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퀴엠 - CJK - 죽은자를 위한 미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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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은 탁월한 글쟁이다. <네 무덤에 침을 뱉어라> 를 읽고 그에게 매료된 이후, 그가 내는 책이라면 뭐든지 읽는다. 옛날 이문열의 책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책을 읽고 나면 내 교양이 한단계 업그레이드되었다는 뿌듯함을 느낀다. 다른 학자들과 달리 그는 글을 쉽게, 그리고 재미있게 쓴다. 그로 인해 난 미학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유익한 내용을 재미있게 쓸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재주다. 인간의 잔혹성을 주제로 한 <레퀴엠> 역시 그의 글쓰기가 가진 특징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은 가미가제라는 무지막지한 방법으로 적에게 타격을 가하려 한다. 운좋게 적의 항모에 도달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대공포화에 맞아 바다속으로 침몰하고 말았단다. 그렇게 무모한 개죽음에 젊은이들이 동참한 것은 나라를 위한 거룩한 죽음은 인간 존재의 자기완성을 가져와, 신이 되어 야스쿠니 신사로 돌아온다는 허황된 믿음 때문이었다. 진중권은 이들을 전장으로 내몬 전범들을 이렇게 비꼰다.

'남에게 옥쇄를 권하던 A급 전범들은 왜 사무라이답게 자결을 하지 않고 구차하게 살아남았을까? 신이 되어 영생할 수 있는 기회를 왜 스스로 내던져버렸을까? (81쪽)]

언제나 극우보수 이데올로기만을 설파하는, 소설가라고 하지만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복거일에 대해 진중권은 이렇게 말한다.

[다친 딸을 끌어안고...절규하는 어머니. 얼마 전까지는 살아 있었으나 이제는 자동차 속에서 새카만 숯덩이로 변한 어느 가족. 이런 참극 앞에서 글을 쓴다는 사람이 태연히 '미국의 전쟁은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은 그야말로 초현실주의적 상황이다. 이 해괴한 감성을 가진 문인은 한때 영어 공용화론으로 사회를 시끄럽게 한 후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아직까지 한글로 책을 쓰고 있는 복거일 씨다(93쪽)]

후후, '알 수없는 이유에서 한글로 책을 쓰는'이란 대목에서 난 웃었다. 해학은 이렇듯 상대에 대한 신랄한 공격이 될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안돌려줄까봐 굉장히 떨면서 누군가에게 이 책을 빌려 줬는데, 그가 재미있게 잘 봤다면서 덧붙이는 말이 '좀 과격하더군요'다.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일관되게 반전평화를 역설하는 진중권을 '과격'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현실, 그건 우리가 알게 모르게 미국이 지배하는 질서를 당연하게, 그리고 안정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교조 역시 반전평화를 아이들에게 가르쳤다는 이유로 '과격하다'는 비난을 배부를만큼 받았지 않는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반전평화'를 '반미'라고 하는 건, 미국이 전쟁광이라는 걸 인정한다는 뜻이 되는데. 노무현의 말처럼 '반미'면 또 어떤가. 우리 아이들도 우리처럼 미국의 지배 아래서 신음해야겠는가? 일본이 100년은 갈 줄 알았다고 안타까워했던 서정주의 오판처럼, 100년 이상 가는 권력은 없다. 해가 지지 않던 나라 영국이나,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던 스페인과 포루투칼,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제국이 오늘날 어떤 모습인지를 생각한다면 끝이 없을 것 같은 팍스 아메리카나도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을거다. '반전평화'의 외침이 '반미'나 '과격'이 아닌,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르짖어야 할 당연한 목소리로 인식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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