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이 내게 그랬다. "혹시 영화평 쓸 때, 일부러 못쓰는 거 아니어요?"

나름대로 열심히 쓴다고 생각하던 터였기에, 그 말을 들었을 때 조금 당황했다. 사실 내가 영화를 보고 쓰는 글은 감상문일 뿐, 영화평은 아니다. 영화평론을 할 때 갖춰야 할 능력으로 영화의 메시지를 그럴듯한 수사로 포장할 수 있는 인문학적 베이스가 있어야겠지만, 핵심이 되는 것은 영화와 거리를 두고 봐야 한다는 것일게다. 거리를 띄고봐야 영화의 장.단점이 객관적으로 보일텐데, 난 영화에 몰입해버리니 '재미없다' '말도 안된다'로밖에 쓸 수가 없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난 영화평을 쓰고픈 마음은 없다. '단점을 찾겠다'는 마음으로 눈에 불을 켜고 영화를 본다면 영화가 주는 재미를 느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게다가, 내가 취미로 영화를 보는 데 비해 그들은 직업상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쓴다. 아무리 좋은 일도 업으로 하면 재미가 없는 법, 그러니 신문지상에 실리는 영화평들이 호평보다는 비난이 많은 게 아닐까?

<태극기>를 봤다. 남들이 대충 다 격찬하는, 별점 평점이 무려 9.28씩이나 되는 <태극기>를 난 어떻게 봤을까? 이해가 안갈지 모르지만 난 별반 재미없게 봤다. 중간에 두번이나 시계를 봤으며, 잔인한 장면들이 너무도 많아 시종일관 손으로 눈을 가려야 했다. <라이언일병>을 볼 땐 펑펑 울었지만, 이 영화를 보고나선 한줄기 눈물만 비쳤을 뿐이다. 거리를 너무 띈 건지, 술이 덜깨서 그런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상한 놈인가보다.



영화 속에서 장동건과 원빈은 형제다. 만약 실제로 둘이 형제라면, 그 어머니는 좋아서 매일같이 한강다리 위에 올라가 춤을 출거다. "정신이 어떻게 된 게 아닌가" 하던 사람들도 사정을 듣고나선 그 어머니를 이해하겠지. 어차피 상상이니까 외연을 조금 더 확장시켜, 첫째가 장동건, 둘째가 원빈, 세째가 권상우라면? 으아... 너무 무서운 상상인 것 같군!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고, 지금도 지구상 어딘가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어쨌든간에 전쟁은 비극이다. 이념에 따라 남북이 갈라져 싸운 6.25는 우리 민족에게 최대의 재앙임에 틀림없다. 그 전쟁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깊은 상흔을 남겼는데, 이산가족 문제도 그 하나고, 남북의 화해협력이 어려운 이유도 거기서 비롯된 것이리라.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초대대통령이라고 무조건 국부는 아니다. 입만 열면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전쟁이 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자던 사람이 전쟁준비는 하나도 안해놓은 것도 어이가 없지만, 막상 전쟁이 터지자 제일 먼저 도망가놓고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말로 국민들을 속인 건 용서할 수 없는 범죄다.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었을 때,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인민군에게 부역한-밥을 짓고 어쩌고 하는 행위를 부역이라 했다-사람들을 모조리 잡아죽인 것 역시 국부가 할 짓거리는 아니었다. 그런 그이니만큼 전쟁의 와중에 국회의원들을 협박해 발췌개헌을 단행, 장기집권의 틀을 다진 것은 별로 놀라울 게 없다. 사람들은 말한다. "공과 과를 모두 말하자"고. 난 이승만에게 지금 열거한 '과'를 능가할 공이 뭐가 있는지 도통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공과를 잘 따지자는 사람들이 군부독재가 끝나고 집권한 대통령들의 공에는 인색하고, 별거 아닌 과를 뻥튀기해 비난하는 건 더더욱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극장 문을 나오는데 생각이 났다. 일년에 국경일이 며칠인데 태극기 한번 단 적이 없는가 하는 생각이. 태극기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다가오는 3.1절엔 나도 태극기를 휘둘러 봐야겠다. 어디 있는지 찾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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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산 2004-02-15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론가들의 영화를 보는 태도에 대해 500% 동의합니다. 분야는 다르지만, 평론이 감성을 좀먹는 경험을 했기에...

실은, 전 피아노를 전공할 뻔 했는데, 예술계 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향상 음악회'라는, 같은 학년 친구들 앞에서 연주를 하는 시간이면 친구들의 연주에 대한 평가를 노트에 적어야 했었구요(터치가 어떻다, 표현이 어떻다..), 유명 음악인의 연주회에 가면 이사람 음악에서 무얼 배워야 하나 귀를 세우고 듣곤 했구요, 친구나 지인들의 연주회에 가면 '친구가 실수를 하면 어떡하나..' 맘졸이면서, 응원하면서 들었답니다.
몇 년을 이러다 보니 음악을 순수한 음악으로 들을 수가 없게 되어버렸답니다. (나만 그런건지도..)

요즘은요? 음악을 거의 듣지 않지만... 어쩌다 피아노 학원에서 들려오는 초등학생이 치는 간단한 소나티네에도 참 아름답다는 느낌, 저정도 치느라 수고 많았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전공자들이 들을 수 있는 아름다움을 전공자는 들을 수 없다니, 참 아이러니하죠?

작년에 피아니스트 겸 대학 교수로 있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저희 동기들 중에서는 꽤 인정받는 친구입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때는 왜 내가 치는 소리가 내 맘에 그렇게도 안들었는지 몰라. 지금 생각하면 그정도 칠 때 좀 더 즐기면서 했을 수도 있었을텐데, 아쉽다'고 했더니, 그친구가 하는 말...
'난 지금도 내가 치는 음악이 맘에 안들 때가 많아'

참으로 어려운 길, 빨리 바꾸길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