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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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인천 모 건물 4층에서 불이 났다.


불은 계속 번져 2층까지 내려갔는데,

당시 2층에는 호프집이 있었고,

그 안에서는 축제를 마친 중. 고교생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고,

56명이나 되는 사망자 대부분은 바로 그들이었다.

술값을 받지 못할까봐 주인이 2층 호프집의 문을 잠가 버린 탓에

탈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주인은 불이 커지자 비상구로 혼자만 탈출하는 엽기성을 보였는데,

그 당시 여론은 “술을 먹은 중고생이 문제다.”였다.

정말 부끄럽지만 나 역시 그런 여론에 고개를 끄덕였다.

책이 필요한 이유는 이런 잘못된 생각에 경종을 울려줄 수 있어서다.

 

 

호프집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경애의 마음>의 한 대목.
[맥주를 마셨다는 이유만으로, 죽은 56명의 아이들이 왜 추모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하는가 생각했다. 그런 이유가 어떤 존재의 죽음을 완전히 덮어버릴 정도로 대단한가.
그런 이유가 어떻게 죽음을 덮고 그것이 지니는 슬픔을 하찮게 만들 수 있는가. (71쪽)]
이 구절은 유령이 스크루지를 인도하듯 나를 1999년으로 가게 했고,
신문을 보면서 “벌써부터 술 마시고, 싹수가 노랗지”라며 혀를 차던 내 모습을 보게 해줬다.
삶의 대부분을 모범생으로 살아왔다는 자부심이 만들어낸 그 허위의식은
사건의 본질을 보려하지 않고 여론에 편승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난 앞으로도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지 않았을까.


책을 읽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나로서는 도저히 생각하지 못할 획기적인 표현을 발견할 수 있어서다.
책의 주인공 상수는 재수학원에서 해병대를 나온 조교로부터 혹독한 대우를 받는다.
나태해질 때마다 선착순 달리기나 뜀뛰기 등의 얼차려를 시키는 그 조교에게
상수는 분노와 원망을 느끼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이 이 관계에서 약자이며, 그의 선처와 용서를 바라게 된다는 것을 느낀다.
늦잠을 잔 어느날, 오늘도 또 얼차려를 받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운동장에 나갔더니
조교가 매우 평화로운 표정으로 상수를 대한다.
“제가 지각했거든요”라고 상수가 말하자 조교가 답한다.
자신은 이미 계약이 끝났고, 그래서 더 이상 얼차려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상수는, 좀 더 정확히 김금희 작가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낸다.
[...결론은 사랑이라거나 연애라거나 하는 것에 복무하는 이들이 일종의 노동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다양한 통로로 물질교환이 일어났으며 권력관계가 조성되었고 결국에는 어느 한편이나 쌍방의 착취로 관계가 종료되기까지 끊임없이 성실과 근면을 강요받았다. (153쪽)]
연애가 노동이고 거기 종사하는 자들이 노동자라니, 이렇게 공감이 갈 수가.
내가 권력자에게 했던 수많은 노동들이 생각났고,
그래서 갑자기 욱 하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지만,
이 나이에 새삼 욱할 필요가 뭐가 있겠나 싶어서 다음 부분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뭔가 많이 느끼게 해주는 소설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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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 2018-07-16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수님 글을 오랫만에 봐서 기쁘구요, 저도 요즘 이 책을 읽고 있어서 한번 더 기쁘네요^^ 아직 많이 안 읽어서 화재사건이 등장하기 전인데, 벌써 마음이 저려옵니다. 연애가 노동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말마다 저는 집안일하고, 남편은 베짱이로 변하는 현실이 슬프기는 합니다.(저희 부부는 주말부부인데, 제가 다른 지역에 와서 살다가 금요일에 본집에 내려가서 계속 집안일을 하다 일요일에 오거든요.ㅠ.ㅠ.)

마태우스 2018-07-17 01:52   좋아요 1 | URL
아 네... 곧 화재사건이 나올 겁니다 초반에 나오는데 아직 거까지 안읽으신 듯요. 초반엔 진도가 잘 안나가긴 했어요. 암튼 남자분들은 다 그런 것 같습니다. 부인이 오면 고생했지, 라고 하기보단 부인 없는 동안 자신이 혼자 살아온 걸 인정받으려는 경향이 있는 듯요. -.- 두집살림이 얼마나 어려운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