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틴이라는 병리학자가 있다. 이 사람은 1918년 독감으로 죽은 사람들로부터 바이러스를 부활시킬 수 있는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영구동토, 그러니까 북극에 가까워서 언제나 땅이 얼어 있는 지역-예를 들면 알래스카-에는 시체가 부패하지 않고 남아있을 것이며, 바이러스도 얻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발상이었다. 물론 자기 생각은 아니고 어떤 나이든 교수가 한 말에서 힌트를 얻었지만, 그 말을 들은 사람들 중 실천으로 연결한 사람은 훌틴이 유일했다.

1951년, 훌틴은 계획서를 써서 연구비 신청을 했다. 2달이 지나도 답이 안온다. 아는 사람의 백을 동원해 알아봤다. 백으로 동원된 하원의원의 대답이다.
[육군에서 훌틴의 아이디어를 도용해, 훌틴이 하겠다고 제안한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 알래스카 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세상에나, 이런 나쁜 놈들이 다 있나. 학문하는 사람이 이러면 되겠나. 열이 받은 훌틴은 다른 루트로 돈을 구해 알래스카로 떠나고, 그보다 먼저 시체의 허파 조직을 채취한다. 사필귀정이라 할만하지만, 유감스럽게 바이러스를 얻는 데는 실패하고 만다.

또다른 얘기.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났을 때, 한 무명 의사가 포르말린에 담궈져 보관되고 있던 1918년 독감의 희생자 샘플로부터 바이러스의 일부를 얻는 데 성공하고, PCR로 증폭한 뒤 염기서열을 알아낸다. 대단히 획기적인 결과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연구팀은 <<네이쳐>>에 논문을 보내기로 했다 (다 알다시피 네이쳐는 세계에서 제일 좋은 잡지로, 나도 초창기엔 여기다 논문을 실을 생각을 했었다). 런던 편집실에서 전화가 왔다. "정말 대단합니다. 당장 논문을 보내세요".... 하지만 어이없게도 <<네이쳐>>는 논문을 다시 돌려보냈다. 심지어 전문가들에게 검토조차 의뢰하지 않고 거절한 거다...그들이 보낸 논문이 검토를 요청할 만큼 흥미롭지 않다고 되어 있었다]

이게 말이 되는가? 그래서 그 의사는 라이벌 잡지인 <<사이언스>>에다 논문을 보냈다. 역시 게재불가. 이유가 뭘까? 논문을 검토한 과학자들에게 그 의사가 너무 생소했던 거였다. "독감의 비전문가들이 이런 걸 한 게 충격이었을 거다"라고 그 의사는 말했다. 결국 몇몇 중견 과학자들이 그를 대신해 중재를 한 끝에 논문이 게재되었는데, 그러자 난리가 났다. 대단한 업적이니 뭐니 하면서.

그 의사의 회상이다. "나는 뭔가 중요한 일을 해내면 권위 있는 학술지에서 앞을 다투어 출판해 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의 결론이다. "그들은 평범하고 고리타분한 논문을 출판하기 위해 혁명적인 논문을 거절한다"

2년 쯤 전, 나랑 나이도 비슷하고 외모도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네이쳐'에 논문을 실은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난 놀라서 숟가락을 떨어뜨렸는데, 나중에 그가 강연을 할 때 이런 말을 했다. 자기가 이러이러한 일을 해서 네이쳐에 보냈는데, 출판이 자꾸 미뤄졌다. 나중에 알고보니 심사를 맡은 놈이 그 논문을 붙잡고 있으면서 독일의 연구팀에게 연락해서 그 일을 빨리 해버리라고 했다는 거다. 술을 못하던 그는 그 얘기를 듣고 안하던 소주를 마셨다는데, 그는 그 사건을 '약소국의 비애'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니 강대국인 미국에서도 이런 일은 있다. 그러니 약소국의 비애라기보다는 못가진 자들의 비애라고 하는 게 옳을 것 같다.

논문을 싣는 것도 이렇듯 정치역학이 중요하다. 최고 권위를 가진 학술원 회원이 되는 것도 정치가 빠질 수 없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정치, 그놈의 정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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