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멀미를 했던 경험은 다들 있을거다. 나만 해도 간만에 새로산 바지에 토사물을 게워냈던 쓰라린 기억이 있다. 차가 귀했던 옛날과 달리, 집집마다 차가 있는 요즘에는 멀미를 한다는 것 자체가 좀 촌스러워 보인다. 실제로 지금은 어린애들도 멀미를 하는 애가 거의 드물지 않는가? 그렇다고 해도 멀미에 대한 내성이 다 똑같지는 않을 거다. '멀미에 대한 저항성'을 4단계로 분류해 봤다. 순전히 내 맘대로.

단계 1. 차 안에서 눈을 뜨고 있어야 하며, 다른 행동을 일체 하지 못한다.

단계 2. 차 안에서 자는 건 가능하지만, 이외의 일은 하지 못한다.

단계 3. 차 안에서 잠은 물론이고 책을 읽는 게 가능하다.

단계 4. 차 안에서 술을 마실 수 있다.

각 단계를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전주서 서울로 올라오는 내내, 별로 볼 것도 없는 창밖만 내다보던 친구가 있었다. 책을 빌려준다고 하니 멀미나서 안된다고 하고, 차에서 자는 것도 안된단다. 이런 애가 단계 1이다. 그 길고 긴 시간 동안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버스를 자주 타야 할 사람이 단계 1에 속한다면 매우 불행한 일일 것이다.

단계 2는 잠이라도 잘 수 있으니 좀 낫다. 하지만 천안과 서울을 출근 버스로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본 결과 과반수 이상이 "버스에서 잤다고 집에서 그만큼 덜 잘 수 있는 건 아니"란다. 그러니까 그들은 눈을 감고 있을 뿐 숙면을 취하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단계 1에 가깝다. 숙면을 위해서는 예민하지 않아야 하는 건 물론 체력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이번에 출장가는 버스 안에서 서울부터 강진까지 다섯시간 동안 줄곧 잠만 잔 사람이 셋 있었는데, 모두 20대였고, 50대인 모 교수는 깊은 잠을 못잔 채 뒤척이기 일쑤였다.

단계 3. 멀미에 웬만큼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도 책을 읽는 건 쉽지 않다. 고속버스야 좀 낫지만, 가다 섰다를 반복하는 시내버스에서 멋모르고 책을 읽었다간 심한 멀미에 빠지게 된다. 어떤 이들은 쭉 달리기만 하는 고속도로에서도 책을 읽는 게 불가능하다. 수다를 떨 친구가 없다면 할수없이 잘 수밖에.

단계 4. 술에 취해 버스를 타면 오버이트가 쏠리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 단계에 속한 사람들은 술에 취해도 별 문제없이 장시간 버스를 타고, 심지어 차 안에서 술을 마시기도 한다. 얼마 전에 망한 리서치 회사의 통계인데, 서울 시민 중 단계 4에 속하는 사람은 단 12%에 불과하다고 한다.

다행히도 난 그 12% 안에 낀다. 몸이 원할 때면 얼마든지 숙면을 취하며, 그 시간만큼 집에서 안잘 수 있다. 안잘 때는 언제든지 책을 보며, 자주 술에 취해 서울행 버스를 탄다. 심지어 워크숍이 끝나고 천안으로 이동하는 와중에 남은 캔맥주가 아깝다면서 6개나 마신 적도 있을 정도. 요즘은 기차를 타지만, 천안과 서울을 지난 4년간 출퇴근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때문이다. 그 기간 동안 읽은 책은 원래 무식하기 이를 데 없었던 나를 그나마 평균적인 상식이라도 갖춘 사람으로 변모시켰으니, 단계 4에 속하는 내 몸에게 감사할 일이다.

질문 하나. 단계 1에 속하는 사람이 후천적인 훈련에 의해 2, 3, 4로 갈 수 있을까? 어떤 학자(이름이 김학자)의 견해에 따르면 그 단계라는 건 사춘기가 넘어서면 고정되어 더이상 올라갈 수 없단다. 그 말이 맞다면, 사춘기 전까지 멀미를 안하도록 열심히 훈련할 일이다. 나중에 집에서 멀리 떨어진 직장에 다니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