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인생의 이야기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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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에  SF 소설이라고 책 페이지나마 넘겨본 것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밖에는 없다.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에 대한 호기심으로 책을 빌렸는데 그나마도 읽다가 포기해서 나라는 인간은 SF로는 아예 개발되지 않은 독서인이랄 수 있다. 편협한 독서의 주요 원인에는 취향의 문제도 있지만 자기 인지가 워낙에 잘 되다 보니 내 머리나 이해력의 한계치를 염두해 지나치게 어려우리라 추측되는 책은 피하고 봤던 영향이 크다. 문과인인 내 입장에서 수학과 과학은 60점짜리 시험지의 공포와도 같았고, 내 독서의 가장 큰 목적인 즐거움과 재미를 헤친다는 생각에 그런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 책과는 인정사정없이 거리를 두게 됐던 것.

그런데 이 책,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아무래도 그런 내 독서 선입견과 취향의 큰 벽 하나를 제거해 준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테드 창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절반은 이해 하지 못했다. 정말 절반 뿐일까 싶기도 하다. 문장의 독해는 물론이거니와 작가의 상상력을 쫓아가기가 많이 버거웠다. 상상이 잘 되지 않는 부분들이 굉장히 많았다. 시작부터, 그러니까 바빌론의 탑 구조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부터 내 상상력은 테드 창이라는 작가의 깊은 바다로 나아가지 못한 채 테드 창 해변의 얕은 물에서만 첨벙첨벙 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해를 하든 하지 못하든 상관없이 나는 계속해서 책을 읽었고, 작가의 창작노트와 옮긴이의 말까지 무사히 완독할 수 있었다. 이해의 부족으로 인한 재독의 필요성을 충분히 느끼면서도 나는 그럼에도 "재미있다", "다시 읽고 싶다" 고 말하고 싶다. 이 재독이 책에 대한 내 이해를 높이기 위한 필요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저 온전히 "재미"를 위한 것이라고도 분명히 얘기할 수 있다. 이해와 재미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분명하게 깨우쳐준 독서였다.

그리고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보며 나는 또한 지금까지 내가 과학소설이라거나 SF라고 하는 장르에 대해 완전히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성급한 일반화일 수 있지만 오로지 이 책만을 두고 얘기하자면  SF가, 과학소설 같은 장르들이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과학이나 우주나 외계인이나 여타의 물리 이론과 수학 공식이나 생물, 기타 호르몬 등이 아니라 다름 아닌 "인간"이라는 것을 알 게 된 것이다. 작가가 무엇으로 그 소재를 포장한다 한들 결국 그가 하는 이야기는 인류의 이야기이며 때문에 그 안에는 역사와 신화와 현실이 응축되어 있고, 사랑과 우정, 모성애와 인류애, 모험과 배신의 활극이 스토리의 주를 이루며,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작가의 인문학적 통찰이 내포되어 있다. 때문에 나는 내가 이해하지 못할 영역으로 뻗친 작가의 상상력에 내 생각만큼 크게 좌절하지는 않았다. 내가 수영을 못한다고 해서 바다에서 보내는 여름 휴가가 지루하지는 않았던 것처럼. 물론 바다 헤엄을 칠 수 있는 사람은 나와는 또다른 류의 즐거움을 누리고 나보다 더 넓은 바다를 볼 것이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지만 고작해야 해변을 밟아본 것만으로도 내 이번 여행은 성공적이었고, 해변을 타고 올라오는 파도가 발목을 스칠 때엔 기꺼이 즐거운 비명을 내지를 수 있었다. 언젠가는 나 또한 깊은 호흡으로 테드 창의 깊은 바다 밑까지 침잠할 수 있을 것을 기대하게 하는 즐겁고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런 즐거운 독서를 할 수 있게끔 멋진 책을 써주신 작가님께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덧붙여 모든 이야기가 다 좋았지만 여덟가지 단편 중 가장 좋았던 것은 순서 없이 다음과 같다. 주제와 관계없이 동화같은 상상력을 보여준 "바빌론의 탑"과 눈시울 붉어지는 모성이 담긴 "네 인생의 이야기", 강철군화의 SF화 같은 느낌의 "일흔두 글자", 어딘지 오베라는 남자가 생각나는 "지옥은 신의 부재"였다. "인류 과학의 진화"는 어렵지는 않았지만 그냥 과학책 서문 같은 느낌의 짧은 단편이라 별 느낌이 없었고, 나머지 "이해"와 "영으로 나누면" 두 이야기는 그냥 어려웠다. 그럼에도 재미가 없지는 않아 수월하게 읽어내렸다는 것이 아이러니. 아차,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가 빠졌구나. 모든 이야기가 다 좋았지만이라는 말은 취소해야겠다. 나쁘다고는 할 수는 없었지만 지루함을 참지 못해 깜빡 졸고 말았기 때문에 이 이야기가 처음이 아니라 마지막에 배치된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몇가지 필사해 두고 싶은 장면이 있어 얹어둔다.




바빌론의 탑

"생각해보게. 해가 서쪽 산마루 뒤로 넘어갈 때면 시나르 평원은 어두워져. 하지만 우리는 산마루보다 더 높은 곳에 있으니 여전히 해를 볼 수 있지. 탑에 있는 우리가 밤을 보려면 해가 서산 너머로 더 내려가야 한다는 얘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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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위를 향해 펼쳐지는 천개처럼 탑을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힐라룸이 시각을 잴 수 있을 정도로 느렸지만, 접근해 옴에 따라 점점 빨라지더니 급기야 눈 깜짝할 새에 그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 다음 순간 그들은 박명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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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라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는 밤의 정체를 깨달았던 것이다. 밤이란 하늘을 향해 드리우는 대지의 그림자였다.




나는 이게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하고 한참을 생각했다. 밤이 하늘 꼭대기에서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만을 봐왔던 나로서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밤이라는 것은 도무지 이해도, 상상도 되지가 않았다. 그러다 탑에 박힌 별 얘기가 나왔다. 별이 가까운 하늘을 회전하다 탑에 와서 콱 하고 틀어박혀 회전을 했다는 것이다. 아, 그랬지 참. 이건 과학 소설이 아니라 "공상" 과학 소설이었어. 실지의 현실이 아닌 거야. 짧은 소회 후 더 뒤로 가서야 나는 작가의 완전한 상상력을 접할 수 있었다. 하늘의 천장이라고 등장인물들이 떠들어대던 그것을 나는 신화에 비추어 그저 바빌론 사람들이 하늘에 천장이 있을 것이라 추측하고 탑을 쌓고 있다로 이해했었다. 하지만 작가의 상상력은기상천외해서 하늘 꼭대기에 아예 화강암이나 대리석 같이, 마치 땅에 해당하는 느낌의 천장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니 해도 달도 별도 다 천장 아래에 있어 천장 가까운 높은 하늘에서 보면 아래에 있는 해와 달과 별을 볼 수 있었던 것. 해가 진 산마루에서부터 밤이 착,착,착,착 위로 올라왔던 광경도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광부와 돌을 다루는데 능숙한 이집트인들을 하늘 꼭대기로 올려 천장에 뚜껑을 만든다는 발생이 기발하고 재미있어 인상적이었다.



네 인생의 이야기 


<콘택트>라고 97년에 개봉했던 조디 포스터의 영화가 떠오르는 이야기였다. 외계 생명체와 교섭해 그들의 언어를 배우며 소통한다는 점에서 소재가 비슷한 점이 있었다. 그러나 "네 인생의 이야기"는 98년도에 발표된 이야기이므로 그 시절 <콘택트>와는 별 연관성은 없지 싶다. 그런데 테드 창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번 11월 개봉 영화 제목이 또 <컨택트>라 헷갈릴 분들이 여럿 생길 것 같기는 하다^^;; 외계인이 등장하고, 내 입장에선 아리송한 직관 언어 '헵타포드B'가 나오고, 언어의 터득으로 인해 자신의 최종 목적지를 알게 되는 한 언어학자의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동시에 강한 모성을 지닌 어머니의 이야기이기도 해서 나는 눈시울을 붉히며 아주 감동적으로 읽을 수 있었다.

 


우리 관계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사실을 내가 매일 자각하게 되는 것은 네가 처음 걷기 연습을 하면서부터야. 너는 쉬지 않고 어딘가로 달려나가겠지. 네가 문지방에 부딪히거나 무릎이 까질 때마다 나는 너의 아픔을 내 것처럼 느끼게 돼. 마치 말을 안 듣고 멋대로 행동하는 팔이나 다리가 하나 더 생긴 듯한 느낌이지. 내 몸의 연장이니까 지각 신경이 느끼는 아픔은 고스란히 나한테 전달되지만, 운동신경은 전혀 내 명령에 따르지 않는 꼴이야. 정말 불공평해. 나의 본을 떠 빚은 움직이는 부두 인형을 낳은 기분이랄까. 계약서에 서명할 땐 이런 조항을 읽은 기억이 없어. 이것도 계약의 일부였단 말이야?


반대로 네가 웃는 것을 볼 때도 있겠지. 이를테면 쇠그물 울타리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 이웃집 강아지와 놀 때. 어찌나 웃어대는지 너는 급기야 딸꾹질을 하기 시작하지. 강아지가 옆집 안으로 들어가면 너의 웃음 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너는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쉬기 시작해. 그러다 강아지가 다시 밖으로 나와서 네 손가락을 핥고, 그럼 너는 또 꽥 소리를 지르고 웃기 시작할 거야. 그 소리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소리이지. 내가 분수나 샘이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만들어주는 소리란다.


자기 몸의 안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너의 행동을 목격하고 심장마비를 일으킬 지경이 될 때 내가 그 소리를 기억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P 193-194



 

 

 

 


며칠전 엄마가 운동화 좀 주문해 달라고 전화를 하셨다. 우리 엄마는 나와는 다르게 발이 아주 작아 225사이즈의 운동화를 신으신다. 인터넷으로 신발을 사기엔 사이즈가 아주 애매하다는 소리다. 거기다 발만큼 키가 작은 탓으로 연세가 드시고도 키높이 운동화를 포기하지 못하신다. 엄마는 삼십대에 등산을 하다 발목을 삐었는데 어린 나와 남동생을 키우느라 제대로 발목을 쉬게 둘 여가가 없었으므로 아직도 그 후유증에 시달린다. 그래서 나는 매번 키높이 운동화는 이제 그만 신고, 매장에 가서 편안한 운동화를 사라, 또는 사자 말씀을 드리지만 씨알도 안먹힌다. 매장에서 사는 건 예쁘지가 않단다ㅡㅡ;; 엄마 좀.... 잔소리를 쏟아내다 짜증이 확 나려는 걸 그냥 꾹 눌러참고 인터넷 여기저기를 뒤져 주문을 해놓았다. 이 단락들을 읽으며 나는, 짜증없이 엄마의 운동화를 구매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어릴 적 내가 무릎이 까져 들어오고 문지방에 넘어져 엄마를 걱정시켰던 것과 같이 나도 엄마의 키높이 운동화 하나쯤은 걱정을 하고 살아야 우리 사랑이 공평하지 않은가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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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령 유랑단
임현정 지음 / 리오북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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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첫 로맨스 소설은 제목도 기억이 안나는 영국 18세기 아니면 19세기 배경의 할리퀸 로맨스였는데 새빨간 머리카락에 콧잔등에 주근깨를 가진 여성과 검은 머리의 등치가 집채만한 공작의 숨막히는 러브 스토리였다. 공작의 마차에 여주인공이 치였던가? 어찌됐든 운명적으로 만난 두 사람의 육체적 끌림을 그냥 막, 아주 막... 이거 설명해야 돼, 말아야 돼? ㅎㅎㅎㅎ 하여튼 15살 중학교 2학년 때였으니 그 문화적 충격이 상당하여 거의 1년 동안은 로맨스 소설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했었다. 그러던 것이 판소의 유행을 타고 넘어 로설은 또 띄엄띄엄, 드라마화 된 유명한 원작만 찾아봤었다. 그 옛날 1퍼센트의 어떤 것이나 커피프린스 1호점이나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 같은 책들을.  <꽃도령 유랑단>은 그런 내가 아주 오랜만에 접하는 한국 로맨스인데 완전 반전! 진짜 깜놀!! 대에에박!!! 414 페이지 끝을 보고 나서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출판사 블로그도 다시 들어가  보고, 인터넷 서점의 같은 분야 인기책과 작가님 전작까지 확인했다. 가을 향취를 거슬러 설설이 피어난 철쭉같은 로맨스라고만 생각했는데 작가님이 "꿈 깨라구!" 소리치며 내 등짝을 걷어차는 느낌이었거든.

 

 

암만 봐도 이거 장르가...... 추, 추리인데? 스, 스릴러 아닌가? 로맨스는 그저 밑간용이었나니!!!
와...나 진짜 깜놀했다. 남장 여자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성균관 스캔들 같을 줄 알고 로맨스 로맨스 하며 시작했는데 액자식 구성으로 뭐가 자꾸자꾸 나와. 어랏. 근데 이 얘기들 심상치 않은데? 뭐지?? 뭐지??? 하며 따라가다 보니 로맨스로 시작한 소설이 조선시대판 코지 미스터리로 둔갑한다. 띠링~ ㅎㅎ 요즘 한국 로맨스 소설의 성향을 모르니 <꽃도령 유랑단>이 평범한 건지 아닌지 분간도 안 간다. 어찌됐든 출판사에서 올려준 스토리 개요 절대 꼼꼼히 읽지 말시길. 그래야 이야기를 따라가며 추측하고 꼬집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작가님이 시인 출신(?)이셔서 그런지 문장들이 정말 토속적이면서도 예쁘다. 쌀뜨물 같이 뽀얀 달빛이나 숭늉 같은 아침 햇살, 오래 고은 조청 같은 눈동자 같은 것들이 작가님 표현처럼 깃털로 가슴을 간질이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밖의 모든 문장들이 넘 예쁘게 수 놓아진 자수 같은 느낌이었다. 다만 딱 한 가지, 은별과 도령들과 기타 남정네들의 외모가 두루 뛰어나다는 걸 강조하려다 보니 자꾸만 그 아름다움을 묘사하려고 해서 살짝 부담스러웠다. 다른 로설과 달리 천편일률적인 묘사는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그리고 진짜 대박 반전은 여섯 도령 이 머스매들이 아니고.........
거기 머스매 어후, 입이 근질근질하다. 스포하고 싶다, 쓰다 보니 자꾸 스포하고 싶어. 그래도 꾹 참아야지. 하여튼 장르 자체가 반전이라는 한 가지를 제외하고도 반전이 더 남아있다는 걸 꼭 기

억해두시기를. 으흥흥~>. <

 

 

온갖가지 재주를 다가진 요물같은 은별과 은별이라면 환장하는 여섯 꽃도령들의 봄꽃 같이 나리는 이야기들에 다들 푹 빠져보시기를 바라며, 춘풍 이불 아래 숨어드는 로맨스는 없지만 그래도 설레는 <꽃도령 유랑단> 이었습니다~~ 아, 보람차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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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홍어
김주영 지음 / 문이당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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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7월달? 8월달? 그 즈음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생 때 읽었던 책들이 자꾸만 생각나고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4월부터 시작해 6, 7월 초반까지 몸이 많이 안좋았고 주위에서 자꾸만 이직을 권유해 머릿속이 복잡해서였을까. 심적으로 힘들어서인지 자꾸만 마음이 편안했던 학창시절로 숨고만 싶었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공부는 그럭저럭이어도 으하하하^^;; (민망민망) 참 속 편한 학생이었는데.

이 책 홍어는 대학 때 읽은 책인데 학교 도서관에서 빨간 양장본으로 빌려 봤었다. 본래는 이렇게 하얀 표지가 있는 걸 도서관은 관리를 위해서인지 몽땅 벗겨놓는 걸 생각하지 못해서 온라인 서점을 무턱대고 뒤지는 바보 같은 짓을 할 뻔 했다. 물론 문학동네에서 더 분위기 있게, 예쁘게 홍어를 내어놓았지만 그 모양 그 맛 그대로로 읽고 싶은 생각이 컸던 탓에 나는 문이당 책을 다시 선택했다. 안타깝게도 문이당 책들이 모두 품절 상태라 결국 중고도서를 구입했는데 상태 상의 책인데도 책이 노르스름한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안쪽은 깨끗해 새책같으니 그에 만족해야겠지. 책 가격이 2,900원인걸.
 

가독성 높은 쉬운 문체에만 익숙해진 탓인지 김주영 작가님의 미학적이면서도 향토적인 문장들을 읽어내기가 새삼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초반을 어떻게 잘 넘기고 나니 아름다운 문장만이 줄 수 있는 향취에 흠뻑 빠질 수 있는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다. 고아하다는 게 이런 것이겠구나. 많은 대화들이 사투리로 펼쳐짐에도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서정적인 문체와 내용으로 참 유명한 홍어이지만 사실 나한테는 자꾸만 한 장면으로만 되풀이 되는 책이었다. 바로 북엇줄. 지금 우리 세대 공갈 젖꼭지마냥 (요즘도 이렇게 부르나 모르겠다. 육아용품을 잘 몰라서) 그 시대 어른들은 말린 홍합 같은 걸 실에 꿰어 아이 목에 걸어주었던 모양이다. 여기, 세영이의 집에 버려지는 호영이의 목에도 그렇게 말린 건어물이 걸려있는데 드물게도 북어를 실에 꿴 줄이었다. 아이는 그 조막만한 손으로 부드럽고 양양한 살결을 쥐고 한도 끝도 없이 북어를 핥아먹는데 그 묘사가 미묘하게 가슴에 남아 홍어하면 아, 애기가 북어 빠는 그 소설? 이라는 말부터 대뜸 나온다. 다른 건어물과 다르게 마냥 부드럽기만 한 북어 살결을, 그래서 이가 없더라도 잇몸으로 짓눌러 삼킬 수도 있는 걸 무작정 핥고만 있는 그 갓난아이의 머릿 속, 마음 속에 남겨져있을 인이 심상치 않았던 탓인 것 같다. 그 안타까운 묘사가 호영이고, 세영이고 그 이름들을 까마득히 다 잊을 때에도 북엇줄을 빠는 아이로 계속 기억에 남아 다시 이 책을 불러들인 것 같달까. 리고 다시 읽는 홍어에서도 나는 길안댁이나 삼례나 세영이 보다 어쩐지 호영이 그 아이에게만 자꾸 눈이 가는 것이다. 옹알이도 없이 가만히 누워 북어를 핥고 있는 그 갓난쟁이가. 모두가 자유를 찾아 떠난 집에 애비 역할조차 못하는 남자와 남아 북어를 빨고 있을 그 아기가 책장을 덮은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마음에 걸린다. 또한 그럼에도 씀바귀를 씹어 삼키며 제 아들만을 키우던 길안댁과 눈밭에 오줌을 뿌리는 걸로 마음의 갈망을 달례던 삼례 이 두 여성의 자유로운 비상은 통쾌했고, 거꾸로 신은 고무신이 주는 이야기에는 속이 후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장을 콩닥대다 날아가버린, 또 날려준 두 마리의 참새 처럼 두 여인 다 누구 손에도, 어떤 운명에도 불들리지 않고 마음 편히 살아가기를. 세영이 삼례와 제 모친을 안전하게 찾아가기를. 이번 겨울, 세영의 집 앞을 뒤덮었던 거위털 같이 조용한 눈을 바라며 홍어 읽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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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달려라, 스미시
김영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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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다닐 때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책이었다.

읽을 당시 잔잔한 내용이라 아주 크게 인상 깊다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읽는 내내 재미있었기에 

이 책을 다시 한번 더 읽어야지 생각을 했더랬다. 물론 그런 생각조차 시간이 더 더 지나니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어떤 책은 작가로 또 어떤 책은 제목이나 주인공, 표지, 느낌으로 기억에 남는다. 그리도 다른 어떤 책들은 모든 전체적인 분위기에 앞서 문장 또는 단어 하나로 이미지를 남기는데 나는 이 책을 마냥 사과 과수원의 인상으로 기억에 남겨두고 있었던 것 같다. 청사과를 보고 문득 이 책이 떠오른 것이다. 제목이 뭐였더라 한참을 궁리하다 생각해냈을 정도로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을 한번 머릿속에 떠올리고 나니 다시 읽고싶은 마음이 굴뚝 같아져서 인터넷 서점에 들어갔더니 이미 품절이란다. 하기는 내 대학생활도 까마득한 옛날이니 ㅎㅎㅎ

결국 알라딘품절센터로 구매해 손에 쥔게 7월 28일인데 오늘에서야 다 읽고 리뷰를 쓴다^^

새벽에 눈 떠서 잠깐, 퇴근해 또 잠깐 그렇게 읽으니 이주를 넘기도록 겨우 이백 페이지 남짓, 오늘 아침까지도 책의 절반도 가있지 않았었다. 빨래 돌리고 청소하고 곰팡이 생긴 벽에 락스 뿌리고 땀에 흠뻑 젖어 락스 때문인지 더위 때문인지 약간 어질어질한 상태로 찬물 샤워하고 누웠다 남은 이백 페이지 정도는 신기할 정도로 몰입해서 술술 읽어 내렸다. 그러니까 스미시가 해바라기 밭에서 차에 치이는 장면부터. 다시 읽어도 엄청엄청 재미있다, 손을 못놓겠다 이건 아닌데 모르겠다. 다음 내용이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뭔지 모르게 꾸준히 페이지를 넘기게 되고, 여기서 책을 덮어도 크게 아쉽진 않겠다 하면서도 결말까지 보게 되는 책인 것 같다. 그러다 한 십년쯤 지나 제목이 뭐였더라 하며 또 한번 읽게 될지도 모를 책 말이다. 이번에는 사과과수원이었지만 그때는 무얼로 이 책을 다시 떠올릴지. 전세집 곰팡이 필 때 읽었던 책? 사과과수원도 너무 난데없었어서 ㅎㅎ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이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비슷한 느낌으로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 아참, 사과과수원을 얘기해 놓고선 리뷰에서 쏙 빼놓았다. 민망^^;;

주인공 스미시가 자전거를 타다 자전거 동호회 팀 일정에 잠시 합류했을때

그의 침낭 속에 들어왔던 젊은 여성의 가슴을 사과 과수원에 비유를 했었다. 어쩐 일인지 나는 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보다

그 사과 과수원이라는 단어에 그때도 지금도 마음이 확 끌렸는데 곰곰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다. 그가 여성에 대한 생에 전반적인 결핍에도 정조를 지켜서? 굳이 이유를 꼽으라면야 이런 내용을 얘기하겠지만 그냥.. 잘 모르겠넹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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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생물들 수의사 헤리엇의 이야기 1
제임스 헤리엇 지음, 김석희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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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세상만사가 결국은 가장 좋은 방향으로 일어나게 마련인 거야 (p213)

 


좋다. 진짜 좋다. 으~ 좋아! 하며 머리맡 베개라도 부둥부둥 끌어안고 싶을만큼 벅차게 재미있다. 올해 읽은 모든 책을 통틀어 <이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생물들>이 가장 좋았다. 2016년이 두 달이나 남았지만 이런 생각이 조금도 성급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읽는 내내 진심으로 행복해서 이 책을 못봤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면 몸서리가 쳐질 정도다. 인제 막 완독을 끝내놓고서 곧장 재독을 희망하게 만들 만큼이니 적어도 내 취향에선 올 한 해 이런 책은 없었다. 단연코 최고!! 그래, 요즘 말로 꿀잼이었다.


농장 키우기 게임스런 표지부터가 참 귀여워 마음에 쏙 들더니 고작 6장의 페이지도 다 넘기기 전 내 눈물을 쏙 빼 마냥 감동적이고 은은한 책인가 보다 했다.  출산 후 한줌 힘없이 헐떡이던 어미가 새끼의 냄새를 맡고 핥아주고 젖을 먹이는 장면이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심쿵해서.그런데 웬걸. 23살 갓 대학을 졸업한 풋내기 수의사 헤리엇과 매우 자주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하는 붕어머리 원장 의사 파넌과 허구헌 날 사고를 쳐대는 사랑스런 말썽꾸러기 트리스탄과 다양하게 등장하는 농부들과 동물들 때문에 아주 죽는다고 웃었다. 그리고 책에 나오는 모든 장면, 인물과 사건 뿐만 아니라 요크셔 데일스의 자연이 눈에 잡힐 듯이 선명해서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아주 안정되고도 편안한 기분이 들었는데 집중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독서 내내 내 기력은 손톱만큼도 뺏기지 않았다. "반짝이는 강물, 청동색과 황금색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나무들, 향기로운 초록색 풀밭"을 상상하는 것이 마냥 쉬워서 이 목가적인 시골 생활과 내쉬는 숨 한줌이 모두 깨끗할 것 같은 묘사들에 몸과 마음이 함께 위로받는 듯 했다. 무슨 힐링 책도 아닌데 말이다. 이런 환경에서 돈을 받고 일하는 게 부당하다고 생각할만큼 만족해하는 헤리엇이 직업인으로서 참 부럽더라. 물론 그 또한 차츰 수의사로서 불평불만이 튀어나오는 순간들이 생기지만 그조차 하나같이 유머가 넘쳐서 마냥 재밌다. 그야말로 감동과 웃음의 버라이어티. 욕 한 마디 없이 이렇게 건전한 웃음을 완벽하게 번역해내신ㅡㅡ물론 원서를 읽지 못하니 비교할 순 없지만 내 경우 어느 정도 오역이 있더라도 가독성이 높은 책을 최고로 치기 때문에ㅡㅡ 김석희 번역가님께 박수를 보내고 싶다. 덧붙여 요크셔 사투리를 우리 사투리체로 번역하지 않고 표준어로 옮겨주신 점 또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만약 이 책까지 말씀하신 대로 제주나 전라나 경상  또는 출생도 신분도 알 수 없는 희한한 사투리ㅡㅡ네버랜드 클래식판 비밀의 화원에서 공경희님이 요크셔 사투리라며 종결어미로 "어이"를 사용하셨다. 주무셨어이, 스프 먹었어이, 정원에 나갔어이, 뭐뭐 했어이? 같은 느낌으로 번역된 문장들에 나는 비밀의 화원 읽기를 포기했다. 그 책이 여전히 새책 같은 상태로 책장에 꽂혀있는 걸 보면 마음이 쓰리다ㅡㅡ를 썼다면 난 요크셔가 배경인 소설 따위 두 번 다시는 거들떠보지 않았을 테다. 하지만 이 소설은 완벽히 표준어로 쓰여졌고 몰입감을 깨트리거나 불편할만한 요소 등은 아무 것도 없으니 안심하고 읽으시길 바란다^^

 


밤새 책을 읽고 리뷰까지 작성하고 나니 훌쩍 새벽 세 시를 넘겼다. 기특한 책을 몇번이고 쓰다듬다 (표지를 만지는 느낌도 굉장히 좋다^///^) 배부른 한숨을 쉬며 베개에 머리를 누이는 지금, 금요일 아침 출근조차 걱정되지 않을 만큼 이 시간이 마냥 행복하다. 이 한 권의 책 <이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생물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진가를 알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리뷰를 올린다.


*아참, 어쩌다 보니 10월 한달 동안 김석희님 번역책만 두 권을 읽게 됐는데 무슨 우연인지 주인공들 이름이 같다. 위대한 개츠비의 주인공 제이 개츠비도 본명이 제임스 개츠인데 이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생물들의 주인공의 이름은 제임스 헤리엇이다. 제이 개츠비, 제임스 개츠는 이름조차 텅 빈 느낌으로 텁텁한데 제임스 헤리엇은 이름까지 상냥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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