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가 쓴 <스크린 밖에서본 한국영화사>란 책을 보면, 상명대 영상학부 교수로 있는 조희문에 대한 비난이 여러 차례 나온다. 권력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최소한의 일관성도 없이 행동하는 그를 보면 자연스럽게 욕을 하게 될수밖에 없다. "이자식, 정말 나쁜 놈이잖아!"

정성일 씨가 한겨레에 의 영화평을 썼는데, 끝부분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역사는 기록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은 (이 영화를 14초 잘라 내야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영화등급분류 위원님들의 명단이다. ...조문진, 조희문, 옥선희, 이종님, 권은선. 당신들은 당신들의 혀끝으로 다시는 ‘표현의 자유’라는 말을 하면 안 된다. 사람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면 안 된다]
그럼, 한입으로 두말하면 안되지. 이 명단에도 어김없이 조희문이 들어있다. 달리 나쁜 놈인가.

스크린쿼터에 관한 토론이 있을 때마다, 그는 폐지 쪽의 패널로 등장해 말도 안되는 궤변을 늘어놓곤 한다. 나쁜 놈 같으니. 그가 나쁜 것은, 스크린쿼터가 없어지면 한국 영화가 궤멸될 것을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알지도 모르면서, 즉 무식해서 스크린쿼터 폐지에 동참하는 사람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옛 말에 이르기를, 무식하면 가만히나 있으라고 했다. 알지도 못하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그러니까 범죄다.

오늘자 중앙일보에 김영봉이란 사람의 시론이 실렸다. <스크린쿼터 논리에 문제있다>! 김씨의 직업이 중앙대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것임을 감안한다면, 그가 어떤 글을 썼을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평소 한편의 영화도 보지 않는 듯한, 문화에 문맹인 사람에게 스크린쿼터에 관한 글을 쓰라고 하면 십중팔구 이런 글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의 말이다.
[이런 제도를 도입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한복은 윌 민족의 전통 복식...그러나 외국 유명패션이 국내시장을 지배해 국익의 손실이 크고 문화주권 유린도 심각하다. 그러므로 앞으로 전국의 모든 패션 관련 사업장에서는 연 1백 46일간 한복을 팔아야 한다]
이런 말을 써놓고 그는 스스로에게 감탄했을 거다. "정말 멋진 비유야!'" 이래가면서. 이 인간에게는 한복과 우리 영화가 별 차이가 없겠지만, 영화를 사랑하는 난 그가 왜 이따위 비유를 했는지 이해가 안간다. 한복 업자들이 한복을 만드는 이유는 한복집에서 자신이 만든 한복이 팔릴 것이라는 확신을 해서다. 평소 한복을 입는 사람은 드물지만, 결혼을 할 때 필수로 한복을 해가지 않는가. 영화 제작자들이 비싼 돈을 들여 우리 영화를 만드는 것은 그것이 극장에 걸려 관객과 소통할 수 있다는 확신을 해서다. 그걸 확신하게 해주는 장치는 바로 스크린쿼터제. 한복집처럼 한국영화만 일년내내 틀어주는 곳이 도처에 있다면, 굳이 스크린쿼터제를 할 필요가 없는 거다.

그는 말한다. "영화계는 한국영화 점유율이 40%가 될 때까지 스크린쿼터를 유지하자는 데 합의했다. 이제는 50%에 근접해 세계최고 수준이 됐으나 언제 다시 추락할지 모를 위험이 있기 때문에...줄일 수 없다고 한다. 세상에 죽을 때까지 실패할 걱정 없는 사업이 있겠는가"
그당시, 우리 영화계의 현실에서 40%는 그야말로 꿈이었다. 그게 현실로 나타난 이유는 두말할 것 없이 스크린쿼터를 "제대로" 시행한 까닭인데, 이 시점에서 스크린쿼터가 없어지면 예전의 한자리 수 점유율로 돌아갈 것이 뻔한 일 아닌가. 이런 건 전혀 안중에 없다는 듯, 김씨는 외쳐댄다.
[영화계가 정말로 헐리우드 영화를 대적할 국제 경쟁력을 원한다면 그들 스스로 보호막을 떨치고 나와 진검승부를 벌일 것을 자청해야 한다]
우리 영화계가 언제 헐리우드를 이기겠다고 했나? 영화 한편에 수억불을 쏟아붓는 그들과 우리의 경쟁은, 치타와 사람이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불공평한 게임이다. 경제학에도 독과점을 제도적으로 금지하는 것처럼, 헐리우드가 대부분을 휩쓸어 가더라도 우리 먹을 것은 조금 남겨 달라는 게 스크린쿼터의 취지다. 치타를 이기기 위해서는 티뷰론을 타고 달려야 하듯, 헐리우드 영화들과 그래도 경쟁 비슷한 것을 하려면 스크린쿼터가 있어야 한다.

그의 헛소리는 계속된다. [누가 영화인들에게 대한민국 문화 수호의 성직을 맡겼는가...필자는 국내에 몇개의 조폭영화가 떴다고 해서 한국 문화가 우수해졌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 경제의 어려움이 거듭되는 것은 이런 사람이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의 말대로 문화는 "우리의 삶의 형태이며, 국민 모두가 창조하는 것"이라고 해도, 영화는 영화인과 관객들의 것이며, 영화 제작은 영화인들에게 맡겨야 하는 거 아닌가? 자신들이 만든 영화의 판로를 확보해 달라는 몸부림에 왜 딴지를 거는지 모르겠다. 누가 "문화수호의 성직을 맡겼"냐고? 그럼 니가 맡을래? 영화에 무관심한 김씨는 몇몇 조폭영화밖에 아는 게 없겠지만, <파이란>이나 <고양이를 부탁해>같은 우리 영화계의 소중한 성과들은 모두 스크린쿼터의 정착에 의해 탄생한 거다. 이렇게 묻겠다. "그럼 헐리우드 영화는 졸라 우수한 영화냐?"고. 아무리 조폭영화가 판친다고 해도, 최소한 우리 영화는 헐리우드 영화들보다 훨씬 인간적이며, 그건 우리의 정서. 삶. 꿈이 거기 묻어 있기 때문이다.

브라질, 중국, 파키스탄... 그는 이상한 통계를 들이대며 스크린쿼터 폐지를 주장하지만, 내가 아는 바로는 스크린쿼터를 폐지한 나라들에서는 자국 영화산업이 거의 다 박살났다. 한번 무너지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것이 문화산업의 속성인데, 도대체 어쩌자는 걸까. 그는 "한미 BIT는...그 손익은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다"고 인정한다. 그래, 누구도 알 수 없는 BIT를 위해 우리나라 영화산업이 황폐화되도 상관없다는 거니?
스크린쿼터는 사실 BIT와는 별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스크린쿼터의 축소 내지 폐지를 BIT를 체결하는 조건으로 내건 것은 무엇 때문일까? 김영봉이 미국 내 메이져 영화사들의 대변인이 아니라면, 미국이 그런 요구를 하는 배경을 제발 좀 헤아리길 바란다. 'BIT 체결하는 대신 제주도 내놔' 이런다고 해서 '그래, BIT가 중요하니까 줄께'라고 할 사람은 없을 거다. 김영봉처럼 고매한 사람은 영화인들을 딴따라로만 생각할테고, 영화 한편의 의미에 대해 전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우리 영화산업이 제주도보다 더 중요하다. 그는 말한다.
[어려운 한국 사회에서 그래도 제일 잘나가는 집단이 영화인들이다. 이들의 집단이기주의가 통하는 나라에서 어떤 사회적 갈등이 풀릴 수 있겠는가]

김씨는 마지막에야 본심을 드러낸다. 이 칼럼의 핵심은 이거다. 영화인들이 잘나가는 게, 돈도 많이 벌고 좋은 차를 타는 게, 고매한 교수로서 기분 졸라 나쁘다는 것. 스크린쿼터의 사수에는 이기주의적인 측면이 있을 수 있다.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 뿐만은 아니다. 영화판에 가면 정말 헐값에 착취당하면서 고생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영화계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이긴 하다. 그런데, 그렇게 고생하면서 왜 영화판에 있을까? 나중에 크게 되려고?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들에게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과 문화 창조의 역꾼이라는 자부심이 없다면 그렇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일년에 영화를 보는 관객은 줄잡아 1억명, 그 중 4천만이 한국영화를 본다. 그 사람들에게 두시간 정도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 경제학자인 김씨는 아무 생각이 없겠지만, 난 그것도 우리 삶에서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니까. 스크린쿼터의 폐지는 그 4천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빼앗는 일, 이걸 어찌 집단 이기주의의 발로로만 생각을 할까?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자. 미국이 BIT를 체결하는 전제조건으로 각 대학의 경제학과를 다 없애라고 한다면, 김영봉 니는 "어, 그래" 하면서 수용할 건가? 거기에 반발한다면 그것도 '집단 이기주의'일까? 아마도 김씨는 경제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김씨에게 경제학이 중요한 만큼, 영화인들에게도 스크린쿼터는 중요하다. 내게도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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