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지구에 남는 이유는 단 한 사람으로 충분했을 거야." (p53)
데이지의 마을에선 성인식을 치른 아이들이 순례를 떠난다. 시초지라 불리는 미지의 곳, 그러나 순례자가 된 그들 모두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다. 데이지는 의심한다. 어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을까? 혹시 시초지에서 위험한 일을 겪은 것은 아닐까? 시초지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 어른들의 눈을 피해 데이지는 금서들을 모아둔 도서관에 접근하게 되고 릴리와 올리브에 얽힌 마을의 역사를 알게 된다. 삶을 증오하며 존재의 가치를 의심했던 여자 릴리가 만든 유토피아, 흠을 갖고 태어났지만 태어날 가치가 없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으며 불완전하고 적대적이고 차별적인 세계에 남기로 한 여자 올리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세계에 맞서는 다른 방향의 인생 이야기가 그렇게 낭만적일 수가 없었다.
2. 스펙트럼
"할머니는 무력하고 유약한 이방인이었기에 환대받을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고작해야 그들의 어린 개체만 한 몸집에 그들을 해칠 만한 어떤 힘도 무기도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다시 만날 때는, 우리는 더는 유약한 이방인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도구를 가져갈 것이다. 그들에 관한 정보를 눈으로 확인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말을 분석하고 그들의 문자를 분석할 것이다. 루이와 할머니의 관계는 재현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p94-95)
우주 미아가 된 희진. 꼼짝없이 죽겠구나 싶을 때에 외계 행성에서 조우한 생명체 루이를 만나 목숨을 건진다. 사람의 것과 유사하지만 사람이라곤 할 수 없는 몸, 5년을 채우지 못하고 사망한 후 환생하는 루이의 존재, 들리지 않고 볼 수 없는 말과 글은 미지의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두 생명체가 나누는 관계가 아름답다. 지구로 돌아온 후 외계인의 발견을 주장하면서도 끝끝내 행성의 위치만은 알려주지 않았던 희진, 그로 인해 얻게 된 불명예에도 불구하고 희진은 후회가 없다.
3. 공생가설
굉장한 상상력이다. "인간을 비인간동물과 구분하는 명백한 특질들이 사실은 인간 밖에서 온 것이라면?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실은 외계성이라면?"(p129) 일곱살 이후로 어린 시절의 기억 대부분을 잊어버리는 유년기 기억상실을 작가는 해마의 발달이 아닌 어린이의 뇌를 숙주로 삼은(이렇게 표현하니 좀 무서운가 싶지만) 도덕적이고 선량한 외계 생명체로 설명한다. 한 외로운 아이의 뇌 속에 남아 영원히 곁을 지켜주었던 그들의 존재에 울음이 터졌던 건 나뿐일까?
4.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게 아닌가." (p182)
눈부신 과학발전이 낳은 이별. 헤어져도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있다는 말조차 낭만이 되어 버린 시대를 상상해 본다. 과학자 안나는 냉동수면기술을 개발하느라 남편과 아들을 먼저 슬렌포니아 행성으로 떠나보낸다. 일이 마무리되면 가족을 쫓아가리라 결심했지만 우주웜홀이 발견되자 정부는 슬렌포니아로 떠나는 우주선을 정지시킨다. 효율성이 없다는 것이다. 가족을 잊을 수 없었던 그녀는 자신이 개발한 냉동수면기술로 잠들었다 깨어나기를 백년도 넘게 반복하며 우주선의 운행을 기다리고 있다. 빛의 속도로도 도달할 수 없는 머나먼 행성. 안나의 셔틀로는 슬렌포니아 행성의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할테지만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는 그녀의 여정은 두려움이 없었고 독자는 불가능을 응원하며 또다시 울게 된다. (SF 읽으며 감수성 대폭발 중ㅠㅠㅠㅠ)
5. 감정의 물성
우울이라는 감정을 실재하는 물건으로 소유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시선을 돌려도 사라지지 않고 조약돌 같은 모양새로 주물주물 만질 수 있고 깨끗히 닦아 서랍 위에 정열하고 향을 맡거나 버릴 수도 있는 조형화된 감정들. 처음엔 행복, 기쁨, 희망뿐 아니라 슬픔이나 우울까지도 구매하는 소비자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지금 읽는 이 책도 숱한 감정들이 물성화된 존재인데 말이다. 우울에 빠져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에 이르러서도 우울의 물성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쓰다듬고 매만지려 하는 보현의 마음은 여전히 알 듯 말 듯 이지만 이 단편이 그냥 좋았다.
6. 관내분실
결혼과 임신, 출산과 양육 속에 정체성을 잃어린 엄마를 이해해가는 한 딸의 여정이다. 마인드, 인덱스, 죽은 인간의 기억을 저장하는 보관소라는 설정은 독특한데 그 시대를 살아가는 모녀의 삶은 독특하지 않은 게 아이러니랄까. SF를 배경으로 한 82년생 김지영 같았다.
7.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우주로 떠나기 직전에 바다로 헤엄쳐 달아나버린 우주비행사 최재경. 영웅에게 쏟아지는 비판의 정당성과는 별개로 재경을 보고 우주인이 되기로 결심한 가윤은 최재경을 이해하고 옹호하고 싶다. "가윤은 사실 재경 이모가 정말로 많은 것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재경은 분명히 우주 영웅이었다. 재경은 세계를 돌아다녔고, 여러 번의 우주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재경은 수많은 소녀들의 삶을 바꾸었을지도 모른다. 최후에 다른 선택을 했다고 해서 재경이 바꾸었던 숱한 삶의 경로들이 되돌려지는 것은 아니다."(p312) 많은 독자들처럼 나도 읽는 내내 우주연 이소연씨를 생각했다. 이소연씨가 일본을 두고 벌인 행보만 아니었다면 최재경을 이해하듯 그녀 또한 이해하고 응원했을텐데 이제는 그럴 수가 없다.
좋아하는 작가가 생겼다고 자랑한다. 김초엽. "기다리는 줄도 모르면서 김초엽을 기다려왔던 것만 같다"는 정세랑 작가의 추천사처럼 김초엽을 만나기 위해 취향이 아닐 것을 각오하며 그간 한국 SF를 읽어왔던가 보다. 19년에 만난 여러 책들 중에서 손꼽게 좋았던 책, 두 번을 읽어도 새롭게 마음이 들고 일어나는 책, 강력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