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만, 조금만 더 시공주니어 문고 2단계 21
존 레이놀즈 가디너 글, 마샤 슈얼 그림, 김경연 옮김 / 시공주니어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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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더스의 개>의 현대판의 불리기도 하는 책이지만 그저 뚝 떼어놓고 봐도 명작이다. 병든 할아버지, 충실과 개와 살아가는 꿋꿋한 소년. 세상의 이기심에 희생되어 버린 네로가 미국의 개척 시대에 다시 태어난다면, 윌리처럼 건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예술을 누리기엔 너무나 가진 것이 없고 순수해서 세상의 악의와는 맞서지 못했던 맑은 영혼은, 루벤스의 '십자가로 끌어올려지는 예수님'의 굽어살핌을 받아, 분명 아름다운 곳으로 승천했을테지만,  

 <조금만 조금만 더>의 윌리는 동정없는 세상에서도 스스로를 소외시키지 않으며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건강한 아이이다. 건강하다... 마음이 참 건강한 이 아이는... 원망도 후회도 쉽게 하지 않고, 포기하는 사치마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참 아팠다. 감자농장의 세금이 500달러나 밀리도록 할아버지가 외면해버린 세금독촉장, 말을 잃어버릴만큼 끙끙거리다 어린 손자녀석의 어깨에 빚을 넘겨주는 그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윌리도 하지 않는데, 내가 감히 어떻게 할까... 개썰매 대회는 다른 누군가에게는 일확천금이 될 수도 있겠지만, 윌리에게는 감히 1등이 아닐수도 있다는 예상마저 허락되지 않는다. 상금 500달러, 이제 감자를 아무리 캐도 현실을 악화시키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던 윌리에게는 마지막 기회이다. 윌리와 번개, 콩과 콩깍지같던 이들에게, 최정예 썰매개인 사모예드를 이끄는 얼음거인은 너무나 힘겨운 상대다. 그래, 세상이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란다. 아이야...  

번개에게 주문하는 간절한 윌리의 바램, 조금만, 조금만 더... 조금만, 조금만 더... 그대로 달려줘, 번개.... 터져버린 건 번개의 심장뿐이 아니라 나의 메마른 가슴도 역시.... 얼음거인의 총성 앞에서 부끄럽고, 안도하며, 슬퍼할 겨를이 없는 것은 참으로 가혹한 일이다.   너무 힘들어서 다시 앞장을 넘기기가 망설여지는 가혹한 경험, 나에게 이처럼 아프게 다가온 말이 또 있었을까....

 

조금만 조금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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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 학교 가기 싫을 때 쓰는 카드 - 2단계 문지아이들 8
수지 모건스턴 지음, 김예령 옮김, 미레유 달랑세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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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베르 노엘 선생님의 인생의 시련...을 비롯한 세상의 상식으로는 헤아리기 어려운 여러 수업들,   "너희에게 선물을 주겠다"  

산타와 이름이 같은 이 늙수그레한 선생님은 단숨에 학교를 너무나 오고싶은 마법의 공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인생의 위기 때마다 쓰라고 나눠준 조커 중 '학교 가기 싫을 때 쓰는 카드'는 그리 쓸모가 없었던 셈. 그러나 조커를 쓰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은 안된다...는 선생님의 방침에 아이들은 깜짝 놀랄 집단행동을 하고...  

이런 선생님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앵카르나시옹 교장, 60이 다 되었는데도 미모가 남아있고 깐깐해뵈는 선생님은 위베르 노엘 선생님과는 상극이다. 쫓아내고 싶은 사람이나 쫓겨나는 것이 부당해 뵈는 사람 모두 이해가 되는 것은 왜일까? 솔직히 극히 상식적인 상황에서, 오히려 교육자가 상식을 신봉하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지킨단 말인가...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싶지 않은 앵카르나시옹 선생님, 오히려 큰 골칫거리를 안고 있기에 안쓰러웠달까, 그래서 이 책은 매력이 넘친다.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산타같은 할아버지 선생님의 편이 되었다가도, 우리 아이가 학교에 가서 만나게 될 선생님이 이해하기 힘든 분이라면...  

 읽을 때마다 달라지게 되는 관점의 변화를 차지하고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해고된 선생님께 아이들이 '명예롭게 은퇴하고 싶을 때 쓰는 카드'를 선물하는 장면이다. 나에게 있어, 그 장면은 이렇게 읽힌다. 

선생님은 실패한 게 아니다... 선생님의 수업은 우리가 받은 커다란 선물이다... 선생님은 명예로운 은퇴를 할 자격이 있는 분이다...  

 

요즘 들어 다시 읽어 보고나서 위베르 노엘 선생님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학교가 아니라, 이런 선생님의 행동이 전혀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만큼 넉넉한 학교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것, 우리 아이들, 살면서 이런 선물 한번 받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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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전쟁 - 불륜, 성적 갈등, 침실의 각축전
로빈 베이커 지음, 이민아 옮김 / 이학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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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에서 1997년에 출간되었다가 2007년에 이르러서 개정판이 나온 로빈 베이커의 <정자전쟁>은 10년의 세월 동안 빛바래고 구태스러워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위험하고 선정적으로 비친다. 꼭꼭 숨겨야 안심이 될 것 같은 구석지고 음습한 성까지 정중앙으로 끌어내 학술적인 측면으로 객관화하고 있는데, 10년 전에는 미성년이었고, 10년이 지나서는 별다를 게 없는 상식적-그리고 무지한- 성의식을 가진 본인을 비롯한 이들에게 읽는 내내 불편한 감각을 불러일으키게 될 듯싶다.


  일부일처로 살아가는 대다수의 부부들은 매 자녀의 출산당 약 500회의 성관계를 갖는다고 하는데, 수태가 목적이 아닌 주기적 성관계는 정자전쟁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정자전쟁이란 여성의 자궁경부에 다른 남성의 정자를 물리치고 자신의 정자로 난자를 수정시키려는 종족보존을 위한 치열한 각축전을 말한다. 여성은 배우자가 아닌 외도로 만난 남성과의 단발적인 성관계에서 수태할 확률이 높은데, 주기적 성관계를 맺는 남성들은 이 정자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방어책으로 배우자인 여성들에게 자신의 정자부대를 채워 넣는다(그리고 여성의 신체는 애인의 정자부대를 편애하도록 배려할 수도 있다)고 로빈 베이커는 말한다.


  일상적인 부부들의 성적 트러블, 스와핑, 양성애, 배타적 동성애, 강간, 집단성교, 매춘, 자위행위, 오르가슴, 외도를 숨기는 효과적인 방법 등등. 쉴 새 없이 독자들에게 몰아치면서, 인간의 거의 모든 성행위의 범주를 정자전쟁의 일환으로 풀어내는 저자의 일관된 서술방식이 때로는 책을 덮어버리고 싶을 만큼 왜 그렇게 껄끄러웠나 생각해보게 된다. 반윤리적이고, 명백한 범죄행각인 성행위에서조차 종족보존의 측면에서 분석하고 있는 그 철저한 사명감이 불편했던 것이 아니라, 의사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해 사례를 검증해나가는 방식에 대한 반발심리 때문이었다. 심심찮게 터져 나오곤 하는, 유명 칼럼니스트들이 실제의 조사 없이 사례들을 조작해 칼럼의 논지들을 한 치의 오차 없이 검증해나가는 것은, 명백하게 직업윤리를 저버린 행동이다. 그러나 로빈 베이커는 이미 서문에서 이 책에 나오는 모든 사례들이 주변인과 자신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재구성으로 완전한 픽션이라고 당당히 밝히고 있다. 픽션 이상으로 과격하고 적나라한 실제 상황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겠지만, 재구성이라고 밝혀진 책임 소재면에서도 자유로운 장치들은 실례이상으로 생생하게 다가오고 있으니 자못 교활한 면모가 없진 않다.


  정자전쟁은 다시 말하지만,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윤리적으로 인정받는 일정 기준을 준수하는 성행위에서 오는 상식적인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종족보존율을 최대한으로 높이는,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후손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힘껏 퍼뜨리면서도 양육의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는 정자전쟁의 승리자들에게 월계관을 준다. 외도의 상대방을 임신시켜 그 남편에게 양육케 하는 것, 남편의 존재는 장기적 배우자 관계에는 적합할지 모르지만 유전적으로 더 마음에 끌리는 정부에게 정자전쟁에서 우세하도록 편애하는 것, 양성애 관계를 맺는 것이 외도를 효과적으로 은폐할 수 있는 것, 일찍이 동성애적 행위에 눈 뜨는 조숙한 아이들이 정자전쟁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다는 것 등등. 정자전쟁이 추구하는 목표는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후손을 가장 많이 갖는 세대 쟁탈전에서의 승리이지 사회의 통념에 안주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정자전쟁>은 최대 다수의 후손들을 위해 반사회적인 행위들을 습득하고 효과적으로 수행하라는 것을 설파하기 위한 책일까? 최종장에 실린 최후의 정자전쟁의 승리자는 역설적으로도 일부일처를 통해 무수히 많은 후손들을 많은 부부이다. 모든 것은 가능성의 문제이다. 정자전쟁을 야기하는 상당수의 책임은 여성에게 있으며, 여성은 외도를 추구하도록 생물학적으로 설정되어 있다고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빈틈없는 각도에서 검증하고 있는 이 책을 통해 2007년의 우리는 대체 무엇을 얻고, 변혁을 이루어야 하는가. 현상을 바로 이해하는 것과 현상을 억제하기 위해 의식화하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하단 말인가? 어렵사리 읽어낸 책을 통해 느꼈던 혼란스러움과 불편한 감각은 앞으로도 10년간, 그리고 또 10년간...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치열하게 계속 되리라는 선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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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야, 안녕 부모와 자녀가 함께 읽는 동화
도종환 지음, 황종욱 그림 / 나무생각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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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읽었던 아주 예쁜 그림책이 있습니다. 윤대녕 씨가 쓰고, 방정화 씨가 그림을 그린 <벙어리 꽃나무>였어요. 투명하고 여린듯하면서도 강건함을 잃지 않는 윤대녕의 문체와 따뜻한 원색의 개구진 삽화를 주로 그리는 방정화의 그림이 어우러진 안팎이 두루 예쁜 그림책이었지요. 우리 작가의 그림책 시리즈의 일환으로 나온 시리즈 가운데서도 유난히 기억에 남아 있는 한 권이었습니다.


  유명작가가 글을 쓰고, 그것을 그림책화 할 때 독자의 기대치는 자못 높아집니다. 그러나 기대 이하의 스토리텔링이나 작화로 인해, 수준이하의 책으로 판명될 때의 실망감은 몇 배가 되어 다가옵니다. 그래서 도종환 시인의 <나무야, 안녕>이 출간되었을 때 기대만큼, 우려되는 바도 컸습니다. 시인의 네임밸류에 기댄 평작이 또 하나 나오겠구나...하는 이른 결론에 사로잡혀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책장을 넘기기 전, 강렬하지만 거슬리지는 않는 생명력이 충만한 자줏빛 표지가 인상적입니다. 둥글둥글한 자줏빛 기운이, 왠지 모를 생명의 에너지가 나무를 에워싼 채 땅과 대기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을 보니, 이 나무가 바로 자두나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허리가 뚝 꺾여버린 어린 자두나무는 봄여름가을 내내 자신의 흉물스러움에 주위의 정성어린 위로도 아랑곳없이 실의에 빠져 말을 잃어갑니다. 겨우살이를 위해 주인아저씨가 막대기를 대고, 끈으로 묶어주지 않았다면 정말로 죽었겠지요. 추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움츠러든 들판에, 여전히 생기 넘치며 낮보다 더 찬란한 빛을 뿌리는 별들이 가득한 밤에 자두나무는 누군가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습니다. 별의 정령은 살고자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북돋으며 하지 않는 자두나무 곁에서 세상에 나온 존재이유를 일깨워 줍니다. 봄이 오고, 여름이 가고, 가을에 이르러 별빛이 잦아들었을 때 부러진 가지 가까이에 맺힌 자두 한 개. 


  도종환 시인의 뒷마당에 허리 꺾인 자두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을 보고, 쓰셨다는 작가후기가 소박하지만 진정성 있는 메시지가 되어 들려옵니다. 화려한 치장 없이 소박한 진정성으로 주변을 이야기하는 시인의 문학성이 과장 없이 전해져옵니다. 부모의 살뜰한 보살핌에 익숙한 아이들은, 들판의 어린 자두나무와는 비할 수가 없을 만큼, 여리고 무너지기 쉬운 존재들일 테지요. 허리가 꺾여 소리 없이 자신을 죽여 가는 침울함에 빠진 자두나무의 모습은, 한 번의 실패에도 세상을 다 잃은  듯 좌절감에, 주위의 어떤 도움의 손길에도 마음을 열어 주려하지 않는 우리의 품 안의 아이와 꼭 닮았습니다. 별빛이 스며들어 한 알의 자두 열매를 맺기까지, 우리 아이가 부모와 선생님과 주변의 마땅한 도움으로 꿈을 이루기 위한 일보를 내딛기까지,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서’ 보다 앞 선 출발선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과연 알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기꺼이 도움을 베푸는 따뜻한 그 손길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지치고 보잘 것 없다고 여겨 팽개쳐둔 자신을 믿어주고, 스스로 일으켜야만 한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되새기게 되었을까요?


  이상의 <황소와 도깨비>는 한병호의, 채만석의 <왕치와 소새와 개미>는 최민호의, 백석의 <개구리 한솥밥>은 유애로의, 권정생의 <강아지똥>은 정승각의 삽화로 빛을 발하는 스테디셀러로 남은 것처럼 도종환 시인의 <나무야, 안녕>은 황종욱 씨의 삽화와 잘 어우러지고 있습니다. 들판의 사계를 은은하고 다채롭게, 그곳에 담긴 생의 에너지들이 충만해 있기 때문에 화려하게 불타오를 듯하게, 온 맘과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무수하게 박혀 온 대지를 뒤덮어 주는 듯하게  표현된 별빛이 책을 덮은 지금도 아른거리는 것만 같습니다. 자두나무에게, 우리 아이들에게 고루 하나씩 스며든다 해도, 멀찌감치 서서 동심을 부러워만 하는 어른들에게도 하나씩 나눠줄 수 있을 만큼 가득했던, 지친 영혼들에게 기꺼이 삶의 용기를 전해주는 모자람 없는 그 진실한 별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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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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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이력 탓일까? 그의 소설에서는 무국적성, 중도적인 정치성향, 속박되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의지 하나면 어떠한 가치들과도 화해할 수 있을 듯한 광활한 경계가 느껴진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나를 규정하는 의무감에 질식하지 않을 수 있는 때로는, 문명을 소외시킬 수 있는 자기 선언들. 나는 처음 만난 그에게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습들(<언더그라운드>와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이전의)을 발견해낸다. 그는 얀 마텔이다.


 <<파이 이야기>>는 저항할 수도 없이 모험 소설들에 푹 빠져 있는 내게, 해묵은 고전과 참신한  사이의 중간지대처럼 다가왔다. <모비딕>, <걸리버 여행기>, <노인과 바다>, <파리대왕>, <로빈슨 크루소>(그리고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조난자의 사투기가 언제나처럼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마는 것처럼, 안전지대에서 모험을 시뮬레이션 하는 독자에게 근원적인 생의 의지가 그 의심스러움을 압도해버렸다. 로빈슨 크루소가 29년 3개월 동안 문명과 유리 된 채 살아남은 것과 파이가 227일간 벵골 호랑이에게서 살아남은 것, 그 응축된 사투의 질을 생각해야지, 시간으로 우위를 점할 수는 없는 문제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 아슬아슬한 사선의 안쪽에 머물러 있는 현재에 안도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선 여전히 파이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있다.    


 인도 내의 유일한 프랑스령 식민지 폰디체리(캐나다의 프랑스령 식민지였던 퀘벡처럼)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는 파텔일가는 아주 온건하게 떠 있는 작은 이상향에서 만족스럽게 살아간다. 초반에 등장하는 동물원의 정치, 사회적 고찰이 다음 장의 중대한 복선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나니, 너무 쉽게 설득당하지 않으려고 바둥댔던 내가 한심스러워졌다. 호텔리어 출신의 아버지가 일궈나가는 동물원 안에서 핀신 몰리토 파텔, 파이는 자연과 인간과 야생동물 사이의 위계질서의 균형을 일찍이 발견해낸다. 힌두교도로 태어나 카톨릭 세례를 받고, 이슬람 예배를 드리며 미션스쿨에 다니는 파이는 ‘신(또는 신들)의 화해’를 이루어냈을지는 몰라도 많은 주변인들을 곤란에 빠뜨리는 종교관이 남다른 소년이다. 동물과 종교에 대한 파이의 의식은 세상의 통념에 반하기도 하고, 상식의 편협함을 간단히도 뛰어 넘어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파이의 그러한 시각이 바로 <<파이이야기>>를 관통해 흐르는 작가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에서 군림한다. 무인도를 장원삼아 자신을 총독이라 칭하고, 섬으로 흘러드는 모든 이질적인 존재들에 우위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는다(그래서 ‘방드르디’와 로빈슨 크루소의 관계가 역전될 때의 쾌감이란!). 파이는 뱅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구명보트에서 공존하기 위해, 동물원에서 배운 원칙들을 바탕으로 리처드 파커를 길들인다. 먹이를 잡아주고, 물을 먹여주는 보살핌에는 자신의 생존의지가 담겨있다. 리처드 파커는 파이를 절망과 자포자기의 나락에서 구원해주는 매 순간 목숨을 위협하면서 삶을 갈망하게 만드는 죽음의 사도 같다. 삶과 죽음의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자신을 벼를 수 있는 죽음의 가면을 쓴 채 곁에 머무는 파이가 살고자 하는 이유.   


 구조된 파이의 이야기를 오카모토를 비롯한 ‘문명인’들이 믿을 수 없어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얀 파텔은 소설 군데군데 사족까지는 아니지만 일부러 돌출시켜 이물감을 불러일으키는 장치들을 많이도 삽입했다. 힌두 사제와 이슬람 지도자와 카톨릭 신부가 만나 파이의 종교관을 성토하는 장면(웃어야하는 부분?)이나 식충 식물이 사는 산성화 섬(왜? 왜? 왜?) 등등. 믿음직한 이야기들의 잔혹성은 관리자형 인간들의 마음에 들지 않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쪽의 영웅적인 귀환에 내심 마음이 쏠린다. 파이가 정말 리처드 파커와 227일을 표류했는지, 표류하는 내내 간절히 바라던 ‘끝나지 않는 이야기’라 써진 공상의 한 권 마냥 리처드 파커를 창조해냈는지의 문제는 모호하고 그럴 듯 해 보이는 작가서문으로 다시 귀결된다(<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서장에서 ‘데레크 하트필드’의 무덤을 찾아가는 장면처럼). ‘듣고 나면 신을 믿게 되는 이야기’라고 노신사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여전히 자신만의 성소에 하나이자 여럿인 신(신들)을 모시고 신심을 잃지 않은 파이, 피신 몰리토 파텔은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넘치는 신의 은총을 받았다는 것일까? 리처드 파커든, 리처드 파커로 치환되는 식인요리사든, 태평양의 망망함을 기약 없이 표류하던 파이에게는 세상의 모든 신들이 정말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을 믿든(신, 또는 리처드 파커) 선택은 이미 파이에게서 우리에게로 넘어왔다.




“한 사람이라도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리 없다”

(폴 오스터,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서문 중에서...

음,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사실만을 기록하는 신문에 실은 꾸며진 이야기’였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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