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눈송이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만화경 속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정답은 대칭이다. 6개의 면, 6개의 모서리, 6개의 점 또는 점들의 집합이 모두 대칭이다. 왜 대칭을 이룰까? 너무 작아서, 자라는 ‘빌딩‘의 모든 부분이 습도와 온도의 똑같은 ‘역사적‘ 패턴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모든 눈송이가 독특하긴 하지만 어떤 눈송이는 다른 것보다덜 아름답다. 책에 실리는 눈송이는 아름다운 것들이다. - P251

과학은 우리에게 눈송이의 아름답고 복잡한 대칭에 대해 완전하고도 충분한 설명을 제공하고, 눈송이가 왜저마다 독특한지도 설명한다. 페일리의 돌멩이처럼 눈송이는 ‘그냥 생겼다‘. 분자들(또는 일반적으로 물질들)이 이런 특정한 모양으로 저절로 형성될 때(즉 ‘그냥 생길 때) 그 과정을 자기조립self-assembly 이라고 부른다. 여러분은 왜 그렇게 부르는지 알 수있을 것이다. 자기조립은 곧 살펴보겠지만 생명체에서 매우중요하다. 이번 장의 주제는 생명의 자기조립이다. - P252

우리는 효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적어도 대략적으로는알고 있다. 여기서 직소퍼즐 개념이 등장한다. 세포 안을 지나다니는 수백 개의 분자를 직소퍼즐 조각이라고 생각해보라. 분자 X는 함께 결합해 XY를 만들기 위해 분자 Y를 찾아야 한다. X·Y 결합은 7장의 복잡하게 교차된 그림 속에 있는 매우중요한 수백 가지 화학반응 중 하나일뿐이다. X가 우연히 Y와 부딪칠 확률은 어느 정도 있다. - P255

우리 목적에 중요한 것은 DNA 사슬에 있는 네종류의 염기 서열이 3개씩 읽히면서 단백질 사슬에 연결되는20종류의 아미노산 순서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단백질 사슬에연결된 아미노산의 순서는 그 단백질 사슬이 어떤 ‘매듭‘으로감기는지를 결정한다. 매듭의 모양(틈과 기타 특징)은 그 단백질이 어떤 효소로 작동할지, 그래서 세포에서 어떤 화학반응의스위치를 켤지 결정한다. 그리고 한 세포에서 일어나는 화학반응들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세포가 되고, 어떻게 행동할지결정한다. 마지막으로-이것이 아마 가장 경이로운 점일 텐데 배아에서 함께 일하는 세포들의 행동은 그 배아가 어떻게 발달해 어떤 아기가 될지 결정한다. 따라서 우리 각자가 하나의 세포에서 아기가 되고 그런 다음 지금의 모습으로 자라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결국 우리의 DNA였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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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는 나와 남들과의 관계를 규율하는 체계이다.
저는 불교에서의 윤리를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나와 남들 간의 관계에서 남이란 다른 사람이기도 하고, 또 다른 생명과 자연까지도 포함합니다. 그런 나와 남과의 관계를 규제하고 규율하고, 또 어떤 질서를부여하는 체계, 그것이 윤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P10

‘살생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심신을 취하게 만드는 것들을 쓰지말라.‘는 오계는 누구나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도리입니다. 윤리는 이렇듯 사람과사람 사이의 관계가 중심이 됩니다. 사람과사람 사이가 건전할 때, 다시 말해 사람들이 건전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의식수준에 이를 때, 사람과 동물과의 관계,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도 좋아질 수 있다고 봅니다. - P12

그런데 그 관계를 ‘사람과 사람, 사람과 동물, 사람과 자연으로 볼 것이 아니라, ‘나와 남, 나와 동물, 나와 자연‘으로 분명히 한정해야 할 것입니다. 실천 주체는 어디까지나 ‘나‘입니다. ‘사람‘이라는 말은 막연한개념입니다. 사람이 어찌해야 한다.‘는 말은 사실상책임 회피에 쓰기 좋은 말이어서, ‘사람은 이래야 한다.‘ 할 때 보통은 자기를 빼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 자연의 관계로 뭉뚱그려서 볼 게 아니라, ‘나와 자연‘의 관계로 명확히 한정시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불교에서의 윤리는 반드시 ‘나‘를 포함하고 ‘나‘로부터 출발하는 대단히 강력한 실천 개념입니다. 하지만 윤리가 그런 실천적 체계이긴 한데시간·공간의 간섭을 많이 받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윤리가 지역이나 역사 문화 등 여러 조건에 제약을 많이 받는다는 점에서 ‘윤리는 조건 지어지는 것‘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 P13

‘나와 남과의 관계가 윤리라면, 도덕이란 무엇일까요? 불교에서 ‘도덕이란 나와 진리와의 관계‘를 바르게 세우는 체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윤리가 나와 남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면, 도덕은 나와 진리와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 규정짓고 싶습니다. 윤리의 구체적표현이 계율이라면, 도덕은 진리, 즉 도道로써 표현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문 표현 그대로 ‘길 도道‘에 ‘큰 덕德자 이지요. 시간·공간에 제약되고 조건지어지는 윤리에 비하면 도덕은 나와 진리와의 관계이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합니다. 나와 진리의 관계를 바르게 세워야 하는 만큼 따라서 도덕이 갖는 의미는 대단히 심오할 수밖에 없습니다. - P14

부처님은 최초의 법문인 <초전법륜경>4에서 중도中道, 팔정도, 선언하셨습니다. 사성제, 즉 고성제苦聖諦집성제集聖諦, 멸성제滅聖諦제도성제가 팔정도입니다. 진리를가운데추구하면서도 길을 잘못 들어 헤매는 중생들에게 부처님은 ‘팔정도로 수행하는 것이 바른 길이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 첫 법문부터 마지막법문까지 시종일관 끊임없이 강조하시고 역설하신 것이 팔정도입니다. 그만큼 불교의 핵심은 팔정도입니다. - P15

불교인가 외도인가는 팔정도가 있느냐 없느냐 그차이에 달렸습니다. 팔정도가 있으면 불교이고 정법法입니다. 팔정도가 없으면 외도입니다. 팔정도가 없으면 그건 정법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표방하는 취지가 좋아도 팔정도 없이는 정법이 될 수가 없습니다. 불교의 특색은 팔정도입니다. 왜일까요? 팔정도 수행을 통해서만 아라한이 나올 수 있고 팔정도가 없는 외도에는 아라한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팔정도는 아라한이 되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입니다. 바른 견해인정견이 있어야 바른 사유(正思)가되고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을 통해 바른집중을 이루면 아라한의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 P17

아라한은 불교가 근본 이상으로 삼는 무탐無貪,무진瞋, 무치無癡를 이룬 분입니다. 탐욕이 없어진 사람, 성내는 마음(心)이 없어진 사람, 어리석음이없어진 사람입니다. 부처님도 아라한이신데 같은 아라한이라도 부처님과 아라한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불成佛합시다‘ 할 때의 성불이란 부처가 된다는 말인데, 부처는 해탈열반을 이루고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세우신 분입니다. 이 겁에서 부처는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뿐입니다. 반면 아라한은 부처님 법에따라 해탈 · 열반에 이른 분입니다. 부처님과 아라한의차이는 법을 세우셨는가, 아닌가로 구분됩니다. - P18

우리가 정定에 들게 되면 대단히 높은 정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탐욕, 진심, 치암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무탐, 무진, 무치인가? 그렇지않겠지요. 정에서 깨어나면탐 • 진 · 치가 도로 살아납니다. 탐진·치가 해결된 것이 아니고 잠시 엎드려숨어있을 뿐입니다. 그런 상태는 탐진치가 완전히없어진 것이 아니므로 불교가 추구하는 목적이 될 수없습니다. 불교는 탐진치를 뿌리째 없애는 것. 다시는 소생할 수 없게끔 뽑아내는 것, 발본색원拔本塞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탐·진·치를 뿌리째 뽑아낸 상태를 아라한의 경지라 하고, 아라한이 되는 것이 불교 수행의 궁극 목적입니다. - P19

팔정도는 진리로서의 길이고, 실천도로서의 길입니다. 팔정도의 실천이 도덕의 실천입니다. 불교가 팔정도를 통해인간 완성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도덕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교의 중심이요,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의 길은 팔정도를 따라 도덕을실천하는 길이요, 진리를 실천하는 길입니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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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물이나 식물의 모든 것, 즉모든 생물의 모든 세부는 마치 누군가가 설계하고 창조한 것처럼 우리를 압도한다. 그리고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그것이우리가 1장에서 만난 수많은 신 중 하나의 솜씨라고 잘못ㅡ생각했다. 또는 특정한 신이 아니라 어떤 이름 모를 창조자의솜씨라고 생각했다. - P210

앞장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완벽한 색깔 패턴을 보여주거나 생존을 돕기 위해 영리한 일을 하는 멋지게 설계된 동물들의 놀라운 예로 가득했다. 각각의 이야기를 마친 후 나는 이렇게 물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해내고 실현한 설계자, 창조자,
현명한 신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았던모든 동식물에 대해 비슷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텐데, 이 예들의 정확히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설계자가 있었어야 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일까? 답은 ‘있을 법하지 않음‘이고, 이제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하려 한다. - P223

동전 던지기의 경우는 특정한 결과가 나올 확률을 계산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적어도 복잡할 건 없다. 인간의 눈 또는 치타의 심장이 얼마나 있을 법하지 않은지는 동전 던지기처럼 산수로 정확한 확률을 계산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이 매우 있을 법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눈이나 심장같은 것은 어쩌다 보니 재수 좋게 생겨나지 않는다. 이런 ‘있을 법하지 않음‘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것들은 설계된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번 장과 다음 장에서의내 임무는 이런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설계자는 없었다. 눈이든, 눈을 설계할 수 있는 창조자든 있을 법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있을 법하지 않은 것이라는 문제에는 창조자가 아닌 어떤 다른 해결책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그 해결책을 제공한 사람이 찰스 다윈이었다. - P224

새끼 치타는 항상 부모로부터 유전자를 물려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발톱에 영향을 주는 하나의 유전자가 부모버전과 완전히 같지 않은 새로운 새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유전자는 무작위로 바뀌었다.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일어난 것이다. 돌연변이 과정 자체는 무작위적이다. 그것은 좋은 쪽으로 유도되지 않는다. 사실 대부분의 돌연변이 유전자는 상황을 악화시킨다. 하지만 약간 더 긴 발톱의 예처럼 몇몇 경우는 상황을 더 좋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 경우 그런 돌연변이가 일어난 동물(혹은 식물)은 살아남을 가능성이더 높고, 따라서 그 돌연변이 유전자를 포함한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할 가능성이 더 높다. 이것이 다윈이 자연선택이라고 부른 과정이다(하지만 그는 ‘돌연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않았다). - P229

다윈의 위대한 점은 인간 선택자가 필요 없다는 사실을깨달았다는 데 있다. 자연은 그 모든 일을 혼자서 수억 년 동안 해왔다. 어떤 돌연변이 유전자는 동물이 생존하고 번식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런 유전자는 개체군 내에서 출현 빈도가높아진다. 다른 돌연변이 유전자는 동물이 생존하고 번식하는걸 더 어렵게 만들고, 따라서 개체군 내에서 빈도가 점점 줄어들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사라진다. - P231

그렇다면 100만 세기 동안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을지 한번 생각해보라. 우리 조상들이 바다에서 기어 나온 물고기였던 때로부터 300만 세기가지났다. 그건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이다. 매 세대 한 단계씩무수히 많은 세대에 걸쳐 변화를 축적할 기회가 있었다. 다시말하지만, 성공적인 돌연변이는 비록 무작위적이더라도 작다는 게 핵심이다. 돌연변이 동물은 무작위로 뒤섞인 엉망진창이 아니다. 각각의 무작위적 변화가 그 동물을 앞 세대와 아주조금만 달라지게 만든다. - P232

우리를 생존에 적합하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는 종마다다르다. 치타의 경우는 단거리 질주이고, 늑대의 경우는 장거리 달리기이며, 풀의 경우는 햇빛을 잘 흡수하고 소(또는 잔디깎기)한테 뜯기는 걸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이고, 소의 경우는 풀을 잘 소화하는 것이며, 매의 경우는 맴돌며 먹이를 포착하는 것이고, 두더지와 땅돼지의 경우는 땅을 잘 파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에 해당하는 것은 경제적 수지타산을 잘 맞추는 것이다. 몸의 구석구석과 수십억 개의 세포에서 함께 일어나고 있는 수천 가지 과정을 잘 처리하는 것이다. 그 모두는세부는 크게 다르지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미래 세대로 유전자를 전달하는 일에 능하다는 것이다. 그 모두는 살아남아유전자를 전달하는 일을 잘하게 해주는 바로 그 유전자를 전달하는 데 능하다. ‘살아남아 유전자 전달하기‘라는 같은 일을하는 각기 다른 수단들인 것이다. - 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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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공부를 이룬 성자에게는 반열반般涅槃에 드는 것이요, 공부를 아직 이루지 못한 사람에게는 ‘내가 금생에 못 다한 공부를 다음생에 마저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생전에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새 계기를 마련하듯이 죽음역시 몸과 마음을 새로이 바꿈으로써 또 하나의 일전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그 이상도 그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니 향상의 계기를 마련하는 죽음이 되지 못한다면, 그 죽음은 제대로 된 죽음이 못되고 옳은 죽음이 못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P26

영가는 지금 경험하는 죽음을 ‘금생에 할 만큼 했는데 이제 몸도 마음도 피곤하다, 새 출발이 필요하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 심기일전하여 해탈을 향한 큰 걸음을 다시 내딛겠다‘ 하는 다짐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해탈 · 열반을 향한 큰 걸음으로서 죽음을 맞아야합니다. 그러니 죽음은 결코 우리가 슬퍼할 일이 아니고 울부짖고 눈물 흘릴 일도 아닙니다. - P30

이렇게 원인을 따라 주욱 올라가면 죽음의 일차 원인은 태어남이고, 그 다음은 유취-애수촉육처-명색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받은 색신은살·뼈· 오장육부가 있는 인간계의 육신이니 이때의 명색 명名肉이 되는 셈입니다. 그러한 명색이 죽음의 깊은 원인이되겠습니다. 그런데 그 깊은 원인에도 다시 그것의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이 식입니다. - P34

식이란 분별하여 아는 것인데 대상의 차이를 구분하여, 그 차이를 통해서 사물을 아는 능력입니다. 대상의 본질이 아니라 표면상의 차이로 그 대상을 아는 식은 앞의 일종으로 지혜이긴 하나 매우 얕은 지혜입니다. 그얕은 지혜를 넘어서는 차원의 지혜가 바로 반야pania입니다. 우리가 몸을 받아서 태어나는 고통스런과정을 밟는 것도 결국은 이 얕은 지혜인 식에 매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식에도 다시 그 원인이 있습니다. 제행무명 때문입니다. - P35

사성제란 무엇인가?15 부처님이 설하신 최초의 법문이 <초전법륜경Dhammacakkappavattana Sutta>입니다.
부처님은 이 경에서 중도와 팔정도八正道사성제를 말씀하셨습니다. 사성제는 고성제苦聖諦,집성제聖諦,멸성제滅聖諦, 도성제道聖諦입니다. 부처님은 이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만 진리라는 말을 쓰십니다. - P36

사성제는 모든 존재가다생에 걸쳐 몸을 받고죽고, 또 다시 몸을 받고 죽기를 거쳐 마침내는 깨닫게 되고 또 반드시 깨달아야 할 절대적 진리입니다. - P37

몇 생에 걸치는, 몇 백 생에 걸치든, 다겁생에걸쳐서라도 사성제를 반드시 깨달아야 합니다. 불교를 믿든, 기독교를 믿든, 천주교를 믿든, 이슬람교를믿든, 힌두교를 믿든, 무신앙자이든, 과학자이든 간에사성제는 누구든 언젠가는 깨달아야 하는 진리인 것입니다. 사성제를 깨달아 아라한이 되면 존재와 삶은완성된 것이고 마침내 할 일을 다해 마친 것이 됩니다. 존재로서 할 일을 다했기 때문에 존재의 세계를벗어나게 됩니다. 즉 해탈 · 열반하여 윤회를 끝내게됩니다. - P38

인생은 삶에서 겪는 갖가지 체험들, 아픔, 고통, 시달림 등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의 목표를향해서 나아가게 되는 흐름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람만이 누리는 생, 즉 인생은 목표지향성을 띤 특수한 흐름입니다. 그 목표가 바로 사성제에 대한 깨달음, 즉 해탈 · 열반입니다. - P39

우리가 해탈열반에 들지 못하고 고를 지속하고있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를 지속하려는 열망, 그강력한 집착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죽고 싶다, 존재하기 싫다‘ 하는 것까지도 사실은 존재에 대한 열망입니다. 왜? ‘이런 형태의 삶은 싫다, 내가 원하는 삶의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싫다‘는 것이므로, 결국은 자기가 원하는 다른 어떤 형태의 존재를 갈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 P42

그러면 어떻게 ‘존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부처님은 존재存在苦에서 벗어나 해탈 · 열반에 드는길, 그 길은 12연기를 순관-관순역관함으로 걷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 P43

우리는 지금 윤회의 현장에 서서 다음생에 몸을 어떻게 받고, 다음생에 대한 원력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하는 중차대한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늙어가고 죽음을 앞두고 있고 또 죽어서 다음 몸을 받아야 하는데, 문제는 ‘어떻게 하면 삶과 죽음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결국 ‘어떻게 하면 존재에 대한 갈애를 없앨 것인가?‘라는 것이고, 그 답은 앞에서 말했듯 사념처를 관함으로써 수와 애의 연결고리를 차단하는 데 있습니다. 이런 소식을 담고 있는 것이 팔정도입니다. 이 팔정도의 실천을 구체화하는 열쇠 중 하나로 우리는 <염신경念身經 Kayagatasati Sutta>21을 발견하게 됩니다. - P46

자기업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이 몸뚱이입니다. 우리가 병을 앓는 것도, 죽음을 겪는 것도 모두다 바로 이 몸뚱이를 통해서이니 그만큼 몸을 관하는것이 중요할 수밖에 없으며 그만큼 향상의 계기도 됩니다. 바깥의 색에서는 해탈의 계기를 결코 찾을 수없습니다. 그 때문에 부처님은 바로 이 몸身)에서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바른 마음챙김하고, 그 몸을 통해서 겪는 온갖 느낌과 경험들을 대상으로 하여 바른마음챙김 수행을 하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 P48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막연하게 생각하거나 대단히 굳어버린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지요. 그러면 과연불교에서 죽음은 무엇인가? 지금 이 맥락에서는 ‘식이 명색과 헤어지는 것이 죽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식은 과거생에 지은 여러 업을 다 함장술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걸맞은 다음생의 명색과 만납니다. 식이 명색과 헤어지고 다시 새로운 명색과 만나는 과정이 죽음과 재생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식이라는 불변의 실체가 있어 윤회를 겪는 주체인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엄밀한 의미에서식은 불변이 아닙니다. 그 자체는 찰나지간에 변하는 것이어서,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진리를실증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식이 고정된 채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변하면서 재생하는 것입니다. - P50

영가의 세계가 다른 것이 아니고, 그저 향상을 향해서 꾸준히 나아가는 도중에 잠시 합쳐졌던 심신이 다시 흩어지는 과정입니다. 심신이 흩어진다는 말은 곧다음생을 향하여 새 출발을 한다는 것입니다. 새 출발을 하려면 새로운 식과 신이 필요한 겁니다. 새 몸과새 환경을 받아 다시 시작하는 과정이 커다란 향상의전기가 되어야 합니다. 부디 그 전기를 잘 살리기 바랍니다. 이것이 영가가 반드시 챙겨야 할 일입니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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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온五蘊이 흩어지는 걸 죽음이라 부르는 겁니다. 죽음이란 대단히 거창하고 두렵고 먼 것 같지만, 실제로는 한때 가합假슴으로 만났던 오온, 즉 색 · 수受 · 상想 · 행行·식이 헤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저들오온은 그저 무상할 따름으로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어떤 운동현상일 뿐입니다. - P11

인생은 불교용어로 풀자면 제행이 됩니다.
제행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인연 따라 복합적으로 만나 얽히고설키며 전개되는 것이라서 천류라고도 합니다. 변천할 천遷에 흐를 류流이니, 끊임없이 변천하면서 흘러가는 것, 그것이 행입니다. - P13

생사가 없는 그 경지, 즉 열반은 모든 존재가 도달해야 할 궁극이자 종점입니다. ‘어떻게 하면 노사가 없을 수 있고, 어떻게하면 생이 없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도성제, 즉 팔정도입니다. 팔정도를 닦는 것이 노사를 없애는 길이요, 생을 없애는 길이요, 유를 없애는 길이요, 취를 없애는 길이요, 애를, 수를, 촉을, 육처를 명색을,식을,제행을 없애는 길이요. 드디어는 무명도 없애는 길이다.‘ - P17

우리가 수행을 통해 향상을 시도한다는 것자체가 아직 명의 상태가 실현되지 않았다는 뜻이 되고 그래서 역관의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니까, 이때는연결고리를 끊어서 연결 관계를 차단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 P18

한편 역관을 실현해 내는 것이 팔정도라면, 이 팔정도의 길을 비추어 주고 이끌어 주는 것은 법입니다.
법은 부처님이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쓰시는 수미일관된 체계입니다. 12연기를 순관을 하는 것도 법이고역관하는 것도 법입니다. 말하자면 ‘ㅇㅇ이 있으면, ㅇ0이 있다‘고 하는 것이 순관이고, ‘ㅇㅇ이 없어지면, 00이 없다‘, 또는 ‘ㅇㅇ이 없으려면 ㅇㅇ이 없어야 한다"고 관하는 것은 역관인데 부처님은 특히 역관을 실현하는 길을 도라 하시고 팔정도로 자세하게 설해 주신 겁니다. - P19

삼세양중인과설을 참고하여 제행을 보면,제행은과거세에 지은 여러 가지 행위들입니다. 과거세에 지은 인業因들이지요. 그것이 금세의 식을 규정합니다. 이 금세의 식이 육처를 통해 촉수애-취를 짓는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안·이·비·설·신·의眼耳육처로 촉수애취하는 대상은 명색입니다. - P22

그렇다면 제행은 왜 있는가? 제행은 무명無明 때문에 있습니다. 무명이 원인이 되어 태어남과 삶이 있게됩니다. 영가에게 닥친 죽음, 그 죽음의 원인도 무명입니다. 요컨대 우리 모두가 태어나고 살고 늙고 죽게되는 원인이 무명입니다. 도대체 왜 죽음이 발생하는가? 한 마디로 무명 때문입니다. 만일 무명과 갈애를넘어선 지혜를 증득하면 죽음을,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 P23

앞서 이야기한 연기법도 지혜와 반드시 연계되어야만 합니다. 지혜의 결여가 무지, 무명이니 무명이연기의 첫머리에 놓이면 9연기가 갖고 있는 모든 한계성이 해결됩니다. 즉 12연기가 되면서 멸성제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무명이 있기에 유위의 연기가 이어진다고 하시면서 이 9연기를 제행으로 표현하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해 ‘무명이 있으면 연기라는 제행이 있다. 그제행은 구체적으로는 ‘재생식再生識이 있으면 색色이 있고, 명색이 있으면 식이 있고, 그 다음 육처 등나머지 제 요소들이 있다"고 설명됩니다. - P24

이렇듯 무명에 의해 벌어지는 식-명색-육-촉수애-취유생-노사가 제행이요,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변화하는 요소들이 거듭거듭 이합집산하면서 흘러가기 때문에 인생은 그야말로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 P25

법은 제행의 흐름에 질서를 부여하고 의미를 갖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법法은 보다 나은 의미를 향한 향상의 노정으로 제행을 바꾸어나가는 의도적 측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법답게 살아서 법을 바로 세운다면 금수나 다를 바 없는 맹목적인 존재의 흐름으로부터 의미 있는 삶의 도정으로 인간의 제행을 전환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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