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피를 입은 비너스 펭귄클래식 에디션 레드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지음, 김재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20년 12월
평점 :
품절


펭귄클래식코리아 지원 도서입니다.

 

"나를 학대해줘요! 날 때려줘요! 나를 발로 짓밟아줘요!

날 사랑한다면 제발 잔인하게 대해줘요!"

 

모피를 입은 비너스, 나를 채찍질 하는 여자를 숭배하는 일에 대하여.

-----------------------------------------------------------------------------

 

?? "제베린 폰 쿠지엠스키 씨는 오늘부로 반다 폰 두나예프 여사의 노예가 되는 의무를 지며, 두나예프 여사가 다시 자유를 돌려주지 않는 한 이 의무는 계속된다. 두나예프 여사는 자신의 노예가 아주 경미한 실수나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도 얼마든지 처벌할 수 있으며, 자신의 기분에 따라 또는 심심풀이로 마음 내키는 대로 그를 학대하고 심지어 죽일 수 있는 권한까지 갖는다. 한마디로 그는 그녀의 무제한한 소유물이다. 반면 두나예프 여사는 주인으로서 되도록이면 모피를 입을 것임을 약속한다. 특히 그녀의 노예에게 잔인하게 대할 경우에." (p126)

 

카르파티아 산속의 조그만 휴양지에서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본디 기질이 그러했던 것일까? 제베린은 잡초가 우거진 정원 의 비너스 석상에 완전히 반해버린 상태다. 시시때때로 비너스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그 발에 입 맞추며 목하 짝사랑 중인 제베린에게 그녀, 2층의 젋은 미망인, 반다가 관심을 드러낸다. 제베린이 실수로 떨어뜨린 티치아노의 그림 <거울을 보는 비너스> 뒤에 그가 적어놓은 비너스에 대한 찬사가 미망인의 호기심을 이끌었다. '비너스여, 어서 폭군의 모피로 몸을 감싸세요.'(p24) 젊은 남자의 소망을 이루어주듯 정원의 비너스상에 모피를 입힌 반다. 제베린은 당혹해하면서도 서서히 반다에게 매료되어 간다. 그리고 소망한다. 모피를 입은 반다가 여왕과 같은 태도로 자신을 학대해 주기를. 때리고 짓밟고 채찍질해 주기를. 잔인하게 자신을 다루어 쾌락을 불러일으켜 주기를.

 

제베린의 욕망을 억눌러보려던 반다는 끝내 조소를 감추지 못한 채 노예처럼 엎드린 제베린에게 개에게나 쓰는 채찍을 휘두른다. 이름을 빼앗고 프랑스 행을 강요한다. 빈털터리로 만든 후 자살을 암시하는 문서를 작성케 한 후 노예로 부린다. 있는 집 자식으로 배울만큼 배운 제베린은 이제 하인들과 같은 방을 쓰며 육체노동에 시달린다. 그레고르라는 예명을 받고 버림받은 개처럼 치이며 살아가는 하루에 분노하고 두려워하며 동시에 흥분한다. 흑인 하녀들 손에 밧줄로 묶여 매질을 당하면서도 지하에 갇혀 괴로움에 몸부림치면서도 반다가 자신에게 질려 불러주지 않을까봐 겁먹는다. 잘생긴 그리스 대사가 그들의 앞에 나타나기까지 그는 최소한의 안전만큼은 보장받은 채로 자신의 쾌락이 유지될 거라고 믿는다. 반다의 침실에서 채찍을 든 그리스 대사를 마주하기 전까지 반다의 무한한 학대를 바랐던 제베린. 그는 살아서 안전했던 옛 삶으로 귀환할 수 있을까?

 

?? "단지 쾌락을 추구할 뿐이에요. 쾌락만이 우리의 인생을 가치 있게 해줘요.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생과 쉽게 작별하지 않아요. 반면에 고통과 궁핍에 시달리는 사람은 죽음을 마치 친구처럼 받아들이지요... 남을 희생해서라도 쾌락을 즐기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 돼요. 결코 동정심을 가져서도 안 돼요. 남들을 자기 마차에, 자기 쟁기에 마치 짐승처럼 붙들어 매야 해요. 자기와 다를 것 없이 느낄 줄 알고 즐기고 싶어 하는 인간들을 자신의 쾌락을 위해 자신의 노예로 만들고 이용할 줄 알아야 해요. 일말의 후회의 감정도 없이요. 그러다가 그들이 죽는 건 아닌지 하는 따위는 물을 필요가 없어요. 여기서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어요. 내가 그들을 손아귀에 넣듯이 만약 그들이 나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나 역시 그들의 쾌락을 위해 나의 땀과 나의 피와 나의 영혼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죠." (p196)

 

1870년에 출간된 소설로 작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생을 갈아넣은 소설이다. 소설의 부록으로 자허마조흐가 파니 폰 피스토르와 맺은 노예 계약서가 실려있는데 제베린이 맺은 반다와의 계약과 아주 일치하는 것을 보면 놀랍다. 사랑을 하고, 한 여인의 노예가 되고, 그 대가로 정당한 학대의 권한(?)을 가지는 기기묘묘한 세상을 목격하는 일이 정말이지 흥미로워 책에서 손을 놓기 힘들었다. 제베린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소설이라 수수께끼와도 같은 반다의 내면이 무척 궁금했는데 훗날 제베린에게 도착한 한 통의 편지를 그녀의 진심으로써 읽어야 할지 마지막 조롱으로 읽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 했다. 1890년 독일의 정신의학자 크라프트에빙에 의해 마조히즘이라는 단어의 유례가 되어 많은 비난을 받지만 인간의 희귀한 욕망을 이토록 노골적으로 다루는 소설의 문학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소설로써의 기능을 다하며 확고한 재미를 갖추었기에 추천한다. 마조히즘이란 단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소설의 맛을 직접 느껴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집에 사는 네 여자
미우라 시온 지음, 이소담 옮김 / 살림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림출판사 지원도서입니다

제목을 보고 궁금해하지 않을 독자가 있을까요? 그 집에 사는 네 여자는 뉴규??

---------------------------------------------------------------------------------------

"자유와 독립,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찬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에 대한 희생으로 모두가 이 외로움을 맛봐야 한다."(p59)

-------------------------------------------------------------------------------------------------------------------------------------

도쿄 외곽에 위치한 백오십 평 대지 위의 2층 양옥집. 동네 아이들이 귀신의 집이라 부르는 마키다가(家) 낡은 대저택에서 소설은 문을 엽니다. 대를 이어 집을 물려받은 쓰루요씨는 일흔 평생 일이라곤 해본 적이 없는 유한마담입니다. 조부의 유산인 부동산과 거품경제 때 손에 쥔 목돈으로 남은 평생 무위도식할 팔자라니 속물인 저는 쓰루요씨의 사정을 알자마자 부러워서 배를 잡고 뜅굴뜅굴 굴렀습니다. 잊을만 하면 로또를 사는데 꼭 당첨이 되서 저도 쓰루요씨와 같은 삶을 살고 싶어요. 노동하지 않는 삶, 동경합니다. 태평한 성격에 소녀 같은 면모를 지닌 쓰루요씨는 백화점 가는 날이면 엔돌핀이 뿜뿜 솟구치나봐요. 백화점 개장이 10시 30분인데 9시도 전에 집을 나서는 귀염둥이라니. 역시 부럽잖아요.

서른 일곱살 자수작가 사치는 쓰루요씨의 무남독녀 외동딸인데요. 아버지 얼굴도 못보고 자랐다기에 유복자인가 했더니 알고 보니 아주 엄청난 아버지를 둔 아가씨더라구요. 아버지의 미스테리를 딸인 사치는 모른다는 게 함정이지만 독자는 모조리 파헤칠 수 있는 함정이라는 게 무척 재미납니다. 연애와는 영 인연이 없는 줄만 알았더니 누수로 엉망이 된 방에 벽지를 바르러 온 인테리어 사장님 가지씨에게 한눈에 반한 상태입니다. 두근두근, 조마조마, 설렘 폭발, 이런 긴장감이 얼마만인지 사치는 무릎이 다 후들거릴 정도인데 가지씨의 조카가 숙모 이야기를 하면서 사랑은 반나절만에 푸쉬쉬 김새 버려요. 물론 그 "숙모"라는 존재에도 비밀이 있다는 건 안비밀. 사치의 연애 행방에 제가 다 조마조마 했어요. 연애 소설이 아닌데 왜 연애 소설 보다 더 떨리는거뉘?

마치다가에는 쓰루요씨와 사치 외에도 두 명의 하숙생이 더 기거 중인데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치와 통성명을 넘어 동거까지 하게 된 유키노는 남자에게는 영 무관심한 모양이에요. 연애세포가 완전소멸 상태랄까요? 사치와 같은 서른 일곱살이지만 딱히 솔로탈출을 꿈꾸지는 않고요. 열심히 요가하고 직장생활 하면서 일상을 잘 꾸리는 게 목표인 것 같습니다. 개성없는 외모와 겉보기엔 조용해 보이는 성격이 특징이라면 특징인데 마치다가의 나날들을 읽다 보면 결코 무존재감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요. 40년 가까이 잠겨 있던 방의 봉인(?)을 풀어 갓파 미라를 발견한 사람도 유키다구요. 사치 대신 사치 아버지에 대한 비밀을 욕망하며 파헤치는 계기를 만든 이도 유키다에요. 사치와 가지씨가 만난 것도 크게 보면 다 유키다 때문이라며 저는 유키다 영물론을 펼쳐봅니다. 본인은 가는 곳마다 물재난을 만나 고난이라지만 유키다의 물재난 후에는 꼭 좋은 일만 생기는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소개할 친구는 다에미! 전남친의 스토킹에 시달리다 마치다가에 들어오게 된 유키노의 직장 후배입니다. 직장 생활을 좋아하는 능력녀에 현실적인 성격이다보니 자신과 반대되는 꿈이 크고 원대한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해요. 그러다 보니 어째 꼬이는 놈이 죄 백수건달과? 기둥서방류? 일할 생각 없이 여자 등쳐먹으면서 말만 번지르르한 남자더라구요. 먼데 사는 언니지만 좀 걱정이 됐습니다. 다에미, 남자 보는 눈 좀 바꾸자. 너 그러다 평생 등골 뽑혀! 정신 차리라고!!

------------------------------------------------------------------------------------------------------------------------------------------------------------------

"외로움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남자나 가족 제도 따위가 아니라,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느슨한 연대, 왜 같이 사는지조차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운 지금 우리 같은 생활 내면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수 실보다 가늘고 미덥지 못한 연결 안에 말이다. 외로움이라는 지옥, 그런데 이때까지 인간이 천국에서 살던 시대가 있긴 했던가?" (p60)

------------------------------------------------------------------------------------------------------------------------------------------------------------------

모녀인 쓰루요와 사치는 그렇다 치지만 유키노에 이은 다에미와의 인연은 정말이지 엉뚱해서요. 네 여자의 동거라니 이거 과연 괜찮을까 싶었는데 벌써 일 년도 넘게 활기차게 살아가는 네 사람의 엉뚱발랄 + 코믹해피 + 판타지한 힐링 이야기를 아주 행복한 기분으로 감상했습니다. 언젠가는 끝날 인연이라는 걸 친구들 모두가 알고 있어요. 결혼을 할 수도 있구요. 직장인인만큼 이직을 해서 마키다가와의 거리가 멀어질 수도 있죠. 연애로 인한 번잡함 등으로 독립에 대한 열망이 생길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친구들끼리 다퉈 관계의 끝을 보게 될지도 몰라요. 네 사람이 뭉쳐 사는 지금이 정말 좋아서 사치는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싶다가도 덜컥덜컥 겁이 나는 거에요. 하지만 사치는 겁쟁이가 아니니까요. 얼른 마음을 추스립니다. "언젠가라는 미래를 두려워해 꿈꾸는 것을 그만둔다면 동화가 현실이 되는 길은 막히고 만다."(p279) 꿈꾸는 바보가 되어 북적북적한 여자들끼리의 우정을 즐기는 사치와 친구들이 정말 부럽습니다. 이야기가 영 엉뚱한 길로 빠질 때면 장르가 판타지라는 걸 떠올려 주세요. 혼자 헤쳐가는 인생에 부쩍 외로운 날 <그 집에 사는 네 여자>를 추천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퀴어 펭귄클래식 에디션 레드
윌리엄 S. 버로스 지음, 조동섭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2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펭귄클래식코리아 지원 도서입니다!

"<퀴어>는 그 안에 내가 적혀 있는 기분이다. 계속 써 나가는 것, 솔직하게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예방접종으로서의 글쓰기였다. 무엇을 글로 쓰는 즉시, 그 무엇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힘을 잃는다. 바이러스를 약하게 만들어서 우리 몸에 주입하면 항체가 생겨서 그 바이러스에 면역력이 갖춰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내 경험을 적음으로써 그 글들을 통해 이후의 위험한 모험에 대한 면역력을 얻었다."(p17)

'사악한 기운이 조앤을 죽였어. 이유가 되려고.'(p21) 퀴어는 시작부터 충격적이다. 버로스는 소설에 발 디디려는 독자에게 고백한다. 자신의 마약 중독 사실과 51년 9월, 아내 조앤을 사망시킨 총기 사고에 대해서. 아내의 죽음이 이유가 된 글쓰기를 설명한다. 참을 수 없는 괴로움 속에 자신의 여정을 적고 내보이는 일. 그리고 괴로움을 반복하여 읽는 일. 자기 학대와 다름 아닌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물러나고 싶었지만 프롤로그에서부터 발목이 잡혔다. 작가 자신과 다름없다는 주인공 리를 알고 싶었다. '아무 의미 없는 길고 고통스러운 여행의 좌절과 피로, 잘못된 방향 전환, 잃어버린 길, 빗속에서 기다리는 버스... 그리고 암바토, 퀴토, 파나마, 멕시코시티로 돌아가기'(p19)를 염치없는 호기심으로 쫓는다. 작가의 고통과는 별개로 소설은 흥미롭기 그지없다.

리는 친밀한 관계를 원한다. 리의 말에 정중하게 귀를 귀울이고 리의 성적 관심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자유로운 포옹과 키스 혹은 그 이상의 관능을 나눌 수 있는 남자를 곁에 두고 싶은 욕망에 영혼이 바스라질 지경이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남자들이 리를 스쳐가버렸다. 리가 그들에게서 발견한 의미를 그들 중 아무도 리에게서 발견하지 못했다. 외롭고 지쳐 침대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우는 리의 모습은 어린애 같다. 마약중독자에 동성애자인 어린애 같은 남자라니. 한심한 기분에 한숨이 나오지만 동시에 가엾어 어쩔 줄을 모르겠는 마음으로 리를 보게 된다. 리의 눈에 포착된 한 남자, 앨러턴이 리보다 좀 나은 사람이기를 바라지만 그럴 리가 없지. 속없이 게으르고 누구에게나 무관심한 앨러턴은 리를 경멸한다. 리는 앨러턴에게 낯부끄러운 추파를 던진다. "고통과 증오로 뒤틀린 추파"(p42)라는 게 어떤 모습인지 상상이 가지 않지만 리가 건낸 미소에 섬뜩해진 앨러턴이 자리를 피한 것을 보면 어지간히 꼴부견이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두 사람은 돌연 육체적 관계를 갖는다. 한 침대에서 잠들고 눈을 뜨는 며칠이 지속되도록 리의 추파와 앨러턴의 회피라는 관계적 양상은 변화가 없다. 스스로를 파파라 호칭하며 앨러턴에게 금전적 호의를 내보이는 리와 리의 금전은 손쉽게 취하면서 리의 마음에 구속되지 않으려는 얄밉도록 냉정한 앨러턴의 외면이 지속된다. 아름다운 소년들에 눈이 멀어 '내가 어쩌겠어? 호텔로 데려가? 그 아이들은 기꺼이 오겠지. 몇 수크레면...'(p118)이라고 생각은 할지언정 결코 손을 내밀어 소년들을 취하는 일은 없는 리. 방탕은 말뿐, 리의 마음과 몸은 오직 앨러턴에게로만 뻗어있다. 앨러턴의 마음을 지배하고 싶은 욕구로 리는 야혜(마음을 지배할 수 있는 식물)를 찾아 남미의 곳곳을 여행한다. 앨러턴이 동행한 그 길에서 더욱 슬퍼지고 더욱 고립되는 리. 거부 당한 리의 마음과 리를 조금도 원치 않는 앨러턴의 마음은 길의 어디쯤에서 작별하게 될까. 난잡하고 불결하며 폭력적인 멕시코시티를 벗어나 춥고 축축하고 어두운 푸요에 이르러 앨러턴에 대한 리의 탐욕은 조금쯤 사그러들었을까. 그런 의문으로 손에서 내려놓기가 힘든 책이었다. 마음이 싱숭생숭해 에필로그는 읽지 말까 싶기도 했다.

"무모하고, 꼴사납고, 난폭하고, 감상적인ㅡ 한마디로 형편없는 ㅡ 행동"(p15)이 소설 속에 가득하다. 책이 집필된 1950년대에는 도저히 출간될 수 없는 이미지와 내용을 담고 있고, 1985년 독자를 만난 그때에도 문제작 취급을 받았던 이유가 이해가 간다. 허나 우리는 2020년의 독자라 충격이나 놀라움보다는 마냥 애처로운 마음으로 리를 들여다 보게 될 가능성이 많은 작품이 아닌가 싶다. 군중 속의 고독과 때로 영혼이 찢기는 것만 같은 관계적 허기에 공감하면서. 리의 마음은 황폐한데 황무지 같은 그 속을 들여다보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나 자신에 살짝 죄책감마저 들었던, 기묘한 우울과 우울이 바래는 천진함이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마약중독자에게 천진함이라니 정말 말도 안되잖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나폴리 4부작 3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길사 지원 도서를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밀라노의 서점에서 레누와 니노가 재회한다. "릴라는 문제가 있어. 성관계도 그랬어."(p40) 임신한 릴라를 두고 뻔뻔하게 도망쳤던 니노는 몇 년만에 재회한 레누에게 릴라와의 관계를 변명한다. 레누는 당혹스럽다. 그의 표현이 주는 불쾌감은 말할 것도 없고 니노가 말하는 잘못된 성관계로 인해 태어난 생명, 어린 젠나로를 생각하면 니노를 책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릴라는 너 때문에 신세를 망쳤어!" 꼭 이 말을 해줘야겠다고 다짐하는 레누. 허나 니노의 얼굴을 보기만해도 설렘으로 벅차 릴라에 대해서도 젠나로에 대해서도 하다못해 약혼자인 피에트로에 관해서도 잊어 버리고 만다. 첫사랑의 위력은 도대체 어디까지인걸까. 작가로서의 성공도 피에트로의 정중한 청혼도 니노와의 재회 앞에서는 빛이 바래는 것만 같다.

반면 릴라는 더이상 니노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에 눈 멀어 있기엔 어머니라는 위치가 가진 책임감이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젠나로를 출산하며 스테파노와 재결합한 릴라는 아들에게 경제적 혜택을 주겠다는 일념으로 가정에 충실하려 애쓴다. 스테파노의 변심과 불륜마저 무시한다. 허나 스테파노의 애인인 아다는 릴라의 존재를 참을 생각이 없다. 스테파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릴라의 신혼집으로 쳐들어 온 아다는 도나토 사라토레 때문에 미쳐버린 그녀 어머니 멜리나처럼 정신적 불안 증세를 보인다. 아다의 임신 사실까지 알게 된 릴라는 자신을 사랑하는 또다른 남자 엔초와 함께 고향을 떠나 동거를 시작한다. 육체적 관계 없이 존중과 신뢰, 호감이라는 정신적인 교류로 유지되는 두 사람의 관계는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혹 연인이 생긴 것은 아닐까? 내일이라도 헤어짐을 요구하지는 않을까? 릴라는 엔초의 늦은 귀가 때마다 두려워 하지만 쉽사리 그의 방문을 열 용기를 내지 못한다.

"아! 레누. 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우리는 모두 동파된 수도관 같아. 도무지 만족하지 못하는 머리를 가진다는 것은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야."(p493) 스테파노의 아내로 부유한 삶을 살았던 릴라는 이제 햄공장의 노동자로 새벽 다섯시부터 저녁 아홉시까지 노동에 시달린다. 사장 브루노의 농간에 분노하면서도 직장을 잃을까 두려워 몸을 사리기도 한다. 이웃 여자에게 맡긴 젠나로는 더는 어렸을 적의 똑똑한 아이가 아니다. 열악한 환경에 시달린 탓일까. 릴라는 점점 타협을 배워간다. 한때 원수처럼 여기며 저주했던 미켈레와도 사업적으로 손을 잡는다. 릴라가 독학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이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할 때 일견 평온해 보였던 레누의 삶에도 변화가 온다. 두 딸의 출산과 양육이 주는 부담감, 작가로서의 자신감 상실, 가부장적인 피에트로와의 갈등과 타지에서 느끼는 외로움 속으로 성큼 니노가 걸어 들어온 것이다. 수면제를 먹고 잠든 남편을 두고 손님방으로 니노를 찾아간 레누는 이후 그를 향한 모든 욕망을 폭발시킨다. 두 딸도 남편도 안중에 없이 이혼을 감행한다.

떠나간 자 레누와 머무른 자 릴라. 등지고 걸어가는 두 여성의 삶의 이정이 표지 이상으로 멀게 느껴졌던 3권이다. 1, 2권에서도 존재감이 옅지 않았던 니노였지만 3권에 이르러 레누의 삶까지 어지럽히는 모습에 화가 났다. 피에트로와 레누의 둘도 없는 친구인냥 행세하던 니노가 피에트로의 존재감을 지우고 소외시키며 뻐꾸기처럼 둥지를 가로채는 모습에는 소름이 덜덜. 도나토 사라토레와는 또다른 종류의 여성 편집증, 정신병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된다. 도대체 니노의 뭘 믿고 사랑을 맹세하는지. 도대체 어쩌자고 니노를 쫓아 집을 나갈 수 있는지. 어떻게 두 딸마저 내버려 둔 채로 니노의 출장길에 동반하는지 리뷰를 쓰면서도 정말이지 레누가 이해가 안된다. 눈이 멀었다고 밖엔 볼 수가 없다. 레누는 이혼을 작정했지만 니노도 과연 부자에 권력이 넘치는 젊은 아내 대신 레누를 선택할까? 릴라 또한 걱정되기는 매한가지다. 엔초와 미켈레에게 지성과 능력을 인정받으며 승승장구 하지만 릴라는 고향도 가족과의 인연도 끊지 못한다. 가장 노릇을 다시금 시작해 주머니를 연다. 문제의 근원과 떨어질 생각이 아예 없는 것이다. 불안하기만 한 3권의 끝, 도대체 어디쯤에 이르러야 두 주인공을 안심하고 지켜볼 수 있을까? 4권의 제목이 하필이면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라서 더욱 초조하다. 누구의 아이를 잃어버린다는 것인지. 릴라, 레누, 이제 좀 편해지면 안되나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방구석 미술관 2 : 한국 - 가볍게 시작해 볼수록 빠져드는 한국 현대미술 방구석 미술관 2
조원재 지음 / 블랙피쉬 / 202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뷰어스클럽을 통해 출판사 지원을 받아 솔직하게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반 고흐는 아는데 왜 김환기는 모를까?"( p5)

 

"김환기를 왜 몰라요? 나는 압니다!" 라고 답할 수 있으면 참 좋았을텐데요. 아쉽게도 제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역시나 "김환기가 누군데요?" 였습니다. 누굽니까 정말? 유명하신 분이에요? 시작부터 의문 폭발하는 한국 미술 백 년의 정수가 이 한 권에 다 들었습니다. 돌아온 <방구석 미술관> 한국편! 호기심의 촉각을 세워 잘 보고 기억하겠다는 각오로 두 눈을 부릅뜨고서 한 편 한 편 집중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방구석 미술관>을 읽으면 김환기 화백이 누군지도 알 수 있습니다. 렛츠고!

 

천명자, 백남준, 이중섭. 한국의 화가로 제가 단박에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딱 세 명 뿐입니다. 교과서에 등장해 시험을 쳤던 백남준, 이중섭 작가. 미술관과 작가의 위작 대립으로 떠들썩했던 천명자 작가. 나혜석 작가는 이혼 고백장으로 먼저 알아 글쓰는 작가인 줄로만 알았지 화가라고는 생각을 못했지 뭡니까. 그밖으로 등장하는 여섯 분은 이 책으로 모조리 처음 알았습니다. 이응노, 유영국, 장욱진, 김환기, 박수근, 이우환. 어떤가요? 낯익은 이름이 좀 보이십니까? 제가 유난히 한국 미술을 몰랐던걸까요? 어쩜 이렇게까지 모르는 분들 뿐인지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미술 교과서에 다 등장하신 분들이라면 죄송합니다. 시험에 나온다고 선생님께서 체크해주신 부분만 암기했습니다ㅠㅠ)

 

일제시대와 6.25를 거쳐 대략 100여 년. 비슷한 시대를 관통한 작가들인만큼 결이 비슷한 절망과 역경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난, 고학, 예술에 대한 인식 미비, 전쟁, 가족 또는 연인과의 생이별, 일본 뿐 아니라 독재정권 시대 우리 정부의 탄압까지. 그중에서도 독특한 개인사로 제 마음에 남은 세 분 작가님이 계십니다. 목차를 읽을 때만 해도 천명자, 나혜석 두 여성 작가의 삶이 제일 인상적일 줄만 알았는데요. 책을 읽고 난 후엔 이응노, 유영국, 김환기 작가의 삶과 그림이 제일 마음에 와닿더라구요. 세 분 작가의 공통점은 예술에 앞서 가정 경제에 책임을 다한 분들이라는 겁니다.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두고서 일평생을 살았다는 점이 기이할 정도로 감동적이더라구요. 해외 예술가들의 경우엔 부유한 이보다 가난한 이에게, 생을 포기하고 예술에만 몰입한 작가들에 더 끌렸는데 한국 작가는 정반대라니 참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백남준 보다 먼저 세계에 이름을 떨친 이응노는 서화를 사사해준 스승의 집을 나와 제일 먼저 간판사부터 차렸다고 합니다. 일본 유학 때엔 신문 배달소를 열어 본인뿐 아니라 애들을 공부시키구요. 경제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여견이 마련되지 않았을 땐, 이를테면 감옥이나 프랑스 장기 체류 시엔 밥풀과 쓰레기를 재료 삼아 작품도 만듭니다. 좌절할 시간도 없었겠구나 싶은 일면이었습니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유영국은 예술적 자유를 억압 당하자 절필을 결심하고 선주가 되어 어선을 탑니다. 피난하면서는 갱지도 팔았고 양조사업장도 차렸는데 여견이 마련된 후엔 사업을 곧장 가족에게 넘기고 그림에만 전념합니다. 2019년 홍콩의 한 경매에서 132억원에 낙찰된 작품 <우주>의 화가 김환기는 부친 사후 모든 소작인의 빚을 탕감해주고 땅문서를 되돌려줍니다. 조혼한 아내와 이혼할 때에도 그시절 치곤 드물게 넉넉히 위자료를 주고서 작별을 했다고 하네요.

 

물론 그 밖의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삶도 흥미진진했습니다. 시대의 앞서간 여성으로서 많은 영역에서 최초라는 수식어를 남긴 나혜석은 삶의 애환도 무척 컸더라구요. 용감무쌍한 여러 일면이 존경스러운 한편 좌절의 적지 않은 부분이 본인의 이기심 때문은 아니었나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죽기 일보 직전의 고독"을 찾아 방랑한 천경자와 가난으로 외롭고 서글펐던 이중섭의 삶을 통해 예술가의 숙명과 고통을 목격하고 나니 이름을 남기지 못하는 범인으로서의 삶이 차라리 감사하게도 여겨졌습니다. 이름만 익숙할 뿐 삶은 완전히 생경했던 백남준과 아이의 낙서처럼도 보이는 장욱진의 그림도 기억에 남습니다. 저작권 문제로 실을 수 없는 작품과 작가의 생전 목소리를 큐알코드로 실어 놨는데 읽기 바빠 빠트린 몇 몇 개는 나중에라도 꼭 찾아서 보고 들으려구요. 세계를 돌면서 더 많은 화가들과 그들의 삶, 작품들의 이야기로 방구석 미술관이 개관했으면 좋겠습니다.

 

 

 


 

#방구석미술관 #조원재 #블랙피쉬 #미술책

#예술서적 #방구석미술관한국편 #베스트셀러

#미술 #방구석미술관2한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