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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 - 2018년 공쿠르상 수상작
니콜라 마티외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9월
평점 :
"앙토니는 열다섯 살 여름을 지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시작되어야 했다." (p36)
1992년 7월. 몰락한 공업 도시 에일랑주. 생기없는 도시를 헤엄치는 소년들이 있습니다. "젠장, 존나 우울해", "씨발 진짜 이제 뭐 하지?", "뭐든 해야지"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의 처음은 항상 이런 식입니다. 숨 막히는 더위도 질색이지만 사지육신을 옥죄는 심심함은 완전히 지옥 같습니다. 피는 끓는데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거. 그것만큼 뭣 같은 일이 또 있을까요. 소년들은 에일랑주라는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 같습니다. 탈옥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실은 용기가 없습니다. 보트를 훔치고 마리화나를 피우고 방화를 저지르고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도로를 점령하고 총을 들고 또래 아이를 협박할 수는 있어도 다만 용기가 없는겁니다. 나고 자란 도시를 떠날 용기 말입니다. 막연히, 언젠가, 어른이 되면 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연히, 언젠가, 어른이 되었을 때 꼭 맞는 용기가 생겨날까요? 이 책은 집회서 44장 9절처럼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고 존재한 적 없었던 듯 사라져버린, 태어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되었으며 그뒤를 이은 자녀들도 마찬가지였던" 에일랑주 소년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누드비치에 숨어 들어가 여자의 알몸을 훔쳐보겠다는 계획은 실패했지만 앙토니와 사촌은 스테파니라는 소녀를 만나 파티에 초대받는 기회를 얻습니다. 보들보들한 피부, 주근깨와 허벅지의 솜털까지 예쁜 소녀에게 반한 앙토니는 몰래 아버지의 오토바이를 타고 그녀와 친구들이 말한 파티를 방문합니다. 일종의 집착증 및 결벽증이 있는 아버지에게 들키는 날이면 감당할 수 없는 폭행을 당할 줄 알면서도 스테파니와의 첫키스, 어쩌면 그 이상을 생각할 때, 앙토니는 유혹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충분히 예견된 바 앙토니의 욕망은 처참하게 몰락합니다. 스테파니와는 어떤 결실도 이루지 못했고 소위 잘나가는 아이들 사이에서 잔뜩 기죽은 채 맛본 약물에 앙토니는 정신줄을 놔버립니다. 제 몸도 못가눌 상태가 되어 깨어났을 땐 이미 야마하 YZ가 깜쪽같이 사라진 후. 아버지의 폭력이 두려운 엄마의 노이로제를 감당하며 사촌과 함께 오토바이를 찾아 해맨 나날들을 배신하듯 야마하 YZ는 앙토니의 집 앞에서 불타는 중입니다. 이후로는 추락 추락 또다시 추락하는 나날입니다. 오토바이 한 대로는 짐작할 수 없는 여파가 앙토니의 삶에 몰아닥치거든요.
오토바이가 실종됐던 1992년, 그로부터 2년 후인 1994년, 다시 1996년, 마지막으로 1998년까지 2년씩 껑쭝껑쭝 뛰어 넘는 시간 속에 십대에서 이십대로 성장하는 소년들 앙토니와 사촌 그리고 아랍계 이민자인 하신의 이야기로 메말라버린 이국의 청춘을 엿봅니다. 태어난 울타리에 매여 옴짝달짝 할 수 없었던 그들의 사랑과 실패, 좌절과 분노, 증오와 환멸이 페이지마다 비명처럼 들려와 읽는 도중에는 도무지 손을 뗄 수가 없는 책이었습니다. 앞서의 모든 감정을 망각하고 순응하며 이십대가 된 앙토니가 책의 말미에 맥주를 땁니다. 무모한 시절 그의 손에 들렸던 마리화나 대신에 빚을 늘려가며 주문한 티비의 리모콘을 쥐고 조국의 축구 선수를 응원하며 내일 있을 출근의 괴로움을 잊으려 애쓰는 모습. 용기는 커녕 생에 대한 열정으로 불뚝거리던 에너지마저 고갈된 앙토니의 밤이 저와 다름없어 서글프고 우울해졌지만 프랑스 작가라서, 공쿠르 상 수상작이니까, 좀 지루할지도 모르겠다던 제 예측만큼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엄청 재밌고 굉장히 생생하고 씁쓸하게 공감하는 한여름 뙤약볕 같이 뜨거운 소설, 추천을 백번쯤 날려도 아깝지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