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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해변
이도 게펜 지음, 임재희 옮김 / 문학세계사 / 2021년 2월
평점 :
진짜 소설다운 소설을 읽었다 - 『예루살렘 해변』
이 책은?
소설을 읽었다. 정말 소설다운 소설을 읽었다.
읽다가 새삼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새겨보게 되는, 그런 소설을 읽었다.
흔히들 소설에서 반전을 이야기 하는데, 그래서 이 책 역시 책 뒤표지에 <독특한 문체, 탁월한 상상력, 놀라운 반전>이라고 써 놓았는데, 이 소설은 반전 차원을 넘어선다. 소설 속으로 녹아들어가는 기분, 이런 기분 느낀 책, 처음이다.
이 책 『예루살렘 해변』은 이스라엘 작가 이도 게펜의 소설을 모아놓은 소설집이다.
저자 이도 게펜은 <1992년 이스라엘에서 태어나 현재 텔아비브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사골 뇌 연구소Sagol Brain Institute, 소라 스키 의학센터, 텔아비브 대학 부속기관인 ‘가상 증강 현실 연구소’에서 신경 인지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스토리텔링이 어떻게 인간 정신에 대한 이해를 증폭시킬 수 있는지 탐구하는 작가다. 그는 현재 이 연구소에서 스토리텔링과 증강 현실을 이용해 파킨슨병의 양상을 진단하는 혁신적인 연구를 이끌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은?
소설을 읽다가 몇 번이고 앞으로 돌아가 저자의 경력을 훑어보곤 했다.
대체 이런 소설을 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어떤 경력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소설을 쓰지, 하는 궁금증이 일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가상 증강 현실 연구소’에서 신경 인지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스토리텔링이 어떻게 인간 정신에 대한 이해를 증폭시킬 수 있는지 탐구하는> 작가이기에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다, 그거다. 그래서 작품 하나 하나를 읽어갈 때마다, 새록새록 스토리텔링의 그 깊숙한 의미가 다가오는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은 표제작인 <예루살렘 해변>을 비롯하여 모두 14편인데, 14편 모두가 새겨볼 만하다. 그러나 그중에서 한 편을 꼽으라면, 단연 <파리와 고슴도치>다.
여기 수록된 작품 중 가장 짧은 소설이다. 쪽수로 겨우 5쪽에 불과한데, 그리고 시작도 뭔가 엉성한데 읽다가 그만 울컥해지는, 그래서 작가의 솜씨에 감탄, 경탄하게 되는 작품이다.
시작은 이렇다. 첫문단이다.
요나단 형이 입대한 날부터 나는 시간을 잡아보려고 노력했다. 말 그대로 붙잡으려고 양손을 뻗어 손가락 사이를 지나갈 때를 기다렸다가 주먹을 재빨리 쥐고 최대한 많은 덩어리를 잡으려 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시간을 잡는 것은 정말 까다로운 일이었으니까. 어찌 되었든 난 어설픈 파리 한 마리조차 잡아 본 적이 없다. (383쪽)
이게 뭔소리? 시간을 손으로 잡다니? 그야말로 ‘헐’이다.
그런데 눈에 띄는 단어 하나 '파리', 손으로 파리조차 못 잡는데, 보이는 파리조차 못잡는데, 보이지 않고 형체가 없는 시간을 어떻게....
(여기서, 등장하는 ‘파리’가 제목의 ‘파리’이고, 그 ‘파리’가 가지게 되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다 읽고 나서 알게 된 것, 저자에게 미안한 일이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처음에 그런 생각에 빠져 그 뒤 글들을 허투루 읽었던 모양이다.
그 다음 장면, 형이 군대에서 휴가를 왔는지, 집에 다니러 온 형이 가족들과 식사를 하면서 군대 이야기를 재미있게 해준다. 거긴 안전하다면서 가족을 안심시키는 말도 하면서.
형은 계속 말했다. 전초 기지에서 아무일도, 정말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걸 믿을 수 없다고, 오히려 집에 있는 것보다 북쪽에 있는 그곳이 훨씬 더 안전하다고. (383쪽)
휴가 나온 형을 동생은 졸졸 따라다닌다. 면도하는 형의 모습, 이렇다.
그날 저녁 늦게 형은 집안을 서성거렸고 나는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형은 친구들과 약속이 있다며 면도를 했지만, 실은 고슴도치 쓰다듬는 느낌을 싫어하는 메이탈을 위한 거였다. (384쪽)
10살짜리 동생이 군대에 가서 휴가 나온 형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 그려지지 않는가? 게가다 형이 면도하는 모습도 어린 동생에게는 멋지게 보일 것이다.
여기서 ‘고슴도치’가 등장한다. 제목에 등장하는 고슴도치다.
그리고 형은 화자인 동생에게 말한다.
형은 2주 안에 한창 분쟁중인 가자 지구로 보내질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384쪽)
그리고 형은 어린 동생에게 시간을 잡는 법을 가르쳐준다. 시간을 잡아 병에 집어넣는 방법을. 이게 동생이 형을 기억하는 방법이 된다.
군대에 가서 죽은 형을 기억하는 방법!
그런데도 거기까지 읽으면서도 전혀 바로 다음 문장에 나올 사건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 채집이라는 황당함에 주의를 뺏긴 탓이었을까?
이런 것, 역시 눈치 채지 못하고 읽었다.
나는 형이 내게 들려주었던 모든 이야기의 시간을 끌어모아 계속 병을 채웠다. (386쪽)
이윽고 등장하는 문장, “모두들 조의를 표하러 왔다.” (386쪽)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면서, 뒷통수를 한 대 세게 맞았다.
지금 10살짜리 사내아이인 화자는 형을 그렇게 기억하는 것이다.
형의 시간, 형과 같이 한 시간, 가족이 형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모아 모아, 병속에 담아두고 싶어하는 그 절절한 마음을, 저자는 두 손으로 잡아 이 작품 속에 담아 놓았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그것을 느꼈다. 거의 보이지 않았고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사라질 뻔 했지만, 내 손에 쥐어진 것이 시간 덩어리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385쪽)
나는 이 집 전체를 시간으로 채우고 싶다. 내 평생 갈 만큼. (387쪽)
다시, 이 책은?
이 책에 모두 14편의 소설이 실려있다. 그 중 어느 한 작품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다.
여기 모두 분석해서,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저자는 주제를 잡아내어, 그걸 어떻게 하면 스토리텔링으로 녹아낼 것인지 치밀한 연구 끝에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다음에 우리에게 내어 놓는다. 그러니 작품 속에 주제가 살고, 이야기가 살아 움직인다. 소설 속 이야기에 들어있는 인물들도 그래서 모두 진짜 살아 움직인다.
이게 소설이다. 진짜 소설이다.
그러니 이 소설집을 읽을 때는, 한 문장, 한 글자도 허투루 읽지 말고, 모두다 가슴에, 심장에 새긴다는 각오로 읽어라. 그게 이 소설집을 대하는 독자의 태도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