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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의 이력 탓일까? 그의 소설에서는 무국적성, 중도적인 정치성향, 속박되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의지 하나면 어떠한 가치들과도 화해할 수 있을 듯한 광활한 경계가 느껴진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나를 규정하는 의무감에 질식하지 않을 수 있는 때로는, 문명을 소외시킬 수 있는 자기 선언들. 나는 처음 만난 그에게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습들(<언더그라운드>와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이전의)을 발견해낸다. 그는 얀 마텔이다.
<<파이 이야기>>는 저항할 수도 없이 모험 소설들에 푹 빠져 있는 내게, 해묵은 고전과 참신한 사이의 중간지대처럼 다가왔다. <모비딕>, <걸리버 여행기>, <노인과 바다>, <파리대왕>, <로빈슨 크루소>(그리고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조난자의 사투기가 언제나처럼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마는 것처럼, 안전지대에서 모험을 시뮬레이션 하는 독자에게 근원적인 생의 의지가 그 의심스러움을 압도해버렸다. 로빈슨 크루소가 29년 3개월 동안 문명과 유리 된 채 살아남은 것과 파이가 227일간 벵골 호랑이에게서 살아남은 것, 그 응축된 사투의 질을 생각해야지, 시간으로 우위를 점할 수는 없는 문제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 아슬아슬한 사선의 안쪽에 머물러 있는 현재에 안도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선 여전히 파이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있다.
인도 내의 유일한 프랑스령 식민지 폰디체리(캐나다의 프랑스령 식민지였던 퀘벡처럼)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는 파텔일가는 아주 온건하게 떠 있는 작은 이상향에서 만족스럽게 살아간다. 초반에 등장하는 동물원의 정치, 사회적 고찰이 다음 장의 중대한 복선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나니, 너무 쉽게 설득당하지 않으려고 바둥댔던 내가 한심스러워졌다. 호텔리어 출신의 아버지가 일궈나가는 동물원 안에서 핀신 몰리토 파텔, 파이는 자연과 인간과 야생동물 사이의 위계질서의 균형을 일찍이 발견해낸다. 힌두교도로 태어나 카톨릭 세례를 받고, 이슬람 예배를 드리며 미션스쿨에 다니는 파이는 ‘신(또는 신들)의 화해’를 이루어냈을지는 몰라도 많은 주변인들을 곤란에 빠뜨리는 종교관이 남다른 소년이다. 동물과 종교에 대한 파이의 의식은 세상의 통념에 반하기도 하고, 상식의 편협함을 간단히도 뛰어 넘어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파이의 그러한 시각이 바로 <<파이이야기>>를 관통해 흐르는 작가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에서 군림한다. 무인도를 장원삼아 자신을 총독이라 칭하고, 섬으로 흘러드는 모든 이질적인 존재들에 우위에 서기를 주저하지 않는다(그래서 ‘방드르디’와 로빈슨 크루소의 관계가 역전될 때의 쾌감이란!). 파이는 뱅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구명보트에서 공존하기 위해, 동물원에서 배운 원칙들을 바탕으로 리처드 파커를 길들인다. 먹이를 잡아주고, 물을 먹여주는 보살핌에는 자신의 생존의지가 담겨있다. 리처드 파커는 파이를 절망과 자포자기의 나락에서 구원해주는 매 순간 목숨을 위협하면서 삶을 갈망하게 만드는 죽음의 사도 같다. 삶과 죽음의 그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자신을 벼를 수 있는 죽음의 가면을 쓴 채 곁에 머무는 파이가 살고자 하는 이유.
구조된 파이의 이야기를 오카모토를 비롯한 ‘문명인’들이 믿을 수 없어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얀 파텔은 소설 군데군데 사족까지는 아니지만 일부러 돌출시켜 이물감을 불러일으키는 장치들을 많이도 삽입했다. 힌두 사제와 이슬람 지도자와 카톨릭 신부가 만나 파이의 종교관을 성토하는 장면(웃어야하는 부분?)이나 식충 식물이 사는 산성화 섬(왜? 왜? 왜?) 등등. 믿음직한 이야기들의 잔혹성은 관리자형 인간들의 마음에 들지 않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쪽의 영웅적인 귀환에 내심 마음이 쏠린다. 파이가 정말 리처드 파커와 227일을 표류했는지, 표류하는 내내 간절히 바라던 ‘끝나지 않는 이야기’라 써진 공상의 한 권 마냥 리처드 파커를 창조해냈는지의 문제는 모호하고 그럴 듯 해 보이는 작가서문으로 다시 귀결된다(<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서장에서 ‘데레크 하트필드’의 무덤을 찾아가는 장면처럼). ‘듣고 나면 신을 믿게 되는 이야기’라고 노신사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여전히 자신만의 성소에 하나이자 여럿인 신(신들)을 모시고 신심을 잃지 않은 파이, 피신 몰리토 파텔은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넘치는 신의 은총을 받았다는 것일까? 리처드 파커든, 리처드 파커로 치환되는 식인요리사든, 태평양의 망망함을 기약 없이 표류하던 파이에게는 세상의 모든 신들이 정말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을 믿든(신, 또는 리처드 파커) 선택은 이미 파이에게서 우리에게로 넘어왔다.
“한 사람이라도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리 없다”
(폴 오스터,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서문 중에서...
음,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사실만을 기록하는 신문에 실은 꾸며진 이야기’였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