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난 사람을 잘 그려요 엄마 아빠와 함께 신나게 그리기 2
레이 깁슨 지음, 신형건 옮김, 아만다 발로우 그림 / 보물창고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어린이 날, 우리 손녀딸에게 선물한 것인데  손녀딸이 아주 좋아하는 그림책이 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의 집
김희경 지음,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그림 / 창비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음의 집, 이 그림책은 주 독자인 어린이를 의식해서인지 아주 조심스럽게 집이라는 장소를 선택하여 마음의 모양을 펼쳐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 세상에서 개개인의 마음은 한 개인의 성역이자 타인이 침해해서는 안 되는 고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심리치료사들은 어떤 사람의 마음을 알고자 할 때, 그 사람이 그린 그림과 말, 행동으로 상처의 정도를 알아보는데, 신기하게도 마음을 굳게 닫고 있는 사람의 그림에선 자신이 그린 집의 문 또한 굳게 닫아둔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사람은 자기가 그린 집의 내부나 인물들을 자세하게 그린다. 우울한 마음은 고흐의 그림처럼 드넓은 밭에 나가 있는 자신의 조그만 모습을 그린다. 하지만 이런 해석이 다 맞는 것은 아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완성된 그림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질문에 응답하는 말 또한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위의 글처럼 그림만 보고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아무튼 이 그림책을 읽고나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마음의 집에 소속되어 있는 화장실이다. 요즘엔 없어졌는지 모르지만 주부들이 알고 있는 상식으로 남자들의 마음엔 냉장고가 있다. 집에서만 거의 생활하는 아내와 달리 남자들은 직장 등의 사회생활 속에서 억울하지만 참아야 할 때, 화가 나지만 평정을 유지해야 할 때, 남자들은 공격적인 감정을 이 냉장고에 넣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정주부의 마음엔 어떤 장치가 있을까? 아마 눈물이 아닐까? 싶다. 눈물을 흘리면서 억울함도 화나는 감정도 변기의 손잡이를 눌러 오물을 버리듯이 불쾌한 마음을 씻어내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 외에도 마음은 정원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이를 테면 긍정의 씨앗을 뿌리면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그 사람의 내면을 평화롭고 활기차게 하지만 부정의 씨앗을 뿌리면 마음의 정원엔 가시나무가 무성하고, 사람들과의 상호관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의 모양은 가지각색이고, 우주처럼 광활하다.


집으로 비유되고 있는 그림책 ‘마음의 집’은 이 세상의 수많은 마음의 집중에 하나이며, 구체적인 표현이다. 마음의 집은 누구에게나 있다. 말이 없는 엄마, 구석에서만 노는 친구, 혼자서 밥을 먹는 아빠, 이제 막 태어난 아기, 눈이 보이지 않는 장애인이나 대머리 교장 선생님에게도 마음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알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마음은 여러겹으로 둘러쌓인 상자 속의 비밀처럼 잘 드러나지 않으며,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시계인 데도 보는 관점에 따라 기쁠 때도 있고, 화가 날 때도 있는가 하면, 같은 고양이인데도 어떤 날은 고양이 때문에 슬프고, 어떤 날은 고양이 때문에 즐겁다. 이처럼 수없이 변화하는 마음을 나는 알 수가 없다.




이러한 의문들이 실마리가 되어 꼬리를 무는 가운데 누군가 조용히 대답을 해준다. 마음은욕심쟁이가 살고 있는 큰 집, 평생 한 집에서만 사는 고집쟁이, 날마다 리모델링을 하는 변덕쟁이 집처럼 마음은 집과 같다고. 마음의 집은 모양이나 크기가 다를뿐아니라 백 사람이면 백 개의 집이 생긴다고. 그러나 마음의 집엔 어느 집에나 문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조금만 열고, 어떤 사람은 활짝 열어두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마음의 문을 아예 닫아둔다고.


방, 어떤 방은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어떤 방은 아기집처럼 작아서 자기만 겨우 들어갈 수 있으며, 창문은 두 개 있는데, 한쪽에서는 날마다 비가 내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해가 쨍쨍 난다고. 계단, 친구와 다투면 열 계단, 엄마한테 혼나면 백 계단, 더 힘든 일을 만나면 1000계단, 아무리 올라가도 끝이 안 보이는 계단도 있다고. 부엌, 어떤 사람은 요리가 서툴러 마음을 요리하지 못하지만 어떤 사람은 마음을 멋지게 요리해서 다른 사람에게 준다고.

감정, 감정은 화장실에 있는데, 친구가 미워질 때, 시기하는 마음이 생길 때, 잘난척하고 싶을 때, 싸우고 싶을 때는 변기 손잡이를 꾹 누르라고. 마음의 집엔 가끔씩 주인이 바뀌기도 하는데, 불안하거나, 초조하면 그 마음이 주인 행세를 하며 내마음을 다스린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이 주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내 마음의 집이 보이지 않을 때라도, 스러져 갈 때도, 내가 마음의 방에 혼자 있을 때라도, 창밖에 비가 올 때도 걱장하지 마. 이 세상에는 다른 마음들이 아주 많아서 언제나 너를 도와줄 거야.

다른 마음들, 그 아주 많은 다른 마음들은 누구일까? 이렇게 해서 이 철학적인 그림책은 마지막까지도 수많은 다른 마음들을 명제로 의문을 남기면서 이야기를 마친다.

 그림을 말한다면 이 그림책의 주인공은 파란색의 머리에 붉은 색의 눈과 코 입을 가졌다. 주인공만이 아니다. 이 그림책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가 파란색이고 붉은 색의 눈과 코 입을 지녔다. 그래서 파란색은 이 그림책의 중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파란색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 파란색은 심리학적으로 평안, 또는 냉담을 연결시키는 것과는 반대로 파랑은 물리적 실재에 있어서 가장 높은 에너지를 함유한 색이며, 촛불의 중심 또한 파란색이다. 성령처럼 항상 파란 불꽃을 내며 타는 물체는 아주 많다고 한다. 중세엔 파랑이 진정으로 신적인 빛인 동시에 모든 형태의 악에 맞서는 구원자라고 믿었다. 프랑스의 화가 앙리 마티스는  1952년 오린종이에 과슈로 푸른색의 누드(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를 그렸다. 푸른색으로 거기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인간의 모습을 푸른 색으로 그린 것은  어쩌면 인간의 내면에 깃든 가장 순수한 마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와 같이 이 그림책의 등장 인물들도 인간의 내면 가장 내밀한 곳에 살아 숨쉬는 영성을 나타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철학적인 의문들이 꼬리를 무는 가운데 파란색을 기조(基調)로 하여 인간의 마음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게 하는 이 그림책은 과연 어떤 어린이가 읽으면 적합할까? 의문을 가진 나는 실제로 초등 4학년 여자아이에게 읽어줬는데, 조용히 경청했고, 재미있다고 한다. 그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보아 알고 싶은 욕구를 살짝 자극해주면서 수준 높은 그림책을 알게 되었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터널 그림책은 내 친구 2
앤서니 브라운 글 그림, 장미란 옮김 / 논장 / 2002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앤서니 브라운 (글 그림) | 장미란 (옮긴이) | 논장 | 2002-09-15




 ‘터널, 이 그림책은 서로 상반된 성격의 남매가 집을 떠나 남다른 시련을 경험하면서,  미숙한 존재에서 독립된 존재로 성장하는 통합된 성격으로의 발달을 보여줍니다.  

 여동생인 로즈는 그의 빨간색 옷처럼 마음이 따스하고 열정적인 아이입니다. 하지만 아직 누구에게 자신의 열정과 따스함을 표현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자기 속에 숨어 있는 따스함과 열정이 있는지조차 모르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로즈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마녀나 괴물이 나오는 옛이야기 그림책을 읽거나 공상에 빠져 있습니다.

반면 로즈의 오빠는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축구공을 차거나 뒹굴면서 뛰어놉니다. 이처럼 겉으로 보기엔 오빠가 남성적이고 활달해 보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단단한 벽돌 담장처럼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소통이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중에도 겁 많은 동생 로즈에겐 관심이 있어, 늑대 가면을 쓰고서 잠자는 동생 방에 들어가 동생을 놀래켜주며 장난을 치곤합니다.

밤이면 낮에 활동을 많이 한 오빠는 곤히 잠들지만, 로즈는 말똥말똥 깨어 있습니다. 로즈는 깜깜한 밤을 너무너무 무서워하기 때문이지요. 로즈의 방을 살펴보면 어딘지 모르게 무시무시합니다. 벽에는 빨간모자의 아이가 무서운 늑대와 마주하고 있는 그림 액자(월터 크레인의 그림)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엔 옛이야기에 나오는 오두막집 램프가 켜져 있고, 천정에도 둥근 갓의 스탠드가 걸려 있습니다. 때문에 불이 켜져 있는 데도 옷장에서 비죽이 나와 있는 옷소매나 빨간외투의 소매자락, 그리고 늑대가면을 쓴 오빠의 그림자가 무서운 분위기를 더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즈의 이불 위에 펼쳐진 채 놓여져 있는 마녀의 그림이 있는 그림책과 침대 밑에 발바닥이 뒤집혀진 채 벗어놓은 로즈의 신발은 마치 로즈가 너무나 무서워서 황급히 신발을 벗어던지고 침대로 들어간 듯이 보입니다. 
 아무튼 동생 로즈와 오빠는 늘 티격태격 싸웁니다.

서로에게 관심은 있지만 관심을 나타내는 방법을 아직 모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티격태격하는 남매를 지켜보던 엄마가 어느 날 아침, 화를 내며 남매에게 말합니다. “둘이 같이 나가서 사이좋게 놀다 와! 점심때까지 들어오지 마.”

사이좋게 놀으라니요? 티격태격 싸우면서 놀아도 함께 놀까말까인데 사이좋게 놀으라니요. 때문에 둘은 더욱 같이 놀기 싫습니다. 그런 남매가 찾아간 장소는 바로 쓰레기장이었어요. 쓰레기장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쓰레기장은 어쩌면 ‘버림받음’일지도 모릅니다. 쓰레기장이란 장소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물건들이 버려지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오고 싶어서 왔어? 나도 이렇게 끔찍한데 오기 싫어.”라고 하는 여동생의 말처럼 잠시 동안이긴 하지만 이 남매는 엄마에게 쓰레기처럼 버림을 받았고, 집을 나왔습니다. 집을 나온다는 것은 어머니로부터 벗어났음입니다.  

혼자서 여기저기 살피러 다니던 오빠가 조금 있다가 동생을 부릅니다. 즉 터널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것 봐! 터널이야. 저 끝에 뭐가 있는지 알아보자.” 낯선 일에 미숙한 동생은 마녀나 괴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면서 싫다고 하지만 오빠는 혼자서 터널 안으로 기어들어갑니다.  

그렇잖아도 겁이 많은 동생은 터널이 무서워서 들어가지 못하고 오빠가 다시 나오기만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오빠가 나오지 않자 동생은 할수 없이 오빠를 찾아 공포감을 무릎 쓰고 터널 속으로 들어갑니다. 동생 혼자였다면 절대로 들어가지 않았을 터널을 오빠를 찾기 위해 들어간 것입니다. 자신이 수호령처럼 지니던 마녀 그림책을 놓아 둔 채로 말입니다. 
 

동생이 들어간 터널 속은 마치 로즈가 생명으로 태어나던 최초의 장소(엄마의 아기집)처럼 축축하고 미끄럽습니다. 또 으스스하기도 하고요. 터널 반대편엔 고요한 숲이 있었어요. 오빠는 보이지 않고 숲은 갈수록 컴컴하고 울창했습니다. 동생은 늑대와 거인의 형상을 한 나무들이 무서워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었지요. 하지만 동생의 가슴에 숨겨진 온정어린 마음은 오빠만 버려두고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제까지 티격태격 싸우기만 했던 오빠, 동생이 겁 많다고 늑대가면을 쓰고서 놀려주던 오빠, 동생이 검은 후추를 선택하면 하얀 소금을 주장하던 오빠, 그런 오빠를 구하겠다는 단 하나의 생각으로, 겁 많은 동생은 늑대의 형상을 한 무시무시한 나무들의 곁을 마구 뛰어갑니다. 
 
얼마나 달렸던지, 숨이 찬 동생이 멈추어서자 빈터가 나타났고 나무들이 모두 베어져 황량한 그 장소엔 돌로 굳어버린 오빠가 서 있었습니다.

동생은 처음으로 오빠를 위해 혼자서 무서운 숲을 달렸고, 돌이 된 오빠를 마침내 발견했지요. 돌이 된 오빠는 작은 돌들이 원을 이룬 장소에서 달리는 자세로 돌이 되어 있었어요. 돌이 된 오빠를 본 동생은 차갑고 딱딱한 오빠를 와락 껴안고 눈물을 흘립니다. 많은 신화들에서 사랑의 눈물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아, 어떡해! 내가 너무 늦게 왔나 봐!” 안타까워하는 동생의 따스한 마음에 돌이 된 오빠는 조금씩 색깔이 변하면서 부드럽고 따스해집니다. 뿐만 아니라 황량하던 주위의 풍경도 서서히 바뀌어갑니다. 돌이 된 오빠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움직이더니, 어느새 오빠로 변하여 반갑게 말합니다. “로즈! 네가 와 줄줄 알았어.” 이보다 더한 소통이 있을까요? 오빠는 로즈가 올줄 알았으니 말입니다.

 얼마나 기쁘던지 오빠의 주위에 원을 그리고 있던 작은 돌들이 오빠의 모습처럼 데이지 꽃으로 변했습니다.(이 동그라미가 의미하는 바는 아마도 이제까지 한쪽으로 치우쳐 있던 남매의 성격이 비로소 균형을 잡아 통합되었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이제 오빠는 동생을 신뢰하게 되었고, 더 이상 겁쟁이 동생이라고 놀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로즈가 그 무서운 터널을 지나고, 그보다 더 무서운 늑대형상의 나무들 곁을 지나온 건 절대로 미숙하고 겁많은 로즈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즉 로즈나 오빠나 이제 더 이상 예전의 동생과 오빠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들은 터널이라는 장소를 통하여 그들이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지만 잘 알 수 없었던 자기 안의 능력들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서로 상반된 성격이 통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점심을 차리고 있었고, 남매를 본 엄마가 말합니다.
“어서 오너라. 둘 다 아주 얌전하구나. 별일 없었니?”
둘 다 얌전하다는 건 무엇을 뜻할까요? 이제 더 이상 티격태격 다투지 않는다는 의미이겠지요. 둘은 이제 서로 신뢰함으로 웃음 띤 눈빛 하나만으로도 서로가 통하니까요. 엄마는 참으로 현명했습니다.  누구든지 이 그림책을 읽는다면 각 장면마다 왜? 라는 의문을 제시하면서 그 의문들을 하나 하나 풀어가는 동안 독립된 인격, 통합된 성격으로 한층 더 성장할 것입니다.  ♧








2010. 7. 31. ⓒ金慶子(함초롬) 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른발, 왼발 비룡소의 그림동화 37
토미 드 파올라 글 그림, 정해왕 옮김 / 비룡소 / 199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가 하는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할아버지. 




  오른발 왼발 그림책을 보면 손자와 할아버지를 통해서 인간이 살아가면서 서로 어떻게 상호작용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야기의 첫 장면을 보면 아기의 이름 보비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며, 이 어린 아기의 가장 친한 친구인 할아버지는 보비가 할아버지를 부르기 쉽도록  보브라고 부르도록 가르친다. 그 때문인지, 보비는 정말로 보브란 말을 가장 먼저 말했다고 한다.

  또 할아버지는 보비에게 오른발, 왼발 하면서 보비의 양손을 잡아 이끌어주면서 걸음마를 가르쳐 준다. 이와 같이 할아버지는 말 못하는 어린 손자에게 보브란 말, 걸음마, 그리고 블럭 쌓기 놀이를 가르쳐 준다.

 블럭 쌓기 놀이를 가르쳐 줄 땐 아이가 그저 높다란 탑을 쌓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맨 위 정상의 코끼리 블럭을 쌓을 때마다 재채기를 하여, 쌓기의 성공을 지연시키면서 손자로 하여금 블럭 쌓기의 즐거움이 어디에 있는지를 일깨워 준다. 즉 블럭을 높다랗게 쌓는 데 주력하지 않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실패와 즐거움을 느끼도록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방법은 아직 말을 못하는 어린 손자로 하여금 할아버지와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손자 또한 할아버지가 병으로 의사소통을 전혀 할 수 없게 된 상황인데도 자신이 할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것처럼 즐거움과 유머가 넘치는 블럭쌓기 놀이를 할아버지에게 다시 보여준다. 이로써 깊은 병에 걸렸던 할아버지는 웃음과 행복, 즐거움을 느끼게 되고 병에서 회복되어 손자에게 묻는다.
 "보비야, 나한테 어떻게 걷는 법을 가르쳤는지 얘기해 다오."
라고. 이에 손자는 말한다.
 "할아버지가 내 어깨를 이렇게 짚고요. 난 이렇게 말했어요. '오른발, 왼발 따라해 보세요.'라고요."  

   이 그림책을 한슬이에게 읽어주었더니, 한슬이가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것은 블럭쌓기 놀이였다. 마침 한슬이에게 여기 나온 블럭과 비슷한 크기의 블럭이 있어서 모두 세어봤더니 놀랍게도 30개였다. 한슬이의 블럭도 이 책에 나온 블럭처럼 비슷하게 구성되어 있어서  '아, 이 블럭은 영국문화에서 오랜 전통을 가진 블럭이었구나!' 하고 놀랐다. 또 한슬이는 이 그림책이 재미있다고 한다. 블럭쌓기와 무너뜨리기, 그리고 할아버지와 보비가 가르치는 걸음마가 재미있다고 한다.  


 이 그림책을 잘 관찰해 보면 할아버지와 보비의 얼굴이 매우 비슷하다. 그외로  중요한 건 어른과 아이의 상호작용이다. 보비는 할아버지로부터 배운 상호작용을 깊은 병이 들어버린 할아버지에게 사용함으로써 할아버지로 하여금 말을 할 수 있게 하고, 걸음을 걸을 수 있도록 돕는다. 바로 이것이 중요한데, 아이가 어른에게서 배운 상호작용은 어른이 된 다음에도, 사회생활할 때도 사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아이와 의사소통을 할 때는 아이와 상호작용할 때는, 성취지향적으로 놀아주기 보다는 놀이 과정이 중요하다. 즉 아이의 감정을 존중해 주면서 민감하게 반응해 주고, 즐거움과 웃음이 넘치는 놀이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오른발, 왼발 그림책은 바로 이러한 깨우침을 주는 좋은 그림책이다.
.






2010. 1. 27 .ⓒ金慶子(함초롬) 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막대기 아빠 비룡소의 그림동화 203
줄리아 도널드슨 지음, 노은정 옮김, 악셀 셰플러 그림 / 비룡소 / 200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들어가며]

'막대기 아빠'라는 그림책을 즐겁고 재미있게 읽었다.

이 그림책은 정말 많은 것을 나에게 보여주고 있어서,
첫 번째는 막대기 아빠의 줄거리와 느낌을, 
두 번째는 막대기 아빠의 역할들을,
세 번째엔 막대기 아빠의 개성에 대한 이야기로 나누어 보았다. 









첫 번째 -줄거리와 느낌

누군가 ‘인생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던가, 그림책 ‘막대기 아빠’는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커다란 보금자리 나무 집에서 알뜰살뜰한 아내와 함께 올망졸망한 아이들 셋을 기르는 막대기 아빠 가족이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나뭇가지의 잎새들이 작고 앙증맞은 모습으로 파릇파릇 돋아나는 어떤 화창한 봄날, 막대기 아빠는 산책을 나갔다가 나뭇가지 위의 다람쥐가 “어머머머, 개를 조심하세요!”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는다. 다람쥐의 말과 함께 개에게 발견 된 막대기 아빠는 던지면 물어오고, 던지면 물어오는 장난감 막대기가 되어 개와 개의 주인에게 시달림을 받는다. 하지만 개는 공원의 경비에게 발각되었고 ‘개를 풀어놓지 마시오.’란 표지판의 글처럼 개의 주인은 더 이상 막대기 아빠를 소유할 수 없게 되며 막대기 아빠는 그 자리에서 도망친다.

마침내 집을 향하여 허둥지둥 도망치던 막대기 아빠는 "어머머머, 막대기 아빠 여자 아이를 조심하세요!“ 라는 파랑새의 말과 함께 막대기 아빠는 다시 여자아이의 눈에 발견되었고 그 여자 아이의 장난감이 된다. 막대기 아빠는 여자 아이에게 ”난 막대기 아빠야, 막대기 아빠라고! 아, 가족들이 있는 보금자리 나무에서 멀어지고 있어!“ 라고 외치지만 아무도 막대기 아빠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다. 
 

막대기 아빠는 여자 아이의 손에 의해 시냇물에 던져지고 막대기 아빠는 시냇물을 따라 떠내려가던 막대기 아빠는 알을 낳아 품으려는 백조의 눈에 발견되고 백조의 둥지를 만드는데 사용된다. 백조의 둥지가 된 막대기 아빠는 백조의 알이 부화되어 아기 백조가 태어날때까지 둥지를 떠나지 못한다. 그 동안 시간은 흘러서 무더운 여름이 된다.

백조의 둥지를 떠난 막대기 아빠는 강물을 따라 흘러흘러 집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진 바닷가로 간다. 바닷가엔 해수욕을 하는 사람들이 수영을 즐기거나 모래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막대기 아빠는 어느 아저씨의 손에 의해 모래성의 깃발을 단 깃대가 된다. 몹시 기분이 상한 막대기 아빠는 자신의 몸에 걸린 깃발을 떼어낸다.

“쳇, 나는 깃발을 다는 깃대가 아니라고!”
깃발을 떼어내 버린 막대기 아빠는 다시 전쟁놀이하는 나무칼이 되었다가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의 책가방 걸이가 된다. 또 어느 여자 아이의 그림 그리는 나뭇가지가 되기도 하고, 인디안 소녀의 활이 되었다가 어느 남자 아이의 야구 배트가 되었을 땐 나뭇잎이 노랗게 물드는 가을이 다가온다.
그런데도 막대기 아빠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막대기 아빠는 여전히 사람들의 눈에 발견되고 흰눈이 내리던 어느 날 부메랑이 되어 던져진다.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뒤덮은 날 눈사람의 팔이 되었던 막대기 아빠는 길을 잃고 헤매다가 차가운 눈 위로 푹 쓰러져 잠이 든다.

하지만 막대기 아빠는 사람들 눈에 여전히 쓸모있는 막대기로 보였고, 마침내 벽난로의 땔감으로 쓰이게 된다. 깊은 잠에 빠진 막대기 아빠를 잠에서 깨운 것은 “으허, 으랏차차, 끙! 굴뚝에 끼었어요! 누가 좀 도와줘요!”라고 외치는 굵고 나직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막대기 아빠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두리번거렸고, 마침내 소리나는 곳을 북북 긁고 벅벅 긁어서 굴뚝에 끼인 목소리의 주인공이 내려올 수 있도록 도와준다. 쿵! 목소리의 주인공이 굴뚝에서 내려오자 막대기 아빠는 깜짝 놀란다. 그는 바로 산타 할아버지였기 때문이다.

“막대기로군, 자넨 정말 훌륭해! 고맙네, 고마워! 자네가 아니었다면 계속 굴뚝에 끼어 있었을 거야.” ‘훌륭한 막대기 아빠.’  막대기 아빠가 얼마나 기뻤을까! 가족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훌륭한 막대기 아빠’를 알아 봐 준 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아니고 바로 산타 할아버지였다.

이 훌륭한 막대기 아빠는 산타 할아버지를 도와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선물을 나누어준다. 마침내 선물을 다 나누어준 산타할아버지는 맨 마지막 집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 맨 마지막 집은 누구의 집일까? 그 집은 바로 막대기 아빠가 지금까지 몹시도 가고 싶어하던 집, 너무나 멀리 떨어져버린 집으로 가고 싶어하는 막대기 아빠의 집이었다.

그 머나먼 길을 막대기 아빠는 산타 할아버지의 썰매를 타고서 단숨에 갈 수 있었고,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과 함께 그리운 가족들을 만나 서로의 품에 안겨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 있게 된다.

이 그림책의 그림은 정말 매력적이면서 아름답다. 얼마나 아름답던지, 한슬이(5세)에게 천천히 텍스트를 끝까지 읽어 준 다음, 아름다운 그림들을 함께 보면서, 그림책에 숨어 있는 것들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건 바로 매 장면마다 “어머머머, 막대기 아빠! 개(여자아이, 백조, 아저씨)를 조심하세요!”라는 등의 말을 한 동물들이 누구인지 찾아내는 놀이였다.

한슬이는 “어머머머! 막대기 아빠 조심하세요!” 라며 말하는 장면의 그림들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어머머머! 막대기 아빠 조심하세요!”라고 말해 준 다람쥐, 파랑새, 개구리, 갈매기, 작은 새를 잘 찾아냈다.

또 막대기 아빠가 곤경에 처할 때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림책의 그림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변화되는데, 한슬이에게 나뭇잎이 움트는 봄, 해수욕장이 등장하는 여름, 나뭇잎이 노랗게 물드는 가을,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로 변화되는 그림들을 이야기해 주었더니 더욱 흥미로워 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막대기 아빠가 가족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떤 방식으로 가족을 사랑해 왔었는지를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두 번째 -막대기아빠의 역할들 


다른 한 편 막대기 아빠 그림책을 잘 살펴보면 막대기 아빠가 산책을 하던 도중에 집을 벗어나게 되는데, 그 동기는 막대기 아빠의 몸이 매우 쓸모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개를 풀어놓은 주인이 막대기 아빠를 던지면 물어오는 개의 주인에게 쓸모가 있고, 두 번째로는 막대기를 시냇물에 던지는 놀이에 쓸모가 있게 된다.

세 번째는 둥지를 지어 알을 낳아 기르려는 백조에게 쓸모 있는 막대기가 되었고, 네 번째엔 모래성에 꽂을 깃발이 필요한 아저씨에게 쓸모 있게 된다. 다섯 번째엔 어떤 아이의 나무칼로서, 또 다른 아이의 가방걸이로서, 어떤 여자 아이의 그림 그리는 막대기로서, 또 어떤 인디안 여자 아이의 활로서, 어떤 남자 아이의 공을 치는 방망이로서, 어떤 남자 아이의 부메랑으로서, 또 어떤 아이가 만든 눈사람의 팔로서......

막대기 아빠의 쓰임새는 참으로 많고도 많다. 하지만 그 일들은 모두 남을 위하는 일이지, 결코 막대기 아빠를 위한 일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일들은 마치 막대기 아빠의 운명처럼 찾아와서 막대기 아빠로 하여금 집에서 너무나 멀리 떠나오게 만들었다. 때문에 막대기 아빠가 사회적으로는 쓸모 있는 막대기일지 몰라도 막대기 아빠 개인에겐 너무나 피곤한 일이고, 집에서 너무나 멀리 떠나와서 길을 잃어버렸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막대기 아빠가 인정 없고 마음씨가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가 백조의 둥지로 사용되었을 때, 막대기 아빠는 백조가 알을 품어 새끼 백조가 태어나서 둥지를 떠날 때까지 잘 참아주었기 때문이다.

막대기 아빠가 훌륭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막대기 아빠는 아이들이 나무칼로 사용할 땐 마치 칼인 것처럼 용도에 맞게 몸을 잘 겨눠주었고, 가방걸이로 사용할 땐 가방을 잘 걸치도록 해 주었으며, 여자 아이가 땅위에 그림을 그릴 땐 그림이 잘 그려지도록 몸을 펼쳤으며, 인디안 소녀가 활을 만들었을 땐 활인 것처럼 몸을 휘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공을 치는 방망이로 사용될 땐 공이 잘 맞도록 몸을 탱탱하게 해 주었으며 부메랑이 되었을 땐 정말 부메랑인 것처럼 몸을 휘어주었으며 눈사람의 팔이 되었을 땐 눈사람이 다 녹아버릴 때까지 눈사람의 팔이 되어준다.

이처럼 막대기 아빠는 누군가의 손에서 쓰임새가 있을 때마다 마치 그것인척 해 줌으로서 아이들을 기쁘고 즐겁고 해 주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마지막 장면에서 산타가 ‘훌륭한 막대기’라 불렀던 까닭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산타 할아버지는 우리가 착한 일을 하는지 안하는지 잘 지켜 본 다음에야 선물을 가져다 주시기 때문이다.





세 번째 -- 막대기 아빠의 개성

이 그림책을 보면 막대기 아빠는 자신을 장난감처럼 여기는 사람이나 동물들에게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은 “나는 막대기 아빠.”라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으로는 막대기 아빠의 개성이 존중 받지 못하지만 막대기 아빠의 가정에선 자신이 값어치 있으며 존중받는 아빠라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는 듯 하다.

하지만 “어머머머, 막대기 아빠 조심하세요!”라고 말해주는 동물들 외엔 어느 누구도 막대기 아빠를 막대기 아빠로 보아주는 사람이나 동물은 없다. 그들은 다만 막대기 아빠가 부메랑처럼 휘어지거나 활처럼 휘어지거나 백조의 둥지에 넣을 막대기처럼 부드러워지거나 깃대처럼 꼿꼿하거나 마치 무엇인척, 해주면 그만인 것이다. 때문에 막대기 아빠의 외침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다.

“어휴, 이러다 가족들에게 영영 돌아가지 못하면 어쩌지?”
불쌍한 막대기 아빠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메다가 하얀 눈 위에 쓰러지고 춥고 기운이 빠져 그대로 잠이 들고 만다.

죽음처럼 깊은 잠에 빠진 막대기아빠는 꿈속에서도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지만 현실적으로는 벽난로의 땔감이 되어 죽기 일보 직전에 있었다. 그러한 막대기 아빠가 “굴뚝에 끼었어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라는 목소리에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데, 그는 지금까지 누군가의 장난감이 되거나 어떤 쓰임새로 사용되던 때와는 달리 진심으로 위험에 빠진 산타를 구함으로서 마침내 ‘훌륭한 막대기’로서 존중을 받는다.

또한 남에게 베푸는 산타를 만남으로 해서 막대기 아빠는 남을 돕는자로서 행동할 수 있게 되었으며 막대기 아빠라는 개성을 인정받고,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게 된다. ♣




2009. 12. 26. ⓒ金慶子(함초롬) 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