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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명화 한 편을 감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10초나 30초? 아니면 꼬박 2분? 중요한 화가의 전시회에는 300점을 거는 것이 표준이 되어 있는데, 그러면 그런 곳에서는 좋은 그림 한 점을 감상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일까? 그림 한 점에 2분을 쓴다면 300점을 모두 보기까지 열 시간이 걸린다(점심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화장실을 가는 시간은 셈에 넣지 않았다.) 마티스나 마그리타나 드가의 전시회에 가서 열 시간 동안 그림을 본 사람 있으면 손들어보세요. 나는 그런 적이 없다."(p116) 이보게 작가 양반, 나도 물론 그런 적이 없소.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차라리 그랬으면 좋았을 뻔 했다는 생각을 했소. 왜냐면 그대 책을 읽느라 토요일 하루를 온전히 거덜내며 커피를 사발로 마신데다 그러고도 완독을 못해서 일요일 오전까지 그대의 책과 함께 내가 너덜너덜해졌기 때문이오!! 그림 300점을 보나 그대 책을 이틀에 걸쳐 죽어라 완독하나 어렵기는 매한가지. 왜 적을수록 강력하다고 얘기하면서 이렇게 수다스럽냔 말이오!!
아르고스호의 재난을 그림으로 남긴 제리코, 스물넷에 일기를 쓰기 시작해 사후 누구도 독파할 것을 시도하지 못한 세 권의 두툼한 일기장을 출간한 들라크루아, 프로포즈 하는 편지에다 대고 네가 내 프로포즈를 거절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자리는 얻을 수 없다고 쓴 쿠르베(물론 까임;;), 화가는 과일이나 꽃, 심지어 구름으로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다고 말한 마네(마네의 라일락 꽃다발을 한참 들여다봤다. 화가는 라일락 꽃다발로 무슨 얘기를 하려던걸까? 나 예뻐?), 아름다운 소년 랭보와 그의 연인 베를렌을 그린 팡탱(참고로 이 책의 표지 속 저 소년이 랭보다. 내 마음 속 랭보는 토탈 이클립스 속 디카프리오뿐이었으므로 기분이 이상해졌다), 300 프랑에 자기 그림을 사간 중개상이 7,500 프랑에 그림을 파는 것을 보고도 꿈쩍 안한 세잔, 여성 모델들에게 관대했는지 관대하지 않았는지 여전히 아리송한 드가, 깊은 화합이 주는 기쁨을 알아 전적으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던 르동(여러분 화가들 중에서도 애처가가 있었답니다!), 필요 이상의 감수성 때문에 좋아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좋아한 보나르(그는 아내 마르트가 들어가는 그림을 385점이나 그렸다;;), 줄리언 반스가 좋아하는 그림 탑 10에 들어가는 <비질하는 여자>를 그린 이십대의 뷔야르(줄리언 반스는 노년에 그린 그림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틀렸다), 그 밖으로도 발로통, 브라크, 마그리트, 올든버그, 프로이트, 호지킨의 작품들에 대한 다양한 얘기가 설명되어 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내내 화가의 사생활에만 관심을 가졌는데 줄리언 반스가 환원주의식 접근을 하지 말라고! 대쪽같이 나를 질타해도 그것 말고는 재밌는 게 없었다. "그림들을 이야기로, 대화로, 가정사를 말해주는 자서전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구성과 미학보다는 그림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찾게 되고, 이는 화가에 대한 작지만 중대한 배신이다."(p243)라고 못이 박히게 들어도 돌아서면 또 사생활. 구성과 미학은 너무 어렵단 말이다. 차라리 그림의 주제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편이 독자인 내게는 더 편하단 말이다. 아, 어쩌란 말이오!!!
"이런 미술 에세이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반스뿐이다" 라고 소개하는 책, 내가 미술 에세이를 몇 권 읽어본 게 없긴 하지만 진실로 이런 미술 에세이는 처음이긴 했다. 요리 관련 에세이로 먼저 만나 쉽게 봤던 게 문제였던게지. 화가의 흥미진진한 사생활로 작품의 속내를 들려주곤 했던 여타의 에세이와 달리 전문적이고 지적이고 현학적인 얘기들이 넘쳐난다. 그렇다고 사생활 얘기가 없다는 건 아니지만. 보다시피 독자인 나는 온통 사생활로만 작가를 엮어놨다. 내 머리에는 온통 그런 것만 남는다;;; 17명의 화가들이 "미술이 어떻게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를 거쳐 모더니즘에 이르렀는가"(p18)를 이야기하며 자신의 작품을 소개한다. 인생과 작품에 대해 할 얘기가 많았던 작가도 있고 적었던 작가도 있지만 어찌됐든 분량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 그들의 얘기를 대변하는 것이 줄리언 반스이기 때문이다. 옥스퍼드 영문사전 증보판 편찬에도 참여했던 작가의 머릿속 낙낙하고 뾰족한 단어들은 언제든 종이 위에서 존재감을 과시할 준비를 하고 있다. 독자는 펼치기만 하면 된다. 마음의 준비를 좀 하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