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는 나와 남들과의 관계를 규율하는 체계이다.
저는 불교에서의 윤리를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나와 남들 간의 관계에서 남이란 다른 사람이기도 하고, 또 다른 생명과 자연까지도 포함합니다. 그런 나와 남과의 관계를 규제하고 규율하고, 또 어떤 질서를부여하는 체계, 그것이 윤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P10

‘살생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심신을 취하게 만드는 것들을 쓰지말라.‘는 오계는 누구나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도리입니다. 윤리는 이렇듯 사람과사람 사이의 관계가 중심이 됩니다. 사람과사람 사이가 건전할 때, 다시 말해 사람들이 건전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의식수준에 이를 때, 사람과 동물과의 관계,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도 좋아질 수 있다고 봅니다. - P12

그런데 그 관계를 ‘사람과 사람, 사람과 동물, 사람과 자연으로 볼 것이 아니라, ‘나와 남, 나와 동물, 나와 자연‘으로 분명히 한정해야 할 것입니다. 실천 주체는 어디까지나 ‘나‘입니다. ‘사람‘이라는 말은 막연한개념입니다. 사람이 어찌해야 한다.‘는 말은 사실상책임 회피에 쓰기 좋은 말이어서, ‘사람은 이래야 한다.‘ 할 때 보통은 자기를 빼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과 자연의 관계로 뭉뚱그려서 볼 게 아니라, ‘나와 자연‘의 관계로 명확히 한정시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불교에서의 윤리는 반드시 ‘나‘를 포함하고 ‘나‘로부터 출발하는 대단히 강력한 실천 개념입니다. 하지만 윤리가 그런 실천적 체계이긴 한데시간·공간의 간섭을 많이 받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윤리가 지역이나 역사 문화 등 여러 조건에 제약을 많이 받는다는 점에서 ‘윤리는 조건 지어지는 것‘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 P13

‘나와 남과의 관계가 윤리라면, 도덕이란 무엇일까요? 불교에서 ‘도덕이란 나와 진리와의 관계‘를 바르게 세우는 체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윤리가 나와 남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면, 도덕은 나와 진리와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 규정짓고 싶습니다. 윤리의 구체적표현이 계율이라면, 도덕은 진리, 즉 도道로써 표현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문 표현 그대로 ‘길 도道‘에 ‘큰 덕德자 이지요. 시간·공간에 제약되고 조건지어지는 윤리에 비하면 도덕은 나와 진리와의 관계이기 때문에 시공을 초월합니다. 나와 진리의 관계를 바르게 세워야 하는 만큼 따라서 도덕이 갖는 의미는 대단히 심오할 수밖에 없습니다. - P14

부처님은 최초의 법문인 <초전법륜경>4에서 중도中道, 팔정도, 선언하셨습니다. 사성제, 즉 고성제苦聖諦집성제集聖諦, 멸성제滅聖諦제도성제가 팔정도입니다. 진리를가운데추구하면서도 길을 잘못 들어 헤매는 중생들에게 부처님은 ‘팔정도로 수행하는 것이 바른 길이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 첫 법문부터 마지막법문까지 시종일관 끊임없이 강조하시고 역설하신 것이 팔정도입니다. 그만큼 불교의 핵심은 팔정도입니다. - P15

불교인가 외도인가는 팔정도가 있느냐 없느냐 그차이에 달렸습니다. 팔정도가 있으면 불교이고 정법法입니다. 팔정도가 없으면 외도입니다. 팔정도가 없으면 그건 정법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표방하는 취지가 좋아도 팔정도 없이는 정법이 될 수가 없습니다. 불교의 특색은 팔정도입니다. 왜일까요? 팔정도 수행을 통해서만 아라한이 나올 수 있고 팔정도가 없는 외도에는 아라한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팔정도는 아라한이 되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입니다. 바른 견해인정견이 있어야 바른 사유(正思)가되고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을 통해 바른집중을 이루면 아라한의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 P17

아라한은 불교가 근본 이상으로 삼는 무탐無貪,무진瞋, 무치無癡를 이룬 분입니다. 탐욕이 없어진 사람, 성내는 마음(心)이 없어진 사람, 어리석음이없어진 사람입니다. 부처님도 아라한이신데 같은 아라한이라도 부처님과 아라한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성불成佛합시다‘ 할 때의 성불이란 부처가 된다는 말인데, 부처는 해탈열반을 이루고 중생을 위하여 법을 세우신 분입니다. 이 겁에서 부처는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뿐입니다. 반면 아라한은 부처님 법에따라 해탈 · 열반에 이른 분입니다. 부처님과 아라한의차이는 법을 세우셨는가, 아닌가로 구분됩니다. - P18

우리가 정定에 들게 되면 대단히 높은 정신세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탐욕, 진심, 치암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무탐, 무진, 무치인가? 그렇지않겠지요. 정에서 깨어나면탐 • 진 · 치가 도로 살아납니다. 탐진·치가 해결된 것이 아니고 잠시 엎드려숨어있을 뿐입니다. 그런 상태는 탐진치가 완전히없어진 것이 아니므로 불교가 추구하는 목적이 될 수없습니다. 불교는 탐진치를 뿌리째 없애는 것. 다시는 소생할 수 없게끔 뽑아내는 것, 발본색원拔本塞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탐·진·치를 뿌리째 뽑아낸 상태를 아라한의 경지라 하고, 아라한이 되는 것이 불교 수행의 궁극 목적입니다. - P19

팔정도는 진리로서의 길이고, 실천도로서의 길입니다. 팔정도의 실천이 도덕의 실천입니다. 불교가 팔정도를 통해인간 완성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도덕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교의 중심이요, 핵심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의 길은 팔정도를 따라 도덕을실천하는 길이요, 진리를 실천하는 길입니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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