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대 감기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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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교련 시간, 수행 평가로 머리에 붕대감기를 하게 된 세연은 걱정이 태산 같다. 수평 평가 점수가 낮을까봐 걱정이냐고? 아니다. 짝이 없어 수행 평가를 치르지 못할 것이 걱정이다. 여드름을 감추기 위해 바르기 시작한 파운데이션 때문에 문제아로 낙인찍혀 왕따가 됐다. 화장을 하니까 저 애는 걸레일 거라고 아이들이 손가락질 한다. 선생님께 혼도 나고 스스로도 이런 자신이 싫지만 도저히 화장을 포기할 수 없다. 파운데이션이라는 방패 하나를 얹지 않고서는 도무지 거울을 볼 수 없는 병. 학교라는 문을 열고 들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화장을 해야만 하는 세연은 그런 자신과 누가 수행 평가를 치르려고 할까 걱정이 된다. 그때에 다가온 것이 진경이었다. 아름다운 외모, 뛰어난 감수성, 맵시있는 글솜씨, 상냥한 마음가짐, 학교의 마돈나인 소녀 진경이. 당황하고 긴장한 탓에 진경의 머리에 붕대를 한 바퀴 더 감은 세연은 진경의 입에서 악 소리가 나올만큼 붕대를 잡아 당겼고 어쩐 일인지 그 일을 계기로 둘은 친구가 된다. 그러나 대학 문턱을 밟자마자 언제 화장한 소녀에게 돌팔매질 했냐는 듯 화장을 가르치려 들고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에 환멸을 느껴버린 세연과 아름다움으로 끊임없는 연애사를 써가는 진경의 삶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진경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커다란 아파트에서 질곡없는 삶을 살았고 세연은 독신으로 스스로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글로써 고단한 하루를 버텨내는 중이다. 둘은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몰이해, 시기심 사이에서 우정의 줄타기를 하며 다퉜다가 화해했다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한다.

작가정신에서 출간 중인 시리즈 < 소설, 향>의 두번째 소설은 윤이형 작가의 붕대감기이다. 진경와 세연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그밖에도 정말 다양한 여성이 등장한다. 아이의 병간호를 위해 직장을 그만둔 워킹맘 은정은 진경과 같은 유치원 학부모이다. 사교를 노골적인 이해관계라며 회피해왔던 그녀는 뒤늦게 친구를 놓쳐온 삶을 후회한다. 은정이 자주 방문했던 단골 미용실의 디자이너 지현은 불법촬영 편파수사를 규탄하는 집회 참여자이다. 지현은 은정의 아이가 버릇없다는 이유로 트위터에 "유충, 재기해, 죽어, 유병장수" 같은 말로 욕설을 날린 적이 있다. 아름다움을 버리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집회의 동료들과 직업 사이에서 갈등 중이다. 세연은 젊은 여성들의 정치 감각과 목소리에 놀라며 또다시 중심에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 될 것을 겁먹는다. 그들을 지지하며 젊은 세대들과 같은 감각을 느끼려 하지만 그럴수록 주관은 흐트러지고 피로감만 커진다. 진경은 근래 세연이 어울리고 있는 여성들이 기혼자를 두고 이르는 말들을 찾아보고 놀란다. 비혼자인 세연이 기혼자인 자신을 두고 낱낱이 평가하고 있진 않을까 의구심도 느낀다. 모 대학의 교수인 경혜는 서른살도 더 어린 고등학생 채이와 친구가 된다. 그런 채이가 후배 교수에게 추행당한 것을 알고 데자보를 붙이지만 이것이 우정에 기인한 것인지 죄책감을 덜기 위한 것인지 알지 못해 혼란스럽다. 채이의 친구인 형은은 경혜가 대자보를 붙인 것에 분노한다. 자격없는 사람이 고작 데자보 하나 붙인 것으로 투사 취급받는 것이 꼴같잖은거다. 채이는 그런 형은을 설득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며 화를 내더니 또 뭘 하니까 자격이 있니 없니 하는 건 연대가 아니다. 우리 이런 걸로 화내지 말자. 다투지 말자 한다.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피곤하다고 생각했던 나 같은 독자까지도 소설 속 여러 여성들의 목소리에 한 움큼씩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추행범 한 명 빼고는 오로지 여성들만 등장하는 소설 속 여성들의 대립을 엿보는 일에 피곤함도 적지 않았지만 이해라는 것, 연대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붕대 감기 수행 평가의 목적은 응급 상황에 처했을 때 최소한의 처치 정도는 배우도록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 책이 우리 사회의 어떤 갈등 상황을 목격했을 때 상기하고 공감하고 행동하는 감각을 일깨우는 좋은 응급처치 책이 되어주지 않을까 생각하며 추천해 본다.

"너는 가끔 사람들의 눈앞에서 문을 꽝꽝 소리 나게 닫아 버리잖아.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 사람들이 따르지 않기 때문에 말이야. 그럴 때마다 말하고 싶었어. 꼭 그렇께까지 해야 해? 좀 기다려 줄 순 없는 거니? 모두가 애써서 살고 있잖아. 너와 똑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변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삶이 전부 다 잘못된 거야? 너는 그 사람들처럼, 나처럼 될까 봐 두려운 거지. 왜 걱정하는 거니, 너는 자유롭고, 우리처럼 되지 않을 텐데. 너는 너의 삶을 잘 살 거고 나는 너의 삶을 응원할 거고 우린 그저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인데."(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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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트위스트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9
찰스 디킨스 지음, 유수아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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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트위스트, 구빈원에서 태어나 알파벳 순으로 이름을 부여받았다. 지원금을 착복할 목적으로 고아농장을 꾸리는 한 노파의 손에서 9살이 될 때까지 굶주림을 겪고 매질을 당하며 컸다. 9살 때 다시 구빈원으로 불려갔지만 그곳의 사정 또한 다를 바가 없었다. 교구 이사회가 펼치는 정책은 뜻이 분명했다. 구빈원의 고아는 구빈원 안에서 천천히 굶어죽든지 길거리에서 재빨리 굶어죽든지 둘 중 하나니까 잘 먹일 필요가 없다는 것. 너무 배가 고파 죽 좀 더 달라고 말했다가 교수형에 처해질 놈이라는 욕을 듣고 독방에 갇혔던 올리버는 3파운드 10실링에 굴뚝 청소부에게 팔렸다가 다시 장의사의 도제로 되팔린다. 이건 꽤 운 좋은 일이랄 수 있었는데 굴뚝 청소부는 게으른 도제들이 굴뚝 안에서 게으름을 피지 못하게 하겠다며 그 밑에서 불까지 떼는 악마 같은 놈이었던 것이다. 장의사는 사기꾼이라도 사람 죽이는 나쁜 놈은 아니니 양반이랄 수 있었는데 대신에 그곳엔 자선학교 학생인 노아가 있었다. 가난하기는 올리버나 노아나 매한가지지만 노아는 출신이 분명하고 양친이 살아있다는 이유로 기세등등해서 올리버를 지질하게 학대한다. 노아의 괴롭힘에 묵묵히 인내하던 올리버는 어머니를 욕하는 말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결국 장의사의 집을 탈출한다.

런던이 어떤 곳인지를 몰랐던 올리버. 발이 부르터 피가 나도록 걷고 또 걷다가 만난 어린 신사 미꾸라지의 꾐에 넘어가 소매치기 우두머리인 유대인 노인의 집에 발을 디딘다. 원래도 험난했던 올리버의 인생은 그를 만나 더욱 거대한 막장 너울에 파도차기 시작하는데 노인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올리버를 결코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올리버의 착한 성품에 반한 노신사와 숙녀분들이 올리버의 인생을 구제하기 위해 애쓰지만 그때마다 올리버를 납치하거나 올리버를 강도짓에 써먹거나 올리버를 범죄자로 만들어 런던의 하류 인생으로 말아먹겠다는 듯 덤터기를 씌운다. 말로는 올리버에게 다른 소매치기 소년들과 다른 급의 재능이 있다 하는데 기술과 대담성을 겸비한 미꾸라지와 비교하면 마냥 순진한 올리버에게서 도대체 무얼 엿본 건지 알 수 없었다. 유대인 노인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악당 멍크스는 올리버의 과거를 좇아 구빈원까지 찾아가 올리버의 모친이 남긴 증거를 인멸한다. 올리버의 불행 외에는 바라는 게 없다는 멍크스, 그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토록 올리버를 미워하는 것일까. 이렇게 보면 올리버는 불행 밖에 없는 인생을 사는 것 같지만 노신사와 숙녀들이 함께 할 때 봄날 초록의 새싹이 돋아나듯 마음을 치유받고 성장한다. 인생의 비밀이 새롭게 밝혀지는 그날까지 결코 불행에 좌초하지 않으며 아름다운 영혼을 지켜나간다.

희한하다. 어지간한 고전은 그림명작 동화책으로라도 만났는데 올리버 트위스트에 대해서만큼은 기억이 없다. 불쌍한 고아 소년의 대명사처럼 올리버 트위스트라는 이름만을 알았을 뿐 영화도 본 적이 없고 책과도 첫만남이다. 603이라는 대단한 페이지에 일차로 놀라고 올리버의 존재감이 작품 속에서 두드러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차로 놀라며 매일매일 조끔씩 완독했다. 올리버 보다 올리버의 주위에서 노니는 인물들이 주는 흥미로움이 훨씬 큰데 죽을 날을 받아놓고서도 올리버의 행복을 비는 충실한 친구 딕, 심약한 성품으로도 노약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학대하는 교구관 범블, 호주행에 처해진 미꾸라지나 개과천선한 찰리 베이츠 같은 좀도둑들, 올리버를 구하려다 살해 당하는 창녀 낸시, 유대인에 대한 각종 편견을 모조리 뭉뚱그려 놓은 것 같은 좀도둑 대장 페이긴, 낸시의 포주이자 애인인 사익스, 점잖은 채하며 하층민의 영혼을 녹여 부를 쌓는 신사들 등 1830년대 런던 앞뒷골목의 고약한 지린내를 풀풀 풍기는 악당들이야 말로 이 소설의 찐 매력이었다. 명작이 주는 뿌듯함에 더해 리얼 막장 모험 활극으로써 재미 또한 두드러지는 책. 크리스마스 캐럴을 읽으면서도 생각했지만 그 시절 찰스 디킨스가 셰익스피어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다는 말이 가히 과장은 아닐 듯하다. 완연복이며 조지 크룩생크의 24장의 흑백 삽화를 담고 있다. 표지의 명화는 오거스터스 에드윈 멀레디의 <런던 브릿지에서의 쉼>. 하룻동안 32킬로미터를 걷고 건초더미 위에서 잠들었던 올리버의 평화로운 잠과 표지의 별이 총총한 밤이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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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벨리스크의 문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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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권위의 SF 문학상 휴고 상을 3년 연속 수상했다는 부서진 대지 시리즈 제 2편이 출간됐다. 1편 다섯 번째 계절을 잇는 오벨리스크의 문이다. 세계관에 경악하고 인물에 감탄하는 그야말로 내가 원하는 이상향의 판타지!! 어쩜 이렇게까지 재미있을 수가 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출간 텀이 있어서 설정이 기억 안날까봐 걱정했는데 웬걸. 앞부분 읽자마자 다섯 번째 계절의 내용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강렬해 잊을 수가 없었던 거다.

천년이 갈지 만년이 갈지 알 수 없는 다섯 번째 계절(끊임없는 지진, 계속된 겨울, 불가능한 수확, 겨울잠에서 깨지 않는 동물, 예측 불가능의 재난) 앞에서 에쑨은 딸 나쑨을 찾아 고요 대륙을 헤맨다. 아들을 죽이고 딸을 납치한 남편, 그런 자의 다정함을 믿고 결혼을 한 자신이 비루하다. 고작 그런 남자와 결혼을 해 자식을 낳은 에쑨에게 딸 나쑨 또한 분노한다. 폭력적인 아버지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아양을 떠는 것으로 삶을 연장하며 나쑨의 어린 영혼이 조각난다. 지자는 지자대로 로가의 능력을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인내하지만 나쑨을 볼 때마다 폭발하는 증오를 억누를 수 없다. 내 자식이 더러운 로가라니, 죽어 마땅한 것을 내가 살려두고 있다니. 정신을 차려보면 저도 모르는 새 딸의 뺨을 내려치고 있다. 달리는 마차에서 딸을 떠민다. 딸의 목을 조이기 위해 두 손을 내밀고 칼로 나쑨을 찌르려 덤빈다. 로가를 자식으로 둔 모든 부모가 지자 같지는 않다. 지자의 증오심은 도대체 무엇에 기인한걸까?

또한 나쑨은 그런 지자의 손아귀에서도 에쑨을 그리워하지는 않는다. 이건 이상하다. 나쑨을 향한 에쑨의 절절한 모성을 생각하면 나쑨의 차가움은 야속할 지경이다. 펄크럼의 수호자에게 잔인한 교육을 받았던 오로진은 상냥한 교육법을 몰랐다. 자칫 힘이 잘못 발휘되면 일대의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나쑨의 재능을 제어하기 위해 에쑨은 냉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나쑨의 손목을 부러뜨린 것도 같은 이유다. 네가 살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내게 감사할테다. 에쑨은 생각하지만 나쑨은 아니다. '찾은 달'에 이르러서야 진짜 집을 찾게 된 나쑨.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을 만나고 제대로 된 보호를 받으며 손목이 부서지지 않은 채로 교육 받는다. 샤파를 비롯한 세 명의 수호자가 머무는 이 땅에서 나쑨은 어떻게 성장하게 될까? 한때는 자신의 스승이었지만 이제는 원수와 다름없는 샤파와 딸의 이 우연한 만남을 에쑨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길을 잃은 에쑨은 에쑨대로 카스트리마의 정동에서 새삶을 시작한다. 나쑨을 찾아야 하지만 어디에서도 추적 가능한 단서가 나오지 않는 지금으로썬 다른 수가 없다. 그곳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수호자 또한 연인인 알라배스터에게 새로운 교육을 받으며 지글지글 끓고 끊어지고 바스라지고 솟구쳐 오르고 폭발하며 쾅쾅 성내는 대지의 원인도 알게 된다. 달이 없다. 달이 날아갔다. 도대체 왜? 누가? 어떤 이유로 달을 궤도 밖으로 날려버렸나? 엄마와 딸이 각기 다른 방향에서 다른 목적으로 성장하지만 결국 이들은 달로 만날 수 밖에 없는 운명이 예견된다. 1권의 중심이었던 펄크럼의 존재는 희미해지고 오벨리스크와 스톤이터, 그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달의 궤도를 수정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에쑨과 나쑨의 성장이 든든한 뿌리를 내렸다. 3편 완결에서는 죽순처럼 쑥쑥 솟아나는 이들의 결말을 보게 될테지. 부디 모녀의 해후가 얼른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종말의 시대를 종단하는 여정에 호기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 책을 꼭! 반드시! 만나기를 바란다. 판타지를 좋아하는데 아직까지 이 책을 못읽은 독자가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다 아플 정도니까 꼭꼭꼭 읽어보시길. 강추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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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춘부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5
M. C. 비턴 지음, 문은실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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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흐두에 새로운 사람들이 이사왔습니다. 매기 베어든과 앨리슨, 이모와 조카 사이인 이들은 앨리슨이 폐암 수술을 끝낸 후부터 함께 살기 시작합니다. 젊은 시절, 자신을 사랑하는 여러 남자들로부터 차곡차곡 헌납받은 재산들을 모으고 불린 덕에 매기 베어든은 부유한 삶을 누리고 있는데요. 이제와 그녀는 결혼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섭니다. 제비 같은 바텐더에게 흠뻑 빠졌다가 배신을 당한 후 순식간에 살이 찌며 젊음도 아름다움도 잃고 말았던 경험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낳은 게 아닌가 싶어요. 남자와 함께 일 수 있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건 지금뿐이다 라구요. 성형으로 얼굴과 온몸을 수정하며 아름다움을 다소 회복한 매기 베어든은 젊은 시절 그녀에게 구애했던 네 명의 남자를 로흐두의 저택으로 초대합니다. 그리고 숨기지 않고 그들을 유혹에 빠트릴만한 사실 하나를 알려주죠. 나는 결혼을 하고 싶다, 나와 결혼한 남자는 아주 부유해 질 것이다, 그 일은 예비 남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성사될 수도 있는데 내 심장이 매우 약해서 생각만큼 오래 살지 못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라고 암시까지 줍니다.

그 밤 남자들의 관심을 온통 차지하고 앉은 매기를 보며 앨리슨은 분노합니다. 이모가 조용히 죽어버린다면 좋을텐데! 매기가 성형수술을 하고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제 1 상속녀였던 앨리슨은 한 순간에 재산을 잃고 빈털털이로 나앉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잠깁니다. 이모의 자동차, 이모의 집, 이모의 가정부와 사랑에 빠진 앨리슨. 유약하고 가난한 백수 조카의 가슴에서 불이 나는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택을 방문한 모든 남자들에게도 분명한 동기가 있었는데 크리스핀 위더링턴, 제임스 프레임, 스틸 아이언사이드, 지미 앤더슨 모두가 한때는 부유했으나 지금은 빈털털이라는 겁니다. 옛 애인의 연락을 받고 스코틀랜드의 외지 로흐두까지 총알같이 날아온데에는 "돈"이라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용의자가 넘쳐나는 가운데 말할 것도 없이 매기 베어든이 살해 당합니다. 그녀는 차에서 산 채로 불타 죽........ 지는 않고요. 차에 불이 나자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드디어 해미시가 출동한 시간이 된 거지요. 해미시 가랏!

5권에서는 제가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해미시와 프리실라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없습니다. 프리실라에 대한 사랑이 아주, 대단히, 옅어졌기 때문에 해미시는 온전히 수사에만 집중합니다. 반면에 프리실라는 전남친과 함께 방문했던 지난 번에는 거의 일주일이나 지난 후에 해미시를 찾아왔는데 이번 방문에서는 도착한 첫날 해미시를 찾아가요. 그리고 분명하게, 4권에서는 짐작만 했던 그 사실을 피부로 또렷히 깨닫게 됩니다. 어쩜 좋아!! 해미시가 내게 더는 관심이 없어!! 가엾은 프리실라, 이제는 네가 움직여야 해, 자자, 얼른얼른, 독자를 위해 해미시를 충동질 해랏!! 이 커플의 연애 얘기가 옅어지는 5권에서 거의 처음으로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가 추리 소설다운 면모를 보였는데요. 덕분에 시리즈 중 가장 재미있는 편으로 꼽게 될 것 같습니다. 아직 남은 편수가 열 권도 더 넘는 것은 함정입니다만 ㅋㅋㅋ 시간이 지날수록 85년도에 출간된 이 시리즈가 오래동안 사랑받은 이유를 더 잘 알게 되요. 6권 속물의 죽음도 얼른 만나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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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
루이스 알베르토 우레아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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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아홉 둔 소 길마 벗을 날 없고 가지 많은 나무에는 바람 잘 날이 없다고들 하잖아요. 빅 엔젤이 우리나라의 이 속담들을 들었으면 무릎을 쳤을 거에요. 빅 엔젤의 생이야 말로 철들 적부터 가족을 위해 뼈가 삭도록 노동하는 삶이었거든요. 내 가지를 이고 지다 못해 남의 나무 가지들까지 떠받친 바람 잘 날 없는 인생이었구요. 그의 인생은 소년기부터 파란만장 했는데 아버지 돈 안토니오와 어머니 마마 아메리카부터가 평범치 않은 사람들이었어요.

바람난 남편이 집을 나가겠다 할 적에 마마 아메리카는 화를 내지 않아요. 대신에 저 놈이 나가는 즉시로 아껴 마지 않는 오토바이를 바다에 처박겠다고 속이 후련해지는 상상을 해요. 마마 아메리카의 유일한 걱정은 그의 큰아들 빅 엔젤이었는데 예민한 아들이 아버지의 배신으로 무너지지는 않을까 염려했어요. 그래서 이혼에 앞서 빅 엔젤을 집에서 내보내기로 하고 어선을 꾸리는 이모부 첸테벤트에게 딸려보내요. 근데 이 새끼 너무 나쁜 새끼. 어린 조카를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얼마나 학대하는지 몰라요. 빅 엔젤은 쓰레기 더미에서 잠을 자고 미끼로 쓰이는 청어를 날로 먹고 밤에는 무명천 바지를 풀어헤친 채 구타하는 이모부를 버텨요. 사나이니까 혼자 있을 때만 울고요. 가족들과 여자친구 페를라를 그리워해요. 몇 푼 안되는 급료를 악착 같이 모으며 마음 속으로 얼마나 다짐했는지 몰라요. "나는 가치 있는 놈이야. 난 가치 있는 놈이야." 이모부에게 달아나던 그밤의 이야기는 오로지 빅 엔젤 홀로 간직한 비밀인데요. 제발 제발 그 오물 같은 놈에게 아무런 죄책감도 갖지 말기를. 빅 엔젤의 이야기를 읽으며 얼마나 바랬는지 모릅니다.

빅 엔젤이 가족을 찾았을 때엔 온식구가 길거리에 나앉은 상태였어요. 가장 없이 마마 아메리카 홀로 아이들을 키우기가 너무 힘들었던 거에요. 빅 엔젤의 첫사랑인 페를라도 다른 남자를 만나 벌써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상태였구요. 빅 엔젤의 절망감이 얼마나 컸을지 예상이 가시나요? 그렇지만 가치 있는 삶을 위해 노력할 줄 알았던 빅 엔젤은 국경선을 넘어 미국에 밀입국해 자리를 잡아 나가기 시작해요. 잠을 줄여가며 공부하고 일하고 돈을 벌며 식구들을 건사해요. 페를라의 남편이 죽은 것을 알고는 페를라와 결혼해 자식들뿐 아니라 페를라의 동생들까지 거두고요. 의붓 동생인 리틀 엔젤의 주말까지 책임져요. 미국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리틀 엔젤을 빅 엔젤은 미워하는 동시에 동정해요. 멕시코의 가족들을 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미국의 가족들도 배신하거든요. 리틀 엔젤도 형을 미워하는 동시에 아버지보다 더욱 따르며 존경해요. 전형적인 애증의 관계죠.

빅 엔젤은 페를라와의 사이에서 세 아이를 낳았고요. 그 아이들이 커서 또 손자 손녀를 낳았어요. 물론 모든 형제 모든 자식들이 장성하지는 못했어요. 모든 노력이 운명을 이기는 건 아니니까요. 빅 엔젤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암이거든요. 그가 곧 죽을 걸 알았을 때 마지막 생일 파티를 기획해요. 문제는 빅 엔젤의 생일 일주일 전에 100세인 마마 아메리카가 돌아가셨다는 거에요. 70세가 될 아들을 위해 마마 아메리카가 조금만 양보해주셔도 좋았으련만. 큰아들과 며느리에게 섭섭했던 그간의 분풀이를 이렇게 하시나 싶었습니다. 빅 엔젤은 그러나 생일을 포기하지 않아요. 생일 전날 어머니를 장례 치르고 다음 날 곧장 내 생일 파티를 하는 거야! 죽을 날이 코 앞인데 난 아무것도 무서울 거 없어!! 그는 도대체 왜 이렇게 생일 파티에 집착하는 걸까요? 70세의 생일은 그에게 무슨 의미일까요? 미국과 멕시코 전역에서 모여든 각양각색의 친척들이 들려줄 삶의 이야기 속에서 빅 엔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빅 엔젤은 무사히 인생의 마지막 생일을 치룰 수 있었을까요?

없으면 외로운데 함께 있으면 또 너무 시끄러운 빅 엔젤의 가족들. 모이기만 하면 다투는 이 웬수 같은 집구석 내가 다시는 오나 봐라 하는데 돌아보면 이놈의 웬수들이 짠해서 몸둘 바를 모르게 되는 그런 거, 너무 잘 알겠어서 눈물이 퐁퐁 나는 감동적인 가족 축제의 현장에 다녀왔어요. 멕시코 가족들의 이름이 너무너무 낯설어서 초반에는 애를 좀 먹었는데요. 읽다 보면 그놈 같은 저놈이 분간이 되며 책이 잘 읽히는 분기점이 옵니다. 너무 가난해 버틸 수 없었던 고향 멕시코에서의 삶, 먹고 살기 위해 미국에서 불법 체류로 연명하는 삶, 미국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죽음에 서명하는 삶, 서명 후에도 인정받지 못해 그늘로 표류하는 삶, 멕시코인으로도 미국인으로도 정체성을 규정할 수 없는 삶, 빅 엔젤과 그의 가족들의 뜨거운 가족애도 물론 감동적이지만 끊임없이 존엄에 대한 사투를 벌여나가는 생의 여정으로 가슴이 벅찬 책이었어요. 페를라의 말대로 언제 골로 갈지 모르는 인생이라지만 삶의 마지막이 빅 엔젤처럼 농담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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