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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왕 형제의 모험 (칼 에디션, 양장)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김경희 옮김, 일론 비클란드 그림 / 창비 / 2016년 12월
평점 :
품절
창비와 알라딘에서 사자왕 형제의 모험 한정판을 내어놓았다. 기념 주화와 함께 칼 에디션, 요나탄 에디션으로 나누어 출시한 2500부 한정판인데 마음 같아선 두 권 다 사고 싶었지만 여건이 안되므로 마음 짠한 칼 에디션으로 선택. 근데 새책으로는 드물게 뒷면에 스티커가 붙어있다. ISBN은 위에 따로 표시되어 있으니 아래 121이 한정판 시그널 넘버인가? 어른이 되어 더 좋아하게 된 삐삐의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책이기도 하고, 곽아람 작가님의 "어릴 적 그 책"을 읽은 뒤부터 계속해서 읽어야지 읽어야지 생각하고 있던 책인데 밀린 책들을 읽다 보니 너무 늦게 잡게 된 것 같다. 일요일 남은 저녁 시간을 채우기에 딱 알맞은 페이지 수에 슈뢰딩거의 고양이("내가 너를 구할 수 있을까", 현재 예판 중)와 거대한 우주 공간 속에 보글보글 일어나는 거품처럼 다른 차원이 생기고 있을 거라 믿었던 안나 박사("씁니다, 우주일지")의 여운 때문인지 낭길리마로 가는 사자왕 형제들의 결말을 오늘! 꼭! 재독하고 싶은 욕구가 불쑥 치밀었다. 책을 펼치자마자 얼른 끝 페이지로 넘어가고 싶어 좀 안달이 났다는 것만 빼면, 나는 정말 이 책의 결말이 너무나 좋았으므로, 어린 시절 그때 적과 다를 바 없는 감동과 여운이 좀 감격스러워 찔끔 눈물이 났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병약한 동생 칼과 모든 방면에서 빼어나게 뛰어난 형 요나탄. 기침으로 콜록대는 동생을 꽉 안아주며 다가올 죽음을 위로할 줄 아는 이 의젓하고 착한 형은 집 안에 불이 나자 동생을 등에 업은 채 이층 창문에서 뛰어내려 낭기열라의 세계로 떠나게 된다. 흉내내지 못할 용기로 사자왕이라는 애칭을 얻게 된 형을 잃고 슬픔과 두려움에 허덕이던 칼의 앞에 나타난 새하얀 비둘기 한 마리. 마치 전령새인 듯 비둘기는 형 요나탄이 벚나무 골짜기에 있는 기사의 농장에서 칼을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오라는 전언을 전해 준다. 형에 대한 그리움으로 "엄마 울지 마세요. 우리 낭기열라에서 다시 만나요." 라는 쪽지 한 장을 남기고서 칼 또한 낭기열라로 떠나게 되고 형제는 벚나무 골짜기 시냇가에서 정다운 해후를 한다. 칼의 기침도 아픈 다리도 요술처럼 낫게 해준 이 마법 같은 세계의 평화는 들장미 골짜기의 폭군 텡일과 괴물 용 카틀라에 의해서 깨어지게 되고, 탱일의 폭압과 살육으로부터 들장미 골짜기를 독립시키기 위한 형제의 여정이 시작된다. 벚나무와 들장미 골짜기의 지도자인 소피아와 오르바르, 부역자들에게 탄압 받으면서도 자유에의 의지를 잃지 않고서 칼과 요나탄을 숨겨주는 마티아스 할아버지와 골짜기의 주민들, 활을 잘 쏘는 후베르토와 마냥 친절하게 느껴지는 황금 수탉 요시. 그러나 숨은 배신자의 위협과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오르바르의 사형일, 평화를 사랑하는 요나탄과 칼의 피할 수 없는 전쟁이 동화임에도 긴장을 압축하며 독자를 몰아간다. 사자왕 형제의 용기와 모험, 카틀라를 조종하는 요술 같은 나팔과 슬기로운 말 그림과 피알라르와의 우정, 그리고 낭기열라의 너머에 존재하는 또다른 세계 낭길리마의 환상같은 이야기와 용의 불길을 쐬어 점점 마비되어 가는 형을 등에 업은 채 낭떠러지 앞에 선 칼의 마지막 선택까지 흥미진진하고 즐겁고 감동적인 장면이 가득한 동화이다. 특히나 칼과 요나탄이 낭기열라로 가는 이 마지막 장면이야 말로 이 동화의 백미라고 생각해서 그 부분만 두 번, 세 번을 반복해 읽었는데 읽고 또 읽어도 너무 좋았다. 어른이 되어 다시 읽으니 약간 자살같은 느낌이 없지 않아 살짝 놀라긴 했지만. 실제로 1973년 출간 당시엔 이 결말 때문에 아동소설로서는 반발을 꽤 거세게 받았다고 한다.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어른 시각에서의 해석일 뿐으로 어릴 적에는 그런 미묘한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한 채 두 형제가 평화로운 세계 낭길리마로 행복하게 떠났다고 생각했던 터라 아이와 어른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은 고전 동화책이다.
이윽고 밤이 되자 모든 산과 강과 들판이 캄캄한 어둠에 휩싸였습니다. 나는 요나탄 형을 등에 업고 팔을 내 목에다 두르게 한 채 낭떠러지 끄트머리로 갔습니다. 내 귓가에 들리는 형의 숨결은 아주 고르고 조용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질 못했습니다. 어째서 나는 늘 요나탄 형처럼 용감하질 못한 걸까요?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보이지는 않았지만 바로 내 발 아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한 발짝만 내딛으면 곧장 어둠 속으로 떨어질 테고 그러면 모든 일이 끝나는 것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 지나가 버리겠지요.
"사자왕 스코르판, 무섭지 않니?"
"아니....... 형, 사실은 무서워. 하지만 해낼 수 있어. 지금, 바로 지금 할 테야. 그러고 나면 다시는 겁나지 않겠지. 다시는 겁나지......"
"아아, 낭길리마! 형, 보여! 낭길리마의 햇살이 보여!"
ㅡ 사자왕 형제의 모험, p319,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