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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매시슨 - 2만 피트 상공의 악몽 외 32편 ㅣ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36
리처드 매시슨 지음, 최필원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3월
평점 :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 리처드 매시슨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현대문학의 세계문학 단편선으로 출간되지 않았다면 책소개도 안읽고 넘겨버렸을거다. 레이 브레드버리와의 즐거운 만남을 주선한 전집이라 예의상 의리상 흘낏 쳐다는 봤다. 그러다 곧장 눈에 띄인 그 제목. <나는 전설이다> 왓??? 하릴없이 채널을 돌리다 이 영화가 나오면 본다. 무조건 본다. 처음부터 끝까지는 벌써 서너번 본 것 같다. 중간중간 본 것도 치면 다섯번도 넘는다. 다 보고 일어날 때도 있고 중간부터 보다 일어날 때도 있고 다 안보고 그냥 일어날 때도 있어서 굳이 헤아려 본 적이 없다. 닐 게이먼의 말이 옳다. "그는 거인이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이미 당신은 그의 이야기들을 잘 알고 있다."
퇴근 후 집에 와보니 문 앞에 택배 하나가 놓여있다. 작은 나무 상자, 그 안에 든 건 유리로 된 반구형 커버가 덮인 버튼 장치와 누군가가 방문할 거라는 쪽지 한 장이다. 정각 8시. 띵똥띵똥 초인종이 울린다. 영업사원 같은 남자는 악마 같은 유혹을 해온다. "이 버튼을 누르면 세상 어딘가에서 선생님이 모르는 누군가가 죽게 됩니다. 그 대가로 선생님께선 5만 달러를 받게 되는 거고요."(p200) 정신나간 백만장자가 심리실험이라도 하는 모양이지? 부부는 생각한다. 동시에 괴로움을 느낀다. 5만 달러. 2020년 4월 2일자의 환률로는 6140만원. 이 소설 "버튼, 버튼"의 배경은 1970년 즈음. 버튼 하나만 누르면 지긋지긋한 직장을 때려 칠 수 있다. 아름다운 섬에 별장도 지을 수 있으리라. 꿈에 그리던 유럽 여행을 다녀오는건 어떨까? 5만 달러면 이 모든 게 가능하다. 누가 죽었는지 알 수 없단다.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를 거란다. 그냥 버튼만 누르란다. 유리 덮개를 벗겨 한번 꾸욱 누르기만 하면 홀가분해질 수 있는 삶. 그들이 느끼는 유혹 그들이 느끼는 두려움을 고스란히 느끼며 손에 땀을 쥔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오늘이 사형집행일인 남자가 문득 잠에서 깨어나 외친다. 여기가 어딥니까? 대체 왜 나를 여기다 가둔 거에요? 나는 죄인이 아닙니다!! 사형수는 자신을 핵폭발에 휩쓸린 물리학자라고 얘기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을 빗겨나 여기 이 자리 이 사형수의 몸에 들어온 것 같다고. 이전의 죄수였다면 알 수 없었을 핵 지식을 떠들어대고 아내를 찾으며 슬퍼하고 분노하고 절망하는 남자의 눈물. 내가 간수였다면 내가 목사였다면 과연 그의 말에 귀기울여줬을까? 아니면 사형수의 정신착락이라 여겨 거리낌없이 그를 사형 의자에 앉혔을까? 1997년. 인간으로 꽉 찬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을 찾아 나선 우주 비행사들. 그들은 서식 가능하다고 추측되는 어느 행성에서 추락한 우주선을 발견하게 된다. 탑승자를 찾아 우주선을 탐사하던 이들은 돌연 굳어진다. 죽은 이들의 얼굴이 도플갱어처럼 그들과 닮았던 것이다. 아니 틀림없이 그들의 얼굴인 것이다. 우주의 어떤 영향력으로 추락한 우주선이라는 미래와 막 외계행성에 도착한 현재의 그들이 조우했다는 추측에 이르게 된 비행사들은 고민한다. 남아 있는 식량과 연료는 두 달치. 죽을 것을 알고도 우주선을 띄울 것인가 죽음을 피해 외계 행성에서의 고립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고 그들이 추측한대로 부서진 우주선은 그들의 미래가 맞았을까? 제일 유명한 작품이라는 2만 피트 상공의 악몽 또한 인상적이다. 비행기 날개에 매달려 엔진을 뜯어내려는 한 남자. 그 남자를 보는 건 승객 윌슨이 유일하다. 위험을 무릅쓰고 비상구의 손잡이를 열어 총을 쏠 것인가. 아니면 평소 소망했던데로 조용히 죽음을 맞을 것인가.
주술을 입은 인형, 좀비, 유령, 외계인, 뱀파이어와 기타 괴물들, 정신병자, 마녀, 살인마. 다양한 인물들이 버무려내는 심령과 SF와 공포와 미스터리, 판타지가 혼재한 33개의 작품들이 익숙한 결 속에서도 하나같이 뜻밖이고 하나같이 놀랍다. 리처드 매시슨을 정말정말 좋아해서 거의 모든 작품을 읽은 작가 빅터 라발(그는 또 누구인가??)이 고르고 골라 엮은 작품집이라는데 그래서인지 단 한 작품도 실망스럽지가 않더라. 허겁지겁 정신없이 페이지를 먹어치웠다. 이 책을 읽는 동안은 배도 안고프고 잠도 안오고 피곤하지도 않아서 페이지가 1만 2천 페이지쯤 되었어도 좋았을 것 같다. 명작들이 다 그렇지만 1923년생 작가의 책이라도 후진 느낌이 하나도 없다. 애정하는 작가의 반열에 또 한 명 추가하는 기쁨에 환호하며 빅터 라발의 추천사를 전한다. "생존을 위한 사투, 가공할 상황에 빠져 버린 보통 사람, 누구도 그 설정에 독점권을 주장할 수 없다. 하지만 리처드 메시슨은 나, 그리고 당신보다 훨씬 이전에 그 땅을 갈고 집을 지어 놓았다. 덕분에 우리는 그 안에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고. 건축가 만세! 자, 여러분도 어서들 들어오시길."(p6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