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그랜트가 나오는 영화는 뻔하지 않을까? 별점순위에서 <올드보이>와 더불어 수위를 다투고,

본 사람이면 누구나 강추를 해대는 이 영화를 안본 이유는 그런 거였다. <노팅힐>은 봐줄 수 있어도,

아류작은 보기 싫다! 아무리 달콤한 사탕이라도 자꾸 먹으면 질린다!

내가 마음을 돌리게 된 것은 어느 분의 적극적인 설득 때문이다.
"너무너무 재미있어요. 꼭 보세요!"

 

이런 식으로, 영화를 본 사람들이 전하는 입소문은 많은 사람들을 극장으로 달려가게 한다.

자신이 받은 즐거움을 남과 공유하고픈 마음은 인간이 이기적인 동물이라는 기존의 가치관을

헷갈리게 만드는 것 같다. 내가 영화를 본다고 해서 그 자신에게 손톱만큼의 이익도 돌아가지

않을텐데 말이다. 최근에 읽은 책에 의하면 이렇게 입소문을 내주는 소비자를 알파 소비자라고

한단다. 흥행 전망이 어두웠던 영화 <타이타닉>이 성공한 게 10대 소녀들의 바람몰이 때문이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인데, 제임스 카메론이 <타이타닉>을 재난영화가 아닌 러브스토리로 만든

것도 그렇게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러브 액츄얼리>는 너무나도 재미있는 영화였다. <반지의 제왕 3>을

볼 때는 "언제 끝나나"는 심정으로 시계를 몇 번이나 봤지만-재미없어서는 결코 아니다-이 영화를

보는 도중 거푸 시계를 본 건 "우 씨, 벌써 이렇게 지났어?"라며 안타까워하기 위해서였다.

이러저러한 인연으로 얽힌 십여명의 등장인물들이 동시에 사랑을 시작하고, 갈등을 일으키며,

해결을 하는 과정이 너무도 아름답고 로맨틱하게 그려져, 시종일관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느끼하게 생각했던 휴 그랜트도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는데, 특히나 그가 수상 관저에서 춤을

추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라 할 만한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그리다 보니 그 해결이

억지스러운 부분도 없지 않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봐줄 용의가 있다. 영화는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는 게 빈곤하기 짝이 없는 내 철학이니까.

 

어제가 천안 멀티플렉스에서 <러브 액츄얼리>가 상영되는 마지막 날이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극장에서 영화의 간판을 내렸을 테니, 못본 분들은 비디오가 출시되기를 기다려야 할 듯하다.

나 역시 약간의 이타심을 가지고 있는지라 내가 본 재미있는 장면들을 몇 개만 적어본다. 못본

분들에게 위안이 되었으면 하고.

 

1) 수상인 휴 그랜트가 눈독을 들이는 여자가 있다.
휴: 남자친구는 있어?
여자: 헤어졌어요. 내 허벅지가 굵다고 했어요 (내가 봐도 굵은 건 맞다).
휴: 나쁜 놈 같으니... 내 권력 이용해서 놈을 암살해줄까? 전화만 하면 공수부대가 떠.

 

2) 마약으로 젊은 시절을 허송세월한 원로가수가 희한한 노래로 뜬다. 그 사람이 나올 때마다 난

배꼽을 잡았는데, 그 중 가장 재미있던 장면이다.
생방송에 나온 그 가수: 어린이 여러분들! 마약하지 마세요!(처음으로 바른말 하네 싶었다)
팝스타되면 공짜로 얻을 수 있거든요!
방송MC: (당황하며) 광고듣죠!

 

3) 시종 무례한 요구만 하던 미국 대통령이 휴 그랜트가 좋아하는 여자를 건드린다. 열이 받은

그랜트 왈, "우리나라는 위대한 나라입니다. 세익스피어, 처칠...어쩌고....그리고 베컴의 나라....

위협만 하는 자는 친구가 아닙니다!"
이 말과 동시에 휴 그랜트는 영웅으로 떠오른다. 어떤 가수는 "나의 영웅에게 이 노래를 바칩니다"

라며 노래를 시작하는데, 그랜트가 춤을 추는 건 바로 이장면이다. 블레어 총리가 시종일관

부시의 푸들 노릇만 하는 게 영국인들로서도 자존심이 상할테니, 영화 속에서나마 이런 한풀이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나중에 된서리를 맞더라도, 미국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대통령을

살아생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노무현 자식.... 그런데 우리나라의

위대성은 어떻게 설명할까? "광개토대왕, 안중근.유관순, 서태지의 나라" 이렇게?

우리야 다 알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다. 위대하다는 게 공감을 얻으려면

그런 사람이 필요한데....

 

4) 목걸이
목걸이 판매상으로 <미스터 빈>으로 유명한 로안 왓킨슨이 깜짝출연한다. 얼굴만 봐도 어찌나

웃긴지. 하여간 영화 속의 사장은 젊고 아름다운 부하직원으로부터 구애를 받는데, 그녀를 위해

잠깐 짬을 내서 비싼 목걸이를 산다. 남편의 주머니에서 그 목걸이를 본 아내, "올해도 스카프인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이야?"라며 감동한다. "여보, 앞으로 툴툴거리지 않을게요"라는 카드도

쓰고. 하지만 그녀가 받은 선물은 고작 CD 한 장. 인간은 그럴 때 가장 배신감을 느끼는 법이다.

여인은 혼자 방으로 올라가 오열하는데, 그때 의기양양하게 그 목걸이를 건 젊은 여직원의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오죽하면 보는 내가 그 여인이 불쌍할까. 남자들이여, 바람을 피우려면 들키지나

마라. 들키는 건 아내를 두 번 죽이는 결과다.

 

5)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 나왔던 멋진 남자-사실 휴 그랜트의 반도 안되는-는 포루투칼 여자를

좋아한다. 그녀를 위해 포루투칼어를 열심히 배우고, 그녀가 일하는 카페에 가서 청혼을 한다.

물론 포루투칼어로. 그러자 여자는 유창한 영어로 대답을-예스!라고-하는데, 그 남자가 묻는다.
남자: 영어 배웠어?
여자: 혹시 몰라서요.

 

아이, 응큼해요 둘다!

 

6) 샘이라는 애도 가끔 사람을 웃기는데, 드럼을 치는 그는 보컬을 맡은 여자애를 좋아한다.

여자가 노래한다. "사랑해요, 그대!" 그러면서 여자는 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데, 그때 샘의

표정은 의기양양 그 자체. 하지만 노래 가사에는 '그대(and you!)'가 무지 여러번 나온다.

그때마다 손가락을 바꿔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보컬 여자. 그때 배신감에 젖은 샘의 표정은

휴 그랜트의 춤과 더불어 <러브액츄얼리>의 3대 유머 안에 들만하다. 깜찍한 녀석...

 

7) 마지막 교훈. 남녀가 잘 때는 휴대폰을 끄자! 무슨 소리인지는 보면 안다.
8) 의문점. 휴 그랜트에 관해 쓰다가 느낀 건데, 걔는 누가 옆에서 "휴-" 하고 한숨쉬면

"나 불렀어?"라고 말하지 않을까?
9) 의문점 2. 샘의 아버지는 영화 속에서 아내를 잃은 걸로 나온다. 샘이 왜 재혼하지 않냐고 묻자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한다. "클라우디아 쉬퍼가 아니면 재혼 안할거야" 그런데, 아버지는

학예회에서 다른 학부형의 어머니를 만나는데, 첫눈에 전기가 통한다. 샘이 말한다.

"어서 고백하세요!" 그 여자, 클라우디아 쉬퍼를 닮았던데, 맞는지 모르겠다. 유명한 사람이 워낙

많이 나오긴 했지만, 쉬퍼도 나온 걸까?  나중에 알아보니 쉬퍼 맞단다. 카퍼필드의 애인인 그 쉬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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