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3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장경룡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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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면서 읽었어야 할 소설을 이제서야 읽은 건 다소 쑥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상문이란 걸 쓰는 이유는, 어려서 읽는 것과 감수성이 무뎌질대로 무뎌진 요즘 읽는 건 느낌이 다르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다.

귀가 따갑게 들어온 <설국>이건만, 책을 덮고 나서 '이게 뭐가 위대한 소설일까?'라는 의문을 가졌다. 나만 빼고 다들 좋다고 할지라도 내가 옳을 수가 있지만,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이 책으로 노벨 문학상을 탄 걸 보면 이 소설의 가치를 나만 모르나보다. 내가 이 소설을 좋게 보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신성한 노동의 가치를 부정한다; 주인공은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듯, 일정한 직업이 없다. 말로는 글을 쓴다고 하지만 결과물로 나온 적이 없다. 뻑하면 설국의 무대가 된 온천 지방에 놀러와 게이샤랑 노닥거리는 게 고작. 한푼이라도 아껴가면서 애를 키우는 아내에게 미안하지도 않는가?

2) 지조가 없다; 아내 이외의 여자를 좋아할 수도 있다. 이해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 또 한눈을 파는 건 용서가 안된다. 한 게이샤가 맘에 들었고, 그 게이샤 역시 그에게 매는 와중에, 기차에서 본 또다른 여인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그 남자. 어찌어찌 해보고 싶지만 그 게이샤랑 이미 내연의 관계인 걸 아는 마을 사람들의 눈 때문에 그러지 못한다. 여자는 눈치가 빠른 법, 그 게이샤 역시 그 여자 얘기가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그 여자가 화재 현장에서 떨어져 죽었을 때, 그 남자놈이 안타까워한 건 아마도 이런 심정이리라. '애구! 한번 해보지도 못했는데'

여자의 바람에는 추상같이 엄격하면서, 자기 자신은 천하의 난봉꾼이며 그걸 또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남자들은 일본 뿐 아니라 이 땅에도 많다.

3) 이렇다할 사건이 없다; 소설이라 함은 발단과 전개, 갈등이 있고 결말이 있어야 하지만, 이놈의 소설은 그런 게 없다. 남자 놈이 계속 게이샤랑 노닥거리며 한눈을 파는 게 전부다. 페이지가 짧아서 다행이지, 지겨워 죽는 줄 알았다. 하기사, 큰상을 탄 작품들은 대개가 그런 법이다. 이걸 보면서 '설국'이라 불리는 곳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 외에는 '빨리 읽고 끝내자'라는 일념 뿐이었다.

상황이 이럴진대, 사람들은 왜 이 소설을 찬양할까? 그래서... 장정일의 독서일기 2권에 수록된 내용을 여기다 옮긴다.

[<설국>의 주인공 시마무라는 자기 마음을 스치고 지나가는 아름다운 순간을 발견하고, 머뭇거리며, 그것을 잡으려고 시도하지만 그 시도는 적극적이지 못하며, 몰아적이지도 않다. 관조에 가까운 것이다. 코마코와 요코에 대한 그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시마무라의 태도가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가 발견한 것들은 모두 상실될 것들이기 때문이다. 눈처럼. 문예출판사 본 <설국>에는 표제작과 함께 두편의 단편 <이즈의 무희>, <금수>가 덧붙어 있는데 애초에 작가는 상실될 것들만을 발견했다고 느껴진다]

상실될 것들... 역시 뭘 아는 분의 글은 뭔가 다르다. 그래, 너무 의미를 따지지 말자. 중요한 건, 내가 <설국>을 읽었다는 거 아니겠는가. 내일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말할 생각이다. '아니 너 <설국>도 안읽었어? 그거 노벨 문학상 받은 건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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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6-16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쥴님은 미술실력도 뛰어나지만, 문학 부문에서도 탁월하신 듯 싶네요. 나중에 생각나면 나머지 말씀도 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