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자생물학 기법이 개발된 1995년, 사람들 중에는 영구동토에 묻힌 시체에서 스페인독감의 바이러스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이 두그룹 있었다. 한팀은 던컨이라는 엄청난 미녀였고, 또하나는 아까 언급한 의사와 1951년 알래스카에 갔었던 훌틴이었다. 두 팀의 스타일은 판이하게 달랐다.

먼저 미녀팀. 이 팀은 최고의 선수들로 연구팀을 꾸렸다. 지리학자, 바이러스학자, 국립 의학연구소장... 무덤 발굴 전문회사 (이런 회사도 있나?), 지반 조사 레이더팀....
"계획을 짜고 허가를 구하고 온갖 자질구레한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다국적 팀을 구성하는 일로 몇달이고 몇년이고 시간을 보냈다]
연구비도 많이 받았다. 국립보건원에서만 15만 달러를 받았다나. 모든 과정은 언론에 공개되었고, 미녀는 기자들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일을 진행했다. 계획을 세우는 데만 6만달러가 넘게 들었을 정도.

다음으로 훌틴팀. 의사는 훌틴에게 물었다. 언제쯤 떠날 수 있느냐고. 72세의 훌틴은 이렇게 대답해 의사를 놀라게 했다.
"이번주는 곤란하고, 다음주엔 떠날 수 있을 것 같네"
훌틴은 결국 삽 한자루를 가지고 동토로 떠나고, 비만이라 지방이 많아 단열 효과를 냈던 여인의 허파를 얻는 데 성공한다. 그 조직에서 의사는 바이러스의 백신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헴아글루티닌의 염기서열을 밝혀내는 쾌거를 이룩한다. 훌틴이 쓴 돈은 단돈 3천달러에 불과했다.

염기서열이 밝혀지고 난 뒤 한참 후, 던컨 팀이 아이슬란드에 도착했다. 땅을 파본 던컨은 깜짝 놀랐다. 그 땅이 녹았다 얼었다를 반복해서 시체가 다 부패해 있었던 것. 우주복을 입고, 안전에 대비한 장비들을 잔뜩 갖춰서 갔는데 말이다. 그렇게 많은 돈을 들이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그 프로젝트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삽 한자루만 가지고 가는 무모한 면이 있지만, 힐튼은 치밀해야 할 부분에는 굉장히 치밀했다.
[...배송 중에 유실되면 복구할 수 없으니...표본을 나누어 4개의 소포로 보냈다...페더럴 익스프레스를 이용해서 하나를 보내고, 유나이티드 어쩌고를 통해 또 하나를...세째날엔 우체국의 속달 서비스를 이용해 또 하나...네째 날에는 다시 페더럴 익스프레스...]
4개 모두 의사의 연구실에 잘 도착했음은 물론이다.

나를 굳이 분류한다면 던컨 스타일에 가깝다. 뭘 하라고 하면 일단 공부를 한다고 몇달, 그다음에 뭘 주문한다고 다시 몇달...일은 결국 안되고, 다른 사람이 나선다. "그냥 내가 할께" 이럴 땐 삽 한자루만 달랑 가지고 현지로 간 훌틴의 무모함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일을 할 때는 갑자기 훌틴이 된다. 세번 원심분리를 하라면 두번쯤 하고 말고, 잘 섞으라면 대충 섞는다. 그러니 맨날 결과 나오는 게 엉망이지! 이럴 때는 던컨의 세심함을 배워야 하는데, 난 반대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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