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그림 읽기
조이한.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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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메르가 그린 [금의 무게를 다는 여인]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
'보석의 무게를 달고 있는 걸로 보아 보석상인 모양이군. 그렇게 돈을 벌어 애들을 먹여살리겠지. 직접 생업에 뛰어든 걸 보면 남편이 없는 게 아닐까? 아냐, 여인의 배를 봐. 임신했잖아? 그렇담 최근 열달 이내에 남편과 잠자리를 했을거야'

하지만 그게 아니란다. '여인이 들고 있는 저울이 비어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단다. 내가 신경도 쓰지 않았던, 여인 뒤 벽에 걸린 그림은 알고보니 [최후의 심판]을 그린 거란다. 그러니 여인이 들고 있는 저울은 성 미카엘이 '부활한 인간들의 영혼을 달아 선인과 악인을 가르던' 저울이 된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 볼 때, 이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너 지금 이 그림을 바라보는 인간이여. 속세의 물질적 욕심에 눈을 돌리지 말고 네 영혼이 신의 저울에 올려질 날, 신의 마지막 심판의 날이 올 것을 기억하라 (68쪽)]
생활전선에 뛰어든 한 여인을 그린 것이라는 내 생각은 틀렸다. 그림을 보는 일은 이렇듯 어렵다.

'그 시대 미술의 전통과 당시의 문화, 중세 사상의 흐름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하니, 그 모든 분야에 문외한인 내가 그림의 메시지를 이해한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할 것이다. 그림에 대해 잘 알고 싶기는 해도, 그걸 위해 내가 '중세 사상의 흐름과 당시의 문화'에 대해 공부할 마음은 아직은 없다. 십년만 더 젊었으면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남들의 해석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림에 대해 알았다고 혼자 좋아하고 싶다.

이런 의문은 남는다. 화가가 그림을 그린 의도야 분명 있었겠지만, 우리가 그림을 보는 목적이 그린 이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일까? 화가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그 그림을 통해 만족과 평안을 얻었다면 그걸로 좋은 게 아닐까? 그림을 볼 줄 아는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한다면 그럴듯한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무식한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잘 모르는 자의 변명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림을 통해 화가와 관람객이 소통하던 시대가 지나고, 바야흐로 현대 미술의 시대가 개막되었으니까. 그래도 뭘 그렸는지는 알아볼 수 있었던 과거 미술에 비해, 현대 미술은 난해함 그 자체다.
진중권에 의하면 '현대 미술은 더 이상 그 자체로써 자기 자신을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단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나는 단지 작가의 의도를 가만히 서서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관람자가 아니다. 나의 해석은 작가의 그것보다 더 창조적일 수 있다. 창조적 해석을 통하여 나 또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 근사하지 않는가(274쪽)]

다시 말해서, 과거의 미술을 보는 데는 도상학에 대한 각종 해박한 지식이 동원되었지만, 난해함으로 무장한 현대 미술 앞에서는 대가가 따로 없다는 얘기다. '고정관념을 버릴 때 잃어버린 감각이 살아난다(280쪽)'는 말처럼, 무식하면 더 용감할 수 있다. 그림을 모른다고 방구석에만 숨어 있을 게 아니라, 미술관에 가자. 가서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자. 어차피 아무도 모르는데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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