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머 씨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어떤 여자애를 좋아하는데, 그 여자애가 어느날 갑자기 주인공한테 월요일에 집에 같이 가자고 한다. 물론 여자애는 그럴 일이 있어서 그런 거지만,  주인공은 마냥 신나서 그애를 맞을 차비를 한다.
"가장 적당한 산책로를 골라 두려고 하루종일 숲속을 헤맸다"

그뿐이 아니다. 여자애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여섯가지의 특별 쇼를 준비하며,
"부엌 싱크대에서 과자를 조금 훔쳐 내오고...구두상자에 넣어 가지고 일요일 오후에 한 나뭇가지 위에 숨겨 두었다"

여기에 더해 주인공은 "그애를 웃게 만들 이야기를" 준비해 둔다. 이 모든 걸 준비하면서 주인공은 하나도 힘들지 않다. 아니, 오히려 신이 나 죽겠다. 다음 대목을 보면 애처롭기까지 하다.
"수업 시간에는 여느 때와는 달리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집중을 해서 선생님이 내게 방과 후에 남으라는 말씀을 절대로 할 수 없도록 하였다"

드디어 방과 후. 여자 애들만 수업을 한시간 더받는 바람에 주인공은 한시간을 마냥 기다려야 했는데, 그게 전혀 지루한 게 아니다.
"나는 앉아서 기다리며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뿌듯한 행복감에 젖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그애는 내 앞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얘! 너 나 기다렸니?"
"그래" 내가 말했다.
"얘! 나 오늘 너랑 같이 안가. 엄마 친구가 아프대. 그래서 엄마가 거기 안간데.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한참 동안 변명이 이어졌지만 갑자기 이상하게 귀가 멍하고 다리에 힘이 빠져서 그것을  머리에 기억해 두기는커녕 제대로 듣지도 못하였다]

읽는 내가 다 안타깝다. 아니 못가면 못간다고 진작 얘기를 하던가. 하지만 그 여자애에게는 주인공과 같이 가는 게 별로 대수로운 게 아니었는지라, 미리 말할 건덕지가 안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늘 말하지만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언제나 약자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먼저 나와 기다리고, 비를 맞으면서 영화표를 예약하고, 귀찮아하는 애인을 졸라 만나자는 약속을 받아내며, 피곤하다는 사람을 붙잡고 더 있자고 조른다.
<좀머씨>의 여자애는 "나 오늘 너랑 같이 안가"라고 말하면 끝이지만, 주인공의
가슴엔 커다란 멍이 든다. 여자애는 누구랑 같이 가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지만, 주인공은 한번 같이 가기 위해 이틀을 투자해 준비를 한다. 둘다 사랑하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인생이 피곤하다. 커플에 비해 솔로가 편한 건 바로 그래서일 것이다.


하지만 차사고가 무서워 차를 안살 수는 없듯이 더 사랑해서 손해를 볼까봐 사랑 자체를 안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남들이 보기에 주인공의 행동은 아무 의미가 없는 괜한짓이 되어 버렸지만, 최소한 그 행동을 하면서 주인공은 마냥 즐거웠다. 그런 즐거움은 버림받을 게 두려워 아예 사랑을 시작하지 않은 이는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위험이 높을수록 쟁취할만한 가치가 더 생기는 법이며, 그래서 사랑은 충분히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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