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매트릭스 읽기
이정우 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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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영화 [매트릭스]가 나온 뒤, 이를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책들이 여러 권 나왔다. 일전에 읽었던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도 그 중의 하나다. 그렇다면 작년 말에 출간된 이 책, <철학으로 매트릭스 읽기>는 이전에 나온 책들과 어떻게 다른가? 머리말을 보면 이 책이 세상에 나와야 할 필연성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우선 이 책은 국내 소장 철학자들에 의해 씌어졌다...인문학 텍스트의 경우에는 원래부터 우리 식의 사고에 의해서 우리말로 씌어져야 할 필요성이 너무나도 크다]

일견 동의하면서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이들이 말하는 철학이란 것도 다 서양에서 건너온 사상이 아닌가? 장자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간 저자도 있긴 하지만, 저자 대부분은 비트겐슈타인이나 샤르트르 같은 외국 철학자들을 언급하고 있던데 '우리말로 씌어져야 할 필요성'이 무슨 말이람?

이 책의 두번째 필요성은 다음과 같다. [기존의 책들에 수록된 글들은 모두 매트릭스 1편에만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매트릭스> 전체를 총괄하는 내용을 담기에 부족한 면도 없지 않다]

그 말대로 이 책은 <매트릭스>2편까지의 내용을 철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기존의 책들이 1편에만 국한되어 독자들이 '갈증을 느꼈'다면, 몇달만 기다렸다가 3편이 나온 뒤 이 책을 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안그래도 저자들 중 한명은 '매트릭스가 3편에서 ..이런 쪽으로 결론이 날 것인가. 아마도 이러이러하게 끝날 가능성이 가장 높다'라는 말을 하기도 해, 3편을 두번이나 본 나를 허탈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 책이 나온 것은 2003년 11월 5일, 내 기억이 맞다면 이날은 3편이 우리나라에서 개봉된 날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3편이 개봉된 뒤 1-3편을 차분히 분석하기보다는, 3편의 개봉과 동시에 책을 냄으로써 판매에 도움을 주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럴 거면 '전체를 총괄하기에 부족하다'며 이전 책들을 비판할 일은 아니라는 거다.

계속 딴지만 걸었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전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나라 철학자들이 써서 그런지 지젝 등이 쓴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보다는 훨씬 잘 읽혔고, 공감하는 대목도 꽤 있었다. 난 매트릭스 자체를 파괴해야 할 악으로 설정한 영화의 구도에 별 생각없이 동조했지만, 저자의 다음 말도 일리가 있다. [매트릭스가 허구라는 사실과 통제라는 사실만으로는 그것을 파괴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도출되지 않는다. 허구라 하더라도 그것이 완벽하게 현실을 대체할 수 있다면 매트릭스는 인간의 보다 풍요로운 삶을 위한 대안일 수도 있다...프로그램에 의한 통제가 곧 행복과 선택의 말살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매트릭스의 존재 가능성을 확률로 계산한 대목에서 현기증이 나는 등 미흡한 부분도 없진 않지만, 머리말에서 밝힌대로 '이 기획이 이번 한권의 책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도 '충분히 분석할 만한 가치가 있는 대중문화 작품에 대해서...이런 시도를 계속할' 예정이라고 하니, 기대를 가져봄직하다. 철학이란 게 저 높은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삶 어디에서든 찾아볼 수 있는 것이며, 그런 것들을 찾아내 알기쉽게 풀어주는 게 철학자의 할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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