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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 감기 ㅣ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평점 :
고등학교 교련 시간, 수행 평가로 머리에 붕대감기를 하게 된 세연은 걱정이 태산 같다. 수평 평가 점수가 낮을까봐 걱정이냐고? 아니다. 짝이 없어 수행 평가를 치르지 못할 것이 걱정이다. 여드름을 감추기 위해 바르기 시작한 파운데이션 때문에 문제아로 낙인찍혀 왕따가 됐다. 화장을 하니까 저 애는 걸레일 거라고 아이들이 손가락질 한다. 선생님께 혼도 나고 스스로도 이런 자신이 싫지만 도저히 화장을 포기할 수 없다. 파운데이션이라는 방패 하나를 얹지 않고서는 도무지 거울을 볼 수 없는 병. 학교라는 문을 열고 들어가기 위해선 반드시 화장을 해야만 하는 세연은 그런 자신과 누가 수행 평가를 치르려고 할까 걱정이 된다. 그때에 다가온 것이 진경이었다. 아름다운 외모, 뛰어난 감수성, 맵시있는 글솜씨, 상냥한 마음가짐, 학교의 마돈나인 소녀 진경이. 당황하고 긴장한 탓에 진경의 머리에 붕대를 한 바퀴 더 감은 세연은 진경의 입에서 악 소리가 나올만큼 붕대를 잡아 당겼고 어쩐 일인지 그 일을 계기로 둘은 친구가 된다. 그러나 대학 문턱을 밟자마자 언제 화장한 소녀에게 돌팔매질 했냐는 듯 화장을 가르치려 들고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에 환멸을 느껴버린 세연과 아름다움으로 끊임없는 연애사를 써가는 진경의 삶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진경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커다란 아파트에서 질곡없는 삶을 살았고 세연은 독신으로 스스로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글로써 고단한 하루를 버텨내는 중이다. 둘은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몰이해, 시기심 사이에서 우정의 줄타기를 하며 다퉜다가 화해했다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기를 반복한다.
작가정신에서 출간 중인 시리즈 < 소설, 향>의 두번째 소설은 윤이형 작가의 붕대감기이다. 진경와 세연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그밖에도 정말 다양한 여성이 등장한다. 아이의 병간호를 위해 직장을 그만둔 워킹맘 은정은 진경과 같은 유치원 학부모이다. 사교를 노골적인 이해관계라며 회피해왔던 그녀는 뒤늦게 친구를 놓쳐온 삶을 후회한다. 은정이 자주 방문했던 단골 미용실의 디자이너 지현은 불법촬영 편파수사를 규탄하는 집회 참여자이다. 지현은 은정의 아이가 버릇없다는 이유로 트위터에 "유충, 재기해, 죽어, 유병장수" 같은 말로 욕설을 날린 적이 있다. 아름다움을 버리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집회의 동료들과 직업 사이에서 갈등 중이다. 세연은 젊은 여성들의 정치 감각과 목소리에 놀라며 또다시 중심에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 될 것을 겁먹는다. 그들을 지지하며 젊은 세대들과 같은 감각을 느끼려 하지만 그럴수록 주관은 흐트러지고 피로감만 커진다. 진경은 근래 세연이 어울리고 있는 여성들이 기혼자를 두고 이르는 말들을 찾아보고 놀란다. 비혼자인 세연이 기혼자인 자신을 두고 낱낱이 평가하고 있진 않을까 의구심도 느낀다. 모 대학의 교수인 경혜는 서른살도 더 어린 고등학생 채이와 친구가 된다. 그런 채이가 후배 교수에게 추행당한 것을 알고 데자보를 붙이지만 이것이 우정에 기인한 것인지 죄책감을 덜기 위한 것인지 알지 못해 혼란스럽다. 채이의 친구인 형은은 경혜가 대자보를 붙인 것에 분노한다. 자격없는 사람이 고작 데자보 하나 붙인 것으로 투사 취급받는 것이 꼴같잖은거다. 채이는 그런 형은을 설득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며 화를 내더니 또 뭘 하니까 자격이 있니 없니 하는 건 연대가 아니다. 우리 이런 걸로 화내지 말자. 다투지 말자 한다.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피곤하다고 생각했던 나 같은 독자까지도 소설 속 여러 여성들의 목소리에 한 움큼씩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추행범 한 명 빼고는 오로지 여성들만 등장하는 소설 속 여성들의 대립을 엿보는 일에 피곤함도 적지 않았지만 이해라는 것, 연대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붕대 감기 수행 평가의 목적은 응급 상황에 처했을 때 최소한의 처치 정도는 배우도록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 책이 우리 사회의 어떤 갈등 상황을 목격했을 때 상기하고 공감하고 행동하는 감각을 일깨우는 좋은 응급처치 책이 되어주지 않을까 생각하며 추천해 본다.
"너는 가끔 사람들의 눈앞에서 문을 꽝꽝 소리 나게 닫아 버리잖아.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 사람들이 따르지 않기 때문에 말이야. 그럴 때마다 말하고 싶었어. 꼭 그렇께까지 해야 해? 좀 기다려 줄 순 없는 거니? 모두가 애써서 살고 있잖아. 너와 똑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변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삶이 전부 다 잘못된 거야? 너는 그 사람들처럼, 나처럼 될까 봐 두려운 거지. 왜 걱정하는 거니, 너는 자유롭고, 우리처럼 되지 않을 텐데. 너는 너의 삶을 잘 살 거고 나는 너의 삶을 응원할 거고 우린 그저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인데."(p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