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속에서 신은 자신이 질투심이 많다는 말을 자주한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이 "질투하는 신"이라고 말한 적도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이 연적이나 사업 경쟁자를 질투한다면, 신은 라이벌 신들을 질투한다. 타당한 이유가 있을 때도있다. 1장에서 살펴보았듯 초기 히브리인은 현대적 의미에서완전한 일신론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부족 신인 야훼에게 충성했지만, 그렇다고 라이벌 부족들이 섬기는 신의 존재를 의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야훼가 더 강하고, 그래서 섬김을 받을 자격이 더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래도 이따금 그들은 다른 신을 섬기고 싶은 유혹에 빠졌는데, 그들의 신이 그것을 볼 경우 끔찍한 대가가 따랐다. - P106
돌판에 새긴 저 유명한 ‘십계명‘을 인도받고 있었다. 모세는 그것을 가지고 내려왔다. 하지만 금송아지를 보고 너무 화가 나서 돌판을 내던져 깨뜨려버렸다. 걱정하지 말라. 신은 나중에 그에게 여분의 돌판을 주었고,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두 곳에서 그 돌판에 새겨진 말을 들을 수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왜 당신네 종교가 선한 힘이라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십계명을 언급한다. 하지만 십계명이 실제로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딱 한 가지 "살인하지 못한다"밖에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은 선하게 살려면 당연히 지켜야 하는 빤한 규칙이다. 돌판에 새길 필요도 없다. 하지만 5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이 규칙은 알고 보니 "너희 부족 사람들을 살인하지 말라"는뜻일 뿐이었다. 신은 이방인을 죽이는 건 개의치 않았다. 이번장 뒷부분에서 살펴보겠지만, 《구약》의 신은 자신이 선택한백성에게 다른 부족을 도륙하라고 끊임없이 다그친다. 그것도여느 소설 작품에서 비슷한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말이다. - P108
<성경> 속의 신이 보여주는 또 다른 야비한 면은 고기 태우는 냄새를 무척 좋아한다는 것이다. 보통은 동물의 고기이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신이 모닥불 위에 이사악을 묶으라고 시켰을 때, 아브라함은 신이 또 향긋한 연기 냄새를 맡고싶은 것이라고 이해했다. 마지막 순간 이사악을 구한 신은 그후 숫양을 보내 근처 덤불에 뿔이 걸리게 했다. 아브라함은 신의 의중을 알아채고 그 불쌍한 동물을 죽여 신에게 이사악의연기 대신 양고기의 연기를 바쳤다. 느닷없는 숫양의 출현에대한 주일학교의 공식 해석은 이렇다. 즉, 인간을 번제물로 바치지 말고 그 대신 동물을 바치라는 뜻을 신이 그런 식으로 전한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 속의 신은 당시만 해도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습관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을 죽이라는 지시도 말로 했다. 따라서 여러분은 신이 사람대신 양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그냥 말로 했다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 P109
왜 신은 더 이상 아브라함에게 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말을 걸지 않을까? <구약>의 어느 부분을 보면 신은 도무지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거의 날마다 모세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하지만 요즘은 신에게 소식을 듣는다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 만일 그런 사람을 본다면 우리는 정신 치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여러분은 그것자체가 그 오래된 이야기가 사실이 아님을 보여준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가? - P110
아이들 가운데서도 사내 녀석들은 당장 죽여라. 남자와 동침한적이 있는 여자도 다 죽여라. 다만 남자와 동침한 적이 없는 처녀들은 너희를 위하여 살려두어라_<민수기> 31장 17~18절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인종 청소와 아동 학대라고 부른다. 신학자들은 이런 구절과 《성경》에 있는 많은 비슷한 구절에 당황한다. 그들은 <구약>의 이런 이야기들이 역사적으로사실이라는 증거를 현대 고고학과 학문이 찾아내지 못한 것에감사해야 한다. 신학자들은 많은 끔찍한 이야기가 역사라기보다 상징을 담은 신화, 이솝우화 같은 교훈적 이야기라고 둘러댄다. 좋다. 하지만 여러분은 폭력적 살인 충동, 레벤스라움을위한 전투, 대학살과 인종 청소, 여성과 소녀를 남성의 소유물로 취급해 강간하고 성노예로 이용하는 것에 관한 끔찍한 이야기들 중 어디에서 훌륭한 교훈을 하나라도 찾을 수 있는지궁금할 것이다. - P114
나는 처벌의 위협에 대한 이론을 세웠다. 어떤 위협은 그럴듯하다. 예컨대 도둑질한 죄로 유죄판결을 받으면 감옥에간다는 말이 그렇다. 전혀 그럴 듯하지 않은 위협도 있다. 신을 믿지 않으면 죽은 후 불바다에서 영영 헤어날 수 없다는 위협이 그렇다. 내 이론은 위협이 그럴듯할수록 끔찍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죽은 후 벌을 받는다는 위협은 너무나 터무니없어서 그러한 터무니없음을 덮으려면 정말로 소름 끼치는위협이 필요하다. 불바다 정도는되어야 한다. 살아 있을 때벌을 받는다는 위협은 그럴듯하므로(감옥은 실제로 있는 장소이니까), 피부에 관한 극악무도한 고문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 - P134
지옥이 아무리 끔찍하다 해도 종교가 사람을 더 착하게또는 더 악하게 만든다는 분명한 증거는 별로 없는 것 같다. 몇몇 연구에 따르면 종교를 믿는 사람이 자선단체에 기부를더 많이 한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십일조(수입의 10분의 1을 뜻한다) 형태로 교회에 기부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종종 그 돈의일부를 기근 구제 같은 가치 있는 자선 활동에 전달하기도 한다. 또는 지진처럼 끔찍한 재난이 일어났을 때 위기 지원 단체에 전달한다. 하지만 교회가 거두어들인 많은 돈은 선교사의활동 기금으로 쓰인다. 교회는 이것을 자선 기부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게 기근 구제나 지진으로 집을 잃은 사람들을 돕는것과 같은 의미의 자선일까? 교육을 위해 기부하는 것은 좋은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교육이 순전히 <코란》을 암송하는것이라면? 또는 선교사가 아이들에게 부족의 유산을 잊고 대신 <성경>을 배우도록 가르치는 것이라면? - P135
하지만 모든 신자가 《성경》을 따르는 것은 아니다. 어떤신자들은 전혀 다른 성서를 가지고 있고, 성서가 아예 없는 신자도 있다. 나는 여기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성경>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텐데, 그것이 내가 잘 아는 유일한 성서이기때문이다. 하지만 《코란》에 대해서도 거의 같은 이야기를 할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이런 성서가 선하게 살기 위한 훌륭한 길잡이라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은 《성경》의 신이 좋은 롤모델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4장을 다시 한번읽어보는 게 좋겠다. 《코란》은 훨씬 더 나쁜데, 이슬람교도는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배우기 때문이다. - P139
<구약>에 등장하는 신은 라이벌 신들에게 병적으로 집착했다. 그는 다른 신들을 광적으로 싫어했고, 자신의 백성이 그신들을 섬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라이벌신들에 대한 비슷한 강박적 혐오가 예수 시대 이후에도 수백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리스도교가 콘스탄티누스 황제 치하에서 로마의 공식 종교가 된 후, 초기 그리스도교 광신도들은 로마제국을 헤집고 다니면서 그들 눈에는 우상으로 보이지만 오늘날 우리 눈에는 값진 예술작품으로 보이는 것들을 부수었다. - P141
고대 도시 팔미라(지금의 시리아)에 있던 아테나 여신의 거대한 조각상은 하나의 예에 불과했다. 최악의 범인들 중 하나는 존경받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였다. 라이벌 신들의 상을 파괴하려는 초기 그리스도인의 병적 집념과 맞먹는 것이 오늘날과격 이슬람 단체 ISIS와 알카에다의 열성이다. - P142
세 번째 계명: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야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신의 이름을 포함하는 욕설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제길! God damn it!" 또는 "빌어먹을 바보처럼 굴지 마! Don‘t be such a god-damn fool!"처럼. 신이 그것을왜 싫어하는지는 알겠지만, 끔찍하게 심각한 범죄로는 보이지않는다. 안 그런가? 법원 벽에 붙일 가치도 없다. 결국 "너희는욕하면 안 된다"는 말일 뿐이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건 법이아니다. - P143
여섯 번째 계명이 원래 의미한 바는 "너의 부족 사람들을죽이지 못한다"였다(물론 안식일에 나무하러 가가나, 그 밖에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말이다). 우리가 그 사실을 아는것은 《성경》에서 신이 자기 백성에게 다른 부족들을 닥치는대로 마음껏 죽이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 P149
그리스도인이 무화과나무 이야기에 당황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도마의 유년기 복음서>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또 어떤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그냥 무시하고 <신약>의 더 좋은 말에집중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상징‘이었다고 말한다. 실제 무화과나무는 없었고,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상징하는 일종의 비유라는 것이다. 여러분도 눈치챘는가? 이건 신학자들이 발뺌할 때 애용하는 수법이다. <성경>에 있는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단지 상징일 뿐이라거나, 실제로 일어난 적이 없다거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비유라고말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물론 그들은 어떤 구절이 비유이고어떤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선택할 수 있다. - P158
여러분은 《성경》에서 좋은 구절을 찾을 수 있고, 심지어는 <구약>에서도 몇 대목 찾을 수 있다. 내 경험으로 보면 많지는 않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떤 구절은 고약한 말이니 무시하고, 어떤 구절은 좋은 말이니 널리 권할지 어떻게 판단할까? 이질문에 대한 답은 판단하는 어떤 다른 기준, 즉 무엇이 좋은 말이고 무엇이 고약한 말인지 판정할 어떤방법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성경> 그 자체에서는 얻지 못하는 어떤 근거 말이다. 하지만 그 기준이 무엇이든 그걸 직접 사용하면 왜 안 될까? <성경>의 어떤 구절이 좋고 어떤 구절이 나쁜지 판단하는어떤 독립적 기준이 있다면 왜 굳이 <성경>에 신경 쓸까?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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