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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집
김희경 지음,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그림 / 창비 / 2010년 1월
평점 :
마음의 집, 이 그림책은 주 독자인 어린이를 의식해서인지 아주 조심스럽게 집이라는 장소를 선택하여 마음의 모양을 펼쳐보이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 세상에서 개개인의 마음은 한 개인의 성역이자 타인이 침해해서는 안 되는 고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심리치료사들은 어떤 사람의 마음을 알고자 할 때, 그 사람이 그린 그림과 말, 행동으로 상처의 정도를 알아보는데, 신기하게도 마음을 굳게 닫고 있는 사람의 그림에선 자신이 그린 집의 문 또한 굳게 닫아둔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사람은 자기가 그린 집의 내부나 인물들을 자세하게 그린다. 우울한 마음은 고흐의 그림처럼 드넓은 밭에 나가 있는 자신의 조그만 모습을 그린다. 하지만 이런 해석이 다 맞는 것은 아니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완성된 그림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질문에 응답하는 말 또한 더욱 중요하기 때문에 위의 글처럼 그림만 보고 성급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아무튼 이 그림책을 읽고나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마음의 집에 소속되어 있는 화장실이다. 요즘엔 없어졌는지 모르지만 주부들이 알고 있는 상식으로 남자들의 마음엔 냉장고가 있다. 집에서만 거의 생활하는 아내와 달리 남자들은 직장 등의 사회생활 속에서 억울하지만 참아야 할 때, 화가 나지만 평정을 유지해야 할 때, 남자들은 공격적인 감정을 이 냉장고에 넣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정주부의 마음엔 어떤 장치가 있을까? 아마 눈물이 아닐까? 싶다. 눈물을 흘리면서 억울함도 화나는 감정도 변기의 손잡이를 눌러 오물을 버리듯이 불쾌한 마음을 씻어내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 외에도 마음은 정원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이를 테면 긍정의 씨앗을 뿌리면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그 사람의 내면을 평화롭고 활기차게 하지만 부정의 씨앗을 뿌리면 마음의 정원엔 가시나무가 무성하고, 사람들과의 상호관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의 모양은 가지각색이고, 우주처럼 광활하다.
집으로 비유되고 있는 그림책 ‘마음의 집’은 이 세상의 수많은 마음의 집중에 하나이며, 구체적인 표현이다. 마음의 집은 누구에게나 있다. 말이 없는 엄마, 구석에서만 노는 친구, 혼자서 밥을 먹는 아빠, 이제 막 태어난 아기, 눈이 보이지 않는 장애인이나 대머리 교장 선생님에게도 마음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알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마음은 여러겹으로 둘러쌓인 상자 속의 비밀처럼 잘 드러나지 않으며,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시계인 데도 보는 관점에 따라 기쁠 때도 있고, 화가 날 때도 있는가 하면, 같은 고양이인데도 어떤 날은 고양이 때문에 슬프고, 어떤 날은 고양이 때문에 즐겁다. 이처럼 수없이 변화하는 마음을 나는 알 수가 없다.
이러한 의문들이 실마리가 되어 꼬리를 무는 가운데 누군가 조용히 대답을 해준다. 마음은욕심쟁이가 살고 있는 큰 집, 평생 한 집에서만 사는 고집쟁이, 날마다 리모델링을 하는 변덕쟁이 집처럼 마음은 집과 같다고. 마음의 집은 모양이나 크기가 다를뿐아니라 백 사람이면 백 개의 집이 생긴다고. 그러나 마음의 집엔 어느 집에나 문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조금만 열고, 어떤 사람은 활짝 열어두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마음의 문을 아예 닫아둔다고.
방, 어떤 방은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고, 어떤 방은 아기집처럼 작아서 자기만 겨우 들어갈 수 있으며, 창문은 두 개 있는데, 한쪽에서는 날마다 비가 내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해가 쨍쨍 난다고. 계단, 친구와 다투면 열 계단, 엄마한테 혼나면 백 계단, 더 힘든 일을 만나면 1000계단, 아무리 올라가도 끝이 안 보이는 계단도 있다고. 부엌, 어떤 사람은 요리가 서툴러 마음을 요리하지 못하지만 어떤 사람은 마음을 멋지게 요리해서 다른 사람에게 준다고.
감정, 감정은 화장실에 있는데, 친구가 미워질 때, 시기하는 마음이 생길 때, 잘난척하고 싶을 때, 싸우고 싶을 때는 변기 손잡이를 꾹 누르라고. 마음의 집엔 가끔씩 주인이 바뀌기도 하는데, 불안하거나, 초조하면 그 마음이 주인 행세를 하며 내마음을 다스린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이 주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내 마음의 집이 보이지 않을 때라도, 스러져 갈 때도, 내가 마음의 방에 혼자 있을 때라도, 창밖에 비가 올 때도 걱장하지 마. 이 세상에는 다른 마음들이 아주 많아서 언제나 너를 도와줄 거야.
다른 마음들, 그 아주 많은 다른 마음들은 누구일까? 이렇게 해서 이 철학적인 그림책은 마지막까지도 수많은 다른 마음들을 명제로 의문을 남기면서 이야기를 마친다.
그림을 말한다면 이 그림책의 주인공은 파란색의 머리에 붉은 색의 눈과 코 입을 가졌다. 주인공만이 아니다. 이 그림책에 등장하는 인물들 모두가 파란색이고 붉은 색의 눈과 코 입을 지녔다. 그래서 파란색은 이 그림책의 중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파란색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 파란색은 심리학적으로 평안, 또는 냉담을 연결시키는 것과는 반대로 파랑은 물리적 실재에 있어서 가장 높은 에너지를 함유한 색이며, 촛불의 중심 또한 파란색이다. 성령처럼 항상 파란 불꽃을 내며 타는 물체는 아주 많다고 한다. 중세엔 파랑이 진정으로 신적인 빛인 동시에 모든 형태의 악에 맞서는 구원자라고 믿었다. 프랑스의 화가 앙리 마티스는 1952년 오린종이에 과슈로 푸른색의 누드(앉아 있는 여인의 모습)를 그렸다. 푸른색으로 거기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인간의 모습을 푸른 색으로 그린 것은 어쩌면 인간의 내면에 깃든 가장 순수한 마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와 같이 이 그림책의 등장 인물들도 인간의 내면 가장 내밀한 곳에 살아 숨쉬는 영성을 나타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철학적인 의문들이 꼬리를 무는 가운데 파란색을 기조(基調)로 하여 인간의 마음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게 하는 이 그림책은 과연 어떤 어린이가 읽으면 적합할까? 의문을 가진 나는 실제로 초등 4학년 여자아이에게 읽어줬는데, 조용히 경청했고, 재미있다고 한다. 그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보아 알고 싶은 욕구를 살짝 자극해주면서 수준 높은 그림책을 알게 되었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