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책은 잘 안팔리기로 유명하다. 수백부 팔리는 게 고작이고, 수천부 팔리면 당장 인문학 베스트셀러에 진입한다. 한 만권쯤 팔렸다면 그해의 베스트셀러 1위는 따논 당상이다. 인문학의 위기라니, 인문학 관련 책들이 안팔리는 것은 당연한다. 하지만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간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숱하게 많을텐데, 아무리 적게 잡아도 십만은 넘을텐데, 인문학 책은 왜 그리 안팔릴까?

하기사, 학생 때 의학을 전공한 나도 의학 관련 책을 읽은 적은 거의 없으니, 남얘기 할 때가 아니다. 의사들이 의학 책을 안사는 이유는 그냥 다 아는 얘기니까 하는 생각에서 그러는 게 아닐까 싶다. 의학관련 프로그램을 안보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 같고. 그런 식으로 유추한다면, 인문학과 출신들도 다 아는 얘기라서 인문학 책을 안사는 거겠지?

내가 지금까지 읽은 의학 관련 책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 그중 가장 재미있었던 책은 로빈 쿡이 쓴 <돌연변이>다. 로빈 쿡의 다른 소설들을 "병원이 무대라고 다 의학소설이냐"고 폄하하곤 했지만, 그 책은 너무 재미있어서 밤을 하얗게 새워가며 읽었는데, 내가 빌려준 그 책을 읽은 친구는 "하나도 재미없다"고 한다. 그때 알았다. 내가 그 책이 재미있었던 것은 그래도 기초의학을 했다는 학문적 베이스가 있었기 때문이란 걸.

최근에 의학과 관련된 멋진 책이 나왔다. <독감>이란 책인데, 참으로 재미있게 읽고 있다. 1918년 전세계에서 2천만-1억 사이의 희생자를 낳은 스페인독감의 정체를 밝히는 추리소설인데, 지금까지 한 3분의 1쯤 읽었는데 벌써 재미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사실 한가지. 독감이 영어로 '인플루엔자'인데, 그게 '영향'을 뜻하는 'influence'와 단어가 비슷하다. 왜 그럴까? 이탈리아에서는 독감이 추위 때문에 발생했다고 생각을 했기에 독감을 '추위의 영향'이라고 불렀던 데서 연유한단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놀란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코흐'와 관련된 에피소드였다. 콜레라가 유행해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을 무렵 (1883년), 코흐는 아가(agar) 배지를 이용해 콜레라균을 배양하는 데 성공했고, 다음 해에는 콜레라가 물을 통해 전파되는 수인성 전염병이라는 것도 밝혀냈다. 그런데 뮌헨의 위생학자 막스 어쩌고 하는 애는 미아즈마-시체 썩은 데서 나오는 더러운 공기-가 콜레라의 원인이라고 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코흐한테 콜레라균이 우글거리는 배양액을 달라고 했고, 그걸 꿀꺽꿀꺽 마셔 버렸다. 그러고는 코흐한테 편지를 썼다.
"플라스크의 내용물을 모두 마셨소. 내가 여전히 원기 왕성하다는 것을 알려주게 되어 기쁘오"
세상에 이런 무식한 놈이 있을까 싶지만, 그가 어떻게 콜레라에 안걸렸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이에 대해 런던의 의사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체질적으로 위산이 많이 분비되는 행운아였다. 위산은 콜레라를 모두 죽이는 효과가 있으니까"
하지만 콜레라에 걸려 죽은 사람들이 위산이 덜 분비되는 사람이 아닌 바, 이 주장은 별 신빙성이 없다. 내 생각에, 코흐는 인간이 불쌍해서 막스한테 맛이 간 콜레라를 보내줬을 거다. 사람을 죽이는 균을 먹게 한다는 것은 의사로서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이고, 막스가 죽었다고 하면 코흐가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테니까 말이다. 어찌되었건 역사는 코흐만 기억하지, 막스 어쩌고 하는 놈은 전혀 신경도 안쓰고 있으니, 정의가 승리했다고 할만하다. 자신의 무식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다니, 막스란 인간, 참으로 괴짜다. 나도 눈에다 벌레를 넣은 적이 있지만, 그건 막스가 한 것에 비하면 1만분의 1 정도의 위험도 없는 것이잖는가.

들뜨기 쉬운 연말연시에 차분하게 <독감>을 읽으면서 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일 성 싶다. 혹시 아는가. 그 책을 읽으면 독감에 안걸릴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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