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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읽기의 혁명 - 비루한 삶도 고귀한 삶도 부활한다 ㅣ 철수와영희 생각의 근육 4
손석춘 지음 / 철수와영희 / 2024년 10월
평점 :
니체 읽기의 혁명
니체 읽기에 혁명이 필요한 이유
저자는 책 제목을 『니체 읽기의 혁명』이라고 잡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니체를 읽어가는 데, 읽는 방법에 있어 지금까지의 방법과는 다른, 혁명적인 방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 이유를 저자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의 철학이 여전히 많은 곡해를 하고 있어서다. (5쪽)
그 다음에 중요한 대목이 나온다.
우리가 지금껏 니체를 어떻게 사용했는가, 알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말이다.
니체 읽기에 자칫 오해를 일으킬 두 흐름이 있다.
첫째, 삶에 지칠 때 힘을 얻고자 니체의 단편적 문장들에 기대는 흐름.
둘째, 그의 철학이 파시즘은 아닐지라도 반민주주의임은 확실하다며 니체 읽기를 경계 또는 조소하는 흐름.
저자의 관찰 맞다. 지금 당장이라도 니체에 관한 책을 검색해보면 위의 두 가지 흐름을 타고 넘쳐나는 책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저자의 지적 아주 가치가 있다. 이런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그래서 니체를 읽을 때에 그런 경향에 휩쓸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책, 니체의 기초부터 시작한다.
니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쇼펜하우어부터 알아야 하는데, 저자는 이 점 잘 짚어주고 있다.
1장에서는 간략하게 니체의 생애를 소개한 다음에 그의 철학의 시작점인 쇼펜하우어를 2장에서 다루고 있다.
2장에서는 해서 니체의 철학과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비교하면서 살펴볼 수 있게 된다.
이런 쇼펜하우어의 경구도 듣게 된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57쪽)
나중에 니체는 이 말에 대해 다른 생각을 펼친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를 오가는 시계추라는 주장도,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금욕을 주장한 해법도 니체에겐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허무주의에 지나지 않았다. (113쪽)
이런 것 알게 된 것, 진짜 혁명적이다.
니체의 저작에 『권력에의 의지』가 있다.
이 책에 대한 평가는?
지금은 니체 연구자들 사이에서 니체의 저서로 인정하지 않는다, 니체가 남긴 글을 오롯이 편집한 『유고』만 인정한다. (181쪽)
왜 그런 평가가 나오게 되었을까?
『권력에의 의지』는 니체의 유작으로 표기되었으나 진실은 다르다. 그의 여동생이 파시스트인 남편의 직간접적 개입 하에 오빠의 의도와 다르게 편집하여 짜깁기에 가필까지 하면서 편집한 책이다, 결국 파시즘 사상을 담은 책이 되었고, 이를 히틀러가 적극 이용했다.
그래서 니체의 저서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 처음 알게 된다.
박홍규의 『니체는 틀렸다』에 대하여
이 책에서 특기할만한 내용중에 박홍규의 『니체는 틀렸다』를 비판하는 대목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니체가 어떤 식으로 읽혀지고 있는가에 관해 경청할만한 내용이다.
이런 사건이 있었다.
1924년, 미국 시카고에서 어린이가 살해되는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범인은 레오폴드와 로앱, 둘 다 시카고 대학의 학생들이었다. 그들의 범행동기는 뜻밖에 니체의 사상이 들어있다. 레오폴드는 ‘니체’에 매료되어 자신과 로앱을 ‘슈퍼맨(초인)’으로 생각하고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기 위해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른다.
이런 사건을 예로 들면서 박홍규는 니체는 틀렸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그 책을 찾아보니, 목차만 훑어봐도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을 정도다.
1. 니체의 반민주주의
2. 니체와 한국의 반민주주의
3. 니체 선배들의 반민주주의
4. 니체 반민주주의의 시작
5. 니체 반민주주의의 전개
6. 니체 반민주주의의 절정
7. 니체 후배들의 반민주주의
8. 반민주주의자 니체를 버리자!
저자는 박홍규의 주장에 대하여 182쪽에서 199쪽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검토 비판하고 있다.
저자의 요지는 이 한 문장에 나타난다.
니체의 문학적 표현을 법학자가 곧이곧대로 풀이할 때 생길 수 있는 오독이다. 그러다보니 니체에 대한 비판이 지나치게 도식적이다. (189쪽)
니체와 마르크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마르크스와 니체의 연대를 잘 못 알고 있었다.
니체가 먼저고 마르크스가 니체 후에 등장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런 대목을 만난다.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탈고할 무렵인 1883년 3월 17일, 영국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서는 마르크스의 장례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211쪽)
이글을 읽고나서야, 니체와 마르크스의 관계를 알게 된다.
마르크스 (1818- 1883), 니체 (1844-1900)
마르크스가 니체보다 훨씬 앞선 시대를 살았다.
저자는 니체와 마르크스의 사상을 비교하면서, 그들이 19세기 근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223쪽 이하에서 살펴보고 있다.
다시, 이 책은?
니체에 대하여 막연하게 알고 있었던 것들, 궁금하게 생각하던 것들,
예컨대
니체의 사상은 왜 히틀러에 의해 오용되었는가,
과연 그는 반민주주의적인 주장을 한 적이 있는가?
우리나라에서 니체는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가 등등.....
이 책을 통해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왜 저자가 책의 제목을 『니체 읽기의 혁명』이라고 했는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니체를 읽고, 그의 사상을 이해하려고 하는 독자들은, 이 책을 먼저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