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5 - 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 역사 ⓔ 5
EBS 역사채널ⓔ 지음 / 북하우스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끄럽지만 나는 한국사 책은 잘 읽지 않는 편이다. 중고등 시절 국사 상, 하를 마지막으로 한국 역사 인문서를 끝 페이지까지 읽어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하다. 부족함에 대한 자각은 있어서 시도는 해보는데 책을 드는 게 쉽지가 않았다. 무한도전에서 설민석 강사의 얘기를 들으며 양세형씨가 했던 필기가 어찌나 공감되던지. "나는 진짜 공부쪽으로는ㅠㅠ...졸리당, 힘내자, 배우자!" 무한공감, 무한인정!! 무한도전을 보고 또 여기저기 서점에서 2016년 최고의 책으로 설민석님의 "조선왕조실록"이 손꼽히는 모습에 자극을 받아 역사인문서적도 한번 봐보자 했지만 선뜻 손 가는 책이 없더라.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려니 나 같은 국사 인문 고자가 504의 장대한 페이지를 감당할 수 있을까, 또 읽다 덮어 버리면 어쩌나 겁도 났다. 그런 와중에 발견한 책이 바로 역사e. EBS역사채널을 서적화 한 편집본이었다. 역사채널이라면 스치듯 티비로 본 적도 있고 요약본으로 인터넷에 올라온 캡쳐 자료도 본 기억이 있었다. 짧고 간결하고 무엇보다 눈으로 쉽게 다가오는 자료와 해석. 이 책이다 싶었다.

"나는 (...) 경성의 여덟  성문 되는 우리 팔형제 중에 둘째 되는 돈의문이올시다. (...) 몇 백 년 내려오면서 나는 많이 먹어도 항상 간난아이 다려 새아기 새아기 하는 셈으로 새문 새문 하더니 지금은 이 새문이 아주 경성의 여러분과 인연이 지나서 오는 6일에는 경매가 되어간다 합니다. (...) 우리 끝에 동생 서소문은 지난 섣달에 헐려갔고 우리 맏형 동대문과 셋째 아우 남대문은 좌우편  성이 뭉그러져 몇 해 이래로 우리 형제와 연신이 전혀 끝겼는데 지금에 이 몸조차 항해를 잃게 되니 이전을 돌아보고 지금을 생각하매 감구지회를 어찌 금하오리까."

     ㅡ  역사e5, p63, 북하우스, <1915.03.04. 매일신보. 나는  서대문이올시다>


총 3부의 21가지 챕터 속에는 신기하고 재미난 동시에 미안하고 가슴 아픈 역사가 고루 담겨 있었는데  씨없는 수박으로 유명하신 우장춘 박사의 고국에 대한 헌신을 감성적으로 해석하며 눈물 빼기 보다는 객관적으로 살펴봐 주는 태도가 특히나 좋아 기억에 남는다. 여타의 소설들과 달리 확실히 객과적이었고, 한발짝 떨어져 역사를 바라 보고 견지하는 태도가 보였달지. 우리 역사, 우리 사람에 대한 무한 찬양이 아니라 사실의 전달에 힘쓰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참, 책에 나오듯 나도 씨없는 수박을 우장춘 박사의 공적으로 배운 세대라 그 사실에 한치 의심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씨없는 수박은 우장춘 박사의 것이 아니라 일본 박사의 연구 실적이었다고 한다. 농민들이 우장춘 박사를 신뢰하지 못하고 그가 주는 씨앗 등을 잘 사용하지 않으려 하자 농민들의 관심을 끌고 화제를 만들기 위해 씨없는 수박을 이용하셨다고. 지금의 귤과 배추, 무 등이 모두 우장춘 박사의 실적이며 그 전까진 이렇게 아삭하고 달고 맛있는 품종들이 아니었다는 것이 새삼 재미있게 느껴졌다. 물론 그의 부친이 명성황후 시해의 가담자라는 것은 경악스럽긴 했지만 말이다. 부친이 매국노인 줄은 알았어도 단순 친일 부역자인 줄로 알았지 명성황후와의 연계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어서 조금 떫떠름하긴 했지만 연좌제로 이어 붙일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털어버렸다. 부친의 그림자에 머물지 않고 해방 후 한국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신 분이니 그저 감사하기도 했고 말이다. 1920년대 삐삐의 나라 스웨덴에서 유학하고도 조선땅으로 돌아온 뒤 가판에서 콩나물 같은 채소를 팔다 돌아가신 최영숙 박사님 이야기나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매일매일의 일기를 쓰신 정조 임금님, 몇 번이나 위치를 바꿔가며 새로 지어지다 결국엔 허물어져 지금 우리 돈으로 오백 만원 정도에 낙찰되어 팔린 돈의문 등 처음 들어 본 이름과 처음 들어본 이야기도 참 많았다. 정조 임금님 머무시는 궁궐 가까이 세워져 그 문소리의 소란스러움을 극복하는 과제까지 떠안아야 했던 임금님의 고충을 토로하는 이야기나 돈의문을 의인화한 신문기사처럼 유머와 해학이 곁들여지는 이야기들은 역사 인문서에 어려움을 느끼는 나 같은 사람이라도 즐겁게 페이지를 넘길 만한 매력으로 충분함이 넘쳤다. 화제의 드라마 "도깨비"로 새삼 관심사가 되고 있는 조선 도깨비에 대한 이야기도 경각심을 주었는데 시뻘건 얼굴에 뿔, 아랫도리 너덜너덜 걸레짝 같은 천만 두른 도깨비는 우리나라 도깨비가 아니라 왜의 도깨비라고 한다. 왜의 색이 일제시대를 거쳐 너무나 짙게 우리 문화로 침투해 정작 우리 도깨비 본연의 모습은 잊혀지고 말았다고. 점잖은 우리 도깨비는 홑고의에 잠뱅이도 걸치고 머리에는 패랭이까지 쓰고 다니며 뿔도 없고 낯색도 사람과 다를 바 없어 어찌 보면 사람 같고 어찌 보면 귀신 같지만 사람을 좋아하여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는 다정한 요정들이었다. 악한의 매력이 있는 왜의 도깨비에 비교해 이야기로 만들기엔 매력이 덜할지 몰라도 우리 도깨비가 왜의 도깨비에 잡아 먹힌 지금의 상황은 좀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다. 주시경 선생님 혼자 펴낸 줄 알았던 우리 말 큰사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 선생님과 학자들이 참여하여 고초를 겪었는지도 알게 되었고 얼마나 많은 조선술이 사장되었는지 또 주막과 같은 좋은 전통문화가 있었는지를 재미있고 쉽고 간결하게 배우고 느낄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분명 우리의 역사일진데 돈의문이 말하는 것처럼 매번 새것처럼 느껴지는 낯선 역사들에 페이지를 넘기기가 어찌나 죄송스럽던지 조금 반성하는 기분도 들었고 말이다. 우리 역사에 대한 항해의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 역사가 헐려가고 뭉그러지고 연신이 끊겨 잊혀지지 않도록 이 감구지회가 그저 단발이 되지 않도록 한국사에도 지속적으로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스터리 서점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에드 맥베인.로런스 블록 외 지음, 오토 펜즐러 엮음, 이리나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7가지 이야기 중 오늘은 첫 번째 이야기만 읽었는데 신선하고 색다르면서 크리스마스 분위기 대박이에요. 우선 여기까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5도살장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0
커트 보니것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좀 위로가 되니?"


                                                    ㅡ 제5도살장,p44 /  p171, 문학동네


빌리라는 남자가 있다. 그는 어느 날 인류를 위로하고픈 마음이 되었다. 지구는 멸망할 것이고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빌리는 트랄파마도어의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시간의 왜곡을 경험하면서 그 굴레와 장벽을 벗어난 사람이 되었다.  그의 몸은 방울 모양 호박 속에 잠긴 무당벌레 세 마리처럼 시간에 붙들려 있지만 그의 영혼은 과거의 몸과 현재의 몸과 미래의 몸과 시간을 알 수 없는 몸 사이로 자유롭게 오가는 중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내가 원하는 어느 시점으로 퐁퐁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시간 안에 동일한 영혼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해야 할지,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자신의 탄생과 죽음을 동시간대에 아울러 바라보고 있다고 해야 할지 표현하기 난해할 정도로 책은 모든 엉켜있는 시간의 헝클어진 풀림이었다. 한 코 두 코 뜨고 있던 니트를 졸졸졸 풀어내 돌돌돌돌 감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쪽집게 가위로 니트 위로 올라온 여기저기의 보풀을 톡톡 잘라내 던져 뭉쳐놓은 느낌이랄까. 돔으로 덮인 야구장에서 트랄파마도어에 관해 연설하는 중에도 신생아인 자신으로 돌아가 젤리 같은 배를 부드럽게 토닥여주는 어머니의 손길을 느낄 수 있고, 곧장 그 손길에서 벗어나 그랜드캐니언 협곡 위에 서서 바지에 오줌을 지리는 열두 살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중년에 병실 침대 위 혼수상태로 누워 있는 시간에서 곧장 트랄파마도어인에게 납치되어 사육 당하던 결혼 초기의 잠자리에서 깨어나기도 한다. 딸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 자유의지를 갈취당한 채 빵도 익을 것 같은 전기매트 위에서 데워지는 그 순간 또다른 시간에서는 연설을 끝내고 나가다 레이저 건에 맞아 죽어버릴 수도 있고, 드레스덴 속 자신이 겪는 전쟁과 아들이 공군으로 참여한 베트남 전쟁을 동시에 볼 수도 있는 그런 남자다. 시간에서 완전히 풀려난, 몇 번이나 자신의 탄생과 죽음을 목격할 수 있는 그런 존재. (인과가 없이 나열되는 사건들이기 때문에 책에 나와있던 순서대로 쓰지를 못했다. 시간대의 정렬에 구분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빌리 필그림이 가장 많이 깨어 존재했고 돌아갔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가 보병대 척후병으로 참여했던 제2차세계대전 유럽 속. 트랄파마도어인에게 납치되었듯 그는 이제 독일군단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갇히고 기차를 타고 강제 노역에 동원됐다가 머리 위로 쏟아지는 폭격을 경험한다. 납치와 전쟁은 얼핏 그 강압성이 주는 느낌이 비슷한 듯도 싶지만 이 책 속에선 뚜렷한 차이가 있다. 트랄파마도어 행성의 우리 속 생활은 지구에서만큼의 행복을 줬지만 전쟁터에서 그가 행복을 느꼈던 순간은 폭격으로 유린당한 드레스덴에서 햇볕을 흠뻑 쐬며 꾸벅꾸벅 졸던 때 뿐이라는 것. 위어리와 에드거 더비, 영국 장교, 러시아 포로, 그리고 알몸의 소녀들. 많은 고난을 겪고 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많은 폭력을 당하고 많은 시간 속을 헤매여도 그가 시간 밖에 존재하는 사람이어서인지 생과 사를 목격하며 초탈했기 때문인지 책은 크게 감정의 고저없이 나직나직하게 흘러간다. 히로시마 원폭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냈다는 드레스덴 폭격조차도 별 감흥없이 표현되고 말이다. (작가가 실지 2차세계대전의 참전용사, 드레스덴의 생존자였던 점을 미루어 보면 이 평이한 서술 자체가 좀 대단해 보이기도 한다.) 신선이 된 미국인 도사에게 자서전을 쓰라하면 꼭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밍숭맹숭한데 특히나 죽음 또는 그와 비슷하게 충격적인 일 뒤에 대구처럼 꼬박꼬박 달리는 '뭐 그런 거지'가 당면한 상황에 대한 인정 같으면서도 꼭 맥 빠진 사람이 내쉬는 체념처럼도 느껴져 약간 아리송했다. 작가가 생전에 무위자연에 심취하셨나 싶기도 하고. 천지만물의 이치에 순응하던 동양의 사상이 그러하듯 빌리 필그림은 모든 시간에 순응하여 반론하지 않는 사람만 같았다. 

                               끔찍한 시간은 무시해라. 좋은 시간에 집중하라.
            (그럼 모든 것이 아름답고 어떤 것도 아프지 않으리라 / 묘비명의 역설 )
                                                             
                                                                               ㅡ 제5도살장, p151, 문학동네

찬양받는 반전소설, SF물치고는 상당히 밋밋 심심했지만 작가가 글 시작에서 내건 기치가 처음부터 또렷했던 터라, 또 두꺼운 페이지가 아니라 크게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함께 전쟁 포로를 했던 오헨리의 아내에게 했던 약속. 전쟁을 멋지고 근사하게 포장해 그 전쟁을 부추기는 책만큼은 쓰지 않겠다던 다짐이 잘 지켜진 책이었다. (빌리가 한 약속이 아니라 작가가 한 약속이다. 책의 처음과 중간에 한번씩 작가가 나타난다. 소설에서 작가는 주인공 빌리와 함께 포로생활을 한 걸로 나오며 미국인 수용소 변기통 장면에서 잠깐 스치듯 등장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쓰는 소설에 "소년 십자군"이라는 제목을 붙이겠다고 오헤어의 아내에게 약속하는데 영예를 위해 모였으나 성전으로 나가기도 전에 노예로 팔리고 행군 중에 사망하고 바다에 익사해 죽은 가엾은 죽음의 이름을 붙이겠다고 한 건 전쟁에 희생된 넋을 기억하고 전쟁의 몰가치함과 불필요함을 피력하기 위해서였으리라. 전쟁과 관련해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열정과 낭만이 배제된 채 미로 같이 복잡한 시간을 흐르는 소설이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문장들이 있고 아버지를 잃은 아이를, 누군가를 떠나보냈을지 모를 독자를 위로하는 작가의 마음만큼은 직설적으로 엿보여 다정스런 책이었다. 이전까지 나는 커트 보니것이라는 작가를 알지도 못했고 따라서 제5도살장이라는 제목은 들어본 적도 없었지만 평을 보고 혹시나 하는 기대로 잡은 이 책이 지금은 꽤 만족스럽게 느껴진다. 남은 2016년 SF는 더 읽을 책이 없어 이걸로 끝이 나겠지만 2017년도에는 더 다양한 SF 작가와 책들을 찾아봐야 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자왕 형제의 모험 (칼 에디션, 양장)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김경희 옮김, 일론 비클란드 그림 / 창비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창비와 알라딘에서 사자왕 형제의 모험 한정판을 내어놓았다. 기념 주화와 함께 칼 에디션, 요나탄 에디션으로 나누어 출시한 2500부 한정판인데 마음 같아선 두 권 다 사고 싶었지만 여건이 안되므로 마음 짠한 칼 에디션으로 선택. 근데 새책으로는 드물게 뒷면에 스티커가 붙어있다. ISBN은 위에 따로 표시되어 있으니 아래 121이 한정판 시그널 넘버인가? 어른이 되어 더 좋아하게 된 삐삐의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책이기도 하고, 곽아람 작가님의 "어릴 적 그 책"을 읽은 뒤부터 계속해서 읽어야지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던 책인데 밀린 책들을 읽다 보니 너무 늦게 잡게 된 것 같다. 일요일 남은 저녁 시간을 채우기에 딱 알맞은 페이지 수에 슈뢰딩거의 고양이("내가 너를 구할 수 있을까", 현재 예판 중)와 거대한 우주 공간 속에 보글보글 일어나는 거품처럼 다른 차원이 생기고 있을 거라 믿었던 안나 박사("씁니다, 우주일지")의 여운 때문인지 낭길리마로 가는 사자왕 형제들의 결말을 오늘! 꼭! 재독하고 싶은 욕구가 불쑥 치밀었다. 책을 펼치자마자 얼른 끝 페이지로 넘어가고 싶어 좀 안달이 났다는 것만 빼면, 나는 정말 이 책의 결말이 너무나 좋았으므로, 어린 시절 그때 적과 다를 바 없는 감동과 여운이 좀 감격스러워 찔끔 눈물이 났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병약한 동생 칼과 모든 방면에서 빼어나게 뛰어난 형 요나탄. 기침으로 콜록대는 동생을 꽉 안아주며 다가올 죽음을 위로할 줄 아는 이 의젓하고 착한 형은 집 안에 불이 나자 동생을 등에 업은 채 이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낭기열라의 세계로 떠나게 된다. 흉내내지 못할 용기로 사자왕이라는 애칭을 얻게 된 형을 잃고 슬픔과 두려움에 허덕이던 칼의 앞에 나타난 새하얀 비둘기 한 마리. 마치 전령새인 듯 비둘기는 형 요나탄이 벚나무 골짜기에 있는 기사의 농장에서 칼을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오라는 전언을 전해 준다. 형에 대한 그리움으로 "엄마 울지 마세요. 우리 낭기열라에서 다시 만나요." 라는 쪽지 한 장을 남기고서 칼 또한 낭기열라로 떠나게 되고 형제는 벚나무 골짜기 시냇가에서 정다운 해후를 한다. 칼의 기침도 아픈 다리도 요술처럼 낫게 해준 이 마법 같은 세계의 평화는 들장미 골짜기의 폭군 텡일과 괴물 용 카틀라에 의해서 깨어지게 되고, 탱일의 폭압과 살육으로부터 들장미 골짜기를 독립시키기 위한 형제의 여정이 시작된다. 벚나무와 들장미 골짜기의 지도자인 소피아와 오르바르, 부역자들에게 탄압 받으면서도 자유에의 의지를 잃지 않고서 칼과 요나탄을 숨겨주는 마티아스 할아버지와 골짜기의 주민들, 활을 잘 쏘는 후베르토와 마냥 친절하게 느껴지는 황금 수탉 요시. 그러나 숨은 배신자의 위협과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오르바르의 사형일, 평화를 사랑하는 요나탄과 칼의 피할 수 없는 전쟁이 동화임에도 긴장을 압축하며 독자를 몰아간다. 사자왕 형제의 용기와 모험, 카틀라를 조종하는 요술 같은 나팔과 슬기로운 말 그림과 피알라르와의 우정, 그리고 낭기열라의 너머에 존재하는 또다른 세계 낭길리마의 환상같은 이야기와 용의 불길을 쐬어 점점 마비되어 가는 형을 등에 업은 채 낭떠러지 앞에 선 칼의 마지막 선택까지 흥미진진하고 즐겁고 감동적인 장면이 가득한 동화이다. 특히나 칼과 요나탄이 낭기열라로 가는 이 마지막 장면이야 말로 이 동화의 백미라고 생각해서 그 부분만 두 번, 세 번을 반복해 읽었는데 읽고 또 읽어도 너무 좋았다. 어른이 되어 다시 읽으니 약간 자살같은 느낌이 없지 않아 살짝 놀라긴 했지만. 실제로 1973년 출간 당시엔 이 결말 때문에 아동소설로서는 반발을 꽤 거세게 받았다고 한다.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어른 시각에서의 해석일 뿐으로 어릴 적에는 그런 미묘한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한 채 두 형제가 평화로운 세계 낭길리마로 행복하게 떠났다고 생각했던 터라 아이와 어른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은 고전 동화책이다.


이윽고 밤이 되자 모든 산과 강과 들판이 캄캄한 어둠에 휩싸였습니다. 나는 요나탄 형을 등에 업고 팔을 내 목에다 두르게 한 채 낭떠러지 끄트머리로 갔습니다. 내 귓가에 들리는 형의 숨결은 아주 고르고 조용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질 못했습니다. 어째서 나는 늘 요나탄 형처럼 용감하질 못한 걸까요?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내 발 아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한 발짝만 내딛으면 곧장 어둠 속으로 떨어질 테고 그러면 모든 일이 끝나는 것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 지나가 버리겠지요.
"사자왕 스코르판, 무섭지 않니?"
"아니....... 형, 사실은 무서워. 하지만 해낼 수 있어. 지금, 바로 지금 할 테야. 그러고 나면 다시는 겁나지 않겠지. 다시는 겁나지......"

"아아, 낭길리마! 형, 보여! 낭길리마의 햇살이 보여!"

                                                          ㅡ 사자왕 형제의 모험, p319, 창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씁니다, 우주일지
신동욱 지음 / 다산책방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SF + 로맨스 + 코메디라는 장르를 모두 소화하는 대단한 남자가 나타났다. 이름은 맥 매커천. 41살이고 T 그룹의 CEO다. 타칭 세상에서 가장 혁신적인 사업가, 전기자동차의 아버지, 태양광발전의 아이언맨, 화성 이주를 꿈꾸는 개척자, 바람둥이(p10) 등으로 불리는 이 남자 앞에 걸크러시 터지는 뇌섹녀 김안나 박사가 나타났다. 우주 사랑이라는 공통의 매개체로 서로에게 홀딱 반한 이들은 속전속결로 첫날밤을 치르고 혼인신고까지 과감하게 처리하며 사랑의 대화합을 이룬다. 페퍼 옆의 토니 스타크처럼 아내 김안나 박사에게 맥을 못추는 맥 매커천은 본래의 꿈인 화성이주에서 한발짝 물러나 김안나가 계획한 우주 엘리베이터 건설을 목표로 사업까지 구상하게 된다. 그리고 들려오는 한 마디. "자기야, 날 위해서 뭐든지 해줄 수 있어?" 김안나 박사의 질문에 맥 매커천은 답한다. "그럼, 자기를 위해서라면 하늘의 별도 따다 줄 수 있지!" 그리하여 자신의 모든 명성 앞에 지구 최초로 별도 따다 주는 남편을 더하기로 한 이 대책없는 로맨티스트 맥 매커천은 우주인 명단에 제 이름을 올려 머나먼 우주로 떠나가게 된다. 우주 엘리베이터 건설에 반드시 필요한 소행성 AC5680과 소행성의 위험천만한 부스러기들 속 쏟아지는 위협들, 대한민국 대통령 이민호와 수지, 별그대 전지현의 등장과 지극히 원초적인 페텍스 1호 속 생활. 겉은 바삭 속은 촉촉한 응가응가 벽돌 제조와 거시기에 이용된 소변기(책에 나온 단어로 썼더니 음란으로 걸려서 리뷰 등록이 안 된다. 우주인 남성의 신박한 창의성과 벗어날 수 없는 욕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건만!), 기저귀와 대변봉투, 초코 케잌 부스러기 같은 용모로 우주선을 배회하는 응가응가와 육포가 된 응가응가까지. 어느 새 낭만은 사라지고 응가응가 웃음 대향연(그러나 식사 전 후로는 읽지 말라!!)와 폭행, 스릴러까지 끼얹어진 전개 속에서 맥 매커천은 소행성 AC5680을 포획하여 아내의 바람대로 지구 귀환에 무사히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우울증 걸린 영국남자 빌리의 도끼만행사건에서 시작해 대폭발 하는 창의적 로맨스를 거쳐 저 먼 우주 속 로빈슨 크루소에 이르는 방대한 우주 소설의 대미가 어떻게 장식될 것인지 알려 주고 싶어 입이 막 근질근질해질 지경이지만 꾹 참은 채 추천만 꾸욱!



  "아무리 힘이 들고 배고플지라도 유머는 포기하지 않겠다."

                                              ㅡ 씁니다, 우주일지, p408, 다산책방



씁니다, 우주일지"는 사실 책 자체보다는 작가의 알려진 이름으로 먼저 접하게 된 책이었다. 그러나 책을 다 읽은 지금에 와선 그의 유명 배우라는 이력이나 그가 앓고 있는 불치병과 무관하게 온전히 작가로서의 신동욱에게 많은 부분 매료되고 말았다. 5년이라는 긴 준비기간과 이가 빠질만큼 고통스러웠던 집필의 산물을 이렇게 뚝딱뚝딱 인스턴트 음식처럼 해치운 것이 살짝 미안할 정도로 후다닥 그리고 재미나게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나는 또렷하게 설명할 수 있는 스토리를 가진 채 긍정성이 넘쳐나는 유쾌한 책들을 좋아하는 편인데 이 책이 딱 그런 책이었다. 이 책을 읽고 당신이 웃었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고 당신이 즐거웠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고 당신이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고, 이 책으로 환상을 품었으면 좋겠다 하는 기운이 듬뿍 담긴 시종일관 똥꼬발랄한 소설 말이다. 종종 지뢰처럼 밟게 되는 지루한 책을 읽을 때 느끼게 되는 소화불량의 불편함은 전혀 느낄 수 없는 책이었다( 내 생각에 우주인 빌리의 우울증 원인에는 이 변비도 큰몫을 차지한 게 아닌가 싶다.) 12월 맞바람을 맞으며 토끼똥을 꽁 꽁 싸대 듯이 약간 소강사태에 빠졌었던 내 독서 항해도 이 책 "씁니다, 우주일지"를 읽고 부터는 아주 순조롭게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중간 중간 살짝 맥이 빠지는 부분이 없잖아 있기는 했지만 SF 장르가 낯설고 취약하신 분들도 "씁니다, 우주일기"만큼은 큰 불편함 없이 재마나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근데 왜 이렇게 거시기 응가응가 얘기가 많냐고? 책 표지를 보라. 우주복을 입고 있는 우리 주인공 맥 매커천의 머리 위에 놓인 똥덩어리와 그의 손에 들린 뚫어뻥을! 내가 읽어 본 SF라야 몇 권 되지도 않지만 시작부터 끝까지 이렇게 똥 얘기가 많은 책은 보다 보다 처음이었다. 그래서 읽기 싫었냐고? 살짝 비위는 상했지만 그래도 속 시원허니 괜찮았다. 맥 매커천이 워낙에 근사한 남자였으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