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위로가 되니?" ㅡ 제5도살장,p44 / p171, 문학동네빌리라는 남자가 있다. 그는 어느 날 인류를 위로하고픈 마음이 되었다. 지구는 멸망할 것이고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빌리는 트랄파마도어의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시간의 왜곡을 경험하면서 그 굴레와 장벽을 벗어난 사람이 되었다. 그의 몸은 방울 모양 호박 속에 잠긴 무당벌레 세 마리처럼 시간에 붙들려 있지만 그의 영혼은 과거의 몸과 현재의 몸과 미래의 몸과 시간을 알 수 없는 몸 사이로 자유롭게 오가는 중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내가 원하는 어느 시점으로 퐁퐁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시간 안에 동일한 영혼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해야 할지,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자신의 탄생과 죽음을 동시간대에 아울러 바라보고 있다고 해야 할지 표현하기 난해할 정도로 책은 모든 엉켜있는 시간의 헝클어진 풀림이었다. 한 코 두 코 뜨고 있던 니트를 졸졸졸 풀어내 돌돌돌돌 감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쪽집게 가위로 니트 위로 올라온 여기저기의 보풀을 톡톡 잘라내 던져 뭉쳐놓은 느낌이랄까. 돔으로 덮인 야구장에서 트랄파마도어에 관해 연설하는 중에도 신생아인 자신으로 돌아가 젤리 같은 배를 부드럽게 토닥여주는 어머니의 손길을 느낄 수 있고, 곧장 그 손길에서 벗어나 그랜드캐니언 협곡 위에 서서 바지에 오줌을 지리는 열두 살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중년에 병실 침대 위 혼수상태로 누워 있는 시간에서 곧장 트랄파마도어인에게 납치되어 사육 당하던 결혼 초기의 잠자리에서 깨어나기도 한다. 딸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 자유의지를 갈취당한 채 빵도 익을 것 같은 전기매트 위에서 데워지는 그 순간 또다른 시간에서는 연설을 끝내고 나가다 레이저 건에 맞아 죽어버릴 수도 있고, 드레스덴 속 자신이 겪는 전쟁과 아들이 공군으로 참여한 베트남 전쟁을 동시에 볼 수도 있는 그런 남자다. 시간에서 완전히 풀려난, 몇 번이나 자신의 탄생과 죽음을 목격할 수 있는 그런 존재. (인과가 없이 나열되는 사건들이기 때문에 책에 나와있던 순서대로 쓰지를 못했다. 시간대의 정렬에 구분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빌리 필그림이 가장 많이 깨어 존재했고 돌아갔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가 보병대 척후병으로 참여했던 제2차세계대전 유럽 속. 트랄파마도어인에게 납치되었듯 그는 이제 독일군단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갇히고 기차를 타고 강제 노역에 동원됐다가 머리 위로 쏟아지는 폭격을 경험한다. 납치와 전쟁은 얼핏 그 강압성이 주는 느낌이 비슷한 듯도 싶지만 이 책 속에선 뚜렷한 차이가 있다. 트랄파마도어 행성의 우리 속 생활은 지구에서만큼의 행복을 줬지만 전쟁터에서 그가 행복을 느꼈던 순간은 폭격으로 유린당한 드레스덴에서 햇볕을 흠뻑 쐬며 꾸벅꾸벅 졸던 때 뿐이라는 것. 위어리와 에드거 더비, 영국 장교, 러시아 포로, 그리고 알몸의 소녀들. 많은 고난을 겪고 많은 죽음을 목격하고 많은 폭력을 당하고 많은 시간 속을 헤매여도 그가 시간 밖에 존재하는 사람이어서인지 생과 사를 목격하며 초탈했기 때문인지 책은 크게 감정의 고저없이 나직나직하게 흘러간다. 히로시마 원폭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냈다는 드레스덴 폭격조차도 별 감흥없이 표현되고 말이다. (작가가 실지 2차세계대전의 참전용사, 드레스덴의 생존자였던 점을 미루어 보면 이 평이한 서술 자체가 좀 대단해 보이기도 한다.) 신선이 된 미국인 도사에게 자서전을 쓰라하면 꼭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밍숭맹숭한데 특히나 죽음 또는 그와 비슷하게 충격적인 일 뒤에 대구처럼 꼬박꼬박 달리는 '뭐 그런 거지'가 당면한 상황에 대한 인정 같으면서도 꼭 맥 빠진 사람이 내쉬는 체념처럼도 느껴져 약간 아리송했다. 작가가 생전에 무위자연에 심취하셨나 싶기도 하고. 천지만물의 이치에 순응하던 동양의 사상이 그러하듯 빌리 필그림은 모든 시간에 순응하여 반론하지 않는 사람만 같았다. 끔찍한 시간은 무시해라. 좋은 시간에 집중하라. (그럼 모든 것이 아름답고 어떤 것도 아프지 않으리라 / 묘비명의 역설 ) ㅡ 제5도살장, p151, 문학동네찬양받는 반전소설, SF물치고는 상당히 밋밋 심심했지만 작가가 글 시작에서 내건 기치가 처음부터 또렷했던 터라, 또 두꺼운 페이지가 아니라 크게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함께 전쟁 포로를 했던 오헨리의 아내에게 했던 약속. 전쟁을 멋지고 근사하게 포장해 그 전쟁을 부추기는 책만큼은 쓰지 않겠다던 다짐이 잘 지켜진 책이었다. (빌리가 한 약속이 아니라 작가가 한 약속이다. 책의 처음과 중간에 한번씩 작가가 나타난다. 소설에서 작가는 주인공 빌리와 함께 포로생활을 한 걸로 나오며 미국인 수용소 변기통 장면에서 잠깐 스치듯 등장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이 쓰는 소설에 "소년 십자군"이라는 제목을 붙이겠다고 오헤어의 아내에게 약속하는데 영예를 위해 모였으나 성전으로 나가기도 전에 노예로 팔리고 행군 중에 사망하고 바다에 익사해 죽은 가엾은 죽음의 이름을 붙이겠다고 한 건 전쟁에 희생된 넋을 기억하고 전쟁의 몰가치함과 불필요함을 피력하기 위해서였으리라. 전쟁과 관련해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열정과 낭만이 배제된 채 미로 같이 복잡한 시간을 흐르는 소설이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문장들이 있고 아버지를 잃은 아이를, 누군가를 떠나보냈을지 모를 독자를 위로하는 작가의 마음만큼은 직설적으로 엿보여 다정스런 책이었다. 이전까지 나는 커트 보니것이라는 작가를 알지도 못했고 따라서 제5도살장이라는 제목은 들어본 적도 없었지만 평을 보고 혹시나 하는 기대로 잡은 이 책이 지금은 꽤 만족스럽게 느껴진다. 남은 2016년 SF는 더 읽을 책이 없어 이걸로 끝이 나겠지만 2017년도에는 더 다양한 SF 작가와 책들을 찾아봐야 할 것 같다.