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아니 2-3년 전만 해도 그랬다. 연말만 되면 크리스마스 카드를 잔뜩 사들고, 명단을 체크해가면서 주옥같은 말들을 쓰곤 했었다. 그러던 게 슬그머니 이메일 카드로 바뀌더니만, 이젠 그것조차 보내지 않는다. 내가 안보내서인지, 내게 오는 이메일 카드도 크게 줄었다. 세통인가 왔지만, 바로 답장을 해줬다. "내가 먼저 보내야 하는데 미안하구나. 그러고보면 내가 너한테 잘해주지 못한 것 같아. 새해에는 우리 친하게 지내자"  새해라고 갑자기 그에게 관심을 가질 리는 없다는 걸 나도 알고 그도 알지만, 말은 이렇게 하는 걸 보면 나도 정치인 다 됐다.

카드가 줄었다고 속상하거나 그런 건 없다. 오히려 좋다. 옛날이라면 모르겠지만, 요즘이야 단축키 하나만 누르면 금방 연결이 되는데 웬 카드람? '안주고 안받기', 이게 서로 편하다. 문제는 오프라인 카드를 보내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는 거다. 지난주, 난 세통의 카드를 받고 기절할 뻔했다. 한통은 작년 말 우리 학회 회장이 된 분이신데, 그저 그런 덕담이지만  그래도 답장을 해야 한다. 오늘이 1월 13일, 이미 늦었으니 연하장은 좀 그렇고, 장문의 편지를 쓰리라. 생각은 이렇게 하고선 한달 정도를 허비할 것임은 잘 알지만.

또 한통. 내가 작년에 보험을 들어준 프루덴셜생명이다. '국가고객만족도조사 생명보험  부문에서 6년연속 1위를 했으니 고객님과 함께 축하하겠다'는 내용. 이건 카드를 빙자한 자기 회사 자랑 아닌가? 자기가 1등한 것을 내가 축하할 이유는 없다. 보험료나 떼어먹지 않는다면, 10년연속 꼴찌를 해도 상관없다. 이건 답장을 하지 않아도 되니 통과.

나머지 한통. 작년에 모 대학에 발령을 받은 교실 후배다 (나와 나이는 같다). "그 동안 변함없는 관심과 배려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실 후배이긴 하지만, 난 이 친구에게 관심과 배려를 해준 적은 거의 없다. 솔직하게 말했다면 이렇게 썼어야 하리라. "변함없는 무관심을 보여주셔서 서운합니다"  그의 카드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하시는 일마다 알찬 열매가 피어나길 바랍니다" 

이 친구, 내가 맨날 노는 걸 알면서 이런다. 제대로 쓰려면 이렇게 썼어야 한다. "열매가 피어나지 않더라도 제발 일좀 하세요!!!"  윗사람이 아니니 이친구한테는 답장을 할 필요는 없을듯 싶다. 메일을 보내서 "아유, 제가 먼저 보내야 하는데 이를 어쩌죠? 미안하네요..." 이렇게 말하면 해결되지 않을까.

연하장 몇통을 받고 괜한 딴지를 부리고 있지만, 이런 게 한통도 오지 않는다면 당장은 편하겠지만, 맘 한구석에서 썰렁한 바람이 불어오지나 않으련지. 하여간 세상은 점점 각박해져 가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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