. 의무를 다함으로써 사람은 자유로워진다고 말하죠. 일반에서 사람은 의무를 다하는 일이 어째서 자유인가?’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이애할 수 없기 때문에 모두 칸트를 비난합니다. 이를 납득할 만한 해결책을 내놓은 사람은 저뿐입니다. 제 생각에 자유로워라라는 명령에 따를 때에 인간은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자유는 그와 같은 명령에서 오는 것이며 그 외에 자유는 없습니다.]


고진 씨도 나름 아틀라스의 어깨 급이라고 평가되어 보이는데, 가볍고 얕은 느낌이 지워지지 않는다. 행복이 목적이 되면 우리는 자유로워지지 못할지니하지만 그 가벼움 속에서 책임을 말하고, 그동안의 일을 철저하게 살펴봄은 곱씹어볼만한 주장이다.

[도덕이 공동체 규범이라면, 윤리는 자유로워지려는 의무(명령)이지요. 자유는 어떤 것에 속박되지 않는 것인데, 행복하고자 애쓰는 인간의 본능이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겁니다. 행복이 목적이 되면 우리는 결코 자유로워질 수가 없습니다이미 일어나버린 일이 자신의 자유에 의한 것이었다고 받아들이는 것, 즉 책임을 지는 일입니다…”책임지는 또 하나의 바람직한 방법은 그동안의 과정을 남김없이 고찰하는 일이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가를 철저하게 검증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고진이 말하는 헤겔(의 법철학)은 마치 얼마전까지의 한국을 짓누르고 있던, ‘국가의 국민 우위태도의 뿌리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조선시대를 지배한 성리학과는 어느 정도 겹치는 시각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그것은 일본 식민지에서 흘러내려온 것이 아닐까? 그 당시 일본을 휩쌓아온 그 전체주의와 국가 우위가 갖고 있던 그 폭력성

[헤겔은 법철학에서 정치 국가를 시민사회 위에 두었습니다. 시장경제체제인 시민사회는 욕망의 체계이고, 정치 국가는 그것을 초월한 이성의 차원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는 사람들이 시민사회에서는 私人이지만, 국가 차원에서 공민으로서 본연의 모습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역전시킨 겁니다. 경제 사회에서 각자가 보편으로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고 말이죠. 즉 현실 시민사회에서 사람들이 유적 존재로서 존재한다면, 시민 사회 상위에 상상되는 으로서의 국가는 이미 필요없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 경제에 뿌리를 둔 사회관계에서 계급 대립이 해소되면 정치 국가는 지양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마르크스의 유적 존재란 개별의 개인화된 존재 방식이 아니라, 자연/ 사회 존재로서 인간의 총체 존재 방식을 뜻한다. 즉 인간이 노동을 통해 자신을 실현하고 사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방식을 말한다. 그런데 자본에 의해 노동이 탈취되어버리면 인간은 자신의 유적 존재를 탈취당하게 되며 도구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말하고 있는 바는 곧 사인이라는 것을 긍정하면서도 그것을 보편의 것으로 삼으라는 명령입니다. 그것은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서술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이 계몽이라고 한다면 이는 사회의 근본 변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닙니다그러니까 우리는 계몽된 시대가 아니라 계몽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빅데이터라는, 데이터 분석이 강조되는 오늘날에, 그 기반을 제공하는 분야 중 하나인 사회물리학(social physics)가 떠오른다. 이 사회를 물리학으로, 구조의 급격한 움직임은 마치 상전이 현상을 말하는 듯 싶다.

[인간은 아무리 설득해도 움직이지 않지만, 구조의 원인이 명백해지면 급격하게 움직이는 법입니다자유란 원인이 너무 복잡해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 상정되는 환상이라는 스피노자의 생각을 언급했습니다.]


앞서 트랜스크리틱을 읽다가 멈춘 적이 있는데, 그때 이해하지 못했던 자본=네이션=국가를 이제 조금 이해할 수 있는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고진 매트릭스

B 국가(약탈과 재분배-지배와 보호)

세계 = 제국

A 네이션(호수 증여와 답례)

미니 세계 시스템

C 자본(상품교환 화폐와 상품)

세계 = 경제 (근대세계시스템)

D X (세계 공화국)

평등 →                                                              자유

오늘날의 모습을 이루게 된 근대자본제 사회에서는 교환양식 C가 지배형태입니다. 그렇지만 앞서와 마차가지로 교환양식 A B도 각기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세계=경제, 즉 근대 세계시스템입니다. 저는 특별히 오늘날의 이 시스템을 자본=네이션=국가라는 접합체로 봅니다. 그리고 저의 과제는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각기 다른 교환양식의 기원까지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체제를 넘어선 사회가 있는데 이는 교환양식 D가 지배하는 사회구성체입니다. 칸트도 이런 사회를 생각했는데, 이것이 바로 세계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진 선생이, 그 나름의 순발력이나 머리의 반짝거림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 하지만 노동자이자 소비자라는 논리로 프롤레타리아트를 풀어낸다는 건, 마르크스의 생각을 매우 비틀어서 생각하지 않나 싶다. 소비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생산자와는 다른, 기업이나 자본에 맞설 수 있다고 보는 논리인데, 생산자로서 자본에 맞섬이 쉽지 않듯 소비자로서 자본에 맞섬의 우위가 누구나 인정할 만큼 그렇게 커다란 차이를 줄 수 있을까? 설령 그렇지 않다고 했을 때, 용기를 걸고 추구해야 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뭔가 통통 튀는 듯한데, 막상 손에 잡으면 묵직함보다 가벼움에 살짝살짝 실망을 받는 느낌이다. 또 한가지, 기업을 협동조합으로 만들어서 노동자가 경영자가 된다는 생각은 김상봉 선생이 기업의 주인은 누구인가?’에서 말한 논리와 매우 유사성을 띤다.

[봉건 노예는 소비자가 아니지만, 프롤레타리아는 소비자입니다. 이것은 결정을 지을만한 차이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을 놓치고 있기 때문에 소비자 운동은 프롤레타리아트운동과 다른 것이라든 가, 노동자 파업은 이미 힘을 잃었다고 말해버리는 것입니다노동자와 소비자는 별개가 아닙니다. 노동자가 소비라는 장에 설 때에 소비자가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노동자는 그들이 가장 약한 입장이 되는 생산지점에서만이 아니라 오히려 강한 입장에 서는 유통의 장에서 소비자로써 싸워야만 하는 것이죠. 생산지점에서 노동자는 기업과 일체화되기 쉽습니다. 기업에 이익이 되는 일은 노동자에게도 좋은 일이기 때문이죠자본에 대항하는 또 한가지 요소는 노동력 상품을 지양하는 것입니다. 기업을 국유화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하면 국유기업의 임노동자가 될 뿐이므로, 노둥자 상품을 지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자본제 기업을 그대로 협동조합으로 만들어버리면 됩니다. 거기서는 노동자 자신이 경영자죠.]


국가는 의무라기 보다 권리,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보자는 것일까? 사실 국가가 자본을 지배하지 못하게 되면서 고진 씨와 같은 생각을 하는 상황은 이제 충분히 무르익었다. 분명 커다란 변화의 시기가 조만간 올 것이라는 신호가 여러 사람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말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사회주의 혁명이 띄었던 폭력성보다는, 유엔이라는 기존 조직을 통해 바꿔가자는 온건한 방법론을 제시한다.

또 하나 말하고 싶은 건, 일본의 책쓰는 분들이 잘하는 도식화 성향이 이분에게도 보인다는 것이다. 네가지 매트릭스가 나오고, 현재와 조만간의 미래 시국을 그 매트릭스에 투사해서 설명함이, 이해는 쉽지만 언제 우리가 매트릭스로 나타나는 역사를 살아 본적이 있을까?의 물음의 답으로는 그리 적절해보이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전쟁의 임박? 이 의견은 어느 정도 공감, 아니 이미 그 생각을 이미 해온 나로서는 겹쳐지는 이런 부분이 반갑다는 느낌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세계 전쟁은 과연 선진국보다 중,후진국이라는 범주에 더 큰 위험이 될 것인가?

[앞으로 선진국은 경제 성장이 없는 시대가 계속되어 그것에 익숙해져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어소시에이셔니스트가 해야 할 과제는 사람들을 국가에 의해 구제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의 힘을 기르도록 돕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러한 사회의 힘을 위한 시도를 막는 억압을 저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칸트가 말하는 국가연합은 본래 평화론이 아니라 시민혁명을 세계에 동시 실현하기 위해서 구상한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마르크스가 말하는 세계동시혁명과 칸트가 말하는 국가연합이 저의 이론 속에서 서로 이어진 것입니다물론 자본=국가는 완강히 저항할 것입니다. 이미 자본주의는 한계를 보이고 있음에도, 자본=국가는 간신히 연명하며 살아남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대항하는 것, 즉 그것을 새로운 세계 체제의 형성으로 전환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앞으로 남겨진 과제입니다현재 시점에서 증여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 포기/군비 포기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대로 일본인에게는 비교적 실현하기 쉬운 것이라 생각합니다제가 세계 동시혁명이라고 말할 때 마음 속에 그리고 있는 것은 전세계의 거리에서 시민의 봉기가 일어나는 것과 같은 그림이 아니라, 유엔의 획기스러운 변화일 뿐입니다. 이런 변화가 없다면, 세계 각지의 혁명은 결국 분열하고 고립되며 점차 사라져버리게 될 것입니다...칸트의 용어를 빌려서 말하자면, 이는 구성 이념이 아니라 규제 이념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이상은 점진화되어 달성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규제 이념이란 현실에서 실현될 수는 없지만 하나의 이상향으로 현실을 비판할 근거가 되는 이념)…제가 역사의 반복과 관련하여 염려하는 부분을 좀 더 정확히 하자면, 가까운 미래에 자본주의 경제의 위기가 증대하는 것과 더불어, 교환양식 B가 강화되는 순간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국주의 전쟁이 발발하게  될지도 모릅니다자본의 축적은 자급자족 경제에 속한 농민을 시장경제의 임금노동자와 소비자로 편입시키면서 유지됩니다. 1970년대까지 선진 사회에서는 이 과정이 한창 진행되었지요. 그러다가 일반 이윤율이 하락하게 되고, 그때부터 세계 자본주의는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자본은 당시 자본주의 경제 바깥을 편입시키며 세계 시장으로의 진출을 통해 그 출구를 찾았습니다. 이 과정이 세계화 입니다저는 세계 전쟁이 임박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경우만 해도 국내의 빈부 격차가 극도로 커졌고, 그를 맞는 사회 불만의 목소리도 많습니다. 그래도 일본은 그나마 괜찮습니다만, 대한민국 남북 격차는 세계 차원으로 보아도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입니다. 이대로 괜찮을 수는 없습니다. 선진국에서는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겠지만, 중진국에서는 그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갈등이 커지고 있는 것이지요…]


여러 이야기가 나온다. 중핵-주변-아주변이라는 중심-주변 이론, 제국과 제국주의의 차이, 영구평화와 세계동시혁명 등을 말한다.

[선생님은 세계사의 구조에서 세계=제국 단계에서의 중핵-주변-아주변의 구조(중핵과 주변이라는것은 바로 부르주아에 의한 잉여가치 취득 시스템의 한 혁신 부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극단으로 말하자면 자본주의란 프롤레타리아가 창출해낸 잉여가치를 부르주아가 취득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이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가 별도의 나라에 있는 경우, 잉여가치의 취득 과정에 영향을 미쳐온 메커니즘 하나가 국경을 초월하는 가치의 흐름을 통제하는 교묘한 조작이다. 거기서부터 중핵/반주변/주변이라는 개념으로 총괄되는 불균등 발전의 패턴이 생겨난다. 이 개념은 자본주의 세계 경제의 다양한 형태의 계급 대립을 분석하는 데 유용한 지식 개념 장치이다)를 설명하시면서 제국의 문명을 자율성에 기반하여 선택해서 받아들였던 아주변 국가인 영국과 일본은 근대 세계 시스템에서의 중심국가가 될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제국과 제국주의는 다른 것입니다. 제국은 근대 이전 광역국가의 한 형태입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이라는 하나의 제국이 있었고, 그 주변의 여러 나라들은 조공을 바치는 관계로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이 조공은 실제로는 중국 왕조 측의 답례가 더 많은 호수 교환 관계로 이뤄졌습니다. 제국은 이러한 교환으로 평화체계를 구축하려고 했지요. 이에 비해 제국주의는 근대의 네이션=스테이트가 확장되어 다른 나라를 지배하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대영제국이나 일본제국이라고 말합니다만 이들은 제국이 아닌 제국주의인 것입니다월러스타인은 자유주의나 제국주의를 직선의 일회성 역사 단계로 보지 않았습니다. 즉 그것들을 역사의 단계라기보다 반복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에 따르면 자유주의란 헤게모니 국가의 단계에서 세계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이고, 제국주의란 헤게모니 국가가 몰락하고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가 아직 확립되지 않아서 그것을 목표로 각국이 싸우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 둘은 번갈아 반복으로 일어나는 것이죠저는 다음에 일어날 세계 전쟁을 막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에 일어날 전쟁은 자본과 국가가 생존을 위해 일으키는 것이니까 그것을 막는 것은 곧 자본과 국가의 연명을 저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평화 운동과 혁명 운동은 별개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칸트가 말하는 영구평화와 마찬가지로 국가 간의 적대성이 없어진 상태, 즉 국가가 지양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 바로 세계동시혁명입니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그 방향성은 분명 우리가 생각해보고 우리 나름의 명확한 눈을 가져야할 분야이다. 현재 IT로 불리는 이 기술이 갖는 지향성이 무엇인지는 (만약 있다해도 아주 소수를 빼놓고는) 알지 못하며,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운 IT의 깜짝쇼 시청자로 주저앉았다. 과거 철기도 그랬을까? 결국 기술도 헤게모니의 문제일까?

[테크놀로지 문제 자체를 경시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만, 저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사상한 형태로 이루어지는 테크놀로지론과 문명론에는 언제나 반대합니다. 이런 논의들은 국가와 자본을 무시합니다.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산업자본주의를 낳았고,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식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산업자본주의가 테크톨로지를 낳았고, 국가가 전쟁을 일으켰으며, 전쟁 속에서 테크놀로지가 발전한 것입니다. 철기시대를 생각해봅시다. 당시는 강력한 무기로서 철기가 생산되던 시기였습니다. 그것은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가 아니었으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과거를 비추어봤을 때 새로운, 변화의, 혁명은 보편 종교의 형태라고 했는데 이때 보편 종교는 종교라는 말에 한정지어지기는 힘든, 문화나 그 이상의 메타 담론이나 개념어로서 그 모든 것을 포섭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보편종교는 유동민으로서의 자유=평등을 지향하지만, 역설스럽게 그것을 부정하고 억압하는 각 국가의 사제계급과 국가 자체에 의해 유지됩니다. 세계=제국에 종속된 것이지요. 그렇게 세계종교가 된 것입니다. 처음에 D는 보편종교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실제로 공산주의 운동은 근대 이전에는 항상 종교 운동 형식을 취했습니다. 일본에도 16세기 일향종이 좋은 예이고, 한국의 동학혁명도 그렇지 않습니까? 중국에서는 한왕조 말기 황건의 난 이후, 늘 도교와 관련된 종교 사회 운동이 있었고 그것이 왕조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마오는 종교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혁명에 성공했지요. 유럽에서도 마찬가지로 19세기 중반까지 사회운동은 모두 기독교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그 이후 기독교 배경은 사라지고 과학 사회주의(역사 유물론의 관점에서 현실을 과학으로 분석하여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이론이다. 이에 따르면 자본주의 생산방식이나 노동력의 착취에 기반하고 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즉 공산주의가 필욘으로 도래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가 주장되었습니다.]


자유와 평등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매우 중요한 영역이다. 둘중 어느 하나를 제대로 갖추기 매우 힘들고, 하나를 갖출 때 다른 하나는 같이 갖추기는 매우 힘든, 서로 상충되는 요인으로 판단된다. 그 자유와 평등, 아직 우리가 제대로 맛보지 못한 이념의 결과가 언제까지 우리가 목숨까지 바치며 추구해야 할 덕목일까? 게다가 둘은 같은 선상에 놓이기를 서로 썩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아 보이는데 말이다. 이제 우리는 지겨운 두 개념어를 넘어설 준비를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아니 그렇게 해야 우리는 우리 그리고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개인/ 사회 공동체로서 삶의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입니다. 서로 대립하는 개념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된 것입니다. 상반되는 개념인 자유와 평등이 양립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유를 중시하면 불평등이 생기고, 평등에 무게를 두면 자유가 억압되는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는 이렇게 위태롭게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다른 쪽에서 반발이 생깁니다. 그 결과 정권교체가 일어납니다. 선진국의 정치 형태는 이 같은 자유민주주의로 이루어지고, 이것이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말한 역사의 종언입니다자유민주주의 정치제체라고 하는 건 자본=네이션=국가일 뿐, 그것으로 역사가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유와 평등 양 끝 중 어느 한쪽으로 과도하게 치우치면 균형을 잡기 위한 운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스템 자체를 넘어설 순 없을까요? 제가 고민했던 바는 이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참고하는 아테네의 데모크라시는 바로 오늘날의 자유민주주으의 모습입니다.]


고진이 본, 마르크스가 보고 비판했던 헤겔은 법철학이었다고 한다.

[다른 헤겔 좌파들처럼 청년 마르크스도 헤겔을 비판하는 것으로 자신의 직업을 시작했습니다. 마르크스가 특히 초점을 맞춘 것은 법철학이었습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관념론을 유물론으로 전복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째, 마르크스는 헤겔 변증법으로 개념화된 자본=네이션=국가라는 삼위일체의 구조를 보지 못했습니다. 헤겔은 네이션과 국가를 초월의 위치에 둔 반면에, 마르크스는 그것을 경제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이데올로기 상부구조로 간주했던 것입니다마르크스가 헤겔의 생각을 뒤집었을 때, 마르크스는 역사를 이미 끝난 것으로서가 아니라 미래에 실현되어야 할 것으로 봐야 했습니다. 이것이 사물을 사후에 보는 입장에서 사전에 보는 입장으로의 이동입니다교환양식 A,B,C는 끈덕지게 남아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공동체, 국가, 자본은 끈질기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관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교환양식이 집요하게 지속하는 동안, 교환양식 D 역시 마찬가지로 끈질기게 지속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것이 억압받고, 은폐되었다 하여도 D는 계속해서 돌아올 것입니다. 칸트가 말한 규제 이념이란 바로 이런 것이지요칸트에 따르면, 국가연방과 궁극의 세계공화국이란 인간의 선의지 혹은 지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비사회의 사회성과 이를 통한 전쟁으로 도래하게 됩니다. 이 같은 관점을 헤겔은 이성의 간지와는 반대로 자연의 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와 같은 칸트의 낙관주의는 가혹한 회의주의를 그 바탕에 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19세기 내내 헤겔의 관점이 지배해왔습니다. 제국 사이에서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 계속되었고,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귀결되었지요. 결국 전쟁으로 황폐화된 세계에서 사람들은 영구평화라는 칸트의 관념을 다시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국제 연맹은 자연의 간지에 의하여 현실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부 윤리의 정치화, 정치의 윤리화

고진씨가 말하는 새로운 지평이 어떤 건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근대 철학이 제기하는 문제들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면서도 새로운 지평을 마련하지는 못하는 교착상태 말이다. 물론 이러한 패러독스를 피할 방법은 있다. 푸꼬의 논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주체의 문제를 구조 토대의 차원으로 끌어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레스테이아 열린책들 세계문학 197
아이스킬로스 지음, 두행숙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레스테이아는 이 책의 주인공인 오레스테스의 이야기라는 말이다. 지금 존재하는 수많은 나라가 서기라는 숫자매김을 시작하고도 한참뒤에 생겨났다. 그렇지만 만약 오레스테이아가 쓰여진 연도나 글쓴이가 누구인지 모르고 읽어보면 시간의 흐름이 무색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것이다. 이 책을 보면서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떠오른건 누구나 그렇게 결론으로 갈 만큼 이야기 소재와 풀어나가는 데 있어 공통점이 보인다. 그렇다면, 적어도 서양의 위대한 이야기의 근원은 그리스 로마로 올라간다고 환원지을 수도 있을까? 마치 서양의 철학을 플라톤으로 귀결시키는 의견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전에 움베르토 에코가 책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까지 전해지는 이야기가 과연 그 시대의 가장 대표할만한 것들이었나를 놓고서 공동으로 쓴 다른 글쓴이와 잠시 이야기 나눈 대목이 생각난다. 그점이라면 이 책은, '맞다'고 말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작년부터 읽어왔던 그리스 로마의 고전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를 관통한다. 제우스를 비롯한 그 형제들과 다른 신, 그리고 그 윗대의 크로노스와 탄탈로스 무리들, 그리고 아테네와 전쟁에서 막판에 허무하게 무너져버린 트로이까지


비극, 그것도 가족간 비극. 가족이지만 왕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 내 한몸 가누려고 해도 정말 많은 욕심과 무례, 관습의 어긋남, 때로는 지어야 하는 철면피같은 표정. 이 모든 것은 왕의 가족들에게서 충분히 나올 만한 정황이나 이야깃거리라고 본다. 오늘날로 보면 기업의 역사, 그걸 둘러싼 기업주와 그 가족들의 역사를 투영해보면 비슷하지 않을까?


이 책이 아닌, 트로이 전쟁사나 다른 이야기책을 보면 나오는 아가멤논은, 무뢰한이자 야심과 욕심이 철철 흘러내리는 인간이다. 그런 사람이 이 책에서는 문득 나왔다 사라져버림이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책의 이야기 흐름이 어색하다는 말은 아니다.


문득 그리스의 비극이 유행하던 시대로 돌아가, 배우와 코러스가 장엄하게 연기하는 그 광경을 보았으면 얼마나 가슴이 뛸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 책을 보다가 드는 의문은, 이 책의 결말을 보면서 이게 과연 비극일까 싶은 물음이 떠올랐다. 며칠 되새김질해보니 그럴 듯도 싶긴 하지만, 그동안 익숙하게 생각했던 비극과는 그 뜻이 조금은 다르지 않나 싶다. 그리고 그리스 신은 과연 신일까 아니면 사람과 신의 중간단계쯤에 있는, 사람보다 뛰어난 존재지만 신으로 부르기에는 사람과 닮은 슈퍼 히어로 정도일까? 하는 궁금함이다. 아마도 민주주의의 발전은 신에게 조차 그 영험함을 다 주기에는 인간의 위대함을 양보하기 싶어하지 않는 초기 인문주의자들이 아니었을까?

 

문체가 분명 오늘날과는 다른데 , 그 다름 속에서 참신함이라는 모순의 감정이 느껴진다.

1. 아가멤논

[노인이라도 배움에 있어서는 항상 젊은 법이지요예부터 인간 세상에 잘 알려진 속담이 있으니, <사람의 행복이 커지고 부유해지면 자식을 낳게 되니, 자식 없이 죽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그러나 행복의 뜰 안에는 만족할 줄 모르는 불행이 싹터 자란다!>…해묵은 죄악은 계속해서 죄악을 낳고 새로운 죄악으로 더욱 번성하게 되니, 오늘이든 내일이든 때가 되면 그 열매의 저주는 또다시 죄악을 낳는다네. 결코 피할 수도 견딜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없앨 수도 없는 일. 어두은 저주의 불경하기 그지없는 오만함은 그 집안의 아비를 닮았구나...커다란 행운을 누리는 친구를 시기하지 않고 존중해줄 수 있는 기질을 타고난 사람은 드물다. 악한 마음의 독기는 사람의 마음에 파고들어 시기로 병든 자를 이중의 원한으로 괴롭히는 법이다. 자신의 불쾌함으로 마음이 무겁게 짓눌리는 데다 또 남이 잘되는 것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사람과의 교류란 거울에 스쳐가는 그림자처럼 허황된 것에 불과한 것을 과거에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운명이여! 행복할 때는 그림자처럼 뒤집히기 쉽고, 불행할 때는 젖은 해면으로 한번 훔치면 지워져버리는 그림과 같구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처럼 지워지는 운명이 나에게는 더욱 슬프구나.]

 

2. 제주(祭酒)를 바치는 여인들

[나를 지배하는 자의 행위가 옳든 그르든 강요에 못 이겨 그 행위를 찬양해야 하고, 마음속의 증오를 잊어야만 하네!...위대한 힘을 지닌 운명의 여신들이여, 제우스의 힘으로 정의가 나에게 다가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모ㄱㅈㅓㄱㅇㅡㄹ 이루도록 해주소서. <네가 소리치면 그 메아리가 되돌아온다! 증오는 증오를 낳는다> 이렇게 정의하는 죄지은 자의 죗값을 거두어들일 때 소리 높여 호통을 친다! <피 묻은 칼에는 피 묻은 칼로 보답하라! 행한 자는 그대로 당해야 한다!>...그러나 인간의 파렴치하고 대담한 교만과 비길 것이 무엇이며, 인간들에게 고통을 수반하는 뻔뻔하고 욕정에 빠진 여인의분별없는 욕망과 비길 것이 무엇이랴? 여인의 강력하고 제어할 수 없는 욕정은 심지어 짐승의 욕정마저도 능가하는 것을...]

 

3. 자비로운 여신들

[무서운 것도 적절한 곳에서는 이롭게 작용하느 stn가 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속에는 감시자가 늘 지키고 있어야 한다. 고통의 눈물을 통해 엄한 훈련을 하는 것도 이로울지니. 인간이든, 백성이든, 한 나라든 만약 마음 속에 정의를 맞는 두려움이 자리하지 않는다면 어찌 스스로 정의를 존중하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자본은 일하는 자보다 더 많이 버는가 - 피케티와 경제 전문가 9명이 말하는 불평등 그리고 한국 경제
류이근 외 지음 / 시대의창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회의 차별은 오직 공익에 바탕을 둘 때만 가능하다 - 프랑스 혁명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1.


프랑스 혁명은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본 혁명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졌고, 자유 평등 박애의 세가지 정신은 똑같이는 아니지만, 근대 이후 국가 그리고 시민이라는 주체의 생각과 활동에 골고루 영향을 주었다. 그 정신이 과연 경제나 정치에서 지금까지도 그 뜻을 유지하면서 나아가고 있는가? 점점 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가고 있고, 피케티는 지금까지의 경제를 보면서 불평등이 더 심화되고 있음을 분석하여 그 유명한 21세기 자본이라는 책으로 펼쳐 내었다. 피케티의 책은 나오자마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 흐름은 한국까지 건너왔다. 그리고, 반피케티 진영의 비판이 곧바로 생겨났고, 그 비판이란 게 건전-생산이란 관점에서 보면 참으로 그와 멀리 떨어진 비판으로 뻗어나가서 한국의 경제학자를 바라보는 눈은 조금 더 비관으로 다져지게끔 되었다.

피케티의 대단함은, 두개의 공식으로 300년이 넘는 자본주의 역사를 해석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일종의 메타 법칙으로 현상을 설명했다는 점에서, 피케티는 이미 거인의 어깨에는 올라갔다고 평가된다. 이 와중에 피케티의 책을 뜯어보고 뜻깊은 의견을 내는 국내 경제학자 9명을 뽑아서 그 생각들을 이 책에 모아놓았다.

 

21세기 자본과 경제학 이준구
이 분의 미시경제학 책은, 25년전 대학교 다닐때 바이블로 불렸고, 나 또한 이분의 책으로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국내 경제학과 교수님들이 갖는 보수성이 조금은 덜 해보이고, 글을 매우 깔끔하게 쓰시는 분으로 알고 있고, 이런 분이 피케티의 생각을 말씀해주셔서 반가운 마음이 크게 다가왔다. […자본주의 체제는 왜 외부 제약이 없는 한 끊임없이 불평등화의 길을 달릴 수 밖에 없는 것일까? 피케티는 다음과 같은 두 자본주의 법칙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선 자본주의의 제1 기본법칙은 다음과 같다. α = r X β (α는 국민소득 가운데 자본소득 비율, r은 자본수익율, β는 자본/소득 비율) 이 법칙은 언제 어디서나 성립하는 보편 성격을 갖는데, 국민소득 가운데 자본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은 자본수익률과 자본/소득 비율의 곱과 같다는 내용이다. 자본주의의 제2법칙은 다음과 같다. β = s/g (s는 저축율, g는 경제성장율), 이 법칙 역시 보편 성격을 갖는 법칙으로서, 한 경제의 자본/소득 비율은 저축율을 경제성장율로 나눈 값과 같다는 내용이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피케티

피케티의 육성으로 자신의 이론과 생각을 설명한다. 한국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신자유주의로 불리는 영미의 경제 운영 방식이 한국으로 스며들어와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식으로 던저졌고, 당시 정권은 이를 덥썩 물고 우리에게는 받아들일 것을 유혹하거나 강요했다. [IMF의 권고로 외환위기 이후 채택된 개혁 조처의 일부는 한국에서 소득불평등의 증가에 곧바로 영향을 줬어요. 특히 금융 규제 완화의 탓이 큽니다. 금융제도 완화는 한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의 불평등 확대를 부채질했습니다. 금융규제 완화 탓에 더욱더 복잡한 금융상품이 등장했고, 소수의 금융자산가는 더 높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는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렇다고 IMF탓만 해서는 안됩니다. 한국의 정책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IMF를 비난하는 건 너무 단순합니다. 외환위기 이전부터 한국 정부도 대규모 감세 정책을 펴왔잖아요가장 중요한 해결책 둘을 꼽으라면 교육과 조세체계의 누진성 강화입니다.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하는 식의 대체관계가 아니라, 이 둘을 동시에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08년 세계금융위기와 아시아 외환위기를 겪은 우리는 자본주의를 공익 아래 두는 민주주의 장치를 다시 생각해야만 합니다. 민주주의가 사유재산과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지 않고, 사유재산과 시장의 힘이 민주주의의 노예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지금은 이런 논쟁을 다시 해야할 때입니다. 자본주의의 역사/비교 관점을 보여주려 노력한 제 책이 이러한 쟁점을 다시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토마 피케티에게 묻다 - 피케티 이강국

우리나라에서 피케티를 이해하는 가장 쉬운, 그러나 잘못된 방법은 좌파, 맑시스트 경제학자라는 프레임에 가두는 것이다. 일제 이후 형성된 이 주홍글씨는, 이미 우리 몸속에 하나의 기제로 박혀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좌우로 나누기에는 경제학자의 생각이 다양하고 그 부류를 부르는 이름과 기준도 꽤 많이 있다. 그리고 피케티는 분명 맑스와는 거리를 두고 있고 그 후계자로 이름짓기에는 자본주의 체제의 지속성을 가져가고 싶어하는 쪽이 더 맞다고 말하고 싶다.

다른 또하나는,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유럽 등에서 얘기되고 있는 법의 유효성을 더 들여다봐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법 바깥에 있는, 법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법을 만들고 이를 강제하는 지금까지의 구도가 과연 의미가 있을까? 그 한계가 바로 얼마전 한국에 나타난, 말도 안되는 정치 농단의 현상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법이 신뢰를 잃었을때, 과연 그 법의 테두리 속에서 정의를 찾기 위한 시도가 얼마나 약발이 먹힐까? [이강국) 불평등 동학이 필연이라는 말은 아닌건가요? 피케티) 경제 동학에서 불가피한 것은 없습니다. 경제사는 우리가 선택한 제도와 정책의 역사입니다피케티) 저를 혼동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성장해야 한다는 데 찬성합니다. 교육 투자는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방법은 인구가 줄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러려면 성 평등을 증진시켜야 합니다. 또 경력 단절 없이 남녀가 자녀를 키울 수 있도록 더 나은 제도를 만들고 보육 지원을 늘려야 합니다. 생산성 향상 만큼 인구도 증가할 거라고 믿습니다. 제로 성장을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자본수익률이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부를 향한 누진세 부과를 바랍니다. 그래야 새로운 사람이 부를 쌓고 부의 이동성도 더 커질 수 있습니다. 부의 집중을 억제하기 위해서 매우 큰 부와 관련된 수익률이 줄어들기를 원하는 겁니다이강국) 하지만 한국 등 동아시아 모델의 패러다임이 1997년 이후 깨진 것 같습니다피케티) 인구 증가율의 감소와 민주주의의 힘이 불평등 동학에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중국과 한국에서 인구 증가율의 감소는 상속 재산이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해진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때문에 재산 과세는 상속할 때는 물론이고, 그 이전에도 무척 중요해집니다. 법에 기초한 부와 재산 관련 현대 조세제도를 발전시키는 게 중국을 포함한 모둔 아시아 국가에 앞으로 중요할 거라고 봅니다.]

 

피케티와 분배 정의 이정우

이정우 교수는, 내가 아는 경제학자 중에서 가장 분배를 강조하는 사람이다. 참여 정부 때 정책 실장으로 일했고, 그때 그 경력이 내 귀에 꽤 큰 울림으로 남아있다.[ 피케티의 핵심 개념이 자본입니다. 두 번째 핵심개념은 불평등일 겁니다. 자본으로 인한 불평등을 말하는거죠. 자본의 집중과 거기서 발생하는 불로소득, 이것이 가져오는 불평등이 피케티 책의 키워드입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21세기 자본을 읽기 전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떠올렸어요. 우리나라 말로 옮길 때 책 제목을 21세기 자본론으로 해야 하는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읽다 보니 그러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불평등과 불공평은 좀 다른 의미입니다. 불평등은 객관 사실을 말하고, 후자는 주관의 가치판단이 들어있습니다. 피케티는 전자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후자를 이야기하려면 가치판단을 해야 하는데, 사람마다 달라 설득하기가 쉽지 않죠. 피케티는 상위 집단의 소득 몫, 또는 자본에 돌아가는 소득 몫이 아주 커지는 것은 명백히 불평등하고 암묵상 불공평하다고 가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엄밀한 과학의 기준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접근은 충분히 상식에 맞는 가치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상위 10%의 소득 비율이 50%로 올라갔을 때는 위험하고, 33% 수준일 때 제일 양호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위 10%가 전체 소득에서 가져가는 몫이 2분의 1에 이르면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 대공황을 일으키고, 3분의 1일 때 황금시대를 연다고 할 수 있겠네요맬서스의 인구를 빼고 거기에 자본을 대입하면 피케티가 됩니다. 미래를 꽤나 우울하게 내다보는 게 똑같아요. 피케티에게 상당히 맬서스와 같은 게 있습니다. 물론 쿠즈네츠 같은 면도 잇죠. 피케티는 여러 선각자의 종합판이자 후예입니다…피케티가 시장 만능주의자가 아니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제도학파에 가깝습니다. 사회 국가론은 아주 좋은 접근법입니다. 내용을 보면 복지국가 옹호론입니다. 그런데 막상 정책에 가서는 세금 위주로 다뤘습니다. 소득세 누진성 강화와 자본세 도입 정도 밖에 없어요. 그래서 최저 임금제나 기본 소득 등 노동이나 복지, 사회 정책에 관한 논의가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케티가 나중에 보충해야 할 점입니다.]

 

노동소득과 경제 성장: 피케티가 말한 것, 말하지 않은 것 이상헌

국제노동기구에 근무하는 경제학자라면 제도권 경제학자보다는 노동, 분배에 좀더 관심이 있고 학문과 연구 측면에서도 경제학이 말하는 효율의 굴레에 한정짓지 않을 수 있는 처지가 조금 부럽다. 이 박사님에 따르면 노동소득은 선진국조차 상승이 드물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시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경제 생산성이 증가해도 그 열매는 자본에서 따먹고 마는 모양새가 지금까지 이어왔고, 한때 자주 말해지던 낙수효과란 한마디로 멍멍이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라는 말은 이상헌 박사를 포함한 노동 중시 경제학자의 생각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표현한 것이다. […임금의 일반 법칙이란 게 만일 있다면, 그건 아마도 노동생산성이 느는 만큼 임금도 늘어야 한다는 겁니다. 지극히 상식스러운 말입니다. 임금이란 노동자가 생산에 기여한 몫의 보상입니다. 그런데, 그 법칙이 깨지고 임금이 노동생산성을 따라가지 못하는 일이 빈번해졌습니다. 일시 현상도 아니고, 몇 국가에 한정된 문제도 아닙니다. 구조와 세계의 문제죠. 물론 우려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제학자들은 이른바 낙수효과란 용어를 만들어서, 언젠가 경제성장의 혜택이 모두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그런 일이 생기지도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생긴 일이라곤, 1930년대 세계 대공황 이래 가장 심각한 세계 경제 위기였습니다. 경제학은 예측의 과학이라고도 하지만, 이를 예측한 경제학자는 드물었죠지금 와서 보니까 노동소득 몫은 꽤 오랫동안 하락세였습니다. 이런 추세는 선진국의 경우 적어도 30년 가까이 진행돼어 왔습니다. 또 흥미로운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80년대 이전까지는 대체로 증가세였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추적하다 보니, 피케티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노동 소득 몫은 역사에 발맞춰 변화해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결국 자본주의 시기를 통틀어 잠시 동안 보였던 노동소득 몫의 안정성은 일시의 역사 현상이었습니다. 경제학계에서는 이를 법칙으로 본, 돌이켜보면 웃지 못할 해프닝이었습니다. 약간의 기적이라고 했던 케인즈의 직관이 옳았던 셈입니다궁극으로 볼때 세계화에 따른 노동자의 협상력 약화를 중시해야 한다고 봅니다. 세계화는 한때 큰 흐름이자 바람이었지만, 동시에 세계화 자체를 절대선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계화는 경제의 개선을 위한 하나의 중요한 방식이었는데, 어느 순간 주객이 전도돼 그 자체가 목표가 되었습니다. 세계화를 하겠다고 각종 정책과 제도를 서로 경쟁하듯 바꿨어요. 국제 자본이 더 좋아할만한 방식, 수출 기업에 더 도움이 될세계화는 공식으로 무역의 자유와 자본의 원활한 이동을 통한 상호 이익추구라는 원대한 구호를 내세웠지만, 그리고 적어도 이론으로는 그럴 수 있지만, 세계화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본과 노동 간 힘의 관계를 바꾸었다는 점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국제노동기구헌장에 명시돼 있는 유명한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불평등의 확대는 경제성장의 구조상 제약 요인입니다. 이 문제를 해소하지 않으면 저성장의 늪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이제껏 한국 경제는 그나마 순수출 확대를 통한 수출주도 전략에 의존해왔는데, 전 세계 경제가 악화되는 상황에서 이 전략에 계속 의존하기느니 힘듭니다. 소득불평등을 줄이면서 내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는게 옳다고 생각합니다….최근 연구 통계를 보면, 한국의 상위 10%가 가져가는 소득 몫은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미국과 거의 맞먹습니다. 과감한 정책 전환의 필요성을 시사하는 통계가 아닌가란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게 제 개인의 짐작입니다.]

 

경제사상사로 본 피케티 홍훈

어느 새 부터인가 시장을 거의 만능에 가까운 체계로 보는 주장이 아주 강한 힘을 갖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손으로 유명한 아담 스미스조차 시장을 만능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누군가에 의해 생략되고 시장에서의 교환을 지금껏 만든 그 어떤 장치보다 전지전능한 것이므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한다. 홍훈 교수 표현을 따르면 자본주의 경제면 다 똑같다는 그런 순박함이 대부분의 경제학자한테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제라는 분야 또는 학문이 갖는 절대의 이상향/목적은 무엇일까? 성장을 꾸준히 이룬다고 가정했을 때, 그리 되면 무엇이 달성되고 나타나는가? 혹시 우리는 성장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우리 스스로에게 굴레를 만들고 있지는 않을까? [시장에서 불평등이 자동으로 조정되는 게 아니라 내버려두면 막갈 수 잇다는 겁니다. 시장에서 조절 또는 안정이 이뤄진다고 전혀 보장할 수 없다는거죠. 1970,80년대 이후 계속 불평등이 커지고 있는데, 이처럼 시장에 내맡기면 어느 정도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계속 커질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따라서 정책이나 제도를 강구해서 불평등을 억제해야 한다는 겁니다. 피케티가 누진세 강화나 자본세를 얘기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주류 경제학은 보편 이론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미국, 한국, 유럽, 일본 그 어디에서도 적용되는 이론을 추구하는거죠. 자연과학 비슷하다고 할까요. 이런 성향이 처음부터 있다가 나중에 더 확산됐죠. 따라서 주류 경제학은 미국과한국, 일본, 독일 시장이 다 다라다는 얘기에 익숙하지 않아요. 사회과학자 가운데 경제학자가 이 부분에 가장 친숙하지 않을 겁니다. 인류학이나 사회학이나 정치학에서는 미국과 일본은 다 다르다고 접근할 텐데, 경제학은 시장경제면 다 똑같다고 보려 합니다. 자본주의 경제면 다 똑같다는 그런 순박함이 대부분의 경제학자한테 있어요. 모든 경제학자는 아니지만, 학문의 성격이 좀 그래요과연 미국과 같이 이미 고도로 산업화된 나라에서 성장을 추구하는 게 과연 맞을까? 성장하기 위해서라면 우리가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데도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성장해야 할까? 경제란 것은 여타 정치나 문화, 가치 등에 봉사하기 위한 것이잖아요. 그런데 끝없이 성장해야 한다면 결국 경제가 성장의 노예가 되는게 아닌가요? 기본소득론자, 환경론자 같은 사람들은 경제성장 자체가 목적이 돼서는 안된다고 합니다자본이 어떤 수준 이상이 되면 자기 스스로 확대 재생산하기 때문에 덩어리가 커져서 소득 불평등이 악화된다는 게 피케티의 생각입니다. 이 부분은 마르크스와 유사합니다. 이런 논리 속에서 자본의 크기를 관리해야 한다는 피케티의 생각은 특별합니다.. 자본이란 저량 자체를 관리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은 과거에 없었습니다이 지점이 생소합니다. 토지는 움직이지 안잖아요? 그런데 자본은 워낙 활발하게 움직이니까 토지와 달리 위치를 추적해야 한다고 얘기하잖아요. 그래서 국제 간 협조도 필요하다느 겁니다. 자본이 프랑스에 있는지, 케이만 군도에 있는지 등을 다 파악해야 한다는 제 좀 특이합니다소득 분배를 이야기하려면 사회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말해야 하고, 어떤 수준의 불공평은 허용되고 어떤 수준은 허용되지 않는가를 따져야죠. 소득 분배에 뭔가 객관의 기준을 제시하려는 사람들의 논의와 결합시키는 게 필요합니다. 피케티는 이를 많이 얘기하지 않지만, 논의가 이미 다른 곳에서 꽤 있어요. 이문제는 간단치 않아요. 롤즈나 아마르티아 센,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 등의 관련 논의를 거쳐서, 이런 정도의 평등이 돼야 하고, 이런 정도의 불평등은 안된다는 얘기가 나타나야 합니다. 거기에 근거해서 피케티의 자료를 보아야 불평등을ㅇ ㅓ디까지 허용할 수 있고 또 허용할 수 없는지 얘기할 수 있을 겁니다. 정책도 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요. 누진세율은 어느 정도로 할 것인지, 자본세 도입 말고 또 다른 뭘 해야 할지 말입니다주류 경제학계는 소득 분배 문제를 별로 강조하지 않습니다. 외국 뿐 아니라 한국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소득분배 문제 자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 경제학계는 미시 이론, 소득분배 이론, 한계생산성 이론을 한번 더 성찰해야 합니다. 이에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실제 소득이 어떻게 배분되고 있는지, 능력에 따라서 배분되는 게 과연 어디까지인지, 과연 남을 굶겨 죽여야 할 정도로 많은 100, 200배 보수를 받는 게 맞는 건지 고민해봐야 합니다. 소득분배 이론은 절대 경제이론만 갖고서 답을 찾을 수 없어요. 피케티를 비판한 맨큐 하버드대 교수도 인정한 겁니다. 우리 경제학계에서도 순전히 수리 모형이나 통계 모형 뿐 아니라 철학의 성찰도 함께 해야 합니다.]

 

주류 경제학자가 본 피케티 신관호

자본은 가치판단이 없이 스스로의 증식만을 목적으로 한다. 그 무한한 욕심이 때로는 사람들에게 잘살고자 하는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동력으로서 지지되어 왔으나, 피케티가 책으로 말하는 정도로 사람들 사이에 격차가 매우 커져버렸다. 이제는 그 문제를 정말 중요하게 인식해야 함에도 아직 주류 경제학에 계신 분들은 그 심각성을 놓치고 있어 보인다. 사람을 목적으로 하지 못하는 학문으로 변질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불평등이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과거에도 상당히 많은 연구가 있었습니다불평등이 늘어나면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되냐 안되느냐는 거시경제학의 오래된 관심이었습니다피케티의 생각성장과 분배가 상충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분배를 촉진시키면 성장을 더 이룰 수 있다고 믿습니다부의 불평등도가 비교해 봤을때 낮은 미국에서 소득불평등도가 가장 높습니다…정치의 힘이 작용그보다 경제의 힘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자본과 노동의 몫 분배가 악화됐을 때는 필요한 노동 이상의 잉여노동이 많았을 때입니다. 19세기 같은 상황이죠. 이때는 한동안 임금이 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기술이 자본에 유리하게 작용한 요인이 큽니다. 기술이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발전하는 게 상당히 큰 영향을 주고 있어요. 이런 경제의 힘이 노동소득 분배율 악화에 더 중요한 영향을 준다고 봅니다…피케티는 인구 증가율이 감소하면 성장률도 감소한다고 봅니다. 자본수익률이 성장률보다 크면 불평등이 커진다고 봅니다. 그런데 저는 그 주장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겠어요. r g보다 크다고 해서 과연 그렇게 될까 의문입니다자본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부의 대물림도 얘기하고, 자본에 의해 생기는 소득불평등도 얘기하지만, 미국이나 한국이나 아직까지는 자본에 의한 소득불평등보다 노동소득에서 생기는 불평등이 최근의 소득불평등 악화 현상에 더 영향을 주었다고 봅니다. 피케티는 최상위 소득층인 1% 0.1%의 소득 집중에 관심이 매우 쏠려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국에선 중산층 몰락이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부분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로 본 피케티와 불평등 이강욱

순서로 보면 신자유주의의 이념이 나오고, 이 이념을 보편화하려는 시도가 세계화로 이어진다. 서구 뿐 아니라 한국도 이 흐름속에 휘말렸고, 그 속에서 자본과 노동이 갖고 있던 그때까지의 질서가 깨져버렸다. 하지만 가치판단이 개입하지 않고 오로지 커지기만을 희망하는 돈(자본)의 논리 속에서 인간의 어떤 저항 논리도 아직까지 완벽한 승리를 얻지 못했다. […피케티가 굳이 주류 경제학의 대체 탄력성 개념에 기초하여 역사 변화를 설명하려다 문제가 빚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피케티도 정치 경제학, 세력 간 역학관계, 제도와 정치를 중시하긴 했어요. 하지만 저는 자본수익률이나 대체탄력성은 기술 개념보다는 정치 요인을 더욱 고려해서 설명해야 된다고 봅니다.  80년대 이후 자본/소득 비율이 커졌는데 왜 자본수익률은 빨리 떨어지지 않았냐고 할때, 신자유주의 등이 역학관계를 바꿨다고 볼 수 있거든요. 이전보다 노동자들의 힘은 약해졌고, 금융화가 되면서 자산 시장의거품이 커졌잖아요. 이러한 정치 변화가 자본수익률을 덜 떨어뜨렸을 수 있습니다. 세계대전 이후에 이전과 정반대로 나타났던 현상도 똑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그래서 조건부 수렴 이론이 등장했죠. 배로 교수 등이 주장한 개념입니다. 가난한 나라는 선진국과 상황이 같지 않으니, 매개변수 자체가 다르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선진국은 저축률이 높고 인간자본이 크지만 가난한 나라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는 식입니다. 이런 변수를 다 통제하고 나면 비로소 가난한 나라의 성장률이 더 높게 나온다는 것이고 이는 보통의 현실에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피케티는 자본 소득을 자본 전체로 나눈 실질수익률이 연간 4~5퍼센트 정도 된다고 봅니다. 피케티는 소득에 비춰 재산의 크기가 커지고 있으며, 동시에 수익률은 별로 하락하지 않기 때문에 자본소득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몫도 커졌음을 보여줍니다. 피케티는 이 메커니즘을 막을 자연 발생 또는 자기 교정 기제는 없다고 봐요. 오히려 가만히 놔두면 자본의 크기나 자본소득은 더 커진다는 겁니다. 돈이 돈을 낳는다는 거죠. 문제는 자본소득은 노동소득보다 훨씬 더 불평등하게 분배되니까, 이렇게 되면 전체의 불평등이 더욱 악화될 수 있다는거죠…최근 분석한 바를 보면, 우리나라의 자본/소득비율인 β 7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선진국에 견줘 무척 높은 수준입니다. 주로 부동산의 영향때문인 듯 한데, 이는 곧 우리나라의 자본이 많이 축적되어 있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또한 자본소득이 전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 α도 최근 증가하여 약 40%가 넘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세금 데이터를 이용하여 자본소득이 얼마나 불평등하게 분배되는지, 즉 상위 1% 그룹이 자본소득, 즉 배당소득이나 이자소득 등에서 얼마나 차지하는지 등의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하지만 우리나라는 아래쪽 고민을 더 많이 하는 게 필요합니다. 세금 뿐 아니라 최저임금을 높이고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고, 특히 노동자의 힘이 강화되어야 하겠죠. 대기업이나 공기업 등 소수의 좋은 일자리와, 중소기업이나 비정규직 등 다수의 일자리 사이의 임금격차를 줄이는 방법도 고민해야 합니다. 또한 누진소득세든, 글로벌 자본세든, 그 어떤 세금이든, 성장이든 그 혜택이 아래쪽으로 제대로 내려가게 해야 합니다. 시장에 맡겨두면 안 되니까 세금과 복지를 통한 불평등 완화 노력도 매우 중요하죠.]

 

피케티 방법으로 본 한국의 불평등 김낙년

무조건 성장해야 한다는 종교와 같은 믿음 속에서, 성장이 원하는 만큼 따라와주지 않을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꺾임 속에서 그나마 우리는 왜 성장해야 하는지 물어볼 용기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함께 산다는게 무언지 깨닫게 해주는 소중한 기회가 되기도 할 것이다. [고도성장기엔 고용 창출이 빠르게 이뤄졌어요. 분배 정책이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지만 사실상 분배가 잘 이루어진 셈이죠. 굳이 정책을 쓰지 않아도 성장 효과가 널리 확산되었기 때문이죠. 이에 비해 지금은 경제 성장이 정체 되어 분배 문제가 더 첨예한 갈등으로 나타나고 있어요. 90년대 전후로 우리의 경제 구조나 국제 위상이 변하면서 만들어낸 현상입니다. 우리나라의 불평등이 커진 이유 가운데 하나죠우리나라에서 노동소득의 불평등도가 커졌지만, 그 밖의 소득을 포함하여 전체 소득의 불평등도 상승은 좀 더 빨랐던 것으로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자본소득이 우리나라의 불평등 증가에 좀 더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피케티 레볼루션이라고 한 것은 가계조사의 한계를 넘어 상위층이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같은 새로운 지표를 가지고 불평등 추이를 매우 장기간에 걸쳐 보여준다는 사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피케티의 방법을 많은 나라에 적용하여 국제 비교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소득은 물론이고 부의 불평등에도 마찬가지 접근이 가능합니다. 피케티는 소득과 부의 불평등 추이를 프랑스 대혁명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여줘요. 이를 이용해 새롭게 자본주의의 불평등 동학을 만들어낸 거라고 할 수 있어요. 불평등을 보는 사람의 관점을 상당히 바꾸었다고 해야겠죠우리나라는 경제에서 서비스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 나라에 비해 낮은 편입니다. 제조업 비중이 크기 때문이죠. 이를 뒤집어 보면 서비스업에서 부가가치를 키울 수 있는 여력이 그만큼 크다고 볼 수 있죠. 제조업 제품의 경우 국제 경쟁에 노출되어 왔기 때문에 이미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요. 이에 비해 우리나라 서비스업의 질은 그렇지 못합니다. 서비스는 여러 형태로 제도 보호를 받고 있어요. 그렇다보니 국제 경쟁에 노출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예를 들면 의료 분야 개방을 놓고서도 정치 입장의 차이 때문에 제도를 바꾸기가 여간 힘들지 않습니까? 교육의 경우는 어때요? 우리나라만큼 교육에 엄청난 자원을 퍼붓고 있는 나라가 드믈다고 생각하지만 그 효율은 높다고 생각되지 않아요. 교육제도를 개선하여 성장 잠재력을 높일 수 있는 여지는 그만큼 크다고 봅니다. 결국 이러한 제도 개선을 주도할 수 있는 정치가 문제이긴 하지만, 서비스업 발전이 앞으로의 경제 성장에 중요한 과제가 된다고 봅니다.]

 

피케티의 해법과 조세정책 강병구

조세라는 말이 갖는 습관성 거부감은 잠시 제쳐두고, 자본주의의 지속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소수에게 자원(자본)이 집중되는 현상은 최대한 막고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피케티는 자본주의를 흔들어서 새로운 미래를 보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체제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꿈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면 그 세계 또한 신의 왕국이 아닌 이상 뛰어넘어야 할 장벽일 것이다. [피케티는 자본이 소수의 손에 집중될 경우 기업가 정신이 훼손될 수 있다고 봅니다. 예컨데 자산이 소수에게 집중될수록 자산 보유자들은 기업가 정신을 발휘해 창조스러운 생산 활동을 하는 게 아니라, 금리생활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거죠. 이런 측면에서 세습자본주의에 경고하고 있습니다.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이 "과거가 미래를 집어 삼킨다"는 것입니다. 상속과 증여 등으로 부가 계속 집중되고, 거기서 나오는 이자, 배당금, 임대료 등 자본소득이 지배 계층의 생산과 재생산의 기반을 형성하게 되면, 경제의 생산 동력이 떨어진다고 보는 거예요. 피케티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역동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오히려 자본 과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우리나라와 같이 지하경제 규모가 크고 차명계좌를 활용하여 비자금을 관리하거나 탈세를 하는 경우에는 자산으로부터 발생하는 소득을 정상 과세하기가 어렵습니다. 숨겨진 금융 자산의 소유 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도 순자산 과세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자본시장이 자유화되고 조세회피처를 매개로 역외탈세가 만연하는 경우에는 금융시장의 투명화를 위해서도 자산 과세가 필요합니다…저소득 계층은 세율에 좀 반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고소득 계층은 별로 반응하지 않아요. 반응을 하더라도 오히려 세율이 올라가면 노동공급이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어요. 실제 고소득 계층은 계급이 조금 올랐다고 해서 일을 그만두지 않잖아요…우리나라의 경제 성장률도 계속 떨어지고 있구요그렇기 때문에 노동소득 분배율을 높이고 조세와 재정의 재분배 기능을 강화해서 내수 기반을 확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수출 주도형 경제체제를 내수 기반을 확충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장도 가능하고 잠재성장률도 높일 수 잇다고 봐요. 일종의 소득주도성장 전략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시장에서 저임금 노동과 비정규직 문제,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불공정 거래관행을 개선해나가야 합니다. 세금은 이런 정책을 지원할 수 있는 좋은 정책 수단입니다…하지만 우리나라의 고소득자의 실제 세부담이 낮고, 세금을 내지 못하는 근로소득자도 30% 정도에 이릅니다. 그런데 면세점 이하의 근로소득이 전체 근로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 정도에 불과합니다…하지만 우리나라의 고소득자의 실제 세부담이 낮고, 세금을 내지 못하는 근로소득자도 30% 정도에 이릅니다. 그런데 면세점 이하의 근로소득이 전체 근로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 정도에 불과합니다…중장기로는 국가의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는 것은 국민경제의 안정된 성장을 위해서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처한 현실을 고려할 때 재정지출의 확대는 불가피합니다. 정부도 내년에 초유의 확대재정을 편성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재원을 조달할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보다 적극 고민하고 대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부는 여전히 증세없는 복지를 주장하면서 소비세와 소득세 위주의 증세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법인세는 불가침 영역으로 설정하고 있나 봅니다. 사내유보금을 대상으로 하는 가계소득 증대세제도 그 효과성이 의심되고 있습니다. 법인세 최고세율 인상을 포함해서 대기업에 집중된 7조원 이상의 공제 감면을 축소하지 않고서는 재원 마련이 어렵습니다…경제협력개발기구에서 발표하는 개별 국가의 공식 지니계수를 보면, 우리나라의 시장 소득 지니계수는 낮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불평등도를 측절할 때 사용하는 통계청의 <가계동향조사?자료에는 고소득 계층과 저소득 계층이 잘 포착되지 않기 때문에 지니계수를 낮게 추정하는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2012년 배당소득자와 이자소득자 가운데 상위 1%가 차지하는 점유율은 각각 72.1% 44.8%였는데, 이런 부분이 조사 자료에서는 잘 잡히지 않습니다. 소득불평등도가 9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증가하고, 최근에는 근로자의 실질임금 증가율이 마이너스를 기록했습니다. 최저임금도 낮은 수준이고, 저임금 근로자의 비중도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나라입니다. 더욱이 2000년대 이후 자영업자 소득의 증가폭이 임금노당자보다 떨어지면서 소득 격차도 크게 벌어졌어요. 이 때문에 자영업자를 포함한 근로소득자의 불평등은 더욱 커지고, 우리 경제의 내수 기반을 취약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지요…보다 근본으로 "사회가 무엇인가, 경제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성장의 궁극 목표는 사회 구성원의 행복을 추구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있지요. 그렇다면 소득과 부가 소수에게 집중되는 사회보다 많은 사람이 성장의 과실을 골고루 누리는 사회가 낫겠죠.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바람직한 분배 구조를 만들어가는데 한계가 있다면, 국가가 개입해서 시장경제의 취약한 부분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습니다학문 뿐 아니라 사람도 가치중립일 수 없다고 봅니다. 중요한 건 어떤 가치를 갖느냐 입니다.]

 

금융 세계화와 최고경영자의 보수 이유영

소유주가 아닌 전문경영인 연봉의 급격한 증가를 맞는 이론의 뿌리는 별로 없다. 사실 자본주의 밑에서 인간의 탐욕을 적나라하게 나타내는 욕망의 경연이 아닐까? 이처럼 노골화되고 미친게 아닐까 싶은 부를 쫓음을 비난할 논리는 무수하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걸까? 이 장에서는 주로 이런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지만, 사실 이 내용은 자본주의의 무규칙 무제한 성장의 매우 작은 내용만을 설명할뿐, 자본 그 자체가 갖는 자기 증대의 주 영역은 월급쟁이 전문 경영인보다는 기업 등 다양한 수익 원천 소유주와 그 우호 세력(관료, , 언론)이 만들고 있는 막장 드라마가 아닐까?? [조세 회피처의 연원과 폐해를 따지고 보면, 우선 영국의 책임이 크다. 그리고 미국계 다국적 기업의 적극 편승 행위가 두드러져 보이는 게 사실이다. 유럽의 전통 조세 회피처를 제외한 대부분의 조세회피처는 1930년대 이래 영국 식민지에서 기원한다. 시티를 중심으로 한 금융자본이 앞다투어 조세회피처를 건설할 때 영국 식민청은 적극 맞서지 못했다. 오히려 영국은 2차 세계대전 종전 뒤 식민지를 독립시키는 과정에서 작은 섬나라에 통제력을 유지했다. 이러한 정책 탓에 영국이 이들을 오늘날의 대표 조세회피처로 키워왔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특히 그레이트 브리튼 섬 근교의 왕실보호령 3개국인 저지섬, 건지섬, 맨 섬을 비롯하여 카리브 해 권역에 퍼져있는 영국령 섬들을 중심으로 조세회피처가 성장했다한편 OECD 18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1970년대부터 2008년까지 소득세 최고세율의 변화와 최상위 1%의 소득 비중 변화를 살펴본 논문의 결과도 흥미롭다. 소득세 최고세율이 30% 이상 하락한 미국, 영국, 포르투갈의 경우 최상위 1% 계층의 소득 비중이 각각 9%,7%,3% 이상씩 증가했다. 반면 독일, 스위스,프랑스, 덴마크, 스페인 등 소득세 최고세율의 변동이 거의 없었던 유럽 국가의 경우에는, 최상위 1% 계층의 소득 비중 증가율이 1% 정도에 그치거나 이에 미치지 못했다하지만 수십 년에 걸쳐 하위 계층의 실질 소득은 제자리걸음을 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최고경영자들이 지대추구 행위로 지나치게 많은 보수를 받고, 그 결과 부의 불평등 현상이 더욱 심화되어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양상은 굳이 피케티식 파국이 아니더라도, 사회 전체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 커다란 장애가 될 것이란 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부의 불평등 심화 요인으로 지탄받는 관련 제도와 관행 아래에서, 지금은 누가 이득을 보는가 cui bono?라는 회의스러운 질문을 던져야 할 시점인 것이다.]

 

맺으며

경제를 포함해서 많은 학문과 연구가 장기 추세를 보고 거기서 발견한 규칙으로 단기 발생 양상을 해석한다면, 단기는 결국 장기의 구성 요소밖에 되지 못하고, 단기의 분석은 장기 분석의 맥락에서 이해될 지경에 놓이면서 그 자생력과 독자성이 무색화되면서 단기와 미시 영역의 존재 의미가 퇴색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피케티 또한 서양의, 근세 이후 전세계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서유럽과 미국을 주로 중심으로 놓은 이론이라서 이 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를 해석할 때 개별 역사와 사회 상황을 별도의 변수로 고려하면서 기존의 법칙과 균형잡기가 꽤나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르투나의 선택 1 - 3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3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종교라고 머릿속에서 글씨를 써보면 떠오르는 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믿어보자는 느낌이다. 그런 종교는 무조건의 믿음을 가져간다. 그래서 종교의 성인은 만들어지고 지금까지 그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의 믿음과 은혜로,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평가의 객관화나 반론의 모습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버전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종교와는 거리를 둔 예전 사람 중 시저, 케사르, 체자레 라는 사람처럼 글쓰기의 인물로 사랑받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지난 날, 시오노 나나미씨의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내용을 본 기억이 희미하게 나는데, 픽션으로 된 이 글을 보면서 그 희미함에 확실한 색깔이 덧칠해지는 기분이다.


포르투나의 선택은 마리우스 이후 술라가 세상을 움켜쥐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포르투나는 누구일까? 1편만을 보면 술라다. 하지만 이제 술라는 진짜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었다. 정말로그렇게 이빨 빠진 호랑이가 인생과 권력의 정점을 찍을 때쯤, 또다른 포르투나가, 태어나고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되는 공작새이자 세번째 포르투나인 아우구스투스의 아버지인 카이사르다. 1권은 흑마왕 술라에 의한 시이저의 시련기가 주된 내용이며 이 사람에게 조금씩 서광이 비취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 와중에 삼두정치로 유명한 폼페이우스가 등장한다. 만약 이란 말을 걸어보면, 시이저가 없었다먼 폼페이우스가 상아의자에 앉을 운명었을지도 모르겠다. [폼페이우스는 이 세상이 존재하는 방식을 바꾸고 우리가 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꿀 것이다. 폼페이우스에게는 티끌만치의 두려움도 없고, 이 사람의 자신감에는 머리카락 한 올만치의 균열도 없다존엄은 개인이 사람으로서, 그리고 자기가 속한 사회의 지도자로서 무엇인지를 요약한다. 존엄은 개인의 자존감, 온전함, , 지성, 행동, 능력, 지식, 지위, 사람으로서의 가치의 총합이다…. 존엄은 사람의 죽음을 넘어서기에, 사람이 죽음에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 이것이 가장 올바른 정의다. 존엄은 사람의 물리화된 존재의 멸실을 향한 승리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바로는 폼페이우스가 절대 옳다고 생각했다. 술라에게 중요한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존엄이다. 술라는 미트라다테스를 무찌를 거라고 말했다. 옛날의, 전통 형태로 공화국을 재건하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술라는 말한 대로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존엄이 손상될 테니까. 사회 추방과 공식의 오명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 존엄은 없었다. 따라서 술라는 자기 바깥에서 자신의 약속을 이행할 힘을 찾아야 한다. 자신의 약속을 이행했을 때 술라는 만족할 것이다. 그때까지 술라는 쉴 수 없다. 쉬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이야기를 적으며 몇번은 반복되지만 잊혀지지 않고 끊임없이 떠오른 물음은, ‘왜 누군가는 승자가 되고 누군가는 패자가 되는 것일까? 능력의 차이일까? 운 또는 환경 등 누군가 존재의 바깥에 있는 무언가가 좌지우지하는 것일까?’ 이다. 좀더 밀고 나가면, 왜 우리는 존재하고, 다른 어떤 것은 인간이 되는 기회를 얻지 못했을까? 그리고 우리가 사람으로, 승자로, 살어 남은 것이 행운일까? 아니면 불행일까? 아니면 행과 불행이라는 건  불쌍한 중생인 우리가 만들어낸, 자기 위안의 도구일 뿐일까? 적다 보니 옆으로 비껴나가, 평소의 생각이라는 흐름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질 무렵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두번 써먹은 표현을 다시 비틀어서 들먹이면, 소설을 쓰는 사람은 지금까지의 냄새로 앞날의 향기를 점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해질 무렵은 그 냄새와 향기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주는 소설로 내게 보여진다. 앞으로 몇백년 후, 190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의 우리 삶은 어떻게 쓰여질까? 세세한 기록은 디지털화되어 많이 남아있을지라도, 역사책에서는 한 두페이지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떠들썩한 사건, 몇몇 정치인과 기업인, 우리 사회에 공헌한 누군가 정도가 아닐까? 나무의 나이테가 그 나무의 모든 일들을 적지 못하고 커다란 일들만 굵은 선으로 남기듯 말이다.


지금 땅을 밟고 하늘을 머리에 두고 있는 를 한가운데 놓고 지난 70년대부터 오늘을 뒤돌아보면서 떠올릴만한 사건이나 일이 무엇인지 뒤돌아보면 일단 내가 태어났고 이에 더불어 군사독재, 광주, 경제라고 말해지는 산업화와 소득의 늘어남, 6월 항쟁, 대통령 직선제, 올림픽, 아버지의 퇴직, 성수대교와 삼풍 아파트, IMF, 정권 교체, 코스닥 광풍, 결혼, 김예슬 선언, 아이가 태어났고, 박근혜 게이트 등이 있다. 평범한 일상이라고 말할, 하루만 지나도 잊어버릴 만한 그냥 그런 하루 하루 속에서 도드리지게 튀어오르는 듯한 이런 일을 생각해보며,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나는 어디에 있고, 그 옆에는 누가 있었으며, 지금은 같이 지내지 않지만 오랜 동안 나랑 같이 지낸 부모님과 누나, 그리고 내 친지들은 각각의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내가 태어나서 자라온 그곳, 지금은 뉴타운이라는 이름속에 공원으로 탈바꿈한 그곳을 보며, 그리 길지 않은 이 삼십년의 기간동안 우리는 무슨 짓을 해온건지 궁금하다. 그리고 아직도 기득권에서 그토록 치장한 자유와 풍요가 이제 그 목숨줄이 흔들릴만큼 엄청난 도전을 받고 있다. 그동안 누군가의 행복은 누군가의 불행을 디디고 있고, 행복을 얻은 그 누군가는 불행이 오지 않음을, 불행에서 벗어났음에 만족하고 이를 그 누군가에게 감사하면서 스스로의 운명과 시간에 안도하면서 살아온 우리네 삶의 흐름을 무어라고 말하고 평가하고 의미부여를 해야 할까 싶다.


책에는 두명의 민우가 등장하고, 조금 있으면 마지막 해질 무렵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채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다. 또한 책이 얇아서 이 책을 다 읽는 것도 시간을 많이 뺏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운이 꽤 갈 듯 싶다. ‘말빨이라는 단어처럼 분명 글빨이라는게 있긴 있구나 싶었다. 글쓴이의 책을 몇권 읽었고, 그분의 광팬은 아니지만, 책을 쓸 때 어느 책에서나 느껴 지는 빤한 전개나 스타일이 안느껴진다. 이러함이 황석영 선생님의 장점이라고 여겨진다.


요즘 이런저런 글을 쓰려고 조금 더 몸짓과 손짓을 하고 있고, 글이란건 역시 쉽지 않음을 느끼는 찰라 이 책을 보면서 커다란 벽이 서있는 거 같다. 그럼에도 언젠가는 나도 이렇게 감동을 주는 누군가로 자리매김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끼면서, 아직 살아있는 내 자존감을 다시 한번 느끼고 어루만지며 스스로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좋은 계기로 삼았음으로 마무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