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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hH
로랑 비네 지음, 이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1월
평점 :
서슴없이 장르 소설을 비판하는 패기 넘치는 작가와 가슴 아픈 체코 역사의 풋풋한 만남!
이 풋풋함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에 잠깐 고민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이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유대인 말살정책으로 내가 사는 창원 인구의 두 배수에 달하는 유대인이 학살됐다)"을 주도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에 대한 소설을 두고 풋풋한 이라는 형용사가 가당키나 한가... 잠깐 반성도 들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 이보다 더 적합하게 들어 맞는 표현이 떠오르질 않는다. 신기하다. 역사 소설이 어떻게 이런 느낌일 수가 있을까. 표지나 이야기의 시작까진 무지 뻔했는데 말이다.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 긴장이나 비장감은 어느덧 사라지고 혼돈과 생경함과 적잖은 감동이 소설과 함께 남았다. 혁명적인 소설이라는 광고는 가히 과장이 아니다. 이렇게 희한한 소설도 다 있구나 읽는 내내 생각했으니까.
소설은 총 257개의 엄청난 수의 챕터들로 이루어진다. 257일 역사 읽기도 아닌데 이렇게 많은 수로 챕터를 나누는 패기에 한 번 놀랐다. 그리고 여타의 역사 소설처럼 1939년에서 시작하거나 현대에서 1939년으로 시점이 뿅 하고 바뀌며 "1939년의 막이 올랐다"는 식으로 전개되지도 않는다. 대체 언제 본격적인 역사 이야기가 시작되냐며 읽고 읽고 또 읽어 나가다 두 번 놀라게 된다. 그냥 본격적이라는 단어는 이 소설에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걸 서서히 깨닫게 되므로. 평범한 역사 소설이 아닌거로구나 하고 인정하게 되는 시점부터 마음은 편안해지고 책은 확실하게 재미있어지지만 그 전까진 색이 좀 불분명하다. 신선하고 새롭지만 이건 낯설다의 또다른 표현이기도 하니까 읽으면서도 좀 불안불안하달까. 책의 절반이 지나고 나서야 찾아오는 평정심이라는 게 약간의 장애가 될 순 있을 것 같은데 모르겠다. 언덕배기 넘어가면 꽃밭이라는 걸 알아도 오르기 싫다는 사람을 강제할 순 없는 거니까. 근데 진짜 꽃밭이 있긴 있다. 눈이 시큰시큰하고 코 끝이 찡해지는 그런 역사라는 이름의 꽃밭이. 군홧발로 짓밟고 불태우고 총칼을 휘둘러도 이른 봄이면 다시 피어나는 희망이.
화자인 작가는 역사 교수를 아버지로 둔 역사 밀리터리 덕후이다. 이 덕후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자마자 어린 시절 꿈인 "유인원 작전"에 대한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고 이에 대한 자료를 수집한다. 금발의 짐승, 프라하의 도살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요제프 가브치크와 얀 쿠비시라는 낙하산 요원에 대해서. 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흑사병처럼 창궐하는 하켄크로이츠와 나치즘,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들, 체코 및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잔인한 학살들을. 유명한 사실과 유명하지 않은 사실들을 모으고 또 모으지만 이들 낙하산 요원에 대한 자료는 그닥 남아있지 않아 소설에서 차지하는 분량이 지극히 적다. 그러다 보니 소설의 삼분의 일 가까이는 숙청 대상이었던 하이드리히에 대한 자료로 채워진다. 그리고 나머지 삼분지 이는 거의 그냥 잡문이다. 요소요소의 역사 증거들을 수집할 때마다 이를 정리해 놓은 여타의 글들. 이런 식의 소설을 써보면 어떨까 하고 짧게 짧게 써놓은 구상문도 있고 비슷한 소재의 책이나 영화를 찾아 보며 쓴 감상문도 있다. 얄팍한 상상과 허구를 곁들여 짧은 소설을 썼다가 부끄러움에 몸부림치며 지우기도 한다. 뒤늦게 오류를 발견하곤 앞에 쓴 내용에 대한 수정본을 작성하기도 하고 소설 쓰는 게 왜 이렇게 힘드냐며 한탄도 하는, 그러니까 일종의 일기 겸 습작노트 겸 잡학노트인 셈인데 이렇게 모인 잡문 분량이 상당해서 사실 역사가 메인 디쉬인지 아닌지 조금 헷갈릴 정도이다. 아주 잡다하게 수다스런 소설이다 보니 퐁당퐁당 날아오는 화제들이 진짜 웃기기도 했고 말이다. 이를 테면 바비야르 학살을 얘기하면서 아인자츠글루펜(유대인 학살의 최전선에 섰던 나치 친위대) C조 조장 블로벨의 차가 오펠인지 아니었는지를 고민한다거나 하이드리히의 차량 메르세데스의 색깔이 검은색인지 녹색인지를 논하며 녹색이라 말한 작가를 깎아내리는 등으로 말이다. 남자라 그런가. 난 사실 메르세데스와 오펠을 아예 분간조차 못하는 사람이라 이걸 왜 따지고 있나 싶었지만 이 생각지도 못한 깐깐함에 몇 번 폭소를 터트리긴 했다. 그렇다고 마냥 웃긴 책은 아니고 작가가 역사의 본질에 다가가는 모습 등은 존경스러울만큼 신중해서 가상의 이야기들로 역사 속 이야기를 훼손하거나 주제를 망각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소설 창작이란 유치하고 웃기는 것(p172)" 이라는 작가의 생각엔 동의할 수 없지만 상상력과 감정을 절제한 서술 탓에 여타 소설들보다 훨씬 간결하게 역사에 대한 이해와 정리를 할 수 있다는 게 이 책의 최고 장점이지 않나 싶다.
HHhH를 다 읽고 나면 "레인코트 한 벌, 어깨끈 가방과 자전거의 소유주를 찾는다는 포스터, 결정적인 순간에 고장을 일으킨 스텐 기관총. 그 밖에도 세간의 입에 오르내린 여성들, 작전 때 벌어진 실수, 런던, 프랑스, 훈장을 받은 사람들, 망명정부, '리디체'라는 이름의 마을, 발치크라 불린 젊은 감시 요원, 최악의 순간에 지나친 전차, 암살자를 밀고하는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1000만 크라운의 상금, 청산가리 캡슐, 수류탄, 수류탄을 던진 사람들, 성당 벽에 영원히 새겨진 레지스탕스의 정신, 삶과 죽음 사이에서 벌이던 사투의 흔적(p16-17)" 이 머릿속에 필름이 재생되 듯 차르륵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내 안에 뚜렷하게 남겨진 역사의 흔적에 잠깐 놀라움을 느낄 정도로 전달성이 뛰어난 책이므로 감성 보다 사실을 필두로 다가오는 소설, 화려한 비유와 넘치는 상상력 보다는 올곧게 진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는 소설, 고통 속에서 인내하며 살아간 사람들에 대한 경의를 보여주는 소설을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바이다.
"진실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싫다.
이보다 더 나쁜 것은 진실을 가리기 위해 적극 노력하는 천박한 인간들이다."
HHhH, p318, 황금가지
문득 이런 문구가 적힌 역사 소설이, 그것도 제2차 세계대전의 가해자를 다룬 이야기가 일본 서점대상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게 조금 놀랍게 느껴진다. 일본의 독자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이 책을 읽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