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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상) - 중세의‘화려한 반역아’,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일생 ㅣ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민경욱 옮김 / 서울문화사 / 2021년 6월
평점 :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 pre - review
시오노 나나미의 책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생애』를 읽고 있다.
이 책 읽기 전에 먼저 궁금한 것 정리해 본다.
프리드리히 2세의 가계와 생애
출생 - 사망 1194년 12월 26일 ~ 1250년 12월 13일
할아버지 : 프리드리히 1세 (별명 : 붉은 수염)
아버지 :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 (Heinrich VI)
(신성로마제국 황제, 시칠리아 왕)
어머니 : 콘스탄체(Constanza) - 시칠리아 공주, 노르만 왕조의 정통 후계자 (21쪽)
아내 -
첫 번 째 부인 : 아라곤의 공주 콘스탄체 (1209년 결혼)
두 번 째 부인 : 예루살렘 왕국의 이자벨 (욜란데) 여왕 (1225년 결혼)
세 번째 부인 : 잉글랜드 국왕 존의 딸 이자벨라 (1235년 결혼)
1222년 첫째 부인 콘스탄체가 사망하면서 예루살렘 여왕 이자벨 2세와 재혼해 예루살렘 국왕 자리에도 오른다.
이자벨 여왕이 아들 콘라트 4세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자, 예루살렘 국왕 직위는 아들에게 넘어갔다. 콘라트 4세는 후일 독일 국왕과 시칠리아 국왕도 겸하게 된다.
1234년에는 독일 국왕을 겸하던 장남 하인리히 7세가 반란을 일으켰다.
1237년에는 작은아들 콘라트 4세를 독일 국왕에 앉혔다.
그는 1250년 12월 토레마조레 성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서거 이후 신성로마제국 황제 직위는 공석으로 유지되었다가 1312년 룩셈부르크 가문의 하인리히 7세가 가져갔다.
독일 왕위는 1220년 큰아들 하인리히 7세에게, 예루살렘 왕위와 시칠리아 왕위는 작은아들 콘라트 4세에게 계승되었다.
재위기간
신성로마제국 황제 (1220년 ~ 1250년)
독일 국왕 (1212년 ~ 1220년)
시칠리아 국왕 (1198년 ~ 1250년)
예루살렘 국왕 (1225년 ~ 1228년)
전임자 :
신성로마제국 황제, 독일 국왕 : 오토 4세(Otto Ⅳ)
시칠리아 국왕 : 하인리히 6세(Heinrich Ⅵ)
예루살렘 국왕 : 이자벨 2세(Isabelle II)
후임자 :
신성로마제국 황제, 독일 국왕 : 하인리히 7세(Heinrich Ⅶ)
시칠리아 국왕, 예루살렘 국왕 : 콘라트 4세 (Konrad Ⅳ)
그의 일생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았지만, 복잡한 것은 여전하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면서, 시칠리아 왕국의 왕이기도 하다.
또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은 예루살렘의 여왕과 결혼해서 그렇게 된 것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대체 시칠리아와 신성로마제국의 왕과 황제를 겸직하다니, 대체 이게 어떻게 되는 것인가? .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그런 의문점 정리해보기로 한다.
신성로마제국, 무척 궁금했었다.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게 대체 어떤 나라인가?
800년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1세가 교황 레오 3세에게 명목상의 '서로마 황제' 대관을 받아 '신성 로마 황제'라는 개념이 탄생하였으며, 924년 황제 베렝가리오 1세의 사망 이후 제위 계승이 중단되다가 962년 독일 왕국의 오토 1세가 이탈리아 왕국을 통합하고 교황 요한 12세에게 황제 대관을 받으면서 제위가 부활하여 본격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 시작되었다. 나폴레옹 전쟁 도중 1806년 황제 프란츠 2세가 퇴위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은 해체되었다. {나무 위키} |
분명 로마는 아닌데 왜 로마라는 이름이 들어있으며, 그게 나라이기는 하며, 그렇다면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는? 예컨대 시칠리아와는 어떻게 다른가?
신성로마제국은 수장이 왕인가, 황제인가?
그리고 그 수장은 어떻게 되는가? 누가, 어떻게 그 자리에 오르는가?
여기 이 책에 그 답이 있었다.
중세 유럽 그리스도 세계는 두 명의 최고 지도자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다. 로마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다.
로마 교황은 신의 뜻을 신자에게 전한다는 역할로 보건대 그리스도 교회의 최고위자이며 따라서 그리스도교도 전원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교황에 반하는 자가 파문당하는 것도 교황에 반하는 일은 신을 거부하는 것과 같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정신적’이라는 것은 당시에는 ‘종교적’이라는 말이었다.
다른 하나는 황제인데 황제도 동방의 황제와는 다른 성격의, 유럽에만 존재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다.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에서는 세속의 최고위자로 여겨지던 존재다.
바꾸어 말하면 로마 교황의 책무가 신자들이 정신적이고 종교적으로 평안한 생활을 보내다가 편안히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책임을 지는 것이라면 황제의 책무는 같은 신자가 평화롭게 생활하며 굶주리며 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이 둘에 부여된 권력을 전자의 경우 ‘교권’, 후자는 ‘속권’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렇게 ‘교권’과 ‘속권’이 나뉘어 있어도 최고위 사람에게만 신이 주신 권력이 있다는 중세이므로 로마 교황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세습은 허용하지 않았다. 둘 다 선거로 선출해야 했다.
로마 교황은 붉은색 옷을 입은 추기경들의 투표로 뽑혀야만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흰옷을 입을 수 있는 교황이 된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선제후’라 불리는 독일의 유력제후들에게 선출되지 않으면 머리에 제관을 쓸 수 없다.
이점이 다른 제후들과의 가장 큰 차이였다. 왕권은 왕의 아들로 태어나면 얻을 수 있는 세습의 권리지만 로마 교황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만은 그들보다 지위가 위였으므로 세습권이 아니었다. (82- 83쪽)
종교계의 최고 권위자인 로마 교황과 세속의 최고 실력자인 신성로마제국 황제만이 세습도, 전임자의 지명도 아닌 선거로 뽑혀야 비로소 취임할 수 있다.
로마 교황을 뽑는 것은 추기경으로 임명된 고위 공직자들이다. 한편 황제를 선출하는 것은 ‘선제후’라고 불린, 봉건제후 가운데 유력한 제후들이었다. (112쪽)
자,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은 세습이 아니라, ‘선제후’라 불리는 귀족들이 투표를 해서, 선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 프리드리히 2세가 가진 또다른 왕위, 시칠리아 왕국의 왕은?
프리드리히가 시칠리아의 왕이 된 것은 어머니에게서 받은 세습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이는 프랑스 왕 필리프도 영국 왕 존도 마찬가지다. (83쪽)
프리드리히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선출로, 시칠리아 왕위는 세습으로 이어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후에 로마로 떠나기 전에 아들에게 시칠리아의 왕위를 건네준다.
팔레르모 대성당에서 이제 막 한 살 생일을 맞은 적장자 하인리히가 아버지 프리드리히와 어머니 콘스탄체가 참석한 가운데 시칠리아 왕국의 왕으로 즉위했다. (61쪽)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는 세습이니까. 프리드리히 2세는 아들 하인리히에게 왕위를 넘겨준 것, 아무 문제 없다. 그 아들이 한 살이든 두 살이든.
그렇게 해서, 일단 궁금증 하나 풀렸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 책 읽어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