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안 맞네 그럼, 안 할래
무레 요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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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을 훌쩍 넘긴 무레 요코씨의 다사다난한 솔로 라이프를 만났다.

나랑 안 맞네 그럼 안 할래.

간편한 온라인 쇼핑을 즐겼지만 사람 택배와 고양이 택배가 허구헌 날 배송사고를 일으킨다.

짐이 무겁고 버거웠지만 상담원과 통화한 후 단번에 탈퇴를 결심하고 에라 떼려친다.

어지간하면 손수 장을 보게 되니 상자 처리하는 수고가 덜어 스트레스가 줄었단다.

화장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예민한 피부에 맞는 화장품이 거의 없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보이는 5 미리 두께의 아이라인은 "나 열심히 눈 커보이게 했어요옷" 같은 느낌이라 거부한다.

예뻐지고 싶은 욕구가 왜 없겠냐만은 피부 트러블 없이 사는 삶이 훨씬 기호에 맞다.

휴대폰도 없고 SNS도 하지 않는다.

휴대폰을 어떻게 매번 갖고 다니는지 신기하고 SNS에 심취한 사람은 안전불감증 같이 느껴진다.

한 때는 커피 귀신이었지만 카페인에 예민해진 지금은 카페인리스만 찾는다.

작은 키라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보이느 하이힐이 싫다.

포인트 카드를 만들라고 영업이 들어오면 다음부턴 그 가게에 안간다.

꾸준히 써왔지만 값이 오른 수첩에 실망해 대체품을 찾기 위해 발품을 판다.

한밤중 연락온 동료의 술주정을 한 시간 반이나 들어주었다.

"나, 너무 민폐 끼치고 있지?/ 응. 완전 민폐." 라고 대답한 이후 밤이면 전화선을 빼놓고 잔다.

원하는 삶을 위해서는 결혼도 자식도 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엔 망설임 없이 독신을 선택했다.

무레 요코의 나 이런 사람이요 하는 이야기 앞에 왜 내 가슴이 다 후련해질까?

누군가는 안하고 싶은 일, 싫은 일이 왜 이렇게 많냐며 흰눈을 뜰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무레 요코의 좋고 싫음에 대한 단단한 취향이 무지 마음에 들더라.

남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요 오히려 혼자서도 참 잘 살 사람,

이래서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었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팍팍 들었던 것이다.

싫어하는 거 별로 없어, 대충 아무거나, 네 취향대로, 난 상관없는데

무언가를 선택할 때면 습관처럼 뱉었던 이 말은 상대에 대한 배려기도 했지만

내가 그만큼 내 기호를 모르고 내 취향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내가 뭘 좋아하고 내가 뭘 싫어하는지 채에 거른 듯 섬세하게 파악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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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치 오브 넘 - 맛있게 한입, 냠.냠.냠!
케이트 앨린슨.케이 페더스톤 지음, 김진희 옮김, 유민주 감수 / 북레시피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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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훈 셰프가 나온 방송을 본 적이 있다. 하루종일 주방에 서서 손님들의 식사를 책임지던 그가 퇴근 후엔 반조리 식품을 데워 앉지도 않은 채 배를 채웠다. 게스트로 앉아 있던 연예인들이 안타까워 한숨을 쉬었는데 나는 반대로 흡족하게 웃으며 티비를 시청했다. '저봐, 전문 요리사도 피곤하니까 아무거나 집어먹잖아. 괜찮아 괜찮아 나만 이렇게 사는 것도 아니고 까짓 되는대로 편하게 먹고 살자.' 요리하는 것도 치우는 것도 버겁던 때라 셰프의 나쁜 식습관에 위안받고 내 게으름을 정당화했던 것 같다. 알고 보면 셰프는 그날 딱 하루 그런 식사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인데 말이다. 반조리 음식의 반격은 티나지 않게 차츰차츰 진행이 되었는데 한 계절이 지나고 나면 배와 허벅지로 두둑히 붙은 살에 지난 철의 옷이 들어가지를 않았다. 다이어트를 해야지 결심했던 날은 셀 수가 없고 매우 빠른 포기로 우울했던 날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요리사 케이트 앨린슨과 케이 페더스톤도 처음엔 나와 똑같았다. 긴 교대근무의 스트레스와 바쁘다는 핑계로 덥석덥석 아무 생각없이 몸에 좋지도 않은 음식을 집어먹었다. 손쓸 수 없이 몸이 불어났을 때 이들은 동네 체중 감량 센터에 가입을 한다. 다이어트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운동만으로 살을 빼는 건 거의 불가능이라 음식조절을 해야했는데 요리사의 입을 만족시키는 다이어트 음식이 없었다. 결국 두 요리사는 체중 감량에 도움이 되는 레시피들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제일 처음 만들었던 치즈케이크로 속을 채운 딸기를 비롯해 이후 초간단 치킨 커리, 레인보우 쿠스쿠스, 콜드 아시안 누들 샐러드 등을 만들어 인터넷에 공유한다. 수많은 다이어터가 이들 레시피에 열광했는데 6개월만에 방문자가 6만을 넘은 것이 그 증거다. 이 책 또한 영국에서 출간됐을 당시 3일 만에 20만 부가 판매됐다. 6개월 연속 종합 베스트셀러 1위였다면 말 다했지. 담백하고 맛있지만 체중을 불리지 않는 건강한 음식들, 더하여 피곤에 지쳐 돌아온 저녁에도 조리기구 앞에 설 용기를 주는 간편한 레시피들이 가득한 책이다. 한식에만 적합한 내 냉장고의 부족함으로 당장에 해먹을 수 있는 요리들은 많지 않았지만 부족한 솜씨나마 새요리 새맛을 탐구할 의욕을 가지게 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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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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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지구에 남는 이유는 단 한 사람으로 충분했을 거야." (p53)

데이지의 마을에선 성인식을 치른 아이들이 순례를 떠난다. 시초지라 불리는 미지의 곳, 그러나 순례자가 된 그들 모두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다. 데이지는 의심한다. 어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을까? 혹시 시초지에서 위험한 일을 겪은 것은 아닐까? 시초지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 어른들의 눈을 피해 데이지는 금서들을 모아둔 도서관에 접근하게 되고 릴리와 올리브에 얽힌 마을의 역사를 알게 된다. 삶을 증오하며 존재의 가치를 의심했던 여자 릴리가 만든 유토피아, 흠을 갖고 태어났지만 태어날 가치가 없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으며 불완전하고 적대적이고 차별적인 세계에 남기로 한 여자 올리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세계에 맞서는 다른 방향의 인생 이야기가 그렇게 낭만적일 수가 없었다.

2. 스펙트럼

"할머니는 무력하고 유약한 이방인이었기에 환대받을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고작해야 그들의 어린 개체만 한 몸집에 그들을 해칠 만한 어떤 힘도 무기도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다시 만날 때는, 우리는 더는 유약한 이방인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도구를 가져갈 것이다. 그들에 관한 정보를 눈으로 확인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말을 분석하고 그들의 문자를 분석할 것이다. 루이와 할머니의 관계는 재현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p94-95)

우주 미아가 된 희진.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을 때에 외계 행성에서 조우한 생명체 루이를 만나 목숨을 건진다. 사람의 것과 유사하지만 사람이라곤 할 수 없는 몸, 5년을 채우지 못하고 사망한 후 환생하는 루이의 존재, 들리지 않고 볼 수 없는 말과 글은 미지의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두 생명체가 나누는 관계가 아름답다. 지구로 돌아온 후 외계인의 발견을 주장하면서도 끝끝내 행성의 위치만은 알려주지 않았던 희진, 그로 인해 얻게 된 불명예에도 불구하고 희진은 후회가 없다.

3. 공생가설

굉장한 상상력이다. "인간을 비인간동물과 구분하는 명백한 특질들이 사실은 인간 밖에서 온 것이라면?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실은 외계성이라면?"(p129) 일곱살 이후로 어린 시절의 기억 대부분을 잊어버리는 유년기 기억상실을 작가는 해마의 발달이 아닌 어린이의 뇌를 숙주로 삼은(이렇게 표현하니 좀 무서운가 싶지만) 도덕적이고 선량한 외계 생명체로 설명한다. 한 외로운 아이의 뇌 속에 남아 영원히 곁을 지켜주었던 그들의 존재에 울음이 터졌던 건 나뿐일까?

4.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게 아닌가." (p182)

눈부신 과학발전이 낳은 이별. 헤어져도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있다는 말조차 낭만이 되어 버린 시대를 상상해 본다. 과학자 안나는 냉동수면기술을 개발하느라 남편과 아들을 먼저 슬렌포니아 행성으로 떠나보낸다. 일이 마무리되면 가족을 쫓아가리라 결심했지만 우주웜홀이 발견되자 정부는 슬렌포니아로 떠나는 우주선을 정지시킨다. 효율성이 없다는 것이다. 가족을 잊을 수 없었던 그녀는 자신이 개발한 냉동수면기술로 잠들었다 깨어나기를 백년도 넘게 반복하며 우주선의 운행을 기다리고 있다. 빛의 속도로도 도달할 수 없는 머나먼 행성. 안나의 셔틀로는 슬렌포니아 행성의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할테지만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는 그녀의 여정은 두려움이 없었고 독자는 불가능을 응원하며 또다시 울게 된다. (SF 읽으며 감수성 대폭발 중ㅠㅠㅠㅠ)

5. 감정의 물성

우울이라는 감정을 실재하는 물건으로 소유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시선을 돌려도 사라지지 않고 조약돌 같은 모양새로 주물주물 만질 수 있고 깨끗히 닦아 서랍 위에 정열하고 향을 맡거나 버릴 수도 있는 조형화된 감정들. 처음엔 행복, 기쁨, 희망뿐 아니라 슬픔이나 우울까지도 구매하는 소비자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지금 읽는 이 책도 숱한 감정들이 물성화된 존재인데 말이다. 우울에 빠져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에 이르러서도 우울의 물성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쓰다듬고 매만지려 하는 보현의 마음은 여전히 알 듯 말 듯 이지만 이 단편이 그냥 좋았다.

6. 관내분실

결혼과 임신, 출산과 양육 속에 정체성을 잃어린 엄마를 이해해가는 한 딸의 여정이다. 마인드, 인덱스, 죽은 인간의 기억을 저장하는 보관소라는 설정은 독특한데 그 시대를 살아가는 모녀의 삶은 독특하지 않은 게 아이러니랄까. SF를 배경으로 한 82년생 김지영 같았다.

7.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우주로 떠나기 직전에 바다로 헤엄쳐 달아나버린 우주비행사 최재경. 영웅에게 쏟아지는 비판의 정당성과는 별개로 재경을 보고 우주인이 되기로 결심한 가윤은 최재경을 이해하고 옹호하고 싶다. "가윤은 사실 재경 이모가 정말로 많은 것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재경은 분명히 우주 영웅이었다. 재경은 세계를 돌아다녔고, 여러 번의 우주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재경은 수많은 소녀들의 삶을 바꾸었을지도 모른다. 최후에 다른 선택을 했다고 해서 재경이 바꾸었던 숱한 삶의 경로들이 되돌려지는 것은 아니다."(p312) 많은 독자들처럼 나도 읽는 내내 우주연 이소연씨를 생각했다. 이소연씨가 일본을 두고 벌인 행보만 아니었다면 최재경을 이해하듯 그녀 또한 이해하고 응원했을텐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좋아하는 작가가 생겼다고 자랑한다. 김초엽. "기다리는 줄도 모르면서 김초엽을 기다려왔던 것만 같다"는 정세랑 작가의 추천사처럼 김초엽을 만나기 위해 취향이 아닐 것을 각오하며 그간 한국 SF를 읽어왔던가 보다. 19년에 만난 여러 책들 중에서 손꼽게 좋았던 책, 두 번을 읽어도 새롭게 마음이 들고 일어나는 책,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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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 - 2018년 공쿠르상 수상작
니콜라 마티외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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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토니는 열다섯 살 여름을 지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시작되어야 했다." (p36)

1992년 7월. 몰락한 공업 도시 에일랑주. 생기없는 도시를 헤엄치는 소년들이 있습니다. "젠장, 존나 우울해", "씨발 진짜 이제 뭐 하지?", "뭐든 해야지"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의 처음은 항상 이런 식입니다. 숨 막히는 더위도 질색이지만 사지육신을 옥죄는 심심함은 완전히 지옥 같습니다. 피는 끓는데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거. 그것만큼 뭣 같은 일이 또 있을까요. 소년들은 에일랑주라는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 같습니다. 탈옥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실은 용기가 없습니다. 보트를 훔치고 마리화나를 피우고 방화를 저지르고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도로를 점령하고 총을 들고 또래 아이를 협박할 수는 있어도 다만 용기가 없는겁니다. 나고 자란 도시를 떠날 용기 말입니다. 막연히, 언젠가, 어른이 되면 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연히, 언젠가, 어른이 되었을 때 꼭 맞는 용기가 생겨날까요? 이 책은 집회서 44장 9절처럼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고 존재한 적 없었던 듯 사라져버린, 태어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되었으며 그뒤를 이은 자녀들도 마찬가지였던" 에일랑주 소년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누드비치에 숨어 들어가 여자의 알몸을 훔쳐보겠다는 계획은 실패했지만 앙토니와 사촌은 스테파니라는 소녀를 만나 파티에 초대받는 기회를 얻습니다. 보들보들한 피부, 주근깨와 허벅지의 솜털까지 예쁜 소녀에게 반한 앙토니는 몰래 아버지의 오토바이를 타고 그녀와 친구들이 말한 파티를 방문합니다. 일종의 집착증 및 결벽증이 있는 아버지에게 들키는 날이면 감당할 수 없는 폭행을 당할 줄 알면서도 스테파니와의 첫키스, 어쩌면 그 이상을 생각할 때, 앙토니는 유혹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충분히 예견된 바 앙토니의 욕망은 처참하게 몰락합니다. 스테파니와는 어떤 결실도 이루지 못했고 소위 잘나가는 아이들 사이에서 잔뜩 기죽은 채 맛본 약물에 앙토니는 정신줄을 놔버립니다. 제 몸도 못가눌 상태가 되어 깨어났을 땐 이미 야마하 YZ가 깜쪽같이 사라진 후. 아버지의 폭력이 두려운 엄마의 노이로제를 감당하며 사촌과 함께 오토바이를 찾아 해맨 나날들을 배신하듯 야마하 YZ는 앙토니의 집 앞에서 불타는 중입니다. 이후로는 추락 추락 또다시 추락하는 나날입니다. 오토바이 한 대로는 짐작할 수 없는 여파가 앙토니의 삶에 몰아닥치거든요.

오토바이가 실종됐던 1992년, 그로부터 2년 후인 1994년, 다시 1996년, 마지막으로 1998년까지 2년씩 껑쭝껑쭝 뛰어 넘는 시간 속에 십대에서 이십대로 성장하는 소년들 앙토니와 사촌 그리고 아랍계 이민자인 하신의 이야기로 메말라버린 이국의 청춘을 엿봅니다. 태어난 울타리에 매여 옴짝달짝 할 수 없었던 그들의 사랑과 실패, 좌절과 분노, 증오와 환멸이 페이지마다 비명처럼 들려와 읽는 도중에는 도무지 손을 뗄 수가 없는 책이었습니다. 앞서의 모든 감정을 망각하고 순응하며 이십대가 된 앙토니가 책의 말미에 맥주를 땁니다. 무모한 시절 그의 손에 들렸던 마리화나 대신에 빚을 늘려가며 주문한 티비의 리모콘을 쥐고 조국의 축구 선수를 응원하며 내일 있을 출근의 괴로움을 잊으려 애쓰는 모습. 용기는 커녕 생에 대한 열정으로 불뚝거리던 에너지마저 고갈된 앙토니의 밤이 저와 다름없어 서글프고 우울해졌지만 프랑스 작가라서, 공쿠르 상 수상작이니까, 좀 지루할지도 모르겠다던 제 예측만큼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엄청 재밌고 굉장히 생생하고 씁쓸하게 공감하는 한여름 뙤약볕 같이 뜨거운 소설, 추천을 백번쯤 날려도 아깝지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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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에 갇힌 소년 에프 영 어덜트 컬렉션
로이스 로리 지음, 최지현 옮김 / F(에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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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기버 : 기억 전달자>의 원작 소설을 쓴 작가 로이스 로리의 책입니다. 영화로 한 번, 책으로 한 번, 공평하게 만난 작가의 이번 소설은 1908년에서 1911년까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합니다. 영화 속 "전쟁, 차별, 가난, 고통 없이 모두가 행복한 시스템 커뮤니티" 와는 시대와 장르가 완전히 달라서 이 책의 미국은 1차 세계대전을 앞두고 있고요. 가난과 차별이 흐르고 넘쳐 열 다섯, 열 여섯난 아들딸들이 남의 집 일꾼이나 식모로 가는 일이 흔합니다. 입 하나 더는 게 큰일이었던, 그런 시절이 미국에도 있었더군요.

8살 캐티의 집에도 엄마의 일을 도와주러 온 수줍고 상냥한 가정부 페기가 있습니다. 아빠의 손수건을 아껴 다림질 하고 가장자리에 금빛이 도는 엄마의 크림색 주전자를 따로 설거지하며 행복해하는 페기가 캐티는 정말이지 좋습니다. 폐기의 언니 넬은 동생보다 먼저 집을 나와 캐티의 옆집 비숍씨 집에서 가정부 일을 합니다. 풍성한 머리카락이 아름답고 꿈꾸는 표정이 사랑스러운 아가씨지만 허영이 심하고 요란스러울만큼 에너지가 넘치는 성격은 캐티의 눈에도 좀 걱정스럽습니다. 넬이 비숍씨의 아들 폴에게 키스를 받으며 동시에 비웃음을 당할 때는 어쩐지 화도 나는데 눈에 보이는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폴의 비열함을 무의식 중에 느껴서인 것 같습니다. 폴과 넬이 더는 가까워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어른들의 사정을 캐티는 다 알 수가 없으니까요. 페기에게는 제이콥 스톨츠라는 남동생도 있습니다. 이 아이야말로 캐티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꾼, 영원히 잊지 못할 소년입니다. 제이콥이 자폐아라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이콥이 자신의 이야기를 아주 잘 들어주고 또 아주 잘 이해하고 있으며 단지 이를 표현하지 않을 뿐이라는 걸 캐티는 압니다. 둘은, 캐티 생각일 뿐이지만, 아주 진지한 친구 사이인 게 틀림없습니다. 캐티의 생일날 제이콥이 선물한 고양이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지요.

어리고 미숙하고 순수하고 똑부러지는 화자 캐티의 눈으로 본 페기와 넬, 제이콥의 이야기가 충격적인 결말에도 불구하고 눈물나게 평화롭고 따뜻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화자가 캐티가 아닌 넬이었다면 이야기의 양상은 상당히 달랐을 겁니다. 빈부와 계급을 나누고 여성이 약자가 되는 사회적 경계 속에 긴장감은 말할 수 없이 거대하고 뾰족했겠지요. 하지만 캐티는 고작해야 8살, 아이의 눈으로 본 세상과 사람은 동그랗고 원만합니다. 넬이 떠나고 캐티가 젖은 사료 자루를 보며 울고 제이콥이 치료소에 갇히던 때에 소년이 삼킨 침묵, 침묵 속의 진실이 뭐였는지는 비밀로 남겨두겠습니다. 제이콥을 대신해 목소리를 낸 캐티는 로이스 로리 작가의 어머니와 이름이 같습니다. 이 소설은 낡은 작업복을 입고 푹 눌러쓴 모자 아래 어딘지 억울하고 비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 소년의 사진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작가의 상상력 앞에 속수무책일 수 있는 독자는 얼마나 행복한 것이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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