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내가 해방 후의 학생운동사를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1964년이었다. 꼭 20년 전, 그때 대학은 온통 한일회담반대투쟁으로 술렁이고, 역사가 일천한 공화당 정권이 흔들릴 때이다. 나도 그 와중에 휩쓸리게 되었다. 그후 20년, 학생운동은 더욱 질적으로 심화되고 양적으로 확산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적지 않은 내 후배들이 내가 다녔던 대학을 타의에 의해 떠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규명해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러자면 우선 해방 후 한국 학생운동의 흐름을 파악해보아야 한다. 우리나라가 내부적으로 안고 있는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이며, 학생들이 40년간 추구해온 이념은 또 무엇인가?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 지난 40년 동안의 학생운동의 역사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해방 후 40년 동안 몇 차례 정권이 바뀌었지만, 우리 민족이 안고 있는 숙제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학생들의 주장과 운동의 양상 또한 다소차이가 있으나 해방 40년의 기본적인 흐름은 똑같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민족문제와 민주주의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의 산물인 남북분단의 벽이 깨어지지 않은 데서 파생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 P14
이 글을 쓰면서 1940년대는 자료 정리에 충실을 기했다. 한정된 자료밖에 없었기 때문에 만족스럽게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1940년대학생운동사를 정리하면서 그 시대 학생들의 조국에 대한 뜨거운 열정에깊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0년대는 전쟁과 자유당의 횡포에 휩쓸려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 없었다. 1960년대에는 4·19혁명과 6·3 사태라는 거대한 봉우리가 있었기 때문에 양자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결과 1960년대도 1940년대와 기본적으로 같은 흐름이란 것을 발견했다. 1970년대에 들어가서는 각종 공소장, 법정자료, 신문, 연감에 충실했다. 특히 이 시기의 학생운동은 역사적인 안목에서 다루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기 때문에, 역사적인 평가를 배제하고 자료소개 정도에 의의를두었음을 밝혀둔다. 그래서 국립도서관에 가서 1945년부터 1979년까지의 잡지를 색인하고 그 색인에 따라 원본을 찾았다. 그리고 중앙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서 나온 해방 15년 잡지개관 및 호별목차집에 의해 자료를 뽑았다. 1960년대 이후의 기본 자료는 신문이었다. 비록 신문이 사실보도를 하지 않았다 해도 객관적 사실 자체를 토대로 할 때는 신문을 찾을 수밖에없었다. 제일 어려운 것은 1970년대였다. 1970년대 후반기는 신문보도가 없었기 때문에 개인의 공소장 수집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1970년대 기본 자료를 한국 기독학생회 총연맹KSCF에서 구할 수 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학생운동사라고 하지만 학생문제만 다루어서는 역사적 이해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는 사회·경제적 상황을 총체적으로 평가하기에는 현실과 너무 가까운 거리에 있기때문에 주로 학생운동 그자체에 충실했고, 학생운동과 직접 부딪히는사회적 배경만을 다루었음을 밝혀둔다. - P15
이 책 가운데 많은 사건이나 인명이 누락되었을 수도 있다. 1940년대와 1960년대는 학생운동에 관련된 구체적인 인명을 밝히지 않았다. 역사에는 개인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에서였고, 또한 194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는 몇 가지 공통적 관심사에 집중된 운동이었기 때문에 개인보다 운동 자체에 치중했다. 그러나 1970년대는 학생운동이 사건 중심이고, 관계한 사람들이 전부 구속되어 법정에 섰기 때문에 주요 사건에 관련한 인명을 기록했다. 1970년대 학생운동에 관련되었던 사람은 거의 대부분 옥고를 치렀다는 점에서 어쩌면 1970년대는 ‘학생사건‘ 시기란 용어가 성립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학생운동‘과 ‘학생사건‘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역사발전의 긍정적 입장에서 볼 때는 ‘학생운동‘이지만 부정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학생사건‘인 것이다. 1970년대 학생운동이 역사발전에 긍정적인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사건‘이란 용어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은 그시대의 상황이 얼마나 엄혹했던가를 반증한다. 그러나 역사를 긴 안목으로 보면 한 시대의 ‘학생사건‘은 ‘학생운동‘으로 평가될 뿐이다. 그것이 학생운동의 순수성이며 한계이기도 하다. 이런 기본적인 맥락에서 내가 이 책을 쓰기 위해 구체적인 작업에 들어간 것은 1983년 8월 13일부터였다. 그해 12월까지 5개월간 자료수집과 총정리를 했다. 1984년 1월 5일부터 집필을 시작해 2월 12일에 2,500매를 끝냈다. 그동안 나는 두문불출하고, 내 피를 찍어 쓰듯이 2,500매를 미친 듯 써나갔다. 이 책을 쓰는 동안 1980년 5.17을 전후로 대학에서 제적된 학생들의복교문제가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학생과 학생운동에 대한 단세포적인이해가 연일 신문지상에 오르내렸다. 나는 그럴수록 냉정하고 객관적인자세로 모든 자료를 분석·검토했다. 그런데 내가 이 책을 다 쓸 무렵, 참 - P16
으로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1984년 2월 14일 판문점에서 남북연락관이총리 편지를 주고받기 위해 만난다는 뉴스였다. 나는 용기를 내었다. 해방 후 학생운동사가 나와야 할 꼭 알맞은 시기라고 생각했다. 해방 40년, 우리나라 학생운동의 궁극적인 목표의 하나는 민족통일의 평화적 해결인바, 7.4공동성명이래 분단문제 해결에 대한 노력이 다시 고조되고있다는 것은 민족 전체를 위해서도 지극히 다행한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통일이 그리 먼 훗날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 민족의 통일에 대한 의지를 믿는다. 이 책은 해방 후 학생운동사의 시론에 불과하다. 보다 폭넓은 관심과연구가 여러 사람들에 의해 진행되기를 기대하며, 이 책이 그러한 작업의 한 참고자료로 소용되기를 바란다. 독자들의 냉정한 비판과 도움을받아서 언젠가는 개정판을 쓰려고 한다. 그만큼 이 책은 미진한 것이 많고, 저자로서는 부끄러울 따름이다. 이 책을 내가 옥중에 있을 때 돌아가신 아버님 영전에 바치며, 그동안부단히 격려해주신 선배들께 감사한 마음을 드린다. 그리고 10여 년 동안 가정경제를 꾸려온 아내에게도 감사한다. 또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용기를 준 후배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특히 이 책을 쓰게 된 결정적인 동기를 마련해주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책을 출판해준 형성사이호웅 사장에게 깊은 애정을 보낸다. 편집·교정에 수고해준 형성사 직원들께도 따뜻한 감사를 드린다.
1984년 2월 12일 역촌동에서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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