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매시슨 - 2만 피트 상공의 악몽 외 3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36
리처드 매시슨 지음, 최필원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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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 리처드 매시슨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현대문학의 세계문학 단편선으로 출간되지 않았다면 책소개도 안읽고 넘겨버렸을거다. 레이 브레드버리와의 즐거운 만남을 주선한 전집이라 예의상 의리상 흘낏 쳐다는 봤다. 그러다 곧장 눈에 띄인 그 제목. <나는 전설이다> 왓??? 하릴없이 채널을 돌리다 이 영화가 나오면 본다. 무조건 본다. 처음부터 끝까지는 벌써 서너번 본 것 같다. 중간중간 본 것도 치면 다섯번도 넘는다. 다 보고 일어날 때도 있고 중간부터 보다 일어날 때도 있고 다 안보고 그냥 일어날 때도 있어서 굳이 헤아려 본 적이 없다. 닐 게이먼의 말이 옳다. "그는 거인이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이미 당신은 그의 이야기들을 잘 알고 있다."

퇴근 후 집에 와보니 문 앞에 택배 하나가 놓여있다. 작은 나무 상자, 그 안에 든 건 유리로 된 반구형 커버가 덮인 버튼 장치와 누군가가 방문할 거라는 쪽지 한 장이다. 정각 8시. 띵똥띵똥 초인종이 울린다. 영업사원 같은 남자는 악마 같은 유혹을 해온다. "이 버튼을 누르면 세상 어딘가에서 선생님이 모르는 누군가가 죽게 됩니다. 그 대가로 선생님께선 5만 달러를 받게 되는 거고요."(p200) 정신나간 백만장자가 심리실험이라도 하는 모양이지? 부부는 생각한다. 동시에 괴로움을 느낀다. 5만 달러. 2020년 4월 2일자의 환률로는 6140만원. 이 소설 "버튼, 버튼"의 배경은 1970년 즈음. 버튼 하나만 누르면 지긋지긋한 직장을 때려 칠 수 있다. 아름다운 섬에 별장도 지을 수 있으리라. 꿈에 그리던 유럽 여행을 다녀오는건 어떨까? 5만 달러면 이 모든 게 가능하다. 누가 죽었는지 알 수 없단다.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를 거란다. 그냥 버튼만 누르란다. 유리 덮개를 벗겨 한번 꾸욱 누르기만 하면 홀가분해질 수 있는 삶. 그들이 느끼는 유혹 그들이 느끼는 두려움을 고스란히 느끼며 손에 땀을 쥔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오늘이 사형집행일인 남자가 문득 잠에서 깨어나 외친다. 여기가 어딥니까? 대체 왜 나를 여기다 가둔 거에요? 나는 죄인이 아닙니다!! 사형수는 자신을 핵폭발에 휩쓸린 물리학자라고 얘기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을 빗겨나 여기 이 자리 이 사형수의 몸에 들어온 것 같다고. 이전의 죄수였다면 알 수 없었을 핵 지식을 떠들어대고 아내를 찾으며 슬퍼하고 분노하고 절망하는 남자의 눈물. 내가 간수였다면 내가 목사였다면 과연 그의 말에 귀기울여줬을까? 아니면 사형수의 정신착락이라 여겨 거리낌없이 그를 사형 의자에 앉혔을까? 1997년. 인간으로 꽉 찬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을 찾아 나선 우주 비행사들. 그들은 서식 가능하다고 추측되는 어느 행성에서 추락한 우주선을 발견하게 된다. 탑승자를 찾아 우주선을 탐사하던 이들은 돌연 굳어진다. 죽은 이들의 얼굴이 도플갱어처럼 그들과 닮았던 것이다. 아니 틀림없이 그들의 얼굴인 것이다. 우주의 어떤 영향력으로 추락한 우주선이라는 미래와 막 외계행성에 도착한 현재의 그들이 조우했다는 추측에 이르게 된 비행사들은 고민한다. 남아 있는 식량과 연료는 두 달치. 죽을 것을 알고도 우주선을 띄울 것인가 죽음을 피해 외계 행성에서의 고립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추측한대로 부서진 우주선은 그들의 미래가 맞았을까? 제일 유명한 작품이라는 2만 피트 상공의 악몽 또한 인상적이다. 비행기 날개에 매달려 엔진을 뜯어내려는 한 남자. 그 남자를 보는 건 승객 윌슨이 유일하다. 위험을 무릅쓰고 비상구의 손잡이를 열어 총을 쏠 것인가. 아니면 평소 소망했던데로 조용히 죽음을 맞을 것인가.

주술을 입은 인형, 좀비, 유령, 외계인, 뱀파이어와 기타 괴물들, 정신병자, 마녀, 살인마. 다양한 인물들이 버무려내는 심령과 SF와 공포와 미스터리, 판타지가 혼재한 33개의 작품들이 익숙한 결 속에서도 하나같이 뜻밖이고 하나같이 놀랍다. 리처드 매시슨을 정말정말 좋아해서 거의 모든 작품을 읽은 작가 빅터 라발(그는 또 누구인가??)이 고르고 골라 엮은 작품집이라는데 그래서인지 단 한 작품도 실망스럽지가 않더라. 허겁지겁 정신없이 페이지를 먹어치웠다. 이 책을 읽는 동안은 배도 안고프고 잠도 안오고 피곤하지도 않아서 페이지가 1만 2천 페이지쯤 되었어도 좋았을 것 같다. 명작들이 다 그렇지만 1923년생 작가의 책이라도 후진 느낌이 하나도 없다. 애정하는 작가의 반열에 또 한 명 추가하는 기쁨에 환호하며 빅터 라발의 추천사를 전한다. "생존을 위한 사투, 가공할 상황에 빠져 버린 보통 사람, 누구도 그 설정에 독점권을 주장할 수 없다. 하지만 리처드 메시슨은 나, 그리고 당신보다 훨씬 이전에 그 땅을 갈고 집을 지어 놓았다. 덕분에 우리는 그 안에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고. 건축가 만세! 자, 여러분도 어서들 들어오시길."(p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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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아리 사회보험노무사 히나코
미즈키 히로미 지음, 민경욱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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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아리 사회보험사 히나코! 처음 제목을 접했을 때 시리즈 천재가 된 홍대리 같은 독학서인 줄 알았어요. 왜 아시죠? 회계 천재가 된 홍대리, 독서 천재가 된 홍대리, 마케팅 천재가 된 홍대리, (지금은 절판됐지만) 연애 천재가 된 홍대리 등 읽기만 해도 관련 지식이 팍팍 쌓이는 자기계발서 겸 소설책이요. 히나코도 얼핏 보면 딱 그쪽 과의 책 같잖아요. 굳이 일본의 노무 관련 지식을 쌓을 이유는 없다 싶어서 처음엔 안읽으려고 했는데요. 아뿔사, 출판사가 다름 아닌 작가정신인 거에요. 작년 장기로 작가정신 서포터즈 활동을 하며 출판사의 책들을 접해온 바 히나코 = 홍대리 라는 제 추측이 의심스러웠습니다. 차라리 하오 선생의 <어서 와, 이런 정신과 의사는 처음이지?> 쪽이 아닐까 싶어 작가 검색부터 들어갔겠지요. 미즈키 히로미. 교육계 출판사에 근무하다 만화가로 데뷔, 이후 미스터리 문학신인상 우수상을 수상. 소미미디어서 출간된 청춘 미스터리도 몇 권 보이더라구요. 이런 제목이지만! 이런 제목에도 불구하고! 히나코도 코지코지한 미스터리 추리 소설입니다. 노동 현장에서 애처롭게 떨고 있는 노동자와 사장님을 구하는 히어로물일 수도 있었지만 실은 햇병아리 노무사라 그들과 함께 허둥대며 웃고 우는 사회 초년생의 수다 같은 책이랄까요?

 

히나코가 처음부터 노무사가 되기로 결심한 건 아니었어요. 졸업 후에 이리저리 원서를 넣었지만 정규직에서는 똑 떨어지고 어쩌다 보니 파견 사원으로만 몇 년을 배회했습니다. 한번은 정규직 직원, 그것도 가정 있는 직원과 불륜 관계에 있는 정직원이 훔쳐간 서류 때문에 누명을 쓰고 계약 연장에 실패하기도 해요. 관리자는 사실 히나코가 겪은 일의 1부터 10까지 모든 팩트를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자신의 직원을 보호하기 위해 히나코의 목을 가차없이 쳐버려요. 을 중의 을, 적당히 쓰다 바꾸는 소모품인데 양심에 거리낄 것도 없고, 찍소리 말고 있다가 조용히 가라는 말도 넌지시 하대요.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남자친구까지 바람. 심약한 사람이었다면 땅굴을 파고 들어가 우울증에 빠지거나 분노조절장애가 왔을 지경인데 히나코는 난 사람이었어요. 3년이나 공부해서 노무사에 합격하거든요. "일이 없으면 내가 따내는 수밖에 없다. 지켜지지 못한다면 스스로 지켜야 한다. 버려지지 않는 존재가 되어 신용을 얻고 무기를 가져야만 한다. 내 무기는, 어디에 있을까."(p211) 스물 여섯. 무기를 획득한 히나코가 신입 노무사로 취업해 점차 레벨을 올려가는 이야기입니다. 일로 인해 보람찬 순간도 있고 거래처의 막무가내식 일처리에 혈압이 차기도 하고 믿었던 근로자에게 이용 당했다는 생각에 눈물도 펑펑 쏟습니다. 노무사니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라며 막무가내로 끌고가는 친구 손에 붙들려 친구 동생의 직장 상사와 대면하기도 하구요. 한 줄로 쓰니까 친구가 되게 진상 같은데 실제로도 진상진상. 그래도 이런 누나 이런 친구가 있으면 좀 많이 든든할 듯요.

 

노무사가 주인공인 업무 미스터리 연작소설집은 살다 살다 처음 만나는 장르인데요. 근로에 관한 각종 법들이 우리나라와 굉장히 유사하고 ㅡ 알고 보니 우리 근로기준법이 일본의 노동법을 바탕으로 제정됐더라구요 ㅡ 파견 사원, 계약직의 아픔은 국경을 초월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소재라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히나코가 마음에 들었던 그 정장을 꼭 사게 되면 좋겠네요. 히나코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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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게 떠나 명랑하게 돌아오는 독서 여행 - 매일 읽고 조금씩 넓어지는 삶에 대해
서민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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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세계사 2019년 1월 10일 완독, 밥보다 일기 2019년 3월 10일 완독을 거쳐 꼭 일 년 만에 만나는 서민 교수님의 신간이다. 사실 2020년 3월 10일로 리뷰 날짜를 맞추리라 결심했는데 잘 안 됐다. 딴짓 하느라 그런 건 아니고 돈 끼호떼 읽느라고. "유쾌하게 떠나 명랑하게 돌아오는 독서 여행" 탓이었으니 자책하지 말자고 생각했지만 한 작가님의 책을 이렇게 날짜 딱 딱 맞춰서 읽게 되는 경우가 잘 없다 보니 솔직한 마음으론 많이 아쉽다. 작정하고 읽어도 힘들 일인데 순전히 우연이라 더 그렇다. 꽤 멋진 이벤트가 되었을텐데. 쩝.

 

코스가 세 개다. 1 코스, "이상한 나라에서 책 읽기." 17개 목록 중에 딱 두 권을 읽었다. 마션 그리고 편의점 인간. 상실의 시대까지 해서 처음엔 세 개라고 생각했는데 하여튼 부제가 이상하긴 했었다. 어떤 토론을 좋아하세요 라니. 노르웨이의 숲이랑 토론이 무슨 상관이지 하고 넘겨보니 로버트 루트번스타인과 정관용, 서민 작가님 등이 참여한 교양 인문서였다. 인문서랑은 거리가 멀어서 동명의 다른 책이 있는지도 몰랐는데 깜놀이야. 누가 보더라도 낯설 화성이나 비정상인의 면모를 숨기기 위해 주인공 후루쿠라 게이코가 선택한 장소 편의점, 여성의 낙태 결정권을 반대하는 사회와 가뭄에서 콩나듯 개천에서 용이 나는 나라를 만나게 되는 책들을 소개한다. 2 코스, "책 한 권이 사람을 바꾸진 않겠지만." 22권의 페미니즘 소설로 꾸려져 있다. 한 권도 읽어보지 못한 것이 함정. 어째서 페미니즘 책을 읽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한 내 답변이 궁색해서 읽는 내내 부끄러웠다.

 

3 코스, "읽고 쓰며 명랑하게 삽니다." 독서와 글쓰기가 삶에 엄청난 변화를 불러온다며 찬양하고 자화자찬 하는 일은 좀 창피하다. 티비를 시청하거나 영화를 보는 일보다야 품이 더 드는 건 맞는데 앞서 둘과 별 다를 것 없는 취미일 뿐이라고 생각해서다. 더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더 많이 썼으면 좋겠다고는 하되 이 행위를 무슨 기적처럼 이야기 하지 않아서 좋았다. 요 근래 그런 책들이 많이 쏟아져서 이제는 제목만 봐도 부담스러울 지경이니까. 21개 목록 중 6개를 읽어서 코스 중 제일 빠삭했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기사단장 죽이기, 당신의 완벽한 1년, 모스크바의 신사, 오베라는 남자, 위험한 비너스." 독서 여행 같은 책은 몰랐던 책을 알고 싶은 욕구로 읽는걸텐데 나는 모지리인지 아는 책이 나오면 더 신이 났다. 티비엔 <책 읽어드립니다>를 보면서도 그러더니 일종의 자뻑 내지는 과시욕일까?? 목록의 소개가 다 재미났지만 게중 위험한 비너스에 대한 평이 제일 웃겼다. "이 책 덕분에 그와 결했으니 읽은 보람이 있다. 결별을 망설이는 분이라면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p376) 2017년에 위험한 비너스를 읽고도 이후로 2년을 더 히가시노 게이고 책을 읽었던 나, 너무 오래 망설였나 보다. 지금은 잠정 보류한 상태인데 그래도 재미나다고 입소문 나는 책은 다시 찾아 볼 거다. 장담하는데 서민 작가님도 나랑 같은 소문 들으면 솔깃해서 서점 간다에 오백원!

 

이 책 재미나더라 함 봐주라 하는 류의 글을 좋아해서 이번 책도 즐겁게 읽었다. 담백하고 꾸밈없고 술술 넘어가는 페이지들, 앞서 두 권에서 느꼈던 장점도 여전하고. 정작 작가님의 전공이자 제일 유명한 기생충 책들은 읽어본 적이 없는데 기회가 닿는다면 꼭 한번 읽어보리라. 기생충에 대한 이야기로도 내 삶이 조금씩 넓어질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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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끼호떼 1 - 기발한 시골 양반 라 만차의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민용태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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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겠다고 작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점에 가서 책을 보고 놀랐다. 엄청나게 두껍다. 이 두께를 읽는다고? 고전인데? 미친 짓 같았다. 무지하게 많은 글자수, 내가 선택한 창비의 돈 끼호떼에는 삽화도 한 장 없다. 진짜 미쳤나봐. 삽화있는 열린책들이나 시공사로 선택할 걸. 급 후회도 했더랬다. 책을 펼치기 전까지. 책머리에 돌입하기 전까지만 그랬다. 차례를 건너 딱 세 장만 넘기고 나면 그 때부터 신세계다. 아니 어떻게! 고전이! 시작부터 웃기냐!! 며 놀라게 된다. 조금 과장하면 현대소설에서도 맛보지 못한 까무라칠 재미다. 돈 끼호떼도 싼초도 너무 웃겨, 너무 멋져, 완전히 반해버렸다.

 

가산을 팔아가며 기사 소설 읽기에 매진했던 시골 라 만차의 알론소 끼하노 영감. 잠도 안자고 책을 읽더니만 머지 않아 뇌의 골수가 말라 정신이 나가버린다. 쉰도 넘은 나이에 편력기사가 되기를 꿈꾸고 스스로를 돈 끼호떼라 이름 지으니 시작이 반이 아니라 작명이 반인가? 그럴싸한 이름만으로 수천의 모독을 깨부시고 수만의 억울한 자를 돕고 호기있고 용감한 방랑기사가 되어 엘 또보소의 둘시네아 아씨의 명성을 드높일 준비를 끝낸 것만 같다. 새벽 동도 트기 전에 완전무장을 하고 집을 나선 돈 끼호떼. 객줏집의 주인장에게 기사서임을 받아 정식기사로써의 모험을 시작한다. 둘시네아 아씨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라고 소리소리 질렀다가 장사꾼들에게 두들겨 맞고 반시체가 되어 집으로 옮겨진 1차 원정, 씨에라 산중에서 고행하다 친구인 신부님과 이발사에 속아 짐승 우리에 갇혀 고향으로 실려온 2차 원정, 하얀 달의 기사에 패배해 기사이기를 포기했다 종내 우울증에 걸려버린 3차 원정에 이르기까지 돈 끼호떼의 모험은 한 두가지 사건으로 요약할 수 있는 분량과 얼개가 아니건만. 비통하다! 어찌하여 거인으로 착각하고 풍차에 달려드는 정도의 무모함만이 세상에 알려졌더란 말이냐.

 

고전이라서 추천하는게 아니다. 오로지 재미 하나만 보고 강추한다. 낭만괴짜에 얼렁뚱땅한 고집쟁이 돈 끼호떼와 속담 가마니를 짊어진 의리있고 재치있는 하인 싼초 빤사가 세상에 나아가 치고 받고 깨지고 부수는 얘기가 그렇게 마법 같고 환상적이고 우스꽝스럽고 즐거울 수 없다. 이야기가 슬퍼서 눈물이 나는 게 아니라 주인공들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책을 덮고 눈시울이 붉어졌을 정도로 정이 가는 책은 흔치 않으리라. 읽는 게 너무 힘들어 완독에만 가치를 두게 되는 고전들과는 완전히 다른 결로 읽히는 책이다. 몇 번이든 다시 읽을 수 있을 것 같고 꼭 다시 읽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책이기도 하다. 돈 끼호떼의 페이지에 압도 당해 미리부터 포기하려는 독자들에게 다음 문장을 바친다.

 

 

"그대 기사여, 그대가 누구이든지, 이 무시무시한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자여, 만일 그대가 이 검은 물 밑에 숨어 있는 보물을 얻고자 하거든 그대의 강력한 힘과 용기를 보여주소서. 바로 지금 이 검게 불타는 술통의 한중간으로 뛰어들라. 그러지 못하면 이 검은 암흑 밑에 누워 있는 그 황홀하고 신비한 것들을 그대는 볼 자격이 없으리니...." (1권, p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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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 댄서
조조 모예스 지음, 이정민 옮김 / 살림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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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 사라의 삶에 중요한 것은 할아버지 캡틴과 말 부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삶의 두 축이 한꺼번에 무너지려 하고 있어요. 공원에서 부와 함께 훈련 후 돌아오던 길 할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져 버렸거든요. 부에게 축사를 제공하던 친절한 존 아저씨는 축사를 팔고 시골로 내려가려고 준비 중이구요. 새주인은 말로는 괜찮다, 할아버지가 깨어나면 돈을 주면 된다고 하지만 다가오는 손짓이 섬짓섬짓 합니다. 존이었다면 시일이 얼마가 걸리든 임대비와 사료비를 독촉하지 않았겠지만 새주인은 글쎄요.

 

그런 때에 사라와 너태샤가 만나게 된 거였어요. 병원과 학교와 축사를 오가며 저녁을 쫄쫄 굶고 정신이 반쯤 나가서는 돈이 주머니에 있는지 손에 쥐어져있는지 다른 어떤 곳에 떨어트렸는지 분간도 못할 때였어요. 멍한 정신으로 피시 핑거를 들고 아마 계산도 없이 마트를 나가려했던가 봐요. 사라는 좀도둑으로 오인받았고 경비원에게 붙들려 해명했지만 말이 먹히지 않았습니다. 가난하고 후미진 동네라 워낙 절도 사건이 많기도 하고 무엇보다 사라 주머니에 돈이 없었거든요. 사라는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서 눈물이 핑 돌 정도였지요. 너태샤는 너태샤대로 그 밤은 멘붕 상태. 별거 중이던 맥이 집이 공동재산임을 명시하며 짐을 싸들고 들어왔거든요. 이제야 맥을 잊고 새로이 애인도 사귀고 삶의 궤도를 좀 수정해보려던 터에 얼굴만 봐도 상처에 고름이 솟고 피가 나는 것 같은 남편과 동거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거에요. 내가 그간 당신을 배려해 나가 살았으니 이 상황이 불만이거든 집이 팔리기 전까지 당신이 나가 살아줘 라는데야 너태샤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할 말이 없어서 더 열 받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 심정. 너태샤 힘내라ㅠㅠㅠㅠ

 

이 세 사람이 어떻게 함께 살게 되었는지 저는 그 과정을 다 목격했으면서도 여전히 어리둥절한 마음이에요. 너태샤 입장에서 보면 남편을 피해 우유를 사려고 평소보다 좀 멀리, 아니 아주 멀리 있는 마트에 갔다가 만나게 된 아이가 사라거든요. 그것도 상냥하고 친절하고 예의바른 아이가 아니라 좀도둑으로 몰린 아이, 도와줬지만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쌩 하고 가게를 나가 버리는 아이, 이름을 속이고 친근해지려는 기색도 없이 묵묵부답 입을 꾹 닫고 있는 아이요. 저 같으면 너무너무 부담스러워서 얼른 자리를 피해버렸을텐데 너태샤는 어른이었어요. 맥과 상의 후 사라를 임시보호 하기로 하거든요. 그녀가 사라와 비슷한 아이들을 변호하는 직업이라서 그럴 수 있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기본적으로 너태샤와 맥 모두가 좋은 사람들이라 그런거지. 물론 중간중간 내가 미쳤지, 내가 왜 그랬을까, 이 애는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 라고 후회할 때도 있지만요. 어쨌거나 사라가 완벽하진 못해도 훌륭한 어른들에게 맞겨진 것만은 분명합니다.

 

함께 하는 동안 세 사람은 내내로 진력이 납니다. 말을 안해요 말을. 사춘기 아이는 아이대로 입은 뒀다 국 끓여먹으려는지 좁은 시각 안에서 좁은 해결법을 찾아 혼자 다 처리하겠다며 난리구요. 어른은 어른대로 몇 년 더 살았다고 한치 앞은 안다고 자신하잖아요. 분란이 생길 것 같고 자존심이 상할 것 같은 일에서는 먼저 발을 빼버리거나 회피하거나 입을 닫죠. 그럴 수록 문제만 더 커지는 그런 경험, 그럼에도 말하기 싫은 그런 마음 모르지 않음에도 답댑이 답댑이 말 좀 하고 살자 싶었습니다. 툭 터놓고 말을 안하는 인물들 때문에 읽는 내내로 답답하고요. 읽어도 읽어도 줄지 않은 페이지가 초반엔 살짝 부담되기도 합니다. 성장소설이니 기껏 삼, 사백쯤 되겠지 하시겠지만 자그마치 687 페이지 대벽돌이에요. 하지만 걱정마시라. 작가는 책 속에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신발을 숨겨놓은 게 틀림없습니다. 어마어마한 분량이 어느 순간부터 나는 듯이 넘어가요. 사라 할아버지 캡틴의 선택과 후회, 축사 주인 조의 바람, 너태샤와 맥의 재회, 가출 청소년의 모험기에서 빠질 수 없는 사라의 가출, 모든 이들의 화해와 새롭게 만들어지는 가족을 들여다보며 문득 행복해집니다. 조조 모예스 작가의 명성을 피부로 느끼게 되는 책, 강력추천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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