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타메로네 - 테일 오브 테일스
잠바티스타 바실레 지음, 정진영 옮김 / 책세상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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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명의 대담한 입담꾼들이 '둥근 들판' 왕궁으로 모여들었다. 임신한 왕자비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욕망을 채워주기 위해  왕자 타데오가 이야기꾼들을 소집하여 연회를 연 까닭이다. 지난 날 요정의 저주로 무덤에 묻혔던 왕자 타데오가 왕자의 저주를 푼 노예 왕자비와 함께 이야기꾼들을 독려하는 가운데 그들 이야기꾼 사이로 '울창한 계곡'의 공주 초차가 숨어든다. 노래하는 난장이와 황금 병아리를 거느린 암탉, 금실을 잣는 인형으로 왕자비를 유혹하여 이 이야기의 장을 꾸린 장본인인 초차와 유부남의 신분에도 첫눈에 그녀에게 반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타데오 왕자, 뱃속의 왕손을 때려 죽이겠다 왕자를 협박하면서도 탐욕스럽게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노예 왕자비. 세 명의 욕망이 꿈틀꿈틀 술렁이는 와중에 아라비안나이트의 밤이 열리듯 초차를 포함한 열 명의 이야기꾼들은 쉰 가지의 이야기로 닷새의 신비로운 날들을 채워나간다.

 

동화라기엔 지나치게 탐미적이고 야설이라기엔 순수하게 환상적인 17세기의 신비로운 이야기집 펜타메로네를 만났다. "요술과 마술, 요정과 용, 괴물 오그르와 오그레스, 노파와 마녀, 공주와 왕자, 미녀와 야수, 추남과 추녀, 금은보화와 약탈, 사랑과 배덕, 강간과 근친상간"의 고전적 욕망을 만날 수 있는 잔혹동화가 이 책 펜타메로네가 처음은 아니지만 중세를 배경으로 한 기괴한 이야기들은 언제나 호기심을 동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 듯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 특히나 이번에 출간된 펜타메로네는 신데렐라와 백설공주, 라푼젤과 잠자는 숲 속의 공주, 헨젤과 그레텔, 당나귀 가죽, 장화 신은 고양이와 미르테 나무의 요정 등 샤를 페로와 그림형제, 안데르센의 동화로 만났던 익숙한 이야기들을 가장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보여주다보니 흥미가 배는 높았던 것 같다. 빨간망토로 차림한 매혹적인 표지와 잔인하고, 문란하고, 퇴폐적이고, 사악하고, 어두운 동시에 아주 근사한 이야기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어 어찌나 반갑고 흥미진진하던지. 아무래도 가장 날 것의 이야기, 가장 가지치기가 덜 된 형태의 이야기이다 보니 오늘 날의 막장 드라마는 막장 축에도 못끼겠다 싶은 이야기들이 책 속 도처에 깔려있는데 순수한 동화만을 보아왔던 사람이라면 깜짝 놀라 책을 덮게 될지도 모른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와는 전혀 반대로 근래 읽은 동화 완역본들 중에서 가장 수월하게 읽고 끝 페이지까지 마무리 할 수 있었는데 동화라는 장르와 옛스러운 비유 자체가 취향이기도 했지만 번역 자체가 워낙에 매끄러웠던 탓이다. (앞으로 정진영 역자분의 책은 무조건 믿고 선택할 수 있을 것 같다.)  고래로부터 막장 이야기 앞에서는 도끼 자루 썩는 줄을 모른다고 한번 잡고 읽다 보면 백 페이지든 이백 페이지든 훌쩍훌쩍 넘어가는 이야기 속 친숙한 동화 주인공들이 반갑다가도 해괴한 과정과 끔찍한 결말에 눈살이 찌푸려지기도 하고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잠든 채로 강간 당해 아이를 가진다고 생각해 보라), 생전 처음 들어보는 낯선 얘기들, 이를 테면 미모를 위해 면도칼로 자신의 살가죽을 벗기는 노파와의 만남은 지나치게 징그러워 심장이 콩콩 뛰기도 했다. 흔하진 않지만 간간히 튀어나오는 빼어나게 순수하고 재미난 상상들은 할로윈데이 캔디처럼 달콤했고 말이다. 남편감을 아몬드 반죽과 진주알, 사파이어와 루비, 석류와 사향과 향수로 빚어 결혼을 완성하는 핀토 스마우토 이야기가 특히나 재미났는데 내 남자를 내 손으로, 그것도 아몬드 반죽으로 빚어 탄생시킨다는 상상이 낭만적이고 고소하게 느껴졌다. 쿠키 같은 몸통에 석류즙이 피처럼 흐르는 남자라니 이건 뭐 평범한 여성이라도 흡혈 욕구가 생길만한 존재이지 않은가 싶어서 킬킬킬. 노파의 얘기랑 연결시키면 왕이 그랬듯 손가락을 맛보다 그 맛에 미혹되어 하나하나 뜯어 먹고 흘러내리는 석류즙 같은 피까지 핥아먹고 이래야 진짜 잔혹동화인데 참고로 핀토 스마우토는 끝까지 해피엔딩이다. 베르타 아가씨 완전 부러움!! 피그말리온과 유사하지만 훨씬 더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 이야기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 (아무래도 남녀가 뒤바뀐 탓이려니) 이런 소재의 동화가 더 있는지 한번 찾아봐야 할 것 같은데 베르타 아가씨 같은 여자 어디 또 없나? 잔혹 동화의 또다른 버전까지 기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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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구할 수 있을까
루스 오제키 지음, 민은영 옮김 / 엘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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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캐나다 해안에서 발견된 작은 반짝임로부터 시작한 이야기였다.
반짝이는 무언가는 따개비가 다닥다닥 붙은 검은 봉지였고 그저 해안가로 밀려온 쓰레기나 표류물의 일부일 줄로 알았던 더미 속에는 밀봉된 헬로 키티 도시락 통이 들어 있었다. 곰팡이 잔뜩 쓴 부패한 음식물이 아닐까 했던 의심은 곧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라는 한 권의 책과 공병(空兵)의 시계, 프랑스어로 쓰여진 편지 묶음들, 그리고 보라색 잉크로 번져가는 열여섯 여자 아이의 숨겨진 비밀 일기장으로 대체 되었다. 일어로 쓰여진 일기장과 불어로 적힌 편지들 그 속에 존재할지 모를 비밀들은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던 캐나다 웨일타운의 섬 사람들과 야스타니 일가 4대 가족사를 시공간을 초월한 인연들로 엮어 나간다. 나오를 추적하기 위한 웨일타운의 낮과 밤은 사람과 사람이 마법처럼 연결되는 순간의 포착이자 주인공 루스와 나오와 유시(시간속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마술같은 이야기의 포문이었던 것이다.

"당신은 나와 통하는 유시인거고 우린 함께 마법을 만들어낼 거에요!"

                                               ㅡ 내가 너를 구할 수 있을까, p12, 엘리

작가 루스는 섬 해변에서 나오의 일기장을 발견하여 읽기 시작하고 부터는 도통 다른 일에는 집중할 수가 없다. 이를테면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가 돌아가실 즈음부터 쓰기 시작한 자전적 소설의 정리 같은 중요한 일들 말이다. 현재를 살고 있는 루스는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잊어버린 채 과거를 살고 있는 일기장의 소녀 나오에 대해서만 집중한다. 아는 것은 이름뿐. 실존 인물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이 소녀를 추적하는 것에 대해 남편 올리버는 회의적인 반응이지만 루스는 다르다. 이미 그녀의 삶 속으로 풍덩 뛰어든 나오를 나몰라라 할 수 없다. 나오가 궁금하고, 나오의 삶이 아프고, 아이가 겪는 모든 상황과 고민들에 분노하고 연민하다 급기야는 생각하게 된다.

"내가 너를 구할 수 있을까"

가정과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채 이지매와 매춘이라는 절망적인 환경으로 내몰린 이제 막 열 여섯 살이 된 어린 여자 아이 야스타니 나오코. 행복하기를 멈춘 아이 나오. 무기력하게 수족관 앞에 앉아서 시간을 죽일 뿐인 엄마라도, 실업자에서 히키코모리로 전락한 아빠라도 원망 대신 사랑으로 감싸는 순순한 아이이지만 그 사랑이 나오를 약탈하는 편협하고 폭력적인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는 방패가 되어 주지는 못한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증조 할머니 지코에 대한 애정과 존경도 나오의 삶에선 그저 작은 휴식일 뿐 궁극적 평온과는 거리가 멀다. 지코는 매일 매 순간 모든 사람의 극락왕생을 빌며 염주를 돌리지만 그 구제의 엘리베이터 속에 나오의 자리는 없는 것만 같이 아이는 허무하고 고독하다. 지코가 104세와 그에 더하여 세지 않는 시간 속을 계속해서 살아온데 반하여 16세의 나오는 이만 자신의 시간을 멈추기로 결심한다. 남아 있는 시간으로부터의 영원한 퇴장. 오로지 그 순간만이 자신이 생에 대한 결정력을 가지며 의미 있는 인간으로 거듭나는 순간일 것만 같다.

"난 투명 인간인가봐요...... 아마 이런 건가봐요. 나우now란 건 바로 이런 느낌인가봐요."
                                                                 
                                             ㅡ 내가 너를 구할 수 있을까, p479, 엘리
                                                           
뿌리 깊게 다져지는 자살이라는 결심 앞에서 나오는 생에 가장 사랑했던 존재 야스타니 지코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자고 마지막으로 마음을 먹게 된다. 나오 스스로 선택한 야스타니 일가의 멸족 앞에서 알 수 없는 누군가이지만 나의 유시인 당신에게 지코의 생을 남길테니 이를 보아달라 고백하는 나오. 그러나 편지는 지코의 일대기이기 이전에 나오가 겪고 있던 고통의 기록서이자 마치 루스에게 보내는 조난 신호인 것만 같아 루스도 그리고 함께 일기를 읽게 된 독자인 나도 나오에게 온통 마음을 뺏기게 된다. 나오에 대한 이 일기는 어디까지 이어질까. 이 일기가 끝을 맺는다면, 또 맺지 못한다면 매번 인생의 종말에서 발돋움 하지 못한 채 지상으로 추락하는 하루키2와 더불어 자신 또한 쓰러진 유시가 될거라 외치는 나오의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공병의 시계와 프랑스어 편지, 그리고 나오의 일기장은 도대체 어떤 연유로 캐나다 작은 섬 웨일타운의 해안가까지 밀려오게 된 것일까. 혜성처럼 등장한 나오의 영웅, 대한민국 사(史)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 가미가제 특공대 대원 하루키 1은 일본의 진정한 전쟁 영웅이었을까.


책을 읽기 시작하는 동시에 조각조각난 퍼즐들이 몇 줌이나 눈 앞으로 흩뿌려졌다. 알록달록하고, 언제 바람에 날려갈지 몰라 아슬아슬한 이 퍼즐들을 바삐 꿰어 맞춰 그림을 완성시키고 싶은 한편으로 희한할 정도로 마음이 느긋해져 글 중간중간 걸음을 멈추어 한 문장 한 문장 읽고 또 읽고, 아침이면 읽었던 페이지를 한참 앞으로 되돌려 다시 읽게 되는 그런 소설이었다. 죽지 마 나오, 죽지 마요 하루키. 책을 읽는 내내 용기를 잃지 말라고 살아야 한다 살았으면 좋겠다 라는 응원을 나오와 하루키 두 사람에게 보냈다. 하루키 2와 같은 이름을 가진 하루키 1의 편지와 일기 앞에서는 비통함과 안타까움을 참을 수 없었다. 한국 전쟁 당시 쓰여진 학도병 이우근군의 편지가 떠오르는 그 일기들 속 어린 소년의 마음과 상황이 너무나 가슴 아파서 차마 페이지들을 넘기지 못하고 한참을 같은 쪽 앞에 머물러 있어야 했지만 그 시간들이 아깝지 않았다. 그리고 내게 있어 가해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2차 세계대전 속 일본인들에 대해, 그 안에 숨겨져 일을지 모를 또다른 피해자들에 대해 한번쯤 다시 생각하게 되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역사 라는 이름의 진실 앞에서 나는 꽤 강단 있게 구는 사람 중의 한 명이지만 이 일본 소년의 굳은 의기와 결심 앞에서는 쏟아져내리는 감동을 물릴 수가 없었으므로. 한국인, 일본인이라는 경계를 넘어 세상 모든  국적의 독자들이 아마도 나와 같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아이다울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엉뚱하고 착한 본성을 잃지 않는 나오, 개인의 양심과 자본주의의 대척점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오의 아버지 하루키2, 제국주의의 기치를 내건 채 멸망해 가는 조국의 포화 속에 내던져진 하루키 1의 평화에 대한 집념, 시대의 깨어있는 정신으로 자식들을 품었던 따뜻한 어머니이자 아이들을 지킨 수호자였으리라 믿고 싶은 나오의 증조 할머니 지코, 그리고 또다른 세계 속 루스와 그녀의 남편 올리버, 정글 까마귀와 고양이 페스토, 쓰나미와  9.11. 여타의 생소한 여러가지 삶들이 성큼 다가왔다 성큼 물러나는 잔잔한 유시들 속에 몰입한 행복한 시간이었다. 설령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그저 문학적 낭만의 산물일 뿐일지라도 나오와 루스와 하루키 같은 존재를 만날 수 있어서 문학이 가치를 가지는 게 아닐까, 이런 행복한 만남이 문학이 주는 가치의 본질이 아닐까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동양적인 기운이 가득한 신비로운 이야기, 수수께끼 같이 불가사의한 이야기. 그러나 현실이라 믿고 싶어지는 이야기. 도무지 장르를 정의할 수 없는 기기묘묘한 이야기들 속에서 전해져오는 감미롭고 아름다운 문학의 여운을 차마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게 부끄러울 따름이다. 한 소녀의 성장소설이자 그 소녀를 바라보는 성숙한 여인의 마음을 담은 감성소설이며 미묘한 미스테리적 이면까지 갖춘 이 신비소설을 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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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들 수의사 헤리엇의 이야기 2
제임스 헤리엇 지음, 김석희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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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침마다 연재분을 읽으며 행복함을 느끼고 있어요. 겨울에 바라보는 요크셔의 나날도 따뜻하고 유쾌하고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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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hH
로랑 비네 지음, 이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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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슴없이 장르 소설을 비판하는 패기 넘치는 작가와 가슴 아픈 체코 역사의 풋풋한 만남!

이 풋풋함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에 잠깐 고민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이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유대인 말살정책으로 내가 사는 창원 인구의 두 배수에 달하는 유대인이 학살됐다)"을 주도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에 대한 소설을 두고 풋풋한 이라는 형용사가 가당키나 한가... 잠깐 반성도 들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 이보다 더 적합하게 들어 맞는 표현이 떠오르질 않는다. 신기하다. 역사 소설이 어떻게 이런 느낌일 수가 있을까. 표지나 이야기의 시작까진 무지 뻔했는데 말이다.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 긴장이나 비장감은 어느덧 사라지고 혼돈과 생경함과 적잖은 감동이 소설과 함께 남았다. 혁명적인 소설이라는 광고는 가히 과장이 아니다. 이렇게 희한한 소설도 다 있구나 읽는 내내 생각했으니까.

소설은 총 257개의 엄청난 수의 챕터들로 이루어진다. 257일 역사 읽기도 아닌데 이렇게 많은 수로 챕터를 나누는 패기에 한 번 놀랐다. 그리고 여타의 역사 소설처럼 1939년에서 시작하거나 현대에서 1939년으로 시점이 뿅 하고 바뀌며 "1939년의 막이 올랐다"는 식으로 전개되지도 않는다. 대체 언제 본격적인 역사 이야기가 시작되냐며 읽고 읽고 또 읽어 나가다 두 번 놀라게 된다. 그냥 본격적이라는 단어는 이 소설에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걸 서서히 깨닫게 되므로. 평범한 역사 소설이 아닌거로구나 하고 인정하게 되는 시점부터 마음은 편안해지고 책은 확실하게 재미있어지지만 그 전까진 색이 좀 불분명하다. 신선하고 새롭지만 이건 낯설다의 또다른 표현이기도 하니까 읽으면서도 좀 불안불안하달까. 책의 절반이 지나고 나서야 찾아오는 평정심이라는 게 약간의 장애가 될 순 있을 것 같은데 모르겠다. 언덕배기 넘어가면 꽃밭이라는 걸 알아도 오르기 싫다는 사람을 강제할 순 없는 거니까. 근데 진짜 꽃밭이 있긴 있다. 눈이 시큰시큰하고 코 끝이 찡해지는 그런 역사라는 이름의 꽃밭이. 군홧발로 짓밟고 불태우고 총칼을 휘둘러도 이른 봄이면 다시 피어나는 희망이.

화자인 작가는 역사 교수를 아버지로 둔 역사 밀리터리 덕후이다. 이 덕후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자마자 어린 시절 꿈인 "유인원 작전"에 대한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이에 대한 자료를 수집한다. 금발의 짐승, 프라하의 도살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요제프 가브치크와 얀 쿠비시라는 낙하산 요원에 대해서. 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흑사병처럼 창궐하는 하켄크로이츠와 나치즘,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들, 체코 및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학살들을. 유명한 사실과 유명하지 않은 사실들을 모으고 또 모으지만 이들 낙하산 요원에 대한 자료는 그닥 남아있지 않아 소설에서 차지하는 분량이 지극히 적다. 그러다 보니 소설의 삼분의 일 가까이는 숙청 대상이었던 하이드리히에 대한 자료로 채워진다. 그리고 나머지 삼분지 이는 거의 그냥 잡문이다. 요소요소의 역사 증거들을 수집할 때마다 이를 정리해 놓은 여타의 글들. 이런 식의 소설을 써보면 어떨까 하고 짧게 짧게 써놓은 구상문도 있고 비슷한 소재의 책이나 영화를 찾아 보며 쓴 감상문도 있다. 얄팍한 상상과 허구를 곁들여 짧은 소설을 썼다가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며 지우기도 한다. 뒤늦게 오류를 발견하곤 앞에 쓴 내용에 대한 수정본을 작성하기도 하고 소설 쓰는 게 왜 이렇게 힘드냐며 한탄도 하는, 그러니까 일종의 일기 겸 습작노트 겸 잡학노트인 셈인데 이렇게 모인 잡문 분량이 상당해서 사실 역사가 메인 디쉬인지 아닌지 조금 헷갈릴 정도이다. 아주 잡다하게 수다스런 소설이다 보니 퐁당퐁당 날아오는 화제들이 진짜 웃기기도 했고 말이다. 이를 테면 바비야르 학살을 얘기하면서 아인자츠글루펜(유대인 학살의 최전선에 섰던 나치 친위대) C조 조장 블로벨의 차가 오펠인지 아니었는지를 고민한다거나 하이드리히의 차량 메르세데스의 색깔이 검은색인지 녹색인지를 논하며 녹색이라 말한 작가를 깎아내리는 등으로 말이다. 남자라 그런가. 난 사실 메르세데스와 오펠을 아예 분간조차 못하는 사람이라 이걸 왜 따지고 있나 싶었지만 이  생각지도 못한 깐깐함에 몇 번 폭소를 터트리긴 했다. 그렇다고 마냥 웃긴 책은 아니고 작가가 역사의 본질에 다가가는 모습 등은 존경스러울만큼 신중해서 가상의 이야기들로 역사 속 이야기를 훼손하거나 주제를 망각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소설 창작이란 유치하고 웃기는 것(p172)" 이라는 작가의 생각엔 동의할 수 없지만 상상력과 감정을 절제한 서술 탓에 여타 소설들보다 훨씬 간결하게 역사에 대한 이해와 정리를 할 수 있다는 게 이 책의 최고 장점이지 않나 싶다.

HHhH를 다 읽고 나면 "레인코트 한 벌, 어깨끈 가방과 자전거의 소유주를 찾는다는 포스터, 결정적인 순간에 고장을 일으킨 스텐 기관총. 그 밖에도 세간의 입에 오르내린 여성들, 작전 때 벌어진 실수, 런던, 프랑스, 훈장을 받은 사람들, 망명정부, '리디체'라는 이름의 마을, 발치크라 불린 젊은 감시 요원, 최악의 순간에 지나친 전차, 암살자를 밀고하는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1000만 크라운의 상금, 청산가리 캡슐, 수류탄, 수류탄을 던진 사람들, 성당 벽에 영원히 새겨진 레지스탕스의 정신, 삶과 죽음 사이에서 벌이던 사투의 흔적(p16-17)" 이 머릿속에 필름이 재생되 듯 차르륵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내 안에 뚜렷하게 남겨진 역사의 흔적에 잠깐 놀라움을 느낄 정도로 전달성이 뛰어난 책이므로 감성 보다 사실을 필두로 다가오는 소설, 화려한 비유와 넘치는 상상력 보다는 올곧게 진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는 소설, 고통 속에서 인내하며 살아간 사람들에 대한 경의를 보여주는 소설을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바이다.

"진실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싫다.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진실을 가리기 위해 적극 노력하는 천박한 인간들이다."

                                                                                                   HHhH, p318, 황금가지

문득 이런 문구가 적힌 역사 소설이, 그것도 제2차 세계대전의 가해자를 다룬 이야기가 일본 서점대상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게 조금 놀랍게 느껴진다. 일본의 독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이 책을 읽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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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마이 프렌드
로버트 쿤 지음, 안의정 옮김 / 맑은소리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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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것으로 나의 지난 여름 이야기는 끝났다. 그렇지만 물론,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것이 완료된 사건이 아니라, 이제 비로소 시작된 새로운 만남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했었다. 내 이야기를 꼼꼼히 들은 분들은 내가 아직 중요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지난 여름 이후 내게 일어난 변화, 그 여름 이후 내가 느끼고 있는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물론, 그 이야기도 마저 하려고 한다. 그것은 아마 어떤 강물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지난 여름 녀석과 내가 기적을 찾아 떠났던, 그러나 그 여름이 끝나면서 물길을 돌려 이젠 조용히 내 가슴속으로 흐르기 시작한 우리들의 미시시피..... 다시 한 번 그 강을 항해할 것을 녀석에게 약속했었다.
이제 곧 탐험을 시작하려 한다. 그러나 출발에 앞서 시간이 좀 필요하다. 아주 잠깐이면 된다. 뗏목 하나쯤 다시 엮는 건 잠깐이면 충분하니까.

                                                                               굿바이 마이 프렌드, p124, 맑은 소리

어릴 적 영화와 함께 보며 눈물 펑펑 흘리던 그 감동은 아니었지만 십년도 더 지나 다시 만나 즐거웠던 에릭과 덱스터 그리고 린다. 영화의 끝에서 미시시피 강으로 흘려 보내는 에릭의 구두를 보고 참 많이 울었는데 책의 엔딩은 조금 다르다. 그 이후 그들의 삶도 영화나 책과는 완연히 달라서 살아있었다면 35살(82년생)이었을 에릭은 정말이지 먼 곳으로 항해를 떠나버렸다. 그의 핏속에 녹아든 헤로인이 그의 가슴에  흐르던 미시시피의 줄기를  저 하늘에 이어준 것이었다고,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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