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어하우스
베스 올리리 지음, 문은실 옮김 / 살림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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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값 비싸기로 유명한 영국에서 없는 주머니 털어 살 곳을 구하려니 이거 보통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간 남자친구 저스틴의 집에서 살아왔던 티피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자존심 접고 전남친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집값을 벌 것이냐 자존심 지키고 독립을 할 것이냐. 곰팡이가 버짐처럼 핀 아파트를 보고 있으려니 저스틴의 반짝반짝한 둥지가 그리워지지만요. 새애인까지 데려와 경멸하듯 깔아보던 저스틴의 눈빛을 떠올리면 살인 집값 앞에서도 무모한 용기가 솟습니다. 대신에 혼자서는 못삽니다. 딱 공과금 낼만큼만 월급 주는 DIY 출판사에서 뜨개질 책 편집자로 일하는 티피가 자존심을 대쪽 같이 세워도 혼자서는 집값 감당 못해요. 그래서 셰어하우스의 임대인을 찾는다는 광고글에 연락을 합니다. 구글을 뒤져 보니 변태처럼 보이지는 않는군요. 집 보러 갔더니 여자 친구도 있고요. 70년대식 도배지도 딱 티피 스타일. 뭣보다 저녁 6시부터 아침 8시까지는 집주인이 근무 중이기 때문에 온전히 내 공간으로 쓸 수 있다는 게 안심이 되요. 낮에는 집주인인 리언이 밤에는 티피가 거주하는 둘만의 공유 생활은 그렇게 시작이 됩니다.

여자친구도 아닌 생판 남과 동거생활을 결심한 리언을 한번 살펴볼까요. 그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간호사로 근무 중인 건전하고 성실한 청년입니다. 강도로 오인 받아 감옥에 갇힌 동생의 변호사 수임비를 대기 위해 야간근무 강행 중이고요. 한 푼이라도 더 벌 작정으로 밤으로 비어있는 자신의 집을 셰어합니다. 여자친구 케이의 반대가 어마무시했지만 그 여자와는 절대 마주치지 않겠어, 연락도 주고 받지 않을게, 철썩 같이 약속한 후 티피가 준 월세를 받아 변호사비에 보탭니다. 퇴근하고 돌아온 아침, 비몽사몽한 중에도 깜짝 놀라 제 집을 둘러봅니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거실에 쌓여있는 산더미 같은 잡동사니! 책도 한 무더기, 옷도 한무더기, 라바램프와 강아지 캐릭터 저금통과 무지개색으로 토한 것만 같은 낡은 담요와 책상을 가득 채운 재봉틀이라니요. 몸을 포옥 감싸는 빈백 하나만큼은 마음에 들지만 틀림없이 맥시멀리스트인 이 여자와 잘 살 수 있을까 고민됩니다. 그러나 지금은 뭣보다 피곤하기 때문에 고민은 잠시 뒤로, 그냥 잠들기로 하는군요. 가엾은 리언..

일절 소통이 없을 것만 같던 두 사람은 티피의 팬케이크가 계기가 되어 쪽지를 주고 받습니다. 손이 큰데다 고민이 많으면 베이킹을 하는 티피의 특성상 남는 음식이 많았거든요. 굳이 버릴 것 없이 해결해주는 다른 사람이 있으면 참 좋은 일 아니겠어요? 리언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한 푼이 아쉬울 때에 공짜 음식이라니 횡재한 것 같았고요. 그렇게 시작된 쪽지들이 부엌과 거실과 침실을 장악해가며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더욱 많은 사연과 더욱 많은 취향들을 공유해가요. 6개월이 넘도록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서도 우정을 느낄 정도로 두 마음이 성장하죠. 어쩌면 얼굴 한번 본 일 없이 생활 속 자욱들로 서로를 살피고 파악하고 이해했기 때문에 이토록 우정의 마음이 커진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헤어졌지만 여전히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남자친구에게 휘둘리는 티피, 동생을 범죄자로만 보는 여자친구를 설득해 지금의 상황을 이해받고 싶은 리언, 티피가 남자친구에게 받은 정신적 학대를 깨닫고 그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친구들, 사랑하지 않음을 깨닫지 못한 채 안맞는 여자와 힘겹게 연애 중인 형이 가엾기만 한 리치 등 참 좋은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제각기 어려운 연애 사정을 극복하고 성장해 가는 이야기였습니다. 저 어릴 때만 해도 할리퀸 로맨스가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는데 그 시절 남자 주인공과 꼭 닮은 저스틴은 더이상 호응할 수도 호응받을 수도 없는 위치의 남자로 전락해 버렸다는 걸 셰어하우스를 읽으며 톡톡히 깨우치는 시간이기도 했어요. 올 가을 재미있는 로맨스가 읽고 싶다면 <셰어하우스>, 이 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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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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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명화 한 편을 감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10초나 30초? 아니면 꼬박 2분? 중요한 화가의 전시회에는 300점을 거는 것이 표준이 되어 있는데, 그러면 그런 곳에서는 좋은 그림 한 점을 감상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일까? 그림 한 점에 2분을 쓴다면 300점을 모두 보기까지 열 시간이 걸린다(점심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화장실을 가는 시간은 셈에 넣지 않았다.) 마티스나 마그리타나 드가의 전시회에 가서 열 시간 동안 그림을 본 사람 있으면 손들어보세요. 나는 그런 적이 없다."(p116) 이보게 작가 양반, 나도 물론 그런 적이 없소.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차라리 그랬으면 좋았을 뻔 했다는 생각을 했소. 왜냐면 그대 책을 읽느라 토요일 하루를 온전히 거덜내며 커피를 사발로 마신데다 그러고도 완독을 못해서 일요일 오전까지 그대의 책과 함께 내가 너덜너덜해졌기 때문이오!! 그림 300점을 보나 그대 책을 이틀에 걸쳐 죽어라 완독하나 어렵기는 매한가지. 왜 적을수록 강력하다고 얘기하면서 이렇게 수다스럽냔 말이오!!

아르고스호의 재난을 그림으로 남긴 제리코, 스물넷에 일기를 쓰기 시작해 사후 누구도 독파할 것을 시도하지 못한 세 권의 두툼한 일기장을 출간한 들라크루아, 프로포즈 하는 편지에다 대고 네가 내 프로포즈를 거절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자리는 얻을 수 없다고 쓴 쿠르베(물론 까임;;), 화가는 과일이나 꽃, 심지어 구름으로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다고 말한 마네(마네의 라일락 꽃다발을 한참 들여다봤다. 화가는 라일락 꽃다발로 무슨 얘기를 하려던걸까? 나 예뻐?), 아름다운 소년 랭보와 그의 연인 베를렌을 그린 팡탱(참고로 이 책의 표지 속 저 소년이 랭보다. 내 마음 속 랭보는 토탈 이클립스 속 디카프리오뿐이었으므로 기분이 이상해졌다), 300 프랑에 자기 그림을 사간 중개상이 7,500 프랑에 그림을 파는 것을 보고도 꿈쩍 안한 세잔, 여성 모델들에게 관대했는지 관대하지 않았는지 여전히 아리송한 드가, 깊은 화합이 주는 기쁨을 알아 전적으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던 르동(여러분 화가들 중에서도 애처가가 있었답니다!), 필요 이상의 감수성 때문에 좋아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좋아한 보나르(그는 아내 마르트가 들어가는 그림을 385점이나 그렸다;;), 줄리언 반스가 좋아하는 그림 탑 10에 들어가는 <비질하는 여자>를 그린 이십대의 뷔야르(줄리언 반스는 노년에 그린 그림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틀렸다), 그 밖으로도 발로통, 브라크, 마그리트, 올든버그, 프로이트, 호지킨의 작품들에 대한 다양한 얘기가 설명되어 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내내 화가의 사생활에만 관심을 가졌는데 줄리언 반스가 환원주의식 접근을 하지 말라고! 대쪽같이 나를 질타해도 그것 말고는 재밌는 게 없었다. "그림들을 이야기로, 대화로, 가정사를 말해주는 자서전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구성과 미학보다는 그림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찾게 되고, 이는 화가에 대한 작지만 중대한 배신이다."(p243)라고 못이 박히게 들어도 돌아서면 또 사생활. 구성과 미학은 너무 어렵단 말이다. 차라리 그림의 주제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편이 독자인 내게는 더 편하단 말이다. 아, 어쩌란 말이오!!!

"이런 미술 에세이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반스뿐이다" 라고 소개하는 책, 내가 미술 에세이를 몇 권 읽어본 게 없긴 하지만 진실로 이런 미술 에세이는 처음이긴 했다. 요리 관련 에세이로 먼저 만나 쉽게 봤던 게 문제였던게지. 화가의 흥미진진한 사생활로 작품의 속내를 들려주곤 했던 여타의 에세이와 달리 전문적이고 지적이고 현학적인 얘기들이 넘쳐난다. 그렇다고 사생활 얘기가 없다는 건 아니지만. 보다시피 독자인 나는 온통 사생활로만 작가를 엮어놨다. 내 머리에는 온통 그런 것만 남는다;;; 17명의 화가들이 "미술이 어떻게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를 거쳐 모더니즘에 이르렀는가"(p18)를 이야기하며 자신의 작품을 소개한다. 인생과 작품에 대해 할 얘기가 많았던 작가도 있고 적었던 작가도 있지만 어찌됐든 분량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 그들의 얘기를 대변하는 것이 줄리언 반스이기 때문이다. 옥스퍼드 영문사전 증보판 편찬에도 참여했던 작가의 머릿속 낙낙하고 뾰족한 단어들은 언제든 종이 위에서 존재감을 과시할 준비를 하고 있다. 독자는 펼치기만 하면 된다. 마음의 준비를 좀 하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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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러브 소설Q
조우리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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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를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다. H.O.T 팬과 젝키 팬이 복도에서 머리채를 쥐어뜯으며 싸우고 그 소식에 우르르 몰려나가 싸움 구경을 하던 우리들. 뭣 때문에 싸웠는지 누가 이겼는지는 기억에 없어도 어떡해어떡해 친구들과 어깨를 부대끼며 오두방정을 떤 기억은 뚜렷하다. 누군가는 춤을 추고 누군가는 노래를 부르고 또 누군가는 팬픽을 출력해왔더랬지. 깨알 같은 글씨는 지금이라면 돋보기를 들이대야 할만큼 작았지만 생생하게 건강했던 그때의 눈은 무리없이 소화를 했다. 친구들과 돌려읽었던 순정만화가 유치하게 느껴질만큼 소년들의 사랑을 절절하게 녹여냈던 그 시절의 필력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아이돌 사랑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때는 없었어도 흥 많은 친구들을 엿보며 느꼈던 그때의 쏠쏠한 즐거움은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핑클이, H.O.T와 젝스키스가 재결합해 펼쳐보이는 무대에 눈물 쏟는건 내가 그들의 팬이어서가 아니라 (핑클에 대한 기억은 노래방 뿐인 나인데도 눈물 줄줄) 지나간 시절의 향수 때문이었음을, 돌이켜 보고 싶은 건 그들의 무대가 아니라 그때의 우리였음을 가수들이 알면 배신감 느끼려나?

조우리 작가의 라스트 러브는 해체를 앞두고 콘서트를 연 여자 아이돌 제로캐럿과 그들의 팬 파인캐럿이 작성한 일곱 편의 팬픽을 교차시킨 굉장히 새로운 스타일의 소설이다. 책의 속지부터가 독특한데 무지개 케이크 같은 아래, 위, 옆면이 어찌나 예쁘던지. 책소개를 꼼꼼히 읽은 독자는 이 무지개색 속편들이 팬픽이겠군 미루어 짐작했을테지만 책소개는 어줍잖게 훑고 곧장 본편으로 들어갔던 나는 사실 초반엔 무슨 책이 이렇게 앞뒤 연결이 안되냐며 머리 굴리느라 애를 좀 먹었다.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는데서 퍼즐처럼 글을 짜맞추고 있었으니 이 한심한 독자야 쯧쯧. 팬픽을 팬픽으로 보지 않고 아이돌 제로캐럿의 과거로 해석한 나는 얘네는 같이 학교 다니고 같이 편의점 알바하고 육상선수하고 과외선생하고 제자하다가 어떻게 다 같이 아이돌이 됐냐며 암만 소설이라도 넘 작위적이다 했더랬다. 게다가 같은 팀 멤버끼리 서로서로 좋아하고 삼각관계 사각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니 이게 아무리 소설이라도 가능한 이야기냐고 의구심도 가졌다. 아차, 팬픽!! 하고 깨닫고 났을 때는 이미 머리 아픈 채로 페이지를 절반쯤 넘기고 난 후였으니 머리 나쁜 독자를 작가님이 코 앞에서 보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후로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쭉쭉. 연예인치고도 생명이 짧은 여자 아이돌들이 느끼는 인기에 대한 비애, 재능에 대한 박탈감, 미래에 대한 불안, 팬들에 대한 두려움을 염려하며 읽었고 내일이면 그들을 잃게 될 팬들을 걱정하면서 읽었다. 진지하게 의미를 탐구하기 보다 무대 위의 누군가를 사랑했던 우리들의 그때, 어쩌면 우리들의 지금, 사랑받는 여기를 기억하며 읽으면 좋을 소설집이다.

**리뷰 쓰다 생각난건데다 나는 여자 동성애 소설에 아무 거부감이 없는가 보다. 처음 읽는 건데 어쩜 의식을 1도 안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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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사람들 - Novel Engine POP
무레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영상출판미디어(주)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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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태어난 동네에서 쭈욱 살고 있는 마흔살의 마사미. 중학생 때부터 독립의 꿈을 꾸었으나 대학도 통학, 회사도 집에서 출퇴근 중이다. 결혼이라도 했으면 집을 떠날 수 있었을텐데 그마저 때를 놓치며 내내 부모님과 살고 있다. 어느 학교 시험 치니? 어느 대학 가니? 어느 회사에 취직했니? 애인은 있니? 결혼은 언제쯤 하는데? 마주칠 때마다 듣게 되는 동네 사람들의 입찬 소리와 한심해하는 시선에서 언제쯤 벗어날까 궁금했는데 마흔이 되니 도리어 효녀라고 엄지를 추켜세운다. 아버지뻘 남자와의 재취까지 주선하던 옆집 야마카와씨는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굳이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다며 이제는 되려 결혼을 말리는 시늉까지 한다. 남편도 아이도 없이 혼자 사는 그녀, 설마 마사미를 간병대기요원으로 상시복무시키려는 것은 아닐까? 의심의 촉을 세우며 오늘도 독립의 꿈을 꾸는 마사미, 그녀가 이웃했던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40년 넘게 살고 있는 동네. 구석구석 구구절절 쌓인 이웃사촌 이야기가 자그마치 여덞 보따리다. 온동네 소문을 몰고 다니는 소식통 야마카와씨와 엄마들 치맛바람에 하마터면 사귈 뻔한 사각 얼굴의 초등 동창생 오사무, 애들한테도 시비를 거는 호통쟁이 긴지로와 카레집을 하는 인도 대가족 쿠마루씨네, 사기 맞을 것이 걱정되어 이웃과 연을 끊은 센다씨와 더워서 아기를 안아줄 수 없다며 밤낮으로 애를 울리는 새댁, 효로롱교를 전도하려고 마사미를 쫓아다니는 세토씨와 애처가 센도씨네 부부까지. 쉰이 넘어 스테파니라는 이름의 여자와 바람난 아빠나 그 앞에서 어딘지 의기양양한 엄마의 이야기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헷갈렸지만 특별한 일 없이도 바람잘 날 없이 시끄러운 작은 동네의 소란스러움과 자매 같이 다정한 마사미 엄마와 야마카와씨의 활기찬 일상이 부러웠다.

책을 읽다 기억난건데 어릴 적 나는 열쇠를 안가지고 다녔다. 집에 문이 잠겨있으면 아랫집에 가서 "아줌마, 우리 엄마 어디갔는데요?" 하고 물었다. 쪽지를 남기는 일 없이, 당연히 휴대폰도 없었으므로, 엄마는 주인 아줌마한테 열쇠를 맞기거나 아줌마가 없으면 옆집 새댁이 이모한테 열쇠를 맞기고 목적지를 알렸다. 저녁 늦게 들어올 요량이면 밥까지 부탁하는 때도 있었는데 나나 동생이나 별 눈치도 안보고 밥도 잘 먹었다. 개 짖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엉덩이를 붙였다 뗐다 마루에 서서 담벼락을 넘어다 보고는 엄마~ 하고 나간 기억이 난다. 요즘이야 다 번호키니 굳이 열쇠 맞길 일도 없다지만 어른 없다고 애 좀 봐달라고 했으면 부담스러 양손을 내저였을텐데.  그땐 참 마음이 너른 시대였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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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고 차가운 오늘의 젊은 작가 2
오현종 지음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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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장 마루로 나가 낡은 김치냉장고의 문을 열었다. 신 김치 냄새가 나는 플라스틱 통의 뚜껑을 열자, 고무줄로 묶인 만 원짜리 지폐 다발부터 100원짜리 동전까지 적잖은 돈이 플라스틱 통을 채우고 있었다. 죽은 여자가 엎드려 절하는 신이 돈이었다니, 여자는 신을 김치 통에 넣고 경배한 셈이었다." (p21)

"뭐하러 똥통에 돈을 갖다 바쳐! 그런 대학에 가라고 널 공부시킨 게 아니야. 넌 어려서 아무 것도 몰라. 그런데 가면 넌 영원히 낙오되는 거야. 따가라려야 죽어도 따라갈 수 없어. 죽었다 깨나도 안 돼. 대통령 자식이라도 대학이 삼류면 평새 삼류 꼬리표 달고 사는 줄 왜 몰라."(p33)

돈을 김치통에 넣고 경배하는 민신혜의 엄마. 아들을 일류대에 보내기 위해 재수시키는 강지용의 엄마. 신혜와 지용의 만남으로 정면충돌하는 것은 그들 악들이 아니었다. 충돌하는 것은 그들의 자식들이었다. 민신혜는 엄마를 죽이고파 남자친구를 사주했고 강지용은 진짜로 죽이고 싶은 엄마는 살려둔 채 여자친구의 엄마를 죽인 후 미국으로 잠적한다. 경찰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서로의 접점을 남기지 않은 채로, 훗날이래봐야 서너달쯤 뒤 다시 만나 사랑하할 것을 약속하며 그들은 이별한다.

사랑을 의심한 적도 사랑을 배신당할거라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신혜가 사라졌다. 일상을 남기던 페이스북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시도한 공준전화 너머에서, 죽은 여자가 팽겨쳐졌던 낡은 집에서, 입학했다는 대학에서, 신혜는 보험금만 챙긴 채 사라지고 없었다. 지켜야한다던 의붓 동생은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고 엄마의 손에 끌려 성매매를 했다는 호소는 이제서야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의 깃발을 휘두른다. 지용은 신혜를 찾아나선다. 돈이 있으니 불법적인 방법도 서슴치 않는다. 신혜는 한국에 있지 않았다. 하물며 혼자도 아니었다. 지용이 신혜의 목을 감싼다. 한때는 달았고 한때는 부드러웠던 신혜의 몸, 지용은 손아귀에 더욱 힘을 준다.

악을 없앨 방법은 악밖에 없을까? 그럼 이제 새로이 태어난 이 두 악은 또 누가 또 무슨 수로 없앨 수 있을까. 스무살의 청춘을 장밋빛이 아닌 핏빛으로 물들여버린 아이들의 어리석음은 써억 내 취향은 아니었다. 궁지에 내몰린 마음을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지만 설득력도 감화도 부족해서 얇은 책임에도 힘겹게 읽었음을 고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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