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드라마를 보는 건 대개 우연한 계기에 의해 이루어진다. 아는 사람의 권유나, 어쩌다 TV를

켰는데 조금 보니까 재밌더라, 이런 식으로. 저번엔 간만에 놀러온 매형과 시간을 보내려니 할말도

없고 해서 TV를 켰다가 <앞집여자> 1회를 덜컥 봐버렸고, 한번 시작한 것은 끝장을 보는 성격 탓에

종영할 때까지 그 드라마에 묻혀 살았다. 평소에는 무심한 척 하더니, 한번 빠져들면 제정신을

못차린다. "너무너무 재밌어요" 이렇게 비명을 지르고, 시청자 게시판에 글을 쓰기까지 한다.

 

초저녁부터 잔뜩 술에 취해 들어온 어제, 우연히 TV를 켰다가-사실 우연히도 아니다. 난 술만

취하면 늘 TV를 켜니깐-권상우가 폼을 잡고 특유의 반항적인 눈빛을 보내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때 누군가가 해준 얘기가 생각났다. "천국의 계단 참 재밌어. 그거 봐"

그 드라마는 이미 10회까지 진행된 상태지만, 인터넷이라는 현대 과학의 총아가 있지 않는가.

오늘 낮, 시간도 많은데 억지로 짬을 내가지고 1회를 봤다. 첫회부터 필이 온다. 선과 악의

대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도가 아닌가.

 

아버지가 탤런트와 재혼을 하면서 곱게 자라던 한정서는 졸라 어렵게 자라던 남매와 의붓남매가

되며, 한정서의 비극은 그로부터 시작된다. 천하게 살던 애들은 못되먹었다는 설정이나 여자는

남자만 잘 잡으면 인생 끝이다라는 매우 유치한 구성이지만, 아무렴 어떤가. 난 이런 선악구도만

나오면 정신을 못차리고 열광하는데. 그간 무수히 많은 선악드라마를 봐 왔고, 이번 드라마

역시 기존 것과 다를 바가 없는데 왜 이토록 빠져드는 걸까? 나같은 애가 있으니 방송사에서도

늘 이런 식의 드라마만 방영하는 것이리라.

 

이런 류의 드라마를 볼 때마다 늘 느끼는 거지만, 악은 언제나 강하고, 선은 무력하다.

잘못이 탄로나자 한정서에게 무조건 뒤집어 씌우는 유리, 하지만 정서는 제대로 말 한마디

못하고 어이없는 표정만 짓는다. 새동생이 거짓말을 하면 사실대로 고해바치던가 할 것이지

"아빠, 어떡해야 해?"라고 울먹이면 문제가 해결되나? 이런 식의 천사표는 참으로 보는 사람을

짜증나게 한다. 유리와 이휘향의 음모로 유학을 못가게 되자 "아빠, 안돼요"라고 심난한

표정만 짓지 말고, 왜 유학을 안가면 안되는지,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괴롭혔는지 말을 해야지

않겠는가. 혼자 힘으로 안되면 자신을 늘 지켜주는 송주오빠도 있고, 정 혼자서 삭이려면

강해지기라도 할 것이지, 침대에 누워 울먹이는 게 고작인가. 그건 착함이 아니라 바보다.

이 세상에는 유리같은 절대악도 없지만, 정서같은 절대선-절대바보-도 없다. 누구나 상황에

따라서 괴물이 되는 거지, 괴물로 태어난 애는 없는 거다. 질투에 눈이 멀어 동창과 아이들을

죽여버린 그 여인도 살아온 인생 전체가 악으로 점철된 것은 결코 아닐게다. 하지만 온갖

인간적 갈등을 드라마에 투영하려면 재미가 떨어지고, 16부작으로 턱도 없으니, 이런 식의

단순한 구도를 설정한 것이겠지. 앞으로 수요일, 목요일은 되도록이면 일찍 올 생각이다.

그런데... 다음 주는 안되겠는걸.... 술약속이.....허 참....

 

사족: 언뜻 보기에도 왕자같은 송주가 자라서 권상우가 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한정서가 최지우가 되는 것은 조금 어색하다. 아무리 이해를 하려해도 최지우가 청순가련형은

아니지 않는가? <진실>에서도 늘 당하기만 하는 착한 역으로 나오던데, 글쎄다. 그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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