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펭귄클래식 에디션 레드
윌리엄 S. 버로스 지음, 조동섭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2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펭귄클래식코리아 지원 도서입니다!

"<퀴어>는 그 안에 내가 적혀 있는 기분이다. 계속 써 나가는 것, 솔직하게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예방접종으로서의 글쓰기였다. 무엇을 글로 쓰는 즉시, 그 무엇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힘을 잃는다. 바이러스를 약하게 만들어서 우리 몸에 주입하면 항체가 생겨서 그 바이러스에 면역력이 갖춰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내 경험을 적음으로써 그 글들을 통해 이후의 위험한 모험에 대한 면역력을 얻었다."(p17)

'사악한 기운이 조앤을 죽였어. 이유가 되려고.'(p21) 퀴어는 시작부터 충격적이다. 버로스는 소설에 발 디디려는 독자에게 고백한다. 자신의 마약 중독 사실과 51년 9월, 아내 조앤을 사망시킨 총기 사고에 대해서. 아내의 죽음이 이유가 된 글쓰기를 설명한다. 참을 수 없는 괴로움 속에 자신의 여정을 적고 내보이는 일. 그리고 괴로움을 반복하여 읽는 일. 자기 학대와 다름 아닌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물러나고 싶었지만 프롤로그에서부터 발목이 잡혔다. 작가 자신과 다름없다는 주인공 리를 알고 싶었다. '아무 의미 없는 길고 고통스러운 여행의 좌절과 피로, 잘못된 방향 전환, 잃어버린 길, 빗속에서 기다리는 버스... 그리고 암바토, 퀴토, 파나마, 멕시코시티로 돌아가기'(p19)를 염치없는 호기심으로 쫓는다. 작가의 고통과는 별개로 소설은 흥미롭기 그지없다.

리는 친밀한 관계를 원한다. 리의 말에 정중하게 귀를 귀울이고 리의 성적 관심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자유로운 포옹과 키스 혹은 그 이상의 관능을 나눌 수 있는 남자를 곁에 두고 싶은 욕망에 영혼이 바스라질 지경이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남자들이 리를 스쳐가버렸다. 리가 그들에게서 발견한 의미를 그들 중 아무도 리에게서 발견하지 못했다. 외롭고 지쳐 침대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우는 리의 모습은 어린애 같다. 마약중독자에 동성애자인 어린애 같은 남자라니. 한심한 기분에 한숨이 나오지만 동시에 가엾어 어쩔 줄을 모르겠는 마음으로 리를 보게 된다. 리의 눈에 포착된 한 남자, 앨러턴이 리보다 좀 나은 사람이기를 바라지만 그럴 리가 없지. 속없이 게으르고 누구에게나 무관심한 앨러턴은 리를 경멸한다. 리는 앨러턴에게 낯부끄러운 추파를 던진다. "고통과 증오로 뒤틀린 추파"(p42)라는 게 어떤 모습인지 상상이 가지 않지만 리가 건낸 미소에 섬뜩해진 앨러턴이 자리를 피한 것을 보면 어지간히 꼴부견이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두 사람은 돌연 육체적 관계를 갖는다. 한 침대에서 잠들고 눈을 뜨는 며칠이 지속되도록 리의 추파와 앨러턴의 회피라는 관계적 양상은 변화가 없다. 스스로를 파파라 호칭하며 앨러턴에게 금전적 호의를 내보이는 리와 리의 금전은 손쉽게 취하면서 리의 마음에 구속되지 않으려는 얄밉도록 냉정한 앨러턴의 외면이 지속된다. 아름다운 소년들에 눈이 멀어 '내가 어쩌겠어? 호텔로 데려가? 그 아이들은 기꺼이 오겠지. 몇 수크레면...'(p118)이라고 생각은 할지언정 결코 손을 내밀어 소년들을 취하는 일은 없는 리. 방탕은 말뿐, 리의 마음과 몸은 오직 앨러턴에게로만 뻗어있다. 앨러턴의 마음을 지배하고 싶은 욕구로 리는 야혜(마음을 지배할 수 있는 식물)를 찾아 남미의 곳곳을 여행한다. 앨러턴이 동행한 그 길에서 더욱 슬퍼지고 더욱 고립되는 리. 거부 당한 리의 마음과 리를 조금도 원치 않는 앨러턴의 마음은 길의 어디쯤에서 작별하게 될까. 난잡하고 불결하며 폭력적인 멕시코시티를 벗어나 춥고 축축하고 어두운 푸요에 이르러 앨러턴에 대한 리의 탐욕은 조금쯤 사그러들었을까. 그런 의문으로 손에서 내려놓기가 힘든 책이었다. 마음이 싱숭생숭해 에필로그는 읽지 말까 싶기도 했다.

"무모하고, 꼴사납고, 난폭하고, 감상적인ㅡ 한마디로 형편없는 ㅡ 행동"(p15)이 소설 속에 가득하다. 책이 집필된 1950년대에는 도저히 출간될 수 없는 이미지와 내용을 담고 있고, 1985년 독자를 만난 그때에도 문제작 취급을 받았던 이유가 이해가 간다. 허나 우리는 2020년의 독자라 충격이나 놀라움보다는 마냥 애처로운 마음으로 리를 들여다 보게 될 가능성이 많은 작품이 아닌가 싶다. 군중 속의 고독과 때로 영혼이 찢기는 것만 같은 관계적 허기에 공감하면서. 리의 마음은 황폐한데 황무지 같은 그 속을 들여다보며 아름다움을 느끼는 나 자신에 살짝 죄책감마저 들었던, 기묘한 우울과 우울이 바래는 천진함이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마약중독자에게 천진함이라니 정말 말도 안되잖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