랍스터를 먹는 시간
방현석 지음 / 창비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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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오래 전, 박완서님이 <휘청거리는 오후>를 쓸 때인가, 문단 선배들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진정한 작가라면 창작과 비평사에서 책을 낼 수 있어야 한다' 얼마 안있어 창작과 비평사에서 책을 내자고 제의가 왔고, 박완서님은 어찌나 기뻤는지 다른 곳보다 조건이 좋지 않았음에도 덜컥 계약을 했다고 한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그 당시 창비에는 단순한 출판사 이상의 무엇이 있었다. 어두웠던 그 시절, 방황하는 청년들의 정신적 디딤돌이 되어 준 창비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 시대를 견딜 수 있었으리라. 요즘 들어 창비에 대해 여러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진보상업주의', 즉 적당히 진보적인 냄새만 풍기며 책을 팔아먹기 바쁘다는 것이다. 은희경이 <마이너리그>를 창비에서 낸 것처럼, 창비가 이념적 지향에 맞는 작가를 키우는 게 아니라 엉뚱한 작가를 단지 잘나간다는 이유만으로 스카우트한다는 게 그 비판의 근거다. '우리도 먹고 살아야지 않겠느냐'는 창비 측의 변명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고, 창비의 찬란한 과거는 그것대로 존경할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이런저런 비판이 터져나오는 것은 사람들이 그만큼 창비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창비가 일부의 지적처럼 상업주의에 매몰된 것만은 결코 아니다. 최근 창비에서 책을 낸 작가를 보면 황석영, 공지영처럼 창비스러운 작가들이 몇명 있으니까. <랍스터를 먹는 시간>을 쓴 방현석 역시 창비의 이념에 들어맞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당신의 왼편>에서도 그랬지만 방현석은 남들이 다 한물간 것으로 취급하는 투쟁의 역사를 되살리고자 하고, 베트남 돕기 운동을 펼치며 한국에도 양심이 살아 있음을 말해준다.

베트남 전쟁, 사실 말하기 껄끄러운 소재다. 그당시 우리가 참전을 하지 않을 처지가 못됐던 것도 사실이고, 전후방이 따로 구분되지 않은 베트남에서 양민학살 같은 비극은 부득이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우리 사정일 뿐, 베트남 인민들에게 그런 사정을 이해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에게는 민주주의를 위한 성전이었을지 몰라도, 다수의 인민들이 사회주의를 원했던 그 당시 베트남에게 우리는 그저 침략군이었을 뿐이지 않을까. 소설에서 베트남 TV로 한국의 이라크 참전 소식이 나오자 베트남 인민 하나가 이런 말을 한다. '한국은 미국이 부르기만 하면 어디나 달려가는 강아지야?(78쪽)'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라크 파병이 우리에게 많은 이익을 가져다 줄지 모른다. 하지만 그걸 빌미로 우리는 우리의 자존심을 너무나 쉽게 내팽게치는 것이 아닐까? 국가로서의 위신을 포기한 채 얻는 국익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일본에게 과거사에 대한 사죄를 요구할 수 있으려면, 우리가 베트남에서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서도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 양민학살 문제를 제기하자 베트남 참전용사들은 한겨레신문사에 난입해 자신들의 기백이 살아 있음을 입증했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자신을 두번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을 뿐이다. 이라크전 파병을 너무도 쉽게 결정하는 우리 정부를 보면서,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그 비극을 되풀이한다던 어떤 유명한 사람의 말이 생각났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난 랍스터를 한번도 먹어보지 못했지만,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소설의 주인공은 베트남에 머물면서 랍스터를 수시로 먹는다. 그러니까 베트남은 랍스터가 흔한가본데, 베트남의 랍스터를 먹기 위해서라도 우리와 베트남이 우호선린 관계가 되야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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