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하) - 중세의‘압도적 선구자’,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일생 ㅣ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민경욱 옮김 / 서울문화사 / 2021년 6월
평점 :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프리드리히 2세, 그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1194년 12월 26일 ~ 1250년 12월 13일, 중세에 살았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독일왕, 그리고 시칠리아의 왕이기도 했던 인물이다.
그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평가가 적절할 듯 하다.
이해, 황제 프리드리히가 죽었다. 세속 군주 가운데 가장 위대한 통치자로 세계의 경이를 모았고 여러 면에서 멋지고 새로운 업적을 이룩한 개혁가였다. (하, 349쪽)
베네딕트의 수도사이자 영국 출신의 연대기 작가인 매슈 파리스의 기록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그가 한 평가가 다 맞다.
세계의 경이, 멋지고 새로운 업적을 이룩한 개혁가.
인문정신을 정치에서 실현하려고 한 인물.
나는 여기에 한마디 덧붙이고 싶다.
인문정신을 정치에서 실현하려고 한 인물이라고.
그렇게 말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그는 나폴리 대학을 세운다, 지금의 페데리코 2세 대학이다.
(참고로, 페데리코는 프리드리히의 이탈리아식 이름이다.)
나폴리 대학은 유럽 최초의 세속대학이라 할 수 있다. (상, 156쪽)
나폴리 대학은 신학이나 교회법이 주요 과목을 차지했던 다른 대학과 달리 로마법이 주요과목이다. 또한 철학, 윤리학, 수사학도 가르쳤다.
고대에 교양 전반이라는 의미에서 중요시한 아르테스 리베라레스(리버럴 아츠)를 모두 가르치는 것이 프리드리히가 나폴리대학을 설립한 목적이었다. (상, 155쪽)
또한 그가 만난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렇다.
레오나르도 피보나치 (195쪽)
프리드리히는 피사에서 피보나치를 만난다. 피보나치는 이탈리아 해양 도시국가 태생으로 젊은 시절 지중해 주변을 돌아다니며 이슬람 세계와 교역을 하는 중에 아라비아 수학의 유용성을 알아차리고 유럽에 도입하는 데 열정을 쏟고 있었다.
또 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마이클 스콧이란 사람을 만난다.
마이클 스콧 (상, 197쪽)
내가 마이클 스콧이란 사람을 만난 것은 단테가 쓴 『신곡』에서다
『신곡』 <지옥>편 20곡이다.
옆구리에 살점 하나 없는 저 사람은
마이클 스콧으로, 그는
마술의 속임수에 통달했었다. (『신곡』, <지옥>편, 민음사, 200쪽)
미주에 마이클 스콧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문학가이자, 수학자. 아랍어와 히브리어로 된 아리스코텔레스와 아비켄나의 저술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마법사와 점성술사로 알려져 있다.>(위의 책, 383쪽)
그 사람에 대하여 시오노 나나미는 이 책에서 이렇게 소개한다.
피보나치를 언급하는 중에,
참고로 피사의 상인 피보나치는 프리드리히에게 자기보다 다섯 살 어린 친구를 소개한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아직 이슬람 통치 아래 있던 스페인에서 공부한 이 남자와 프리드리히가 교류한 분야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다. 프리드리히의 궁정을 드나드는 단골손님이 되는 마이클 스콧이란 남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상, 198쪽)
유럽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소개한 최초의 인물이다, 라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그러니 그전에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가, 아랍으로부터 역수입된 아리스토텔레스의 등장은 그후 르네상스의 신호탄이 되는 것이다.
해서 이 책에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언급이 자주 보인다.
프리드리히 2세가 세운 나폴리 대학에 관한 기술중, 다음과 같은 대목이 보인다.
나폴리 대학에서는 로마법이 주요과목이다. 또 철학, 운리학, 수사학도 가르쳤다. 그중에서 특히 아랍인이 연구하고 프리드리히가 독학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중시했다. (상, 155쪽)
또 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인 만프레드가 이번에는 주인공이다.
만프레디는 고대 그리스어로부터 아랍어로 번역되고 다시 히브리어로 번역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하나를 직접 읽고 유럽 사람들도 더 읽어야 한다는 생각에 라틴어 번역을 후원한 바 있다. (하, 324쪽)
그러니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프리드리히 가문에 빚을 졌다는 것,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인문정신은 그의 정치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피흘리지 않고 싸우다, 6차 십자군
그는 십자군을 이끌고 원정길에 나선다, 교황으로부터 두 차례의 파문을 당하면서까지 미루고 미뤘던 원정이다. 그러나 목적은 싸우러 가는 게 아니었다. 싸우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는 것, 그게 그의 목표였다.
그리고 그는 그 목표를 이루었다. 리처드 사자심왕도 이루지 못했던 일이었다.
리처드 사자심왕도 가톨릭 교회가 말하는 ‘불신앙의 무리’와 강화를 체결했다. 하지만 리처드는 살라딘을 상대로 격투를 벌인 후에 이 ‘불신앙의 무리’와 강화를 성립시킨 것이다. 반대로 프리드리히는 한 번도 전투하지 않고 ‘불신앙의 무리’와 대화만으로 강화를 성립시킨 것이다. (상, 250쪽)
이런 에피소드, 그의 인문정신인 열린 세계를 잘 보여준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후, 어느날 이슬람 총독이었던 알 가우지에게 물었다.
“예루살렘에 온 후 한 번도 아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왜인가?”
전 총독은 알 카밀로부터 황제의 체류 중에는 아잔을 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서른네 살의 황제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면 당신들 가운데 누가 내 영토를 방문하면 교회 종을 울리지 못하지 않나?” (상, 256쪽)
또 있다, 이런 이야기 그의 주변에 누가 있는지 알 수 있다.
그 다음날부터 하루에 다섯 번씩 모스크의 첨탑 위에서 기도 시간을 알리는 낭랑한 아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루는 프리드리히가 부하들과 시찰 중에 그 일이 일어났다. 아잔을 들은 그들 가운데 그대로 땅에 엎드려 기도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 정경에 이슬람 측이 깜짝 놀랐다. 그들 누구도 그리스도교 세계 황제의 부하 가운데 그토록 많은 이슬람 교도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보다 더 놀란 것은 이슬람 식 기도를 올리는 부하를 그대로 둔 채 남은 부하만을 데리고 시찰에 나서는 프리드리히를 봤을 때였다. (상, 257쪽)
이런 사실과 별도로, 리옹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교황측 검사 : 루체라에는 원래 그리스도교도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을 쫓아내고 그 땅에 아주시킨 사라센인에게 그들만의 마을을 만들도록 인정했다.
다테오 (프리드리히 측) : 황제는 자국 안에서 그리스정교도, 유대교도, 이슬람교도라도 황제의 통치에 반대하지 않는 한 각자의 신앙을 인정하고 있다. 이슬람교도만을 루체라에 모여 살게 한 것은 어디까지나 통치상의 이유 때문이다. (하, 204쪽)
밑줄 긋고 새겨볼 말들
인간이라고 누구나 현실을 모든 것을 보는 게 아니다. 많은 사람은 보고 싶은 현실만 본다.
시저가 한 말이다. (상, 233쪽)
위기의 어원인 라틴어 ‘crisis’에는 ‘소생’이라는 의미도 있다. (하, 345쪽)
우리 말에서는 위기라는 말을 한자어 위기(危機)에서 추론하여 위험과 기회로 뜻을 헤아리는데, 그간 궁금했었다. 서양에서 ‘crisis’는 어떤 식으로 해석하는지.
다시, 이 책은? - 프리드리히 2세의 ‘역사적’ 의의
프리드리히 2세가 죽은 후에 교황 우르바누스 4세, 그 뒤를 이은 클레멘스 4세의 부추김에 힘입은 프랑스의 루이 9세와 그의 동생 샤를이 시칠리아를 침공하여, 결국 시칠리아는 샤를에게 넘어간다. 프리드리히 2세의 시칠리아 왕국은 그렇게 왕이 바뀌게 된다.
교황은 외국 군대를 끌여들여, 눈에 가시같았던 시칠리아를 요리해 버린 것이다
이에 관련하여, 마키아벨리의 다음과 같은 통렬한 비판 글이 있다.
로마에 근거지를 둔 그리스도 교회가 이탈리아에 해를 끼친 것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만한 군사력을 거느리지 못한 로마 교황이 다른 나라의 군사력을 끌어들일 힘은 지니고 있었다는 점에 있다. 이탈리아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처럼 항상 다른 나라의 왕에 의존해온 역대 로마 교황 덕분이다. 이탈리아는 외국 세력의 침략에 오랫동안, 그것도 되풀이해 고통받게 된다. (하, 330쪽)
물론 이런 글이 실린 마키아벨리의 책은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금서처분을 받는다.(하. 331쪽)
어쨌든 프랑스 군을 동원하여 시칠리아를 도탄으로 빠트린 교황은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여기에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다.
프리드리히가 죽은 뒤 53년, 그 아들 만프레디가 죽은 37년 뒤인 1303년, 프랑스의 미남 왕 필리프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를 체포하여 아비뇽 유수가 벌어진다.
그래서 로마 교황이 7대에 걸쳐 프랑스의 소도시인 아비뇽에 유폐된다. 그게 우리가 세계사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 이르기까지, 프리드리히 2세가 교황과 ‘성’은 교황이 ‘속’은 황제가 담당하겠다고, 치열하게 싸웠던 역사는 배우질 못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유럽 중세의 역사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그 다음, 프리드리히가 열어놓은 인문정신이 서서히 유럽을 밝히게 되는데, 그게 바로 르네상스다.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가 프리드리히 2세를 중심에 놓고, 유럽의 중세를 ‘쓸 생각’(12쪽)을 했다는데, 그 생각에 경의를 표한다. 프리드리히 2세를 빼놓고는 유럽 중세를, 유럽의 르네상스를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니, 저자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더라면, 무언가 연결고리가 빠진 채로, 르네상스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