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소설을 너무 허투루 읽었었다
새삼스럽게 새로 소설 읽기를 배우다
나의
학창시설,
소설,
아니
문학에 대한 관심은 지대했으나,
혼자
스스로 책을 읽는 선에서 그쳤다는 것을,
살아오면서
수시로 느끼곤 했었다.
아무래도
내가 소설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곤 했는데,
이
책에서 아이들과 선생님이 나누는 대화 중 “내가
소설을 허술하게 읽었나봐”(384쪽)라는
말은 그래서 나의 모습을 표현한 것 같았다.
분명 저자가 의도하는 바가 있을
것인데,
소설을
허술하게 읽고,
나
혼자만 무언가 다르게 생각하고도,
소설을
잘 읽고 있다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그러한
생각으로 문학을 어떻게 한번 새로 공부해 보겠다는 마음 그치지 않았었는데,
마침
손에 들어온 책이 <청소년,
소설과
대화하다>였다.
이 책의 구성
이 책에는 모두 총
9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그리고
한편의 소설이 끝날 때마다,
그
뒤에 <소설
읽고 대화하기>라는
장을 마련하여,
그
글을 읽은 다음에 학생들과 선생님이 나누는 대화에서 그 소설에서 짚어봐야 하는 것들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 대화를
읽으면서,
‘아이들의
대화’에서는
요즈음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읽었고,
‘선생님의
말씀’에서는
내가 그 앞에서 문학 강의를 듣는다 생각하며 읽었다.
알고
있었던 개념은 더 확실하게,
새로운
단어가 등장하면 받아쓰기 하면서 듣는다 생각하며 집중하며 읽었다.
이 책에서 건져 올린 것들
살아있는 표현들
기쁘다,
슬프다,
하는
감정들을 나타낼 때에,
어떻게
하면 더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그런 표현을 자주
접했다.
<엄마가
수술대위에 누워있는 광경을 떠올리면 심장이 호두처럼 쪼글쪼글해지는 것 같았다.>
<심장으로
따뜻한 피가 스며들어 오는 느낌.>
유하순의
<불량한
주스 가게>에서
건져 올린 표현들이다.
그저 기분이 따뜻해
졌다,
라는
말 대신에 ‘심장으로
따뜻한 피가 스며들어 오는 느낌’이라고
표현하는 것,
얼마나
신선한가?
열린 결말
유하순의
<불량한
주스 가게>의
결말을 두고 토론이 벌어지는데,
그
결말이 딱 부러지게 되지 않고,
그저
중도에서 그친듯한 인상을 주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는 ‘열린
결말’이라는
개념으로 정리가 된다.
<‘열린
결말’이어서
작위적이지 않고 더 흥미로운 것 아닐까요?
뒷이야기가 궁금하다는 것은
이야기로서 살아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요.>(41쪽)
문학작품이 주는 힘
그런 문학 작품들이 주는 힘은
무엇일까?
문학은
읽는 사람에게 어떤 힘을 주는 것일까?
이 책에서는 바로 '상상하는 힘'을
주는 것이라 말한다.(97쪽)
<(이
소설을 읽으며)
이
아이들이 앞으로 어떤 우정을 가꾸어 나갈지,
자기
꿈을 실현할지,
답이
없어 보이는 가족 문제는 어떻게 될지 등 앞날을 상상해 보게 되더라고.>
김유정의 소설 제목은 왜 ‘봄봄’일까? 177쪽
김유정의 소설
<봄봄>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왜 그 소설 제목은
‘봄’을
두 번 썼을까?
그냥
‘봄’
이
아니고?
그런 나의 궁금증을 다소 풀어주는
대화가 여기에서 진행된다.
<봄만
되면 주인공은 장인에게 점순이와 성례시켜 달라고 요구하고 번번이 거절당해.
그러니까
작년에도 거절당하고 올해도 거절당하고,
그런
봄이 계속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해.>(177쪽)
제목을 그렇게 한 김유정의 속내는
모르겠으나,
이
말 듣고 보니 그럴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인칭 관찰자 시점
서술자의 시점에 관하여는
3인칭과
일인칭 두개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 새로 알게 된 것이 있다.
바로
일인칭 시점에서도 나뉜다는 것.
바로
‘일인칭
주인공 시점’과
‘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나뉜다.
이 책에서 그것은 두 번 언급이
되는데,
첫
번째는 <사랑손님과
어머니>에서다.
그 소설의 화자는 어린
영희이다.
그러니
일인칭 시점으로 소설은 진행이 된다.
난,
그저
그렇게 일인칭 시점이면 분석이 다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과 일인칭
관찰자 시점'을 대비하는 발언은 현진건의 <고향>을
읽고 토론하는 자리에서 등장한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그렇지만
관찰자 시점을 잘 활용한 것 같아.
한
개인의 일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에 황폐해진 고향이라는 점에서 조선 사람 모두의 고향이라고 여기게 되잖아.
‘그’를
지켜보던 ‘나’
또한
고향 이야기에 공감하면서 함께 침통해하고.>
(324쪽)
이 소설에서 화자인 '나'는
그러니까 소설에서 전해지고 있는 사건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를
관찰하고 그의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관찰자
시점’으로
소설을 이끌어 가는 이점이 무엇인지 학생들의 대화를 좀 더 읽어보자.
<작가가
노동자의 삶을 상상하면서 어설프게 묘사하는 것보다 식민지 시대 지식인이 노동자나 농민 계층의 삶을 알게되고 같은 조선 사람으로서 동질감을 느끼는
식으로 그리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해.>(325쪽)
결국 현진건이 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그 소설을 이끌어 가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평가이다.
사족 하나.
소설가 전상국이 웃음소리를
‘ㅎ
ㅎ'로만
표현한 적이 있다.
(227쪽)
요즈음 문자를 보낼 때 흔히 쓰는
‘ㅋㅋ’,
‘ㅎㅎ’의
원조가 바로 그일 줄이야!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
그렇게 소설 한 편을
읽고,
그
소설을 허투루 읽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한편
한 편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발견하고, 그래서 다시한번 문학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가 바로 ‘타자에
대한 공감’(309쪽)
이라는
것도.
다른
‘책을 더 읽게 하는
힘’까지
그래서 지금껏 허투루 읽던 소설들을
이제 조금 다른 모습으로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조차 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
주요섭의
<사랑손님과
어머니>에
대한 <소설
읽고 대화하기>에서
작가 박형서를 알게 되었다.
그가
이 소설을 패러디한 소설을 썼다는 것.(229쪽)
그래서
찾아보니,
그의
소설집 <자정의
픽션>에
이런 제목의 작품이 있었다.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 -
'달걀'을
중심으로>
그래서,
읽었다.
새로운
의미의 소설.
이
책 읽고 조금은 나아진 독해력 덕분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