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골서점에서 이 책을 봤을 때, 솔직히 사고싶은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그런 책이 한두권이 아니긴 해도, 여기저기에 기고한 소위 잡글들을 모아서 책을 펴낸 건 왠지 성의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자가 귀에 익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내가 망설인 이유였다. 내게 낯익은 저자들은 최소한 기본은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내가 그책을 산 건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라는 저자의 이력 때문이었다. 진보적인 분의 책으로부터 뭔가 배울 점이 있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 하지만 당장 읽고싶게 만드는 카리스마가 없던 탓에 난 책을 사고 나서도 한달 이상 구석에 쳐박아 놓았었다.

엊그제 새벽, 잠이 안와 뒹굴다가 우연히 이책이 눈에 띄었기에, 담담한 맘으로 첫페이지를 펼쳤다. 진흙 속의 진주라고나 할까, 책은 의외로 재미있었고, 번번히 내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의미와 재미를 모두 겸비한 그런 좋은 책... 책을 보느라 밤을 꼴딱 샌 건 실로 오랜만의 일이다.

잠시 생각을 해봤다. 우리는 책을 왜 읽는가? 뭔가를 배우기 위해서? 그저 시간을 떼우기 위해? 킬링타임용 책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책'이라 함은 남에게 뭔가를 줄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지 않을까? 최소한 난 그런 목적으로 책을 읽는 것 같다. 하지만, 뭔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열린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과연 난 그런 자세를 갖추고 책을 읽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보자. 일전에 김종찬 씨가 쓴 <신문전쟁, 속지않고 읽는 법>을 읽은 적이 있다. '정부가 비판언론을 길들이기 위해 세무조사를 하고, 다른 신문을 동원해 비판언론을 공격한다'는 내용을 아주 잘난척을 하면서 써놓은 책이었는데, 난 그걸 읽는 내내 맘이 불편했다. 그래서 다 읽고 나서는 "이인간 책 다신 안읽어!"라는 생각을 하기까지 했는데, 그와는 대조적으로 <시대유감>을 읽으면서는 마음이 아주 편했다. 그건, 군가산점, 구성애의 아우성, 남녀평등 등 일련의 소재들에 관해 저자와 나의 생각이 비슷한 데서 오는 편안함이었다.

그러니깐 난 책을 통해 내 생각을 교정한다든지 할 마음이 없는 거다. 다시 말해 내가 책을 읽는 목적은 책을 읽으면서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이 옳은 것임을 확인하고픈 거였다. 진보적이라 이름난 한신대 교수의 책을 산 것도 같은 맥락이었고.

공부가 많이 부족한 탓에, 내 사상은 아직 허점이 많다.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려 노력하지만, 잘먹고 잘사는 내 환경 탓인지 진보에 어긋나는 주장을 펼 때도 많고,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굉장히 극우적인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즉, 일관된 어떤 신념의 체계를 갖지 못했다는 얘기다. 내가 다른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닌 바에야 책을 통해서 그 체계를 갖출 수밖에 없는데, 나처럼 닫힌 자세로 책을 읽는다면 책에서 뭔가를 배우는 건 불가능하게 된다. 맘을 비우고 책을 읽는다고 해도 나와 조금만 다른 주장을 접하면 금방 털이 곤두선다.

30이 넘으면 생각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는 건 그래서 그런 것 같다. 역시나 책은 10대, 20대 때 읽어야 한다. 30이 훨씬 넘은 이제사 책을 읽는다고 허둥대 봤자 이미 때는 늦었다. 이제라도 독서를 하는 게 안하는 것보단 나을 것이지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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