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
칼릴 지브란 지음, 공경희 옮김 / 책만드는집 / 201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이 책을 알아보았을때 무척이나 놀랐다. 먼저 이 책의 저자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였다는 것과 이 책이 다양한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솔직히 이렇게 많은 출판사에서 이 책을 출판할만한 가치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책의 리뷰는 무척 많았다. 솔직히 나는 책을 읽기 전에 다른사람의 리뷰는 읽지 않는다. 그 사람의 생각과 편견이 내가 책을 읽기도 전에 심어지기 때문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책을 받자마자 다 읽었다. 내리 읽히는 것이 어렵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많은 리뷰들을 찾아봤다. 

찬사가 이어졌다. 이 책에 담긴 가치가 이리 컸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많은 리뷰들을 보면서 모두가 하나같다고 느껴졌다. 솔직히 나는 이 책이 그 리뷰들처럼 읽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외인이 되기로 했다. 이제부터 다른 시각으로 이 책의 리뷰를 살펴보려 한다.

 

이 책의 내용은 이렇다. 주인공 알무스타파는 오르팔레세에서 12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날 배가 멀리서 보이자 알무스타파는 배를 타러 내려간다. 그때 마을 주민들이 그에 앞을 찾아와 돌아가지 말라는 애원을 한다. 그를 붙잡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알무스타파는 배를 타야만한다. 그 안에 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 바다에 대한 열망이 마을의 주민들의 염원보다 컸던 것이다. 주민들을 그를 떠나보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으로 질문을 한다. 죽음, 결혼, 우정 등의 삶에 대한 변수들에 대해서 말이다. 알무스타파는 이에 차근차근 대답을 한다. 그 대답에는 삶의 진리와 가르침이 담겨져 있었다. 

 

이 부분이 이 책의 핵심이다. 알무스타파는 즉문즉설을 하는데 그 대답이 삶에 가치를 생각할 정도로 깊은 뜻을 느끼게 한다. 나 역시 이 부분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감동했던것처럼 그런 감동을 느꼈다. 과연 이 책이 대단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불편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왜 이 책의 제목은 예언자인가..

책에 등장하는 주민들은 알무스타파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것을 포기하고 그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여기서 첫번째 불편함을 느꼈다. 알무스타파는 12년동안 거기서 생활을 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그제서야 질문을 던진다. 그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왜 평상시에는 질문은 던지지 않았을까? 이 주민들은 알무스타파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일까? 

그렇게 시작된 물음은 나만의 대답을 내렸다. 주민들은 알무스타파라는 존재를 별로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떠난다기에 그제서야 그의 가치를 알게 되고 질문을 던진 것이다. 떠나려는 그에게 안부를 묻거나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묻지 않는다. 자신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만 기다린다. 

여기서 작가가 주민들과 알무스타파를 갈라놓았다. 알무스타파는 현명한 학자이며 대단한 사람이고 그에게 질문하는 주민들은 무지한 사람들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알무스타파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그의 대답이 더욱 가치있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두번째는 이 책의 제목과 연관되는 불편함이다. 예언자 즉 이 마을의 예언녀인 알미트라의 등장이다. 그녀는 예언가이다. 즉 제목 그대로라면 이 책의 주인공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그런 그녀도 알무스타파에게 질문을 하고 대답을 구한다. 이 순간 이 책은 패러독스가 되어 버린다. 예언자라면 누구보다 해박한 지식을 가진 상위 지식층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그녀조차 그에게 질문을 하고 답을 구한다. 

이것이 패러독스가 아닌가? 예언자가 중심이 되어야 할 이 책이 그 순간에 알무스타파에게 옮겨 가버린 것이다. 주인공이 주인공이 아닌것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 책의 제목을 예언자라고 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작가는 그 수 많은 삶에 대한 대답으로 대중들에게 패러독스를 준다. 그가 알무스파타를 통해서 펼쳐낸 주민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고전에 버금갈 정도로 깊이가 있었다. 물론 인정한다. 그러나 작가는 주민들과 예언가 알미트라를 통해서 그것을 비웃는것이다. 제목이 예언자이기에 독자들은 예언자만 생각한다. 작가는 거기서 독자에게 질문한다. 

'예언자가 예언자인가? 알무스타파는 예언자로서 대답을 한 것인가? 당신들(독자들)은 그것만 생각하겠지? 하지만 나는 알무스타파가 예언녀 알미트라의 질문에 대답을 하던 그 순간부터 당신들에게 숨겨진 질문을 할 것이다. 그녀는 예언자로서 왜 알무스타파에게 질문을 했지? 그녀 스스로 예언자라는 중심에서 멀이지는 것 아닌가?'

 

결론은 이 책은 패러독스라는 것이다. 너무 비약적인가? 그러나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이 마냥 좋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독기라고 할까? 작가에게 공격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두고 읽어볼 생각이다. 작가가 독자에게 말하고 싶은 진짜 의도는 무엇이였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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